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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구(金得九, 1955년 1월 8일 ~ 1982년 11월 18일)
직업 권투선수
김득구 (金得九)
출생일 1955년 1월 8일
사망일 1982년 11월 18일 (27세)
키 168cm
프로 데뷔 1978년
프로 통산전적 20전
승리 17
KO승 8
무승부 1
패배 2
2. 출생과 복싱입문
김득구는 1956년 8월 10일(호적 55년 1월 8일) 전북 군산시 옥구군 옥산면 당봉리에서 부친 이동석, 모친 양선녀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이름은 이덕구(李德九)였다.
복싱에 입문할 때 라이센스엔 59년 8월 1일로 등재되었을 정도로 복잡다단한 그의 가족사만큼이나 그의 실제나이도 헛갈리고 복잡했다. 그의 천호상전 동기인 김응식(58년 강진)을 통해서야 그의 정확한 실재 나이를 알 수 있었다.
김득구는 2살 때 부친이 타계하자 6살 때, 모친이 강원도 고성의 김호열 씨에게 재가하면서 이덕구 에서 김득구로 개명하면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이곳에서 3명의 의붓 형들과 더불어 생활하던 그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속초로 나가 과자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어나갈 정도로 빈궁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그가 첫 월급 8백 원을 손에 쥐자 제일먼저 달려간 곳은 서점이었다. 고입 검정고시를 위한 책이었다. 배고픔에 찌든 생활, 변화도 발전도 없는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74년 3월초 무작정 상경을 한다.
7시간에 걸친 직행버스를 타고 도착한곳은 서울 마장동, 첫날밤을 청계천 판자집에서 하늘을 이불삼아 보낸 그는 3일 만에 버스 안에서 책을 파는 외판원일을 시작한다.
그러던 75년 3월 14일, 다방에 책을 팔러갔던 그는 우연히 김현치와 빌라폴로의 WBA 주니어 라이트급 타이틀전을 TV로 본 후 발상의 전환을 한다. 당장 외판원을 그만둔 그는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찐빵장수, 철공소 등 20군데를 전전하다 구로공단 보세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부평초처럼 떠돌던 그는 책을 읽을수 있었고 물어물어 김현치씨가 당시 관장으로 있는 동아체육관을 찾아가 복싱에 입문을 한다. 그는 이때부터 비로소 안식을 찾았다.
천호상전 복싱부에 입학 복싱 전성시대 열어
천호상전은 천호상업전수학교(1968년 개교)의 줄인말
김득구의 복싱인생에 변곡점이 된 76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복싱에 입문한지 7개월이 흐른 77년 3월 서울 신인대회에 출전한 그가 라이트 웰터급에서 대뜸 4연승(2KO승)을 가두며 우승을 차지하자, 천호상전 복싱부에서 스카웃 교섭이 들어와 김응식, 이종근, 박종팔, 이상봉, 양일 등과 함께 동기생으로 입학한다.
그해 11월 제1회 김명복배에 라이트급으로 출전한 김득구는 준결승에서 부산 동의공고 공대식에게 일방적으로 난타당한 끝에 3회 RSC로 패한데 이어 78년 세계선수권대회 선발전에도 예선탈락 하며 성장통을 겪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그해 제2회 김명복배 준결승에서 임수환(전북체고)과 장윤호(남산공전)을 차례로 누르고 신종관(전북체고)을 꺾으며 라이트 웰터급에서 우승한 동료복서 김응식과 함께 모교 천호상전의 복싱 전성시대를 열었다.
3. 운명의 시간
1982년 11월 13일(한국 시간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에서 열린 WBA 라이트급 챔피언 전에서 당시 챔피언 레이 맨시니(Ray Mancini)에게 도전하였다. 챔피언전을 앞두고 맹훈련을 했으며, "관을 준비해 놓고 가겠다, 패한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실제로 미국으로 건너갈 때 성냥갑으로 모형관을 만들어서 가지고 갔다.해당 인터뷰 그리고 그 말은 현실이 되었고, 이에 기뻐하는 사람 없이 슬픔만이 가득한 최악의 비극인 시합이 되었다........오히려 기쁜 인간 말종 한명은 빼고
당시 경기상황을 보면 9회까지는 김득구가 맨시니와 호각에 가까운 멋진 승부를 펼쳤지만,[1] 10회 때부터 체력고갈로 난타를 허용하였다. 그 후 11~13회에 걸쳐서 수세에 몰리면서도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14라운드 시작 직후 맨시니에게 턱을 강타당하여 그대로 뒤로 넘어졌으나, 로프를 붙잡으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경기 속행은 어려운 상태였다. 레퍼리가 KO을 선언하며 맨시니의 승리가 선언되었다.
맨시니가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는 동안 김득구는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뇌출혈에 대한 처치와 혈전 제거를 위해 두 시간 반에 걸친 뇌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5일 뒤 당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있었던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산소 마스크를 떼어내고 장기기증을 하면서 향년 27세를 끝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당시 세계복싱계에선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김득구가 레이 맨시니와 싸우게 된 것은 프로모터 밥 애럼(Bob Arum)[2]의 농간 때문이었다. 김득구는 세계적인 강자들과 싸울만한 기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복싱계의 일관된 평이었고, 김득구의 프로모터인 김현치 관장도 김득구의 기량이 세계적인 수준에 못미친다는 것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다. 레이 맨시니가 챔피언으로 활동할 때 이미 세계 랭킹엔 하워드 데이비스[3]나 에드윈 로자리오 등의 쟁쟁한 복서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레이 맨시니와 챔피언 자리를 두고 일합을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외모로 흥행성을 갖춘 레이 맨시니가 패배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밥 애럼은 랭킹을 조작하여 맨시니의 타이틀전 상대로 위협적인 상대들을 모두 거르고, 떡밥이나 다름없던 김득구를 WBA 랭킹 1위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리하여 밥 애럼은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타이틀 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는다. 레이 맨시니가 cbs채널과 거액의 계약을 체결한 사정 때문에 밥 애럼이 이런 무리수를 던지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레이 맨시니가 강한 상대와 싸우다 패배한다면 모처럼 맺은 TV 계약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세계적인 선수들에 비해 기량이 뒤떨어지는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상대로 링에 올리게 되었다는 것. 소속 선수를 돈벌이 상품으로만 여기는 밥 애럼은 다음 상대로 또 다른 약체(미끼) 선수인 캔 보그너를 내정해 놓은 상태였다.
밥 애럼은 검사 출신의 엘리트이지만, 뒷골목 범죄자 출신인 돈 킹보다 몇 배는 더 추악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복싱계 이면의 추악한 비지니스가 김득구의 생명을 뺏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밥 애럼은 김득구의 죽음조차도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였다. 김득구의 경기 이후 2개월간 본인의 프로모션에 큰 경기가 잡혀있지 않고, 라이벌인 돈 킹의 프로모션엔 3건의 큰 경기가 잡혀있다는 걸 파악한 밥 애럼은 돈 킹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도덕적 이미지를 높이기위한 수단으로 2개월간 미국 전역의 프로복싱경기를 중지하자는 제안을 한다.
생전에 6백만 원이 적립된 통장과 봉천동 연립주택을 매입하기위해 불입한 3백만 원의 중도금 등 알토란같은 천만 원 정도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던 그가 삶을 등지자 대통령 하사금과 대전료 978만원, 각종 조의금 4천 4백만원 WBA사망보험금 10만불(7천5백만원) 등 정확히 1억 1천 747만 6200 원의 유산이 남게 되었다.
82년 프로야구 최고 연봉이 박철순(OB 베어스)의 당시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인 2천 400만 원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액수로 생각된다. 결국 이 돈은 약혼녀와 모친이 6:4로 나누기로 최종 합의를 하고 종결된다. 이후 모친은 ‘가난이 내 아들을 죽였다’며 72일 후인 83년 1월 29일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슴을 끊고 만다. 글을 깨치지 못한 김득구 모친의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김득구의 마지막 경기 주심을 본 리처드 그린도 7개월 뒤 죄책감에 시달린 끝에 자살을 하고 만다. 리처드 그린의 죽음과 비슷한 시기인 83년 6월 23일, 김득구의 유복자 김지완(金知完)군이 탄생했으니, 한편의 멜로드라마를 보는듯한 착찹한 심정이다. 그의 아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김득구는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밖에 졸업할 수 없었기에 ‘완전히 알다’란 뜻으로 알지(知)에 완전할 완(完)이란 글로 아들의 이름을 미리 지어 놨었다.
4. 사후
김득구는 1982년 이영미와 약혼했다. 그가 죽은지 몇 달 후인 1983년에 유복자 김지완이 출생했다. 아들 김지완은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참조기사
김득구가 세상을 떠난 뒤 김득구의 모친은 우울증에 빠졌다가 3개월 뒤 "내가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아들을 죽인 것이다"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농약을 마시고 아들의 뒤를 따랐다. 새아버지는 맨시니가 보상금으로 뭘 준다는 사기전화에 걸려 당시로서는 꽤 큰 돈인 3백만원을 갈취당했다고 한다.
김득구의 사망 이후 맨시니는 1983년 1월에 AP통신과의 회견에서 금년말 안에 한국을 방문해 "김득구의 모친을 만나 위로하고 김득구의 묘앞에 참배하고 싶다."고 밝혔으나 얼마 뒤 김득구의 모친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접하자 호텔안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기 심판 리처드 그린은 선수가 위험한 상태임에도 계속 시합을 강행시킨 끝에 김득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7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대였던 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실은 이탈리아 가제타 델 스포르의 거짓기사이다.[8] 이후 죄책감으로 인한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1984년까지 WBA 라이트급 타이틀을 두 번 더 지켰으나, 1984년 6월 1일 리빙스턴 브램블에게 타이틀을 상실했다. 1985년 2월 복수전에 실패한 뒤 잠정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해 1989년 헥터 카마초와 WBO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결정전, 1992년 그렉 호건과 NABF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결정전을 치뤘으나 모두 패한 뒤 최종 은퇴했다. 복싱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자기가 원하던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물론 김득구와의 경기 이후로도 좀 더 복싱 선수로 활동했지만 김득구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선수 생활에 타격을 가한 점은 틀림없었다. 맨시니는 김득구와의 시합 이후로 자책감에 빠져 시합간의 공백기가 길었으며 그 후에는 이전만한 패기있는 복싱 스타일을 구사하지 못하고 치고 빠지는 히트 & 런 전법의 조심스러운 복싱으로 스타일이 변했다. 맨시니에 대해서 다룬 다큐에서는 불행했던 시합이 한 복서의 아까운 생명, 전도유망한 천재 복서의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하게 했다고 말할 만큼 그의 복싱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맨시니 자신의 입으로도 "그 시합 이후로는 복싱이 싫어져서 복싱을 하는 것이 괴로웠다"고 술회할 만큼 크나큰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경기심판과 김득구의 어머니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 경기후에 3명이 사망했으니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맨시니는 평생 김득구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득구를 소재로 한 영화 '챔피언'이 개봉할 당시 한국을 찾았던 맨시니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득구를 '강인한 전사'였다고 칭찬하면서, 그의 죽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바뀌고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려왔다고 말했다. 만약 하늘에서 김득구와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줄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맨시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 말 없이 끌어안아 주겠다"는 말로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또한 '살인 복서'로 낙인찍힌 자신을 오히려 위로해 준 한국인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함을 표하기도 하였다.#
2012년이 되어서 맨시니는 김득구의 유족과 만남을 가졌는데,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맨시니와 한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온 맨시니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김득구의 아들에게 이제야 오랜 세월동안 가졌던 마음속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겠다고 한 맨시니의 말은 많은 올드 복싱팬의 심금을 울렸다. 맨시니는 매년 복서를 꿈꾸다 세상을 떠난 형[11]의 기일과 김득구의 기일에는 빼놓지 않고 조의를 표한다고 한다.
김득구의 죽음은 세계 복싱계와 스포츠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복서의 안전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국 하원에서는 복싱의 안전을 위하여 청문회까지 열렸으며, 종합격투기를 포함한 모든 격투기 대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생긴 룰이 바로 다름아닌 '닥터스톱'으로 각 선수들마다 할당된 주치의의 판단으로 심판 판정과는 상관없이 경기를 종료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권투평의회(WBC)에서는 김득구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15라운드 경기를 12라운드로 줄였다. 라운드 사이의 휴식시간도 60초에서 90초로 늘렸고, 스탠딩 다운제를 도입했다. 김득구가 사고를 당한 복싱기구인 세계권투협회(WBA)에서도 1988년에 그 뒤를 따랐으며, IBF 역시 1989년에 변경을 시행했다.
미국에서는 권투 선수 문성길의 이름을 딴 'Sun Kil Moon'이라는 이름의 밴드가 활동할 때 밴드 멤버였던 마크 코즐렉이 김득구의 경기를 본 뒤 그를 소재로 한 'Duk Koo Kim'이라는 곡을 발표했다. 이 이야기는 스펀지 120회 방송분에서 소개되었다.
5. 미디어
1984년 한국영화 '울지않는 호랑이'가 김득구를 다뤘다. 이계인이 김득구를 연기했으며 감독은 여곡성, 알바트로스의 이혁수다.
2002년작인 곽경택이 감독을 맡은 한국영화 '챔피언'도 바로 김득구를 다룬 영화이다. 유오성이 김득구를 연기했다.
6. 김득구 선수 가족에 전 대통령이 금일봉
중앙일보 1982.11.17
전두환 대통령은 16일 WBA라이트급 선수권 도전 전에서 치명상을 입고 입원치료중인 김득구 선수의 가족에게 치료비에 보태도록 금일봉을 관계비서관을 통해 전했다.
이에 앞서 전 대통령은 김 선수의 용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김 선수의 가족들이 간병 차 미국으로 최대한 빨리 출국할 수 있도록 관계부처에서 적극적인 배려를 다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김 선수의 어머니 양선녀씨 와 형 김근용씨는 16일 하오9시40분 대한항공편으로 현지로 출발했다.
한편 체육부는 직원1명을 김 선수 가족과 동행시켜 가족의 여행과 간병을 지원하도록 했다.
7. 신문기사
거제시민뉴스
http://www.geojesiminnews.co.kr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반암리 마을 뒤편 야트막한 구릉에 잡풀이 우거진 그곳에 자그마한 무덤이 있다.
무덤 우측에 묘비가 서 있다.
묘비 뒷면에 이렇게 적혀 있다.
‘1956년 8월 10일 출생. 본명은 이덕구, 어머니가 김호열씨와 재혼. 김호열씨 호적에 1967년 입적하면서 김득구로 개명. 1982년 이영미씨와 약혼하고 1983년 유복자 김지완 출생, 1982년 11월 14일 세계라이트급 도전. 동년 11월 18일 미합중국 라스베이가스 대저투스프링 주립병원에서 사망’
초라한 그 무덤의 주인은 바로 불꽃처럼 살다간 복서 김득구였다.
비록 그는 세계제패 목전에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무명의 복서가 전 세계 복싱팬들의 가슴속에 투혼이라는 단어를 아로새겨 주고 불꽃처럼 장렬하게 산화해 갔다.
김득구의 출생지는 강원도 고성이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전라북도 군산으로 이사 후 개명을 했다는 것이 정확한 것 같다.
호적상 김득구는 1955년 1월 8일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윈 후 어머니가 재혼하자 이복형제들과의 불화 등으로 그 시대를 살아 온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다 14살 어린나이로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다. 그 때가 1972년 초여름의 일이었다.
상경 후 그는 살아남기 위해 신문배달, 구두닦이, 중국집 배달원, 볼펜장수 등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불연 듯 이런 식의 삶을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해 늦은 공부를 시작한다.
특유의 뚝심으로 주경야독한 결과 그는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천호상고로 진학한다.
타고난 성실함과 악착으로 노력하는 자 만이 미래를 준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중 우연히 한 장의 포스터를 보게 된다. “권투관원 모집, 꿈이 있는 자여 오라.” 그곳에서 김득구의 인생은 외길로 달려간다.
당시 한국 프로복싱은 동아체육관 그리고 극동프로모션이 양대 산맥을 이루며 국내 프로복싱 시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김득구는 양대 산맥중 하나인 김현치씨가 관장으로 있는 동아체육관에 입문하게 된다. 그 곳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박종팔, 황준석, 유명우, 이승훈, 김환진선수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김득구는 그 중 맏형인 김환진(전 WBA주니어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을 많이 의지하고 따랐다.
그는 천재성을 지닌 복서는 아니었다. 타고난 성실함과 의지로 자신의 단점을 하나 둘씩 극복해 간다.
3년간의 아마추어 선수생활을 거쳐 1978년 박명수선수를 4회 판정으로 꺾고 본격적인 프로선수의 길로 들어선다.
1980년 12월 이필구를 10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한국챔피언 타이틀 획득과 동시 OPBF 동양챔피언 도전권을 손에 넣는다.
김득구가 복싱팬들의 가슴속에 이름을 각인시킨 시합이 바로 당시 동양챔피언 탱크 김광민과의 경기였다.
탱크라는 별명답게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김광민을 상대로 철저하게 아웃복싱으로 일관, 치고 빠지는 전법으로 착실하게 포인트를 획득 절대 열세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승리하게 된다.
이후 그는 두 차례의 방어전을 치르고 꿈에 그리던 라이트급 세계챔피언 도전 자격을 얻는다.
상대는 백인의 희망 WBA라이트급 세계챔피언 미국의 레이 맨시니. 프로통산 알렉시스 아르게요에게 유일한 1패를 안고 있었다.
맨시니는 저돌적인 인파이터로 천부적인 재능과 펀치력을 겸비한 약관의 기재였다.
어떻게 손에 넣은 기회인가. 이때부터 그는 강도 높은 트레이닝에 들어간다. 그 정도가 심하다 보니 주변에서 걱정 어린 조언에 “관을 준비해 놓고 가겠다. 만일 패한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며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1982년 11월 14일 미국 라스베가스 시저스팰리스 호텔 특설링 WBA라이트급 세계타이틀매치. 당시 챔피언 맨시니는 24승(19KO) 1패, 도전자 김득구가 17승(8KO) 1무 1패의 전적이었다.
당시 도박사들은 9:1 혹은 8:2로 맨시니의 압도적인 우세를 예상했다.
체력과 패기의 맨시니, 임전무퇴의 정신력으로 무장한 김득구. 운명의 1회전의 공이 울리자 양자는 성난 맹수처럼 링 중앙에서 난타전을 전개한다. 두 선수의 혈투에 운집한 8천 여 명의 관중들은 열광한다.
맨시니 전매특기인 좌우 훅으로 공격하자 김득구는 라이트 잽에 이은 레프트 스트레이트로 맞받아친다.
맨시니의 초반 KO승으로 싱겁게 끝나리라는 예상과 달리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오히려 김득구가 맹렬하게 밀어 붙인다.
의외로 강하게 치고 나오는 김득구의 투혼에 맨시니뿐만 아니라 관중들도 술렁이기 시작한다.
9회까지 양자는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주먹을 주고받는다. ‘혈투’ 그 자체였다.
이때까지 포인트 면에서 김득구의 우세가 뚜렷해 보였다.
10회, 챔피언 맨시니가 승기를 잡는다.
김득구가 리처드 그린 주심으로부터 어이없는 버팅파울 선언을 받고 주춤하는 사이 맨시니는 김득구를 로프에 밀어부치고 사정없는 좌우연타로 그로기 상태로 까지 몰아넣는다. 다행히 종료 공이 울려 위기를 모면한다.
11회 김득구는 초반에 체력소비를 많이 한 탓인지 다리 힘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자 곧바로 돌진해 들어간다. 맨시니가 찰나의 순간 라이트 훅을 김득구의 턱에 적중시킨다. 살짝 무릎을 꿇었지만 주심이 보지 못해 다운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때부터 김득구에겐 오로지 정신력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지치지 않는 체력을 자랑하는 맨시니는 12, 13회에도 김득구의 얼굴과 몸통을 난타한다.
김득구도 투혼을 발휘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친다.
운명의 14회에서 모든 것이 끝난다. 공 소리와 동시 뛰어나오면서 선제공격을 강행한 것이 화근이었다. 맨시니의 좌우 훅 카운트를 맞고 뒤로 물러서는 김득구를 향해 맨시니의 통렬한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꽂힌다. 김득구가 그대로 캔버스에 쓰러진다.
몸은 만신창이지만 로프를 잡고 전방을 응시하는 눈빛에선 자신을 일어서라고 명령한다. 전 국민이 생중계로 그 장면을 지켜보며 하나 같이 안타까움 마음으로 “득구야 할 만큼 했다. 제발 일어나지 마라.”고 부르짖는다.
그래도 그는 두 팔로 로프를 당기며 안간힘을 다한다. 그 순간 주심의 게임종료 선언과 함께 고목이 쓰러지듯 내려앉는다. 14회 19초만의 일이었다.
그가 약속한 것처럼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는 말이 슬프게도 현실이 되어 버렸다.
뇌사 상태에 빠진지 4일 후 그는 치열하게 살았던 삶의 터전, 사랑했던 모든 이들을 뒤로 하고 그렇게 떠나갔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 이었다.
그의 죽음 후 세계 복싱계는 거센 논쟁이 인다. 뉴욕타임즈를 비릇한 언론에서 복싱의 잔혹성을 지적하였고 미국 하원에서는 이 문제로 인해 청문회까지 열렸다. 결국 세계복싱 양대기구는 경기를 15회에서 12회로 줄이고 스텐딩다운제를 도입하는 등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한다.
맨시니와 김득구의 시합 후 많은 후유증을 양산한다. 당시 주심을 맡은 리처드 그린이 의문의 자살을 하고 김득구의 어머니 양선녀씨도 “가난이 내 아들을 죽였다”며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만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굴하지 않았고 가난이라는 천형에 맞서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 했던 그 시대의 삶을 살아 간 모든 이들의 자화상이다.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당시 약혼자 이영미씨의 뱃속에 3개월 된 아기가 치대 졸업 후 치과의사가 되어 있다.
불꽃의 파이터 김득구, 그는 우리 세대가 살아온 삶의 아픈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너무나 슬픈 이름이다.
故 김득구 선수는 戰士였고, 챔피언의 마음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 레이 맨시니
나에게는 최후까지 싸울 용기와 의지가 있노라. - 김득구
김득구 생애 통산전적 20전 17승(8KO) 1무 2패
■아, 김득구! 대한의 진정한 영웅!
영웅 복서 김득구
고성군 거진읍 반암리는 비운의 복서 김득구의 고향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 김득구의 무덤이 있고, 그의 형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 궁벽진 동해안 바닷가 마을에서 김득구는 '가난은 나의 스승'이라고 외치며 소 먹이고 풀을 뜯으며 복서로서의 꿈을 키웠다.
김득구(당시 27세)는 1982년 11월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특설링에서 열린 세계권투협회(WBA) 라이트급 타이틀전 도중 챔피언인 미국 맨시니의 펀치를 맞고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김득구의 짧았지만 치열했던 삶은 국내외 많은 권투팬들의 심금을 울렸고, 그후 영화, 노래, 시로 되살아났다. 추모는 아직도 계속 된다. 지난 광복절에는 김득구를 추모하기 위한 스트로급 챔피언 박지현의 세계타이틀 7차 방어전이 고성에서 벌어졌다.
길 위에서는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이야기를 종종 만난다. (사)세계걷기운동본부 정준 사무총장은 "김득구는 우리 곁에 있다. 2002년 곽경택 감독이 영화 '챔피언'으로 부활시켰고, 2006년에는 미국의 인디그룹이 노래를 불러 주었으며, KBS 2TV '스펀지'에 나온 적도 있다"면서 "이런 것도 좋은 스토리텔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