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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31
김해 대저 본동내 전경 ... 우리클때 가본 그때 모습의 동내다.
죽림 해창가에도 적산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다 허물어 버렸다.
대저에는 일제강점기 흔적이 아직은 남아있다.
지난달 강서구청역 경전철 역 인근 수만평이 신도시개발 예정지로 확정되었다
일제 강점기 파출소 건축물 냄새가 난다.
뽀쪽한 지붕 처마에 둥근 창 등,
좌천역앞에 남아있는 일제강점기건축 구 좌천파출소 건물형태가 저렇다.
- 97년에 청사신축했다는데
ㅇ 대저 파출소 연혁
- 1905.01.01. 양산군에서 김해군 대하면으로 개편,
- 1910.01.01. 김해군 대상면 대하면 통합, 대저면으로 개칭
- 1920.01.01. 일제시 김해헌병대 대저분견대가 주둔하면서 본위치 청사건립
- 1945.01.01. 김해경찰서 대저지서로 개칭
- 1973.07.11. 대저면에서 대저읍으로 승격
- 1978.02.15. 부산시 북구 대저1동으로 편입
- 1978.03.01. 부산시 경찰국 북부경찰서 대저파출소 개칭
- 1978.12.31. 청사 노후로 철거(동년 11.10착공 현 청사 준공)
- 1997.10.09. 구청사 노후로 철거 동 위치에 현 청사 준공
- 2003.08.01. 강서경찰서 대저파출소에서 (강동,공항,대저 통합)북부지구대로 변경
- 2004.07.01. 북부지구대에서 대저지구대로 개칭
- 2005.09.12. 청사 협소로 동 위치에 증축
- 2010.05.01. 대저지구대에서 대저파출소로 개편
대저 본동의 거리
강서구에 위치한 옛 대저수리조합 건물은 1927년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근대식 건축물로 사무동과 비료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1916년 설립한 대저수리조합의 창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경상남도지사의 명의로 1917년 세웠다.
친구 이기윤 섯달 그믐밤 책에 보면 수리조합과 김해농민들 일제의 수탈내용이 다소 실감있게 기록되어있다.
김해평야 곡물수탈,
조선총독부가 1912년 8월 13일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고 김해에 수리조합을 설립한 현장이다.
제방을 쌓고 배수로를 건설했지만, 김해의 농민을 착취하고 수탈을 위한 것.
일제강점기 대저수리공사기념비 (경상남도지사 ㅇㅇㅇ 일본인 이름은 파버렸다)
누군가 영상으로 탑을 저장하고있다.
본관옆에 같이건축된 비료창고도 있었다는데 허물었나?
약100년된 일제의 수탈역사 증인 저 건물도 철거위기에 있다.
인근 육주선원 동백
대저 육주선원 1958년 이대희 스님에 의해 건립되었고,
육주선원 요사채
육주선원(조계종) 주지스님
법당에는 들어 가지 않았고, 절 여기 저기를 둘러 보다가 폐가로 방치된 요사채를 사진찍고 나오는데
스님이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다.
절에 관심이 있어 둘러 보는 중이라 하자 '아닌거 같은데' 하며 몇번 반문을 한다.
뭔 스님이 속고만 살았나 ... 속으로... 나중에 이야기 했지만 철거업자인 줄알았다고!
수년동안 방치된 절을 지금 모습으로 정비하느라 고생했다고 하였다.
짧은 대화중 뭔가 통했던지 같이 앉자 하여 불교와 육주선원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동안들었다.
육주선원은 과거 김택수의원과 김한수 한일합섬 회장이 시주를 많이 하였던 절이라 한다.
좌천 묘관음사 향곡스님이야기 성철스님 ... 지리산 상무주암 ...
가까이서 보니 소림사 무술스님 쪽에 가깝다.
검도7단 경주 골굴사에서 수련 등 등 불법과 武를 통해 깨닫게 된 화두...
퇴직후 무료한시간 부처님 말씀 공부하기를 적극추천한다.
공부하다가 막히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입력까지 ...
주지스님이 쓰준 화두!
ㅇ 사불시 - 마음도 부처도 허공도 물질도 ..........
ㅇ 시심마 - 이 뭣꼬... ? 이시간 이뭣꼬를 깨뜨릴려고 수행하는 스님들은 몇일까?
ㅇ 만법귀일 일귀하처
<벽암록(碧巖錄)> 제45칙에 나오는 말이다. 당나라 중기 조주(趙州從諗, 778~897) 선사가 제시한 화두이다. 한 수행승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이에 대한 조주 선사 답이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 한 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말뜻은 무엇일까? 원칙적으로 화두는 그 의미를 논리적으로 따지면 안 된다. 화두를 화두라고 인식하는 순간 이미 죽은 화두가 되기 때문이다. 진실한 화두란 듣는 순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때 성립된다. 즉, 머릿속에 오로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것만 남았을 때 화두가 된다. 따라서 화두를 이러쿵저러쿵 풀이를 해서는 안 된다. 말 밖에 일이므로 그렇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이야 말밖에 모르니 조금은 첨언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와 「포삼중칠근(布衫重七斤)」, 둘 다 화두이다. 모두 같은 의미로서, 쓸데없는 관념에 빠지는 걸 경계하라는 뜻이다. 이는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을 이렇게 저렇게 따질 일이 아니라, 그 자체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법(萬法)이란 모든 존재를 말한다. 우주 삼라만상, 일체만물과 이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 등등 일체사가 다 포함된다. 만(萬)이란 무한이라는 숫자의 함축이다. 그러므로 만법은 일체, 제행, 제법을 망라한 삼라만상, 우주만상으로 색(色)과 심(心)에 걸친 모든 차별법, 즉 분별심과 집착에서 비롯돼 일어나는 모든 현상까지를 다 포함한 말이다. 그리고 ‘일귀하처(一歸何處)’에서 하나(一)란 본체(本體)로서 만법의 근본바탕이다. 절대 진리, 근원, 그리고 부처(佛)라고 하겠다. 일체 모든 행위는 절대 진리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상대적 인식을 버리고 절대적 인식 세계에 들어가야 진여(眞如)를 볼 수 있다. 이는 <대승기신론>의 일심사상(一心思想)과도 같은 맥락이다.신라의 원효 대사는 「만법귀일(萬法歸一) ․ 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었다. 원효 대사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인 <금강삼매경론>과 <대승기신론소> 등에 나타난다. 원효 대사는 이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ㆍ극락으로 봤고, 대승ㆍ불성ㆍ열반이라 봤다. 그는 인간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해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감’을 뜻하는 귀일심원(歸一心源)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 실천을 강조했다. 귀일에서 일(一)은 일제유심조(一切唯心造)에서 마음(心)을 뜻하기도 하며, 모든 것은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음은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이 “내가 청주에서 베옷 한 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이다. 조주 선사는 삼베라는 엉뚱한 대답을 함으로써, 말의 논리란 인간이 공리적 활동을 위해 만들어낸 잔꾀에 불과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베옷 한 벌이 무게가 일곱 근이라는 것은 괜한 관념 속에 빠져 어리석은 생각에 맴돌지 말라는 말이다. 베옷 무게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거기에 매몰되지 말라, 이 게 ‘일귀하처(一歸何處)’의 답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일에 분별을 일으키지 말고, 일(一) 즉 궁극처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중국 송(宋)나라 시대에 동산 수초(洞山守初, 910~990) 선사에게 어떤 수행승이 “무엇이 부처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수초(守初) 선사 답이 “마삼근(麻三斤 - 삼베 세근)”이었다. 마삼근(麻三斤)이나 포삼중칠근(布衫 重七斤)이나 모두 격외(格外)의 대답이다. 불법 대의를 숫자로 환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마(麻)가 세 근, 포(布) 일곱 근이라고 정확한 숫자를 들이대고 있으니 어이없는 일, 그래서 그것은 격외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은 대부분 숫자에 얽매여 삼천대천세계라는 숫자, 혹은 마 삼근, 포 칠근이란 숫자의 차별상에 얽매여 집착해 버린다. 이 역시 우리가 통념의 상식적 숫자 개념에 얼마나 쉽게 넘어가는가를 시험하는 성격을 지닌다. 그러니 만 가지 번뇌 망상을 무겁게 짊어지고 다니지 말고 모든 번뇌를 떨쳐버리면 홀가분해진다는 뜻이기도 한데, 결국은 서두에 말한 것처럼 엉뚱한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이런 쓸데없는 관념에 빠지는 걸 경계하라는 말이다. 애초 만법과 하나는 둘이 아니다.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런 관념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겨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감을 깨우쳤지만, 하나가 돌아가는 곳을 다시 찾아야하는데, 그 하나 역시 만법으로 귀의한다고 하지만 법과 하나는 처음부터 둘이 아니었는데, 관념으로 분리시켜 허우적댄 것이다. 어찌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찾을 수 있으랴?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라(佛卽是心), 마음 밖(心外)에 부처가 없는데, “마음이 어디로 돌아갑니까“라느니,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묻고 있느냐 하는 말이다. 따라서 만법은 필시 하나이다! 우리는 우주라는 하나의 몸체 속에 존재하는 각각의 개별자들이다. 이를 몸으로 마음으로 깨닫는 이에게만 “만법귀일(萬法歸一)”은 그 언어의 의미가 살아난다. 그리고 그 때라야 “일귀하처(一歸何處):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아는 것과 이를 깨닫고 이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앎은 그 언어의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단지 길을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앎을 통해 그 길을 걷지 않는다면 그 앎은 온전한 앎이 될 수도 없다. “일귀하처(一歸何處)!” 이는 분리된 심상을 넘어 하나(一心)이거늘 어디로 돌아가고 말 것이 있겠는가. 우주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데, 관계의 실상(實相)을 꿰뚫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여기 말고 달리 또 돌아갈 것이 어디 있을 것이 없다. 실상을 꿰뚫지 못하고 잡념에 매달려 있으니 갈 곳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엄마와 아이는 하나의 몸체에서 분리된 서로 다른 하나이다. 그리고 분리된 서로 다른 그 둘은 하나의 끈으로 연결돼있다. 그것은 서로서로 교감하기 때문이다. 교감하고 공유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가 될 수 없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는 그 아픔을 함께 느끼며 아이가 웃으면 엄마는 함께 웃는다. 둘이 서로 깊이 교감하기 때문이다. 교감과 하나 됨의 극치에서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프다” 하는 것이다. 사바세계의 인간들은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생긴 모습이 다 다르다.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때문에 삶의 양식도 다 다르고 생각하는 입장도 다 다르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 세계는 무수한 각자의 특성을 지닌 개별자들이 일으키는 생존방식의 경연장이다. 그러니 지지고 복고, 속고 속이고, 난리 법석이다. 지옥 중생들이 사는 사바세계가 그런 것이다. 그래도 결국에는 하나로 모아지고 하나로 가게 된다. 부처님 세계로 가게 될 것이다. 그 길 말고는 갈 길이 없다. 거기로 안 가면 지옥으로 떨어진다. 아무리 지지고 볶고 해도 결국에는 - 죽을 때가 되면, 숨넘어갈 때, “부처님…” 하고 죽는다는 말이다. 그것이 ‘귀일처(歸一處)’이다. 다 다른 모습의 인간들(만법)이지만 넓게 보면 그들이 곧 같은 인간(一)이고, 다 부처님의 자식이다. 그러니 갈 곳도 같은 수밖에 없다. 부처님 곁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ㅇ 대저 본동내 적산가옥들
배농사 쌀농사로 착취하고 살았던 흔적들이다.
일본놈들이 36년정도 조선을 지배하고 떠날것이라 생각했다면 조선땅에 고대광실 巨屋을 주거지를 만들지 않았을터...
개다짝을 끌고 영원불멸 조선인을 지배하고 살거라 착각속에서 건축자재 건축목수들을 본토에서 공수하고 조선인 노동력을
착취해서 저런 집을 짓고 무단으로 땅도 차지하고 살았다고 본다.
해방후 적산가옥들은 그밑에서 일하던 조선인, 토착 힘센사람 이장이나 면서기 등 등 이런 사람들이 차지했을 것이다.
고향죽림땅은 해창이라는 농산물 집산지의 배 정박지이자 저장 창고가 있어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진출했다.
마을 강을 끼고 신작로는 거의 일본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김상국, 조광화, 이문식, 그옆에 정씨, 홍산집, 방구쟁이 아저매, 중학교 산밑에 포목 박씨, 장세환, 한성고, 지서밑에 제씨,
등 등 마을에 기와집들은 모두 적산가옥이였다.
저사람들이 차지하고 살던 집은 이제 흔적도 없다.
근래까지 남아있던 적산가옥중에는 상국이 살던집 조광화씨집 중학교 뒤 박씨집이다.
오늘 보니 대저에 적산가옥들이 죽림동내 적산가옥보다 정원도 너르고 집규모도 한수위다.
100년이 되어가는 저 적산가옥들 허물지 말고 관리하고 보존해서 후세에게 역사의 교훈으로 남겼으면 좋겠다.
적산가옥 인근 중국집
50대후반 아줌마가 주방장이고 아저씨는 배달원이다.
간자장 6000원
이건물은 얼마전에 누구한테 팔렸다고 한다.
본채를 그대로 시내에 옮겨 잘 수리해서 카페로 만들면 손님 많이 올것이다.
왜 냐하면 초량 선화여상옆에 일본집 카페가 있는데 손님 엄청 많다.
기왓장에 국화문향이 있다.
일본에서 자재들을 공수해서 지은 것이라 한다.
대동가는 낙동강 본류 뚝방길
대저수문도 일제강점기때 축조된것이다
대동면 소재지
대동에서 화명동으로 연결된 다리
걷는길이 있다.
낙동강 강바람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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