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례성당 가는 길
올겨울 들어 첫 추위가 찾아와 누그러지지 않은 십이월 첫째 금요일이다. 아침 기온은 역시 빙점 아래 내려간 듯하다. 남들은 일터로 나가는 시간 나는 자연학교로 등교를 위해 빈 배낭을 둘러메고 길을 나섰다. 집 앞에서 동정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서 창원역을 출발해 오는 1번 마을버스로 갈아탔다. 용강고개를 넘어 용잠삼거리에서 동읍 사무소를 거쳐 주남저수지 곁을 지났다.
예년 이맘때면 주남저수지 둑길을 걸으면서 북녘에서 내려온 철새들의 동향을 살펴보기도 했는데 올해는 그럴 수가 없다. 철새 도래지 곳곳에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가 발생해 탐조객 방문을 통제해서다. 내가 사는 생활권의 주남저수지와 화포천 습지에도 추워진 날씨에 겨울 철새가 찾아왔을 테지만 녀석들 곁으로 다가갈 수 없어 유감이다. 차창으로만 바라보고 그냥 지나쳤다.
주남 들녘에서 대산 일반산업단지를 거쳐 면 소재지 가술을 지난 북모산에서 내렸다. 북모산은 남모산보다 더 낙동강 강가에 치우는 동네였다. 25호 국도에서 창원과 밀양의 경계가 되는 낙동강을 건너는 다리가 수산대교다. 좁고 낡은 수산교는 제1 수산교로 명칭을 바꾸어 소형 차량만 통행한다. 수산대교든 제1 수산교든 보도를 따라 걸어 건너는 이가 드문데 난 걸어갈 셈이었다.
자동차가 질주하는 교량이지만 보도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본류 주변 풍광에 사로잡혀 폰 카메라로 사진을 몇 장 남겼다. 본포에서 곡강을 굽이쳐 흘러온 수산 근처 강물은 유장하게 삼랑진으로 향했다. 햇살은 강물에 쪽빛으로 어리어 아득히 멀리멀리 흘렀다. 강 언저리 낮은 구릉이 펼쳐지고 그 바깥은 산봉우리들이 강심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듯 고개를 숙이고 다가오는 듯했다.
강바람을 맞으면서 자전거길을 겸한 보도를 따라 1킬로미터가 넘는 긴 다리를 건너 수산에 닿았다. 수산은 하남읍 소재지인데 강변 소읍으로 전형적인 농업지대다. 내가 가고자 하는 행선지는 명례성당으로 조선 후기 가톨릭 전래 과정 순교자 생가터다. 나는 이전에도 강둑길 따라 명례와 오산을 거쳐 상남에서 밀양역까지 두 차례 걸었던 적 있다만 이제는 체력이 받쳐주질 않는다.
이번에는 둑길 따라 명례성당까지 갔다가 명품 강변길을 걸어 다시 수산으로 돌아올 참이다. 수산대교 북단에서 강둑으로 곧게 뻗은 자전거길 따라 명례로 향해 내려갔다. 둑 안쪽 둔치는 파크골프장에서 물억새와 갈대숲으로 이어졌다. 강둑 바깥 넓은 들엔 벼농사 뒷그루 비닐하우스단지였다. 주로 딸기 농사를 많이 지었고 일부는 감자를 하우스 촉성 재배해 봄에 출하하기도 했다.
4대강 사업으로 강둑으로 뻗친 자전거길 따라 명례에 이르니 아리랑 오토캠핑장 들머리였다. 캠핑장은 추위에 야영하는 이들이 드물어 한산했다. 캠핑장 진입로를 따라 강변을 돌아가니 전주 이씨 효령공파 후손의 낙주재가 나왔다. 임진왜란과 후일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이빈이 광해군 계축옥사 때 김제남을 제주도로 위리안치시키고 상경길 그곳 뇌진 풍광에 매료되어 정주했단다.
낙주재 인근 명례성당은 경남에서는 첫 번째 천주교회 본당으로 순교자 신석복의 생가터에 세워진 성지다. 신석복은 누룩과 소금장수였는데 진영에서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순교했다. 대구로 이송되면서 형제들에게 나를 위해 포졸에게 한 푼 돈도 주지 말라면서 신앙심을 죽음과 맞바꿀 결심이 굳었다고 전해온다. 순교자 신석복의 생가터에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성당이 자리했다.
성당 사무를 겸한 공간은 강 건너 대산 일동에서 사는 가톨릭 교우 문정화 서각전이 열려 둘러봤다. 칼끝으로 새긴 글귀와 문양이 예사롭지 않아 천천히 음미하고 나와 성당으로 올라 강변 풍광을 굽어봤다. 점심때가 되어 마을 안길 중국집에서 요기를 때우고 강변으로 난 십 리 명품 길을 느긋하게 걸어 수산으로 되돌아왔다. 아름답기로 입소문 난 저녁놀은 보지 못하고 귀가했다. 22.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