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하는 강현준
정의와 불의 중 무엇이 더 이익인가? 정의와 불의 중 정의가 더 이익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의가 더 이익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불의는 서로에게 부정한 일을 저질러 증오와 분열을 일으키지만, 정의는 서로에게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아 우애와 협조를 부르게 된다. 따라서 불의는 집단이 불화를 조성하게 되고, 정의는 집단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정의가 불의보다 더 이익이 된다.
성실한 장영찬
나는 누구인가? 질문이 어려우면 바꿔보다 정의란 무엇인가? 이것도 어려우면 한번더 바꿔보자 난 정의로운 사람인가? 이 질문애 대답을 국가론 시점에서 봤을 때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
국가론에서 정의란 각자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학생으로서, 꿈쟁이로서 해야 할 일을 노력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하려고 시도하고 노력하고 책을 끝까지 읽으려고 시도하고 노력하지만 정작 결과를 못 내는 어중간한 위치에 머무르고 있는 거 같다.
성경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순종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다. 난 순종하고 있는가? 이건 좀 애매한 거 같다. 아직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해서 그런 거 같다. 하지만 정작 나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아 성경적으로는 정의롭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자랑스러운 거 같다.
기뻐하는 김담희
정의는 무엇이고, 나는 정의로운 사람인가? 플라톤의 국가를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읽으면서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과 대화하며 정의는 국민들 각자가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고, 이는 국가나 개인에 있어서도 동일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지금 상태에도 적용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아는 대로 행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곧 ’나는 정의로운가?‘에 대한 답과 같다. 나는 아는대로 잘 행하고 있다는 말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 일단 제대로 잘 알고 있는가에 대한 고찰도 해봐야 한다. 만약 내가 아는 것이 바른 것이라고 해도 온전히 따르고 있지 않은 것들도 많다.
국가론은 조금만 한눈팔아도 금방 다른 대화가 시작되고,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정말 집중해서 읽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내용은 트라시마코스가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이었다. “불의는 그것을 범하는 자를 행복하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을 비참하게 만들지요. 참주 정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생략) 이러한 짓을 어느 한 개인이 저질렀다면 그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규모로 저질러졌을 경우, 가령 온 국민을 노예로 삼아버린 경우에는 그러한 자를 불명예스럽게 취급하기는커녕 행복한 자요, 축복받은 자로 칭송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불의를 비난하는 것은 그 불의의 희생양이 될까 겁나 그럴 뿐이지 이를 행하기가 두려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가 이에 대한 반박을 하고 나도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세상은 트라시마코스가 말하는 것과 더 유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상국가에 대해서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런 부분만 봐도 이상국가가 실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내와 자녀를 공유해야 하고, 소유재산이 없어야 한다는 부분도 실현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연 그런 국가가 이상향이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국가론은 여러 번 읽어도 완벽히 이해하기 어렵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관점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국가론을 다 읽고 나의 이상국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연구하는 정재훈
정의란 무엇일까? 플라톤의 국가론 속 가장 대표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일까? 흔히 영화에 나오는 악당을 잡고 사람들을 돕는 영웅같은 자들을 보며 '정의롭다'라고 한다. 과연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생각할까?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소임, 즉 해야 하거나 맡은 일을 다 해내는 사람이 정의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소임을 다 하지 못한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가? 구두닦는 사람이 구두를 닦으면 정의롭고, 자신의 신념 때문에 대량 학살을 한 히틀러도 정의로운가? 또한 자신의 소임을 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정의롭지 못한가? 나는 이런 의문점이 생겼다. 이런 질문에 대해 탐구하는게 철학이라고 했는데, 나는 철학보다는 개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철학에 대해 공부가 부족한 것 같다.
슬기로운 민시은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기본적으로 내가 받은 대로 갚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정의는 개인이 각자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이상국가를 이룬다고 말한다. 책에서 읽을 때는 그렇게만 넘어갔던 말이 수업 시간에 다시 곱씹어 보니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사람이 맡겨진 일만 한다고 이상사회가 실현될 수 있을까? 만약 주어진 일이 대의에 옳지 않은 것이라면 어떨까? 대표적인 예로 아이히만을 들 수 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 학살에 앞장선 사람이지만 후에 재판을 받을 때는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근거였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수호자가 진정으로 덕을 갖춘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 같다. 그런 사람이라면 많은 사람을 학살할 만한 명령을 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또한 공동소유를 주장한다. 특히 수호자 계급은 재산뿐만 아니라 가족까지도 공유하며 살아가야 한다. 사회의 통합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던 혈연이라는 관계가 사라진다면 결국 사람들은 완전히 개인적인 존재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사람의 관계 맺음에 있어서 혈연이 전부는 아니지만 가장 단단한 관계가 끊어지고 모두가 서로의 피를 공유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의 공동체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덕은 곧 지식이라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은 아는 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정말 안다면 사람은 그것을 실천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인간의 의지 부족을 간과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고 들었고, 그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아는 대로 행하기란 쉽지 않고, 동시에 몰라서 죄를 저질렀다고 누군가가 답한다면 책임을 추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수업을 들으며 무엇보다 바르게 아는 것이 시작이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한 번도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철학으로는 지혜에도, 진리에도 도달할 수 없다. 참된 앎은 윤리와 도덕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와 있듯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기 때문이다. 이제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알았으니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 행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