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끝에서
우남정
흘러넘치듯 능소화가 담벼락에 매달려 있다
열매는 꽃에 매달리고 꽃은 줄기에 매달리고 줄기는 뿌리에 매달린다 뿌리는 지구에 매달려 있고 지구는 우주에 매달려있다 매달린 것을 잊고 매달려 있다
산다는 것이 매달리는 것일까 저 여자의 가슴에 젖이 매달리고 등에 아이가 매달리고 팔에 장바구니가 매달리고 장바구니는 시장에 매달리고 저 여자는 집에 매달려 있다
손가락은 카톡에 매달려 있고 수많은 당신에 매달려 있다 당신은 씨줄과 날줄, 그물에 매달려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오래된 슬픔이 묻어난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핏방울이 맺혀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굴욕의 기미가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솟구치다’의 그림자가 매달려 있다 그 끝에 거꾸로 솟은 종유석이 자란다
매달리는 것은 추락을 견디는 것 오래 바람을 견디는 것 길게 휘어지는 촉수를 말아 안고 잎사귀 뒤 나뭇가지 끝에서 잠을 청한다
시집『뱀파이어의 봄』 2022. 천년의시작
오늘의 레퀴엠
우남정
붉은 뿌리를 잘라내고
소금물에 데친 주검을 먹는다
등뼈에 칼집을 넣어 발라 회친 주검을 먹는다
가마솥에 고아 낸 흐물거리는 주검을 먹는다
주검은 뜨겁고 달콤하고 비릿하다
꽃무늬 접시에 주검을 올린다
주검에 고명을 올린다
마트에서 순교한 죽음들을 세일하고 있다
신선한 주검을 고른다
누군가의 주검을 먹고 누군가의 죽음이 자라난다
무덤에 돋아나는 오랑캐꽃
사랑한 것들의 주검에 꽃이 핀다
죽음의 젖을 물고
푸른 상수리 나뭇잎에서 눈물이 반짝 빛난다
나는 배가 고프다
네 영혼의 마지막까지 갉아먹고 떠나려, 작정한 듯
시집 『뱀파이어의 봄』 2022. 천년의시작
우남정 시인
충남 서천 출생으로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년 『다시올文學』 신인상 수상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 『구겨진 것은 공간을 품는다』『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2022년 아르코문학나눔 도서 선정) 『뱀파이어의 봄』
김포문학상 대상,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