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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9,6ㄴ-10
형제 여러분, 6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7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8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9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10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Saint Laurentius of Rome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인다며,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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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신다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러분은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성도들을 위한 구제 활동, 특히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는 공동체의 선행을 들려줍니다. 사랑을 베푸는 행위는 씨 뿌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는 선행은 위선적인 행위일 따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다하여 베푸는 사람에게 선행의 씨앗뿐만 아니라 열매도 풍성하게 늘려 주십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섬김과 추종에 대하여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줄 때는 그런 일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려는 뜻 말고 내가 뭔가를 얻으려는 다른 뜻을 조금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나아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영광의 길이 아니라 불명예와 역경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목적지에 이르러 주님의 거룩한 영광을 함께 누리려면 불평하지 말고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지만,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입니다.라우렌시오 성인은 식스토 2세 교황의 일곱 부제 가운데 한 명으로 직무에 충실하여 순교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258년) 식스토 2세 교황과 그의 동료 네 부제가 참수형을 당한 나흘 뒤에, 라우렌시오는 활활 타오르는 숯불 위에서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사랑의 열정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교회의 수많은 순교 성인들에게 전구를 청합시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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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자신의 재산과 재능을 이웃을 위해 기꺼이 봉헌하라는 권고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사랑으로 봉헌되는 삶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사랑의 밀알, 생명의 밀알이 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내어 주시고 구원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구원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로마 교회의 라우렌시오 부제는 자신의 죽음과 표양으로 로마의 회개를 가져온 밀알이 되었습니다. 푸르덴시우스 시인은 라우렌시오가 보여 준 신앙의 증거로 로마의 이교 신앙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박해자들이 교회의 재산을 탐내자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석쇠 위에서 구워 죽이는 형벌을 기꺼이 받은 순교자입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보물’임을 가르쳐 준 분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밀알이 되도록 하느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가정 안에서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밀알,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자선을 베푸는 밀알,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밀알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희생되어야 많은 사람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사랑의 희생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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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자신의 재산과 재능을 이웃을 위해 기꺼이 봉헌하라는 권고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사랑으로 봉헌되는 삶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사랑의 밀알, 생명의 밀알이 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내어 주시고 구원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구원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로마 교회의 라우렌시오 부제는 자신의 죽음과 표양으로 로마의 회개를 가져온 밀알이 되었습니다. 푸르덴시우스 시인은 라우렌시오가 보여 준 신앙의 증거로 로마의 이교 신앙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박해자들이 교회의 재산을 탐내자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석쇠 위에서 구워 죽이는 형벌을 기꺼이 받은 순교자입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보물’임을 가르쳐 준 분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밀알이 되도록 하느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가정 안에서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밀알,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자선을 베푸는 밀알,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밀알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희생되어야 많은 사람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사랑의 희생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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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몇 가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먼저,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만 온다는 점이지요. 새싹이 나오려면 씨앗이 죽어야만 합니다. 씨앗이 죽는다고 해서 씨앗의 형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씨앗의 형태가 새싹의 형태로 변화되는 것뿐입니다.
만일 씨앗이 말라 뒤틀어졌다면 싹이 나오기나 하겠습니까? 새롭고 건실한 싹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내 안에 깃든 악의 경향들을 죽여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생명의 힘, 선한 마음이 충만해질 것이 아닙니까? 개인적인 야심과 욕망을 묻을 때만 비로소 하느님께서 쓰실 만한 재목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생명을 얻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만일 개인의 욕망을 버리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 온 생애를 헌신한 분들이 없었더라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욱 어두웠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눈에 보이는 박해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르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 점에 대해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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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선행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하신다고 자신 있게 선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베풀다 보면 내가 바닥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자기만 생각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챙겨서 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 단면만 바라보면 그런 사람들이 편안하게 손해도 보지 않고 사는 듯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생각해 보면, 그들의 삶이 결코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점에 동의하게 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신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썩지 않으려고 버티는 밀알처럼 발버둥 치다가, 한 알 그대로 껍질 속에서 돌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대로 자신을 봉헌한 성인을 전례 안에서 만납니다. 그 당시 로마 교회는 수많은 가난한 백성에게 자선을 베풀었고 멀리 떨어진 지방에까지 구호품을 보냈습니다. 특히 로마의 일곱 부제 가운데 수석 부제였던 라우렌시오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과 관대함 때문에 모든 이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더 많은 것을 나누려고 그는 심지어 미사 때 사용하는 성작들까지도 팔았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박해자들이 그에게 교회의 보물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자 라우렌시오는 그 보물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한 다음, 사흘 뒤 금은을 보여 주는 대신에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교회의 보물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 썩어서 열매를 맺어야 할 교회, 우리가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십시오”(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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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자가 천금을 걸고 ‘천리마’를 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엉터리 말은 많았지만 진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나이 든 집사가 자신이 구하겠다며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더니 거금 500냥을 주고 죽은 말의 뼈를 사 왔습니다.
화가 난 부자가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주인님께서 죽은 천리마를 오백 냥이나 주고 사셨다는 ‘소문’이 나 보십시오. 죽은 말에도 500냥이나 주는데, 살아 있는 말이라면 훨씬 더 많은 돈을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천리마를 숨겨 놨던 사람들이 줄을 설 것입니다.”
주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베풀지 않으면 돌아올 것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데, 어찌 남이 나를 위해 희생해 주기를 바랄 수 있을는지요? 한두 번의 희생은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뿌리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거둘 수 없습니다.
밀알이 싹을 틔우려면 썩어야 합니다. 썩지 않으려 발버둥 치면 그대로 남습니다. 썩어 거름이 ‘되어야’ 새싹이 돋아납니다. 모든 동물의 어미는 새끼를 위해 희생합니다. 자연의 미물도 ‘모성애’가 있기에 생존이 가능한 것이지요. 본능에 따른 행동이라고 하지만 숙연한 모습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스승님의 말씀입니다. 참고, 나누면서, 아무런 계산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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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은 땅에 떨어져 썩어야 싹을 틔웁니다. 어디 밀알뿐이겠습니까? 모든 씨앗이 그렇습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에서도 새끼를 위한 어미의 희생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본능에 따른 행동이라고는 하지만 감동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 사회는 어떻습니까? 동식물보다 못한 사람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희생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오히려 어리석게 여깁니다.
희생하지 않으면 밀알이 썩는 이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썩지 않으면 하늘의 생명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삶의 무미건조함이 팽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밀알이 썩지 않는데 어찌 싹이 돋을 수 있겠습니까? 희생하지 않는데 어찌 기쁨이 주어지겠습니까? 그러니 희생하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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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건너뛰는 행복, 희생이나 헌신없는 성공을 꿈꾸지 마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유다인들의 대축제이자 큰 명절이었던 과월절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3년여 에 걸친 공적 활동을 마무리지으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수난-죽음-영광의 때’가 이르렀음을 아신 예수님의 머릿속은 백 가지 생각이 교차되며, 무척이나 산란했을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당신만을 위해 기획되고 준비된, 끔찍하고 처절한 수난과 죽음의 독무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그러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세상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단 한 발자국도 회피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으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을까요?
뿐만 아니라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단과 당신의 사랑하는 양떼를 남겨두고 떠나셔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이 앞섰을까요?
참으로 두렵고 착찹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애써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치십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상황들을 모두 아버지께 맡겨드리며, 일반 군중들을 위한 마지막 강연을 펼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복음 12장 24~25절)
이제 지상에서의 과제를 120펴센트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남아 있는 마지막 관문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의 핵심 키워드는 ‘밀알 하나’였습니다.
내어놓음이나 희생, 변화나 쇄신, 결국 죽음을 거부하는 밀알은 언제까지나 그저 한 알 밀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날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변화, 열매와 발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크게 강조하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입니다. 희생이나 헌신없는 성공입니다. 말도 안되는 기적의 연출입니다. 십자가 길 대신 꽃길 보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용감하게 수용하십니다. 내적인 갈등이 커질 때 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며, 언젠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을 꿈꾸며, 얼마 남아있지 않은 당신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제자인 우리들 역시, 스승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배에 승선한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겠습니다.
죽음은 오늘 제자들인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로 다가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포기하고 싶어질 때는 ‘죽을 각오’로, 더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가야겠습니다. 미운 감정이 폭발할 때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용서해야겠습니다.
예수님 한분의 희생과 죽음으로 온 세상과 인류에게 구원이 다가왔듯이, 오늘 내 작은 희생과 헌신, 작은 죽음을 통해 작게나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작은 나의 희생과 봉사, 작은 죽음이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의 십자가 길에 깊이 동참하는 사랑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닌다.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화 ‘붉은 가족’(2012)은 행복하게 위장한 겉모습과는 달리, 위험한 비밀 활동으로 하루하루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아가는 고정간첩 가족 ‘진달래’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간첩 가족은 돈 타령이나 하며 서로 싸우기 바쁜 옆집 가족을 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비판합니다. 옆집 가족은 화목하고 단란해 보이는 위장 간첩 가족을 동경합니다.
콩가루 집안이지만 가족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남한 가족과, 겉으로는 단란한 가족이지만 계급으로 무장된 지령에 의해 조직된 간첩 가족과 우리는 어느 가족을 희망해야 할까요?
결론적으로 고정간첩 진달래 가족은 위계질서가 아닌 피로 맺어진 옆집 가족을 동경하게 됩니다. 북조선의 명령으로 맺어진 가족은 그만큼 결속력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진달래 가족은 당의 지령을 따르는 만족도가 콩가루 집안의 만족도보다 떨어진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뜻하지도 않게 태어나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내가 정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부모님도 나와 같은 아이를 낳으려는 의도는 없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공동체가 가족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결속을 주는 계명들이 존재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를 사랑해야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그 공동체를 만들어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계명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부모에게 대든다든가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 공동체는 결속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가족에게서 오는 행복도 잃습니다.
인간의 삶은 어떤 사람이나 공동체에 속하기 위한 목적이 강합니다. 학교에 속하고 직장, 새로운 사람과 만드는 가족에 속하기 위해 삶을 살아갑니다. 결국 그 속하기 위한 준비를 잘 해 왔다면 그 공동체에 속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 공동체에 속하고 싶은데 놀기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간이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게 되면 다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지옥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옥의 계명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위해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계명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기쁘게 내어주라”는 계명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고도 말합니다.
의로움이란 어떠한 공동체에 속할 자격을 말합니다. 빚을 떼어먹은 사람은 의롭지 못하여 그 돈을 빌려준 가족 공동체에 속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속하기 위해 가져야 하는 의로움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기쁘게 내어주는 계명입니다.
죽음에 이른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너는 무엇을 가지고 있니?”라고 물을 때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해야할까요? 그냥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야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저는 기쁘게 내어주고 싶은 마음을 가졌습니다.”라고 말해야합니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축일입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담당하는 성직자였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그 재산을 바치느니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 덕에 석쇠에 구워지기는 하였지만 그 뜻을 기꺼이 지켰기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하느님 앞에 가지고 간 것은 내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하느님 마음이고 그 마음을 간직했다면 하느님 마음을 간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어주는 것이 즐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지고 있는 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미워해야 한다는 말은 오물처럼 더럽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물을 어떻게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그 가치를 알기는 하지만 남에게 주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길 때 미워하는 것입니다. 돈의 가치를 알지만 남에게 흘러갈 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생명을 끊임없이 받는 것입니다. 생명을 끊임없이 받으려면 나의 생명을 끊임없이 이웃을 위해 내어주고 있어야합니다. 이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죽고, 어떤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죽고, 어떤 사람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쁘게 내어주려는 마음”만 남기고 죽어야합니다.
한겨울에 내리는 눈을 많은 사람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첫눈이 온다고 하면 뉴스에서도 나올 정도이지요. 특히 젊은 사람들은 눈이 내리면 데이트를 하는 등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눈을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바로 15년 전 겨울에 있었던 교통사고 때문이었지요. 강의를 위해 지방에 갔다가 눈길에 차가 미끄러져 사고가 난 것입니다. 그 뒤로 눈이 오면 운전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약속 자체를 잡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냥 집에만 있습니다. 혹시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지요.
예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밤에 사제관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급하게 병자성사를 청하는 전화였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눈이 오면 외출을 삼가는 저이기에 병자성사를 거절했을까요? 아닙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직접 운전을 해서 급하게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이라 해도 더 중요한 일이라면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은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싫다는 이유로 하지 않는 경우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싫어서 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서 다른 이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서 그 중요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자기 자신에게 순간적인 만족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이고 주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되고 맙니다. 또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밀알의 입장에서도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싫겠습니까? 그렇다고 땅에 묻혀 싹을 틔우는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밀알의 본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어서 싹을 틔워야 많은 열매를 맺는 자신의 본 역할을 다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이 한 알의 밀알처럼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자신이 싫어하는 마음을 죽이고, 정말로 중요한 일 특히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라고 하시지요. 단순히 입으로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는 충실한 제자의 모습입니다.
나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혹시 싫다고 귀찮다고 그리고 내게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역할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내 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최고가 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하세요. 이것이 바로 현재 제가 사는 방식이랍니다(오프라 윈프리).
빠른 시간.
전에 본당신부로 사목을 하고 있을 때, 한 달에 한 번은 본당 내 병자들을 위한 봉성체를 했습니다. 연세가 많아 꼼짝 못 하는 어르신도 있고, 긴 병으로 침대에 누워 힘들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특별히 노환으로 힘이 없어 보이는 분들에게는 병자성사도 드리는데 종종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어르신, 어르신 인생은 어떠하셨던 것 같아요?”
이 질문에 거의 하나 같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어요.”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를 말씀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시간의 빠름만을 말씀하시더군요.
자신의 삶이 아직도 많이 남은 것 같고 또 시간은 느리게만 흐르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시간 안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죽음은 곧 생명이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모두 죽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생명을 볼 수가 없다. 저출산의 첫 이유는 부부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결과이다. 하나도 힘들다. 둘은 낳지말자. 아이 없이 그냥 둘이 즐기며 살자. 이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인간의 셈법이다. 이렇게 살아 보았자 축복은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누가 그랬다. “꿈 중에 제일 좋은 꿈이 뭐냐?” “죽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왜냐고 다시 묻자, 그는 “죽음이 곧 생명이니까”라고 말해준다. 꿈이 현실이 될 때, 이는 백번 맞는 말이다. 죽으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인생은 길게 보며 살아야 한다.
인도의 옛 수도 ‘콜카타’는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세우고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로 일생을 살았다. 수녀님이 사신 방에 마련된 당신의 유품은 벼개와 이불, 그리고 깁고 기워 헤어진 수도복이 전부였다. 일생을 죽음으로 사셨기에 당신의 존재가 풍요로워졌을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귀한 생명을 낳아 주었다. 존재가 풍요로우니 필요한 물품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하느님의 섭리를 한 알의 밀알에서 본다. 그런데 사람만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소유가 풍요롭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소유는 존재를 풍요롭게 만들지 못한다.
요즘 부쩍 이런 생각이다. 사제, 수도자의 성소가 줄어든다. 많이 늘어났으면 좋으련만 소유에 눈이 멀어 존재의 풍요를 잃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수도없이 본다. 오르지 소유를 위해 살겠다고 용을 쓴다. 그러나 젊은이의 존재가 결코 풍요롭지 못하다. 존재가 풍요로우면 소유는 그냥 따라오는데 말이다. 자기 전 존재를 주님께 아낌없이 내어 놀 때, 그것은 죽음이지만 또한 생명의 삶이다. 그 죽음의 삶을 살 때면 나는 진한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일상은 내어놓는 죽음의 삶이었다. 예수님은 수난과 죽으심의 일상으로 ‘영광의 부활’을 낳아 주셨다. 이 보다 멋진 삶이 또 있는가? 그래서 우리도 그분을 따라나선다. 이왕에 사는 거, 삶을 내어 놓으며 살자.
한반도가 상생하자
이념 대결은 끝났다. 구 소련에서 러시아의 탄생을 보았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 올리지만 상대를 향해 쏘지 못한다. 쏘았다가는 서로가 공멸이니까. 한반도가 화약고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핵도 있다. 단추를 잘못 누르는 순간 한반도는 공멸인 줄을 알고 있다. 미친 놈이 생겨나지 않도록 기도할 뿐이다.
경제전쟁 중이다. 이제 남은 전쟁은 경제전쟁이다. 패권국인 미국이 중국과 전쟁 중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전쟁 중이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국가 경쟁력에 빨간불이 켜져 있다. 살길이 뭘까? 유일한 한 방법이 있다. 남북경협이다. 이를 위해 종전과 평화정착이 관건이다. 이제 이념대결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한반도가 상생하며 더불어 살아가려 할 때, 미중러일이 우리를 우러러 볼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공을 드리는 이유이다. 북한의 동해상 미사일 발사는 더 이상 의미없다. 공멸이니까. 8월15일 광복의 의미가 살아나길 기도할 뿐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의 씨앗을 세상의 밭에 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씨앗을 하나 하나 뿌리게 될 때 당장은 내것이 사라지는 듯 하지만 그 씨앗이 자라나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을 때에 나는 엄청난 몫을 나누어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세상 속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는 삶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요한12,24)
곽승룡 비오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자기 목숨(psyche)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12,25)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7)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래서일까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추방과 죽음을 겪는 공동체 안에 틀림없이 존재한다. 순교자들이다. 그들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씨는 "땅에 떨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먼저 그렇게 땅에 떨어지셨다. 그리고 하늘로 "들어 올려 지셨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기 위해 "떨어짐"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가기를 바라는 이들은, 예수님처럼, 자기를 선물로 내어놓으면 된다고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다.
곧 자기들의 목숨을 내놓도록 준비되어야만 한다고...
그래서인지 지금 이 곳에서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고, 목숨을 미워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살리기 위해서 변해야 살아있는 거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지만
산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야
변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고
변해야지만 산 것이지
살아있다면 가만히 있어도
쉼 없이 변하는 거야
어차피 쉼 없이 변하는 것이니까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
변화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라
살리는 변화가 있고
죽이는 변화도 있으니까
살아있기에 쉼 없이 변하고
쉼 없이 변하기에
쉼 없이 살리기도
쉼 없이 죽이기도 하는 거지
어차피 살아있기에
쉼 없이 변하는 거라고 해서
그저 살아있음에 머물러서는 안 되지
살아있기에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는 쉼 없이 변하겠지만
살리는 변화와 죽이는 변화
가운데 선택하는 것은
쉼 없이 변하는
살아있는 나의 몫이니까
쉼 없이 변한다고
살아있음에 자족하면서
결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참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변하느냐
죽이기 위해서 변하느냐에 달려 있으니까
바꾸기
이종훈 신부님
땅을 파면 가끔 하얗고 통통한 애벌레를 만난다. 놀랐는지 무서운지 몸을 잔뜩 웅크린다. 매미유충이다. 전에는 몰라 나도 놀랐지만 이제는 미안한 마음에 저쪽 다른 곳에 다시 살살 묻어준다. 저렇게 생긴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날개까지 달고 무더운 여름을 식혀주는 매미가 될 수 있을까?
이삼십년 만에 만났어도 친구들의 얼굴과 말투에는 어렸을 때 그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나도 그렇겠지. 곤충들은 때가 되면 창조주의 계획에 따라 저렇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데, 나는 왜 변하지 않을까? 변하고 싶고 바뀌고 싶은데. 곤충처럼 외적으로 획기적인 변화는 있을 수 없지만 내적인간은 정말 바꾸고 싶은데. 그런 능력이 없는 걸까, 아니면 애초부터 그러고 싶지 않았던 걸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2코린 9,8).” 하느님은 나를 바꾸어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나는 용기가 없다. 살아왔던 대로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서 행복하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미련도 고집도 아니다. 기계처럼, 입력된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그냥 하던 대로 하고 만다. 언제나 후회하고 괴로우면서도 그렇게 하고야만다.
예수님은 바꾸셨고 또 하나도 안 바꾸셨다. 때가 차자 목수일은 접고 복음을 전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봉헌하셨다.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고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이었다. 목수일도 복음전도일도 십자가 희생도 모두가 하나였다. 그분이 내 대신 내 안에 사신다면 나도 그렇게 되겠지.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모든 은총이라고 표현했던 것 같다. 수년 간 땅 속에서 벌레로 지냈는데 고작 며칠 저렇게 노래하고 짝짓기하고 죽는 매미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사람이다. 매미에게는 매미의 삶이, 나에게는 나의 삶이 있다. 매미처럼 혁명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내어주기를 결심한다. 그리고 선함을 향해 조금 열린 마음에 주님이 당신의 모든 은총을 부어주시기를 청한다.
예수님, 나무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서 매미는 여명부터 온 산을 울리며 노래합니다. 그들의 우렁찬 노래로 제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기쁨을 가르쳐주는 것 같습니다. 충만하고 영원한 기쁨을 받아내기 위해 오늘도 제 마음의 그릇을 조금 더 넓힙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삶을 바꾸려고 무진 애를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작정한대로'(요한 12장 24~26)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누구든지 나를 섬기는 이는 아버지께서 존중해 주실것이다.'
마음이 열리면 ~
무엇이든 나누고 싶어지죠.
좋은 결심, 좋은 마음을 지녔다가 시일이 지나면 왜 내가 봉헌한다고 했지?
하며 아깝다는 생각에 점점 적게 하려는 마음을 품는다든지, 이웃에게 나누려다 그만둔다든지 ᆢ
마음에서 작정한대로 하는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 마음에서 작정한대로 기쁜 마음으로 하면 쓰담쓰담 주님께서 칭찬과 함께 복을 가득히 넘치게 주십니다.
'꼼꼼쟁이 되지 맙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요한 12, 26)
(If anyone serves me, let him follow me. And where I am, there too my minister shall be. If anyone has served me, my Father will honor him.)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십시오.
이제 입추도 지나고 무더위도 막바지에 이르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라우렌시오(Laurentius +258) 성인은 스페인에서 태어나신 분이신데, 로마 교황 식스토 2세(Sixtus II, 24대 교황 재위 257~258) 때의 일곱 부제 중에 재산을 관리하셨던 수석 부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로마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재위 253~260) 황제의 혹독한 박해 때에 붙잡혀서, 그가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임을 알고서 교회의 보물들을 바치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자 라우렌시오 성인은 며칠 시간을 달라고 한 다음에 돌아와서 교회의 재산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후에, 박해자들 앞에 나타나서, 그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대단히 분노해서 라우렌시오 성인을 뜨거운 석쇠판 위에 올려놓고 불에 구으면서 죽였다고 합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그 뜨거운 불석쇠판 위에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이제, 이쪽은 잘 구워졌으니 다른 쪽도 마저 구우시오" 하면서 그 엄청난 뜨거운 석쇠불판 위에서도 주님을 향한 신앙이 더 뜨거웠습니다.
참으로 장엄한 순교자이시며, 교회의 보물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일깨워준 훌륭한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인이십니다.
오늘 복음(요한 12, 24~26)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주실 것이다." (요한 12, 26)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때로는 이렇게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이 겪었던 로마 시대의 혹독한 박해에서도 그가 신앙을 증언해야 되었을 때는 뜨거운 석쇠불판 위에서 불에 그을리며 죽어가면서도 그 신앙을 증거 해야 될 결심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앙은 거짓이 아니며 장식품도 아닙니다. 신앙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증언해야 할 각오가 있어야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쳤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분들은 무수히 많고, 우리가 그 분들의 행적을 아는 분들은 복자나 성인으로 존중해 드리고 공경합니다. 신앙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친 것에 대해서 용기와 강한 정신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 행적이 알려져서 가경자, 복자, 성인으로 존경받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러나 또 같은 모습으로 숨졌으면서도 행적이 알려지지 않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그러한 무명의 순교자들도 더 많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도 신앙을 지키신 용기와 하느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분들을 존중해주시고 그 분들에게 신앙 증언에 대한 영원한 생명으로 보장에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날도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서 박해 받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에게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신앙의 기쁨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울러 옛날같은 박해는 없지만, 신앙의 유혹을 받는 분들에게도 그것을 이겨내 하느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신앙을 위해서 목숨 바친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 나는 나의 신앙이 박해 받는다면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그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의 봉사자였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Sermo 304,1-4: PL 38,1395-1397)
오늘 로마교회는 복된 라우렌시오의 개선을 기념하고 경축합니다. 그는 성난 세상을 짓밟고 세상이 던지는 유혹의 미소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노리는 마귀를 패배시켰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라우렌시오는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복된 사도 요한은 “주의 만찬”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명백히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라우렌시오는 이 말씀을 잘 이해했습니다. 이해한 것뿐만 아니라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을 받았기에 그 보답으로 자기 자신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 드렸습니다.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그분을 본받도록 합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보다 그분께 대한 사랑의 더 훌륭한 증거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들을 위해서만 고난받으시기를 원하시고, 그분의 고난은 그런 사람에게만 효과를 미친다고 말해 주는 듯합니다.
거룩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 피를 흘리기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순교자들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순교자들이 지나간 후에도 다리는 끊어지지 않았고 그들이 마신 샘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여, 주님의 정원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순교자들의 장미꽃만이 아니라, 동정녀들의 백합화도, 기혼자들의 담쟁이꽃도, 과부들의 제비꽃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소명에 대해 실망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이를 위해 고난당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피를 흘리고 고난당함으로써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도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신적 위치를 보존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 위대한 엄위여! 바오로는 덧붙여 말합니다. “오히려 당신의 것을 모두 버리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오, 지고한 겸손이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여기에 본받을 그분의 모범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순종하는 분이 되셨습니다.” 왜 당신은 오만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후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들도 거기까지 그분을 따라갑시다. 사도 바오로가 하는 말씀을 잘 들읍시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예전에 신학생 시절에 한 친구가 생각납니다. 그 친구는 다른 이들이 모임이나 놀이를 하고 나면 누가 거들어 주지 않아도 혼자 남아서 다 놀고 난 뒤치다꺼리를 하곤 했습니다. 테니스장도 혼자서 롤러를 밀고, 축구가 끝난 후에 혼자 남아 그 커다란 운동장을 하나하나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뒷정리를 했습니다. 그 덕에 나머지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신부가 된 후에도 누가 특별히 부탁한 것도 아니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이도 없는데 여기저기 다니며 나무를 심으며 궂은일과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해주곤 했습니다. 그 덕에 많은 곳에 많은 사람이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친구는 우리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고, 많은 이들의 존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지금에도 그 친구가 늘 떠오르고 마음 한가운데 살아있습니다. 똑똑하지도 남보다 특별히 잘난 면도 없어 보였지만 늘 성실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위해 배려하고 마무리해주던 모습이 기억에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 그 친구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결심이 아니라 실천을 보여주었고, 아무리 크고 넓은 공간도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며 정리하면서 마치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면서 살았던 존재였음을 되새기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4-25)
사람들은 훌륭한 재능과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칭찬을 하긴 하지만 고마워하지는 않습니다. 출세하고 부자가 된 사람들도 부러움을 사기는 하지만 역시 고마워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개인의 남보다 나은 모습은 타인의 각광을 받기는 하지만 존경이나 감사를 표하지는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시기와 질투의 표적이 되고 생명을 위협받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사회에 헌신하며 기여하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존경과 감사를 받습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바라보는 성인 성녀분들도 다른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고 봉사했다는 면에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감사를 받습니다. 주 예수님의 뒤를 따라 구원의 희생 제사를 우리의 삶으로 이루어 나가기로 합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은 출입국에서 시작합니다. 출국과 입국이 수월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이탈리아 입국 과정에서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자동출입국 심사가 가능했습니다. 우리나라와 이탈리아가 서로 협약을 맺은 것 같습니다. 아무런 질문 없이,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양국이 서로의 문을 쉽게 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미국 여권을 가진 사람이 러시아를 방문하려면 비자를 얻어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 시민권자의 러시아 입국은 상당히 까다롭다고 합니다. 비자를 내려면 비용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의 문을 쉽게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행은 도시를 보는 것이 아니고, 산을 오르는 여행이었습니다. 걷고, 산장에서 자면서 힘은 들었지만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살면서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걸 새삼 알았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너무 많은 것을 먹었고, 너무 많은 만남이 있었습니다. 혜민 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자체의 동력에 의해서 좀 더 빨리, 좀 더 멀리, 좀 더 높이 움직일 것입니다. 영적인 성찰은 좀 더 느리게, 좀 더 내면에 가까이, 좀 더 낮게 움직일수록 깊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의 양심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움직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생각으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우리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시기심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욕심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서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의무감으로 돌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습니다. 부부는 의무감으로 살아서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참아 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의무감으로 한다면 날개는 있지만, 새장에 갇혀서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새와 같을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 같지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나무는 뿌리가 있어야 가뭄도 견디고, 바람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집도 기둥이 있어야만 오랜 세월 지탱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와 같은 사람, 건물의 기둥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봉사자를 보았습니다. 힘든 사람의 짐을 들어주는 분이 있었습니다. 다른 이를 위해서 식사 준비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도 많은 봉사자를 보았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가마솥에 불을 지피는 분, 삼계탕을 끓이는 분, 어르신들 간식으로 전을 부치는 분, 수박을 나르는 분, 사진을 찍는 분, 고기를 굽는 분,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저는 겉으로 드러난 꽃이라면 봉사자들은 어둠 속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 부제도 바로 그런 봉사자였습니다. 더운 여름을 식혀주는 소나기처럼, 우리는 모두 주님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매 풍성한 삶 -부단한 나눔과 비움의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성인은 에스파냐의 우에스카 출신으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대략 258년경 순교했습니다. 성인은 교황 성 식스투스 2세를 돕는 로마의 일곱 부제중 수석으로 주된 임무는 교회 재산 관리와 빈민 구호 및 일반적인 교회 관리였습니다. 참으로 충실한 ‘교회의 사람’이었습니다.
순교를 예견한 성인은 교회의 재물을 모두 바치라는 황제의 엄명을 거슬러 재산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재산을 요구하는 황제의 집정관에게 성인은 병자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나타나 “이 사람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성인은 온갖 고문후 석쇠 위에 눕히고는 구워죽였다 합니다. 석쇠위에서 살이 익어가자 성인은 “이쪽은 다 익었으니 뒤집어라.”여유있게 말했다 하며 그의 몸에서는 향기가 났다 합니다. 전설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성인의 올곧은 신앙을 상징하는 예화입니다. 바로 이에 근거한 오늘 성무일도서 찬미가 한 연입니다.
“혹심한 불의고문 받았었건만/견고한 마음이사 변함이 없어 튀기는 불꽃속에 협박견디며/넘치는 사랑으로 이겨냈도다.”
성인의 축일은 4세기 초부터 교회 전례에 도입되었고, 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은 순례자들이 주로 찾는 로마의 일곱 성당 중 하나가 됩니다. 그에 대한 공경은 빠르게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고, 시인 프루렌티우스는 그의 죽음과 표양이 로마의 회개를 가져왔고, 로마에서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언급합니다. 교회 미술에서 성인을 상징하는 문장은 석쇠입니다.
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들이 성인들이며 성인들 역시 참 다양합니다. 성인들을 기억할 때 마다 지금도 꼭 살아 계시다는 느낌을 갖게 되며, 또 끊임없이 열매를 맺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성인들과의 내적 연대감으로 우리의 신앙도 더욱 굳세어 지고 풍요로워집니다.
좌우간 예수님처럼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끊임없이 열매를 맺고 있는 성인들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풍성한 열매에 대한 예고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앞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요 곧장 이어지는 순교와 부활, 그리고 풍성한 열매들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영원한 현재진행형입니다. 매일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언젠가의 선종의 죽음이 아니라 오늘 지금 잘 살며 잘 죽는 과정이 있어 언젠가 그날 선종의 죽음입니다. 땅에 떨어져 죽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고립단절의 이기적 삶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랑으로 비우고 나누는 삶일 때 비로소 죽어 열매를 맺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상징하는 바 우리 각자입니다.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밀알 하나의 삶입니까, 혹은 끊임없는 사랑의 개방과 나눔과 비움의 죽음을 통한 열매 풍성한 밀알 하나의 삶입니까? 바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생각나는 정하권 몬시뇰의 수도원 연중 피정 중 한 대목 말씀입니다.
“수도원에 죽으러 온 사람들이 살려고 하니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
부단히 죽어 예수님을 닮아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수도생활인데, 버리고 들어 온 옛 이기적 나를 살려고 하니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기적이고 폐쇠적 ‘밀알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사람들을 뜻한다면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이타적 개방적인 사랑의 사람들로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비롯한 무수한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가정이든 교회든 수도원이든 이미 사랑으로 죽어서 무수한 열매를 내는 ‘살아 있는 성인들’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어제 끝기도후 숙소에 가다가 수도원 트럭에 가득 실린 복숭아 상자들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바로 한 수도형제가 복숭아 과수원 형제가 약간 상한 복숭아들을 갖다 수도형제들과 먹으라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작업하여 가져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 또한 사랑의 열매 풍성한 삶의 빛나는 상징입니다. 이처럼 참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섬기려면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섬기면 아버지께서도 이들을 존중하십니다. 예수님과 공동운명체인 우리들입니다. 부단한 섬김과 따름의 여정을 통해 예수님과 깊어지는 일치입니다. 부단히 사랑의 비움과 나눔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삶일 때 열매 풍성한 구원의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참 기쁨은 밀알 하나가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삶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하여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 화답송 시편이 이런 이들에 대한 축복을 선언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참으로 사랑으로 나누고 비울수록 하느님 친히 채워 주시기에 부요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부익부 빈익빈,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힘, 우리의 기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온갖 좋은 것을 선물하시어 참으로 영적 부요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밀알 하나의 주님의 성체가 우리와 하나되어 우리 모두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아멘.
성체성사의 삶
김형진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은 각자 정체성을 지니기에 그에 맞게 쓰이거나 존재해야만 참된 의미를 찾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밀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밀알은 그대로 남아 그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 심겨 썩고 열매를 맺어 빵이 됨으로써, 사람들에게 양식으로 먹히기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인 우리도 한 알의 밀알처럼 살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니, 당신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고, 우리도 그 길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그분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나아가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시어 성체의 모습으로 먹히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도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살아 있는 감실’이 되어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시고 세상에 나아가 사람들에게 먹히는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나눔과 희생을 맛보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웃에게 생명이 되어주는 삶이 참다운 제자의 정체성이자, 존재 이유이며, 참된 구원의 길입니다.
믿음과 삶 <요한 12, 24-2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도신경을 외우고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고백한 내용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고백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며 주님을 섬기려 하지만 주님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믿음 따로, 믿음의 삶 따로 사는 사람은 기도의 내용 따라 살지 않고 믿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말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내고, 태산도 옮길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는 느낌이 좋아 감동을 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약속하지만, 삶의 현장에서 지키지 않고 정치인이 공약을 남발하고 공약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신용을 잃고 헛소리가 됩니다.
이같이 고백만 하고 믿음을 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종신 서약만 하고 잘 지키지 않고 살면 어느 날 “더는 서약을 따를 수 없어 수도원 떠나야 하겠습니다.”하고 떠나는 사람을 60년 동안 수도원에 살면서 많이 보았습니다.
이는 세례 때 신앙 고백을 하고 신앙을 따라 살지 않아서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래서 믿는 것과 믿음을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하늘과 땅을 만들어주신 하느님을 믿으면서 하늘과 땅을 비옥하게 하고 창조주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지 않으면 믿음의 고백은 헛소리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되신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이 사신 삶을 따르지 않고 사는 사람, 권력을 탐해도 십자가는 저버리는 삶은 십자가를 피해 도망가는 사람이며 오신 주님을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고 해도 고통을 원망하고, 한탄하고, 절망한다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성령의 잔잔한 이르심을 거절하고, 성령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매시간 깨우쳐 주시는 사랑의 메아리를 듣지 못하면 자신의 거룩한 삶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영원한 삶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자신이나 주위 사람의 영생에의 초대를 거부하고 슬퍼한다면 이는 믿음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들어가 썩지 않으려고 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듯이 자기희생, 자기 봉헌, 섬김, 나눔과 친교의 삶을 살며 믿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린다.
최민석 신부님
무심코 돌멩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주 먼 옛날부터 커다란 산이었다가 바위였다가 한때는 원시인의 밥그릇으로 사용되었을 법한 돌이 지금은 정원의 귀퉁이 돌이 되어 내 눈앞에 있다. 태초에 굴러갈망정 절망하지 않았던 야무진 돌이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 채워진 정원을 지지해 주는 돌멩이가 되었다.
나 죽어 하느님 앞에 설 때 여기 세상에서 한 일이 무엇이냐.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물으시면 나는 맨 끝줄에 가 설 거다. 내 차례가 오면 나는 슬그머니 다시 끝줄로 돌아가 설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세상에서 한 일이 없어 끝줄로 가 서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내 차례가 오면 나 정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 그저 사랑만 받았다고 말할 것이다.
나 지금 있는 그대로 사랑 안에 있다. 사랑으로 존재하고 있는 내가 고백하는 말이다. 창조주 하느님이 애초에 설계하고 만든 그대로 사랑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억지를 쓰고 욕심을 내 보아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지은 바대로 그저 물 흐르듯이 흐르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참고 기다리며 친절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도 교만하지도 무례하지도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고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낸다.(고린 전서 14, 4-5) 사랑은 사랑이니까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게 맞다.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는 게 사랑이며 자연이다. 자연은 신이고 신은 또한 자연이다. 인간이 신을 이길 수 없듯 자연을 이길 수도 없다. 신을 모욕하는 인간에게 신이 노하듯 자연을 해하는 인간에게 자연도 노한다. 신이 절대자라면, 자연은 과학을 초월하는 또 다른 신이다. 흐르는 4대강의 흐름을 막고 강을 파헤치는 환경 파괴는 사랑을 거슬리는 것이다.
깨어 있지 못하면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하느님은 자연스럽게 자연 안에서 자연의 커다란 문을 열고 자연의 은혜를 활짝 열어 주신다. 푸른 하늘이 되시고 산이나 들에 꽃으로 만발하시고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으로 오실 뿐만 아니라 찌든 무더위로 폭풍으로도 오시어 깨어 있지 못하는 한 그분의 현존 가운데 머물 수 없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생명을 간직한 씨앗은 온전히 자신을 죽이며 내어주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DNA라는 유전 물질로 생명현상을 전하는 모든 생명체는 자신을 절반으로 내어주지 않고서는 어떤 복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생명 현상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고 내어주는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모든 생명체는 존재론적으로 개방하고 내어주는 자기비움(케노시스)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열매로 얻는다. 이것이 생명 현상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기주의는 자기 자신에 집중하고, 남을 위해 과감히 내어주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고립되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자기 안에 내재된 생명의 씨앗마저 말라버린다.
우리 인간은 자기 안에 내재된 선의 씨앗이 자라게 하여 열매를 맺도록 부름 받고 있다. 선의 씨앗이 자라게 하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마음의 밭을 가꾸는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바람에 날려 와 더 잘 자라는 잡초를 나 몰라라 해서는 밭이 엉망이 된다. 그 밭에서는 기대할 것이 없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며 부단히 노력할 때, 기쁨으로 밭을 바라볼 수 있고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우리는 그 밭에서 거둬들인 소출을 마음의 창고에 저장하여 필요할 때 꺼내 쓴다. 우리의 말이나 행동이 그냥 나오는 법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안다.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마태 12,35)고 말씀하신다.
어느 날 한 부자가 자기 집 앞에 앉아있던 가난한 사람에게 쓰레기통을 주며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다. 가난한 사람은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그가 준 쓰레기통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갔다. 그는 쓰레기통을 비워서 깨끗이 닦고는 거기에 아름다운 꽃을 가득 채워 가지고 와서 그 부자에게 꽃향기로 가득한 통을 주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행동에 깜짝 놀라서 물었다. “나는 당신에게 쓰레기를 주었는데 왜 당신은 내게 아름다운 꽃을 주는 것이오?” 그러자 그 가난한 사람이 말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가진 것을 내어 주기 마련입니다.”
우리 마음에 선과 사랑의 밀알이 떨어져 썩어 열매를 맺고, 선한 곳간에 가득 채워 언제나 좋은 것을 나눠주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청하고, 우리 마음의 밭을 매일 정성껏 가꿀 수 있는 성실함의 은총을 청해본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는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 2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존중이라는
단어입니다.
참된 존중을
배우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짧은 우리의
여정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섬기는 밀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밀알은 십자가를
선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존중으로
우리를
모으십니다.
존중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의 시간입니다.
우리를 섬기고
존중하시는 예수님의
삶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섬김과 존중이
우리를 살리는
구원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존중으로
감싸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존중의 열매가
가장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존중안에
삶의 해답이
있습니다.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존중이
성 라우렌시오를
더욱 빛나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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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게 죽는 밀알이 존중 받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의 어머니는 부산에서 자라셨습니다. 결혼해서는 경기도에서 사셨습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가 부산에 가고 싶다고 해서 지인들 몇과 함께 일박이일 동안 부산여행을 하였습니다. 반 년 전에도 같은 멤버들과 똑 같은 코스로 여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해운대, 수영, 용두산 공원, 자갈치 시장, 시간이 되면 용호동까지 같은 코스로 가기를 원하십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자랐던 곳에 계속 가고 싶으시겠지만 같은 지인들을 계속 데리고 가는 저는 그들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반년 전에 갔던 곳 또 가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어머니 듣는 데서 해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공치사한다고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반 년 전 겨울에도 마지막에 제가 공치사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여행 내내 어머니를 위해 내가 무언가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마지막엔 공치사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독서엔 바오로 사도가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게 되면 자신이 희생한다고 생각하여 그 시간도 행복하지 못하고 공치사까지 하게 됩니다. 주는 것이 기뻐야합니다. 기쁘려면 주면서도 즐겨야합니다. 나를 위해 준다고 생각해야지 타인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하면 의롭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받았으면 받은 만큼 갚아야하는 게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갚아야할까요? 필요한 이들에게 갚아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내어주시며 우리도 이웃들에게 목숨을 내어주라 하십니다. 목숨을 내어주되 즐겁게 내어주어야 의로운 사람입니다.
며칠 전에 2박3일 동안 아는 아이들과 물놀이를 다녀왔습니다. 이번엔 아이들에게 무언가 해 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즐겨 놀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물에서 7시간 놀았더니 몸살이 걸렸습니다. 사진을 보니 아이들보다 제가 더 즐거워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몸은 좀 안 좋아졌지만 제 자신에게 참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여행을 마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이 가난한 우리들에게 당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으니 우리도 기쁘게 내어주어야 합니다. 기쁘게 내어주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으로 아버지께 존중받게 됩니다.
수단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던 샘 칠더스라는 미국 목사님이 기관총을 들고 반군들과 10년 이상을 싸워 천여 명의 아이들을 구한 일이 있습니다. 당시 수단은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이 심할 때였는데 반군들이 고아원의 아이들을 마구 잡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폭탄 자살 테러용이나 소년병사로 훈련시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일일이 아이들을 찾아다니느니 고아원을 습격하는 것이 용이했던 것입니다.
샘 칠더스 목사는 자신도 어둠의 세계에서 자랐고 마약밀매와 조직생활을 거쳐 감옥살이를 한 뒤 이제야 방황을 그치고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 수단으로 건너온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보다 더 못한 전쟁 병기들로 사용되는 것을 눈뜨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수단 정부, 심지어 미국 정부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미국으로 도움을 청하러 갔을 때, 또 다시 들이닥친 반군들이 고아원 운영을 돌보던 사람들을 죽이고 아이들을 데려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목사는 더 이상 어찌 할 방법이 없어서 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부군에 합류하여 많은 아이들을 구해내었고 지금은 3백여 명의 아이들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군들은 그 목사의 아이들을 건드렸다가는 어떻게 되는 지 잘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그 곳은 넘보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샘 칠더스 목사가 운영하는 고아원은 수단에서도 가장 안전한 곳이 된 것입니다. 기관총 목사로 불리는 샘 칠더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들을 위해 총을 든 내 행위가 죄악이라면, 나는 죽어서 당당히 지옥에 가겠다.”
자신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미워하되 기쁘게 미워해야합니다. 기쁘게 희생할 수 있어야합니다. 폭력은 분명 안 좋은 것이지만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총을 든 목사의 행동에 누구도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을 줄 알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그를 존중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그리스도처럼 ‘기쁘게’ 목숨을 내어놓는 이를 존중해주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울 교구에는 외국에서 온 신학생들이 있습니다. 신학생들은 ‘레뎀또리스 마테르(구세주의 어머니)’라는 이름의 신학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남미, 유럽, 아시아에서 온 학생들입니다. 젊은이들이 모였을 때 제비를 뽑았고, 한국으로 정해진 젊은이들이 왔다고 합니다. 말을 배우는 것도 힘들고, 한국의 문화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고, 제비에 뽑혀서 왔다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힘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모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미를 드리며 한국의 문화에 적응하는 것 같았습니다. 신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선포하고,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생각이 변하였기에, 좋아하는 일이기에 가족들을 떠나서 멀리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에는 내규가 있었고, 신학생들은 내규를 지켜야 했습니다. 외출이 허락되는 날이 있었습니다. 침묵을 지켜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침기도, 미사, 양심 성찰, 묵주기도, 저녁기도, 끝기도가 있었습니다. 즐거워하기보다는 의무감으로 했습니다. 학기 중에는 잘 지켰지만, 방학 중에는 잘 지키지 못했습니다. 몸은 규칙을 지키지만, 생각과 마음이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좋아하고, 성서를 읽는 것을 좋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았다면 학교의 내규는 저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은총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서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의무감으로 돌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습니다. 부부는 의무감으로 살아서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참아 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의무감으로 한다면 날개는 있지만, 새장에 갇혀서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새와 같을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 같지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연필의 영성’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연필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연필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내세우기보다는 하느님께 먼저 의지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연필은 깎여야 하고, 조금씩 없어지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희생과 봉사를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연필은 겉모습보다는 연필심이 중요합니다. 결국,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연필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겉모습을 꾸미기보다는 우리들의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연필은 잘못 쓰면 지울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삶의 과정에서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이웃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연필로 쓴 것은 지울 수 있지만, 흔적은 남게 됩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흔적이 남게 됩니다. 그러기에 더욱더 신중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작은 연필도 자세히 보면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는 뿌리가 있어야 가뭄도 견디고, 바람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집도 기둥이 있어야만 오랜 세월 지탱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와 같은 사람, 건물의 기둥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봉사자들입니다. 예비 신학생들의 여름 행사에 봉사자들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간식을 준비해 주시고, 방문해 주시는 성소 후원회 임원들이 있습니다. 후배가 될 학생들을 위해서 땀을 흘리는 신학생들이 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도 많은 봉사자를 보았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가마솥에 불을 지피는 분, 삼계탕을 끓이는 분, 어르신들 간식으로 전을 부치는 분, 수박을 나르는 분, 사진을 찍는 분, 고기를 굽는 분,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저는 겉으로 드러난 꽃이라면 봉사자들은 어둠 속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 부제도 바로 그런 봉사자였습니다. 더운 여름을 식혀주는 소나기처럼, 우리는 모두 주님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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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학교에 다닐 때 학생회장에 당선되어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제 자신이 그런 능력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학생들은 저에게 많은 표를 던져준 것이었지요. 기쁘고 감사할 일이었지만, 사실 이 기간 동안 저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이었고 큰 아픔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 경험 때문에 하나의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즉, 남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웠고, 더 나아가 이렇게 부족한 모습으로 신부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일이 있어서 서울 신학교 근처에 갈 때마다 그때의 기억들이 생각나면서 스스로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로부터 20년 뒤, 서울 신학교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쁜 기억이 다시 떠올려졌을까요? 나쁜 기억들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때의 부끄러움도 소중한 기억이 되었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극복이 된 것입니다.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이 때문에 많은 부분에 있어서 할 수 없다고 했던 생각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상처는 그냥 단순히 없어져야 할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이 역시 소중한 기억이 될 수 있으며, 나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잘못된 의식의 판단을 가지고 있을 뿐, 그 어떤 것도 나쁜 것, 잘못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스스로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용기에서 새로운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절망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서, 주님께서 주실 새로운 선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지금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졌던 상처라 할 수 있는 고통이나 시련들이 어쩌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밀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게 되면 그냥 한 알만 남게 되지요. 그러나 죽게 되면 많은 열매를 하나의 밀알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통과 시련 그 자체에만 머물게 되면 아무런 변화도 얻을 수 없지만, 이를 극복하게 되면 많은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결실이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안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충실히 따른다면 분명히 우리들이 생각하지 못한 많은 결실들이 부족하고 나약한 나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들을 현명하게 어떻게 보내야할까요? 그 몫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이 사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마크 트웨인).
11 합덕 성당
합덕 성당은 공세리 성당과 더불어 충청도 최초의 본당입니다. 합덕을 포함하여 조선 시대 내포 지방은 규모가 크고 중요한 신앙 공동체가 많았지요. 그래서 박해의 피해가 어느 곳보다도 극심했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교우촌 공동체가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힘들어 하고 있을 때, 1886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한국교회는 내포 교회의 재건을 위해 양촌 본당과 간양골 본당을 설립합니다. 양촌 본당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합덕 본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충청도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가 됩니다.
실제로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사제와 수도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성소의 요람이 바로 이곳 합덕 성당입니다. 사제 32명, 수사 5명, 수녀 79명을 배출했다고 하지요(이 중에 제 동창신부도 있답니다).
1929년 페랭 신부(백문필 필립보)가 세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 성당은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합니다. 이 페랭 신부는 6.25 순교자로 시복 대상에 올라가 있습니다.
한편 성당에서는 ‘성가정 순례자의 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체 피정, 연수, 신앙 학교는 물론 일반 교우들에게도 언제나 열려 있다고 하네요.
본당 미사가 있지만 순례자 미사도 가능합니다(사전예약이 필요). 피정이나, 식사, 숙박 모두가 가능한 곳입니다. 주소는 충남 당진시 합덕읍 합덕성당2길 22이고, 전화는 041-363-1061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다투게 됩니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올해와 달리 작년에는 비가 정말 많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본당은 실내에서만 2박 3일을 보낸 본당도 있었는데요.
한 바퀴 돌아보면 처음에는 잘 노는 거 같더라고요.
초등학생들이라 뛰어다니고, 공기놀이 하고, 웃고 떠들며 수다 떨고 잘 노는 거 같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날 부터는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은 거 같더라고요.
활기차게 노는 아이들도 별로 없고, 웃고 떠들며 대화하는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놀이가 지겨워졌을지도 모르고, 대화하다보니 상대방 아이의 말이 자꾸 거슬려서 더 말을 하기 싫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제가 아는 일반적인 아이들이라면 시설에 대한 불평도 늘어놓았겠죠.
벽지에 곰팡이가 펴서 떨어졌네.. 거미줄이 있네.. 화장실 물이 약하네.. 하고 투덜거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아이들은 캠프를 하러 와서 해야 하는 프로그램들을 하지 않고 방에만 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나 지루하고 심심하고 다툼이 많고 불평이 많아지는지 체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박 3일의 시간이 지나고 집에 가자는 선생님의 말이 반가웠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런 체험을 성당에 모인 공동체 구성원들도 할 때가 있는 거 같습니다.
‘성당이 왜 이렇게 덥냐.. 음향 시설이 왜 그러냐 신부님 목소리도 안 들린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잘난척을 하냐.. 성당은 왜 이렇게 지루하고 재미가 없냐...’하고 불평하고,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싸우고, 갈라지고, 상처를 줄 때가 있는 거 같습니다.
언제 그런 모습을 보일까요?
아마도 본연의 임무에 집중하지 않을 때 그런 거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병사들을 내무반 침상 앞 열에 정렬시켜놓고 별도의 지시 없이 그들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지켜보는 겁니다.
아마도 불평거리만 찾아낼 겁니다. 침상은 너무 딱딱하고, 음식은 차고, 지휘관들은 거친데다
군생활 자체가 진부하다고 투덜댈 겁니다.
하지만 그 병사들을 참호에 배치시켜 놓고 날아오는 총알을 피해 몸을 굽히게 만든다면..
지겹던 내무반이 천국 같을 겁니다.
침상은 아주 편하고, 음식도 환상적이며, 지휘관들도 존경스럽고, 군생활에 생기가 돌겠죠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도 성당에 와서 본연에 임무에 충실 한다면 어떨까요?
기도하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말씀에 귀 기울이고 삶으로 살아가는 일에 집중하고, 외로워하는 이들과 아파하는 이들을 방문하고, 힘든 형편에 있는 이들을 돕고 봉사하는 일에 집중하는 겁니다.
그럼 아마도 불평과 불만 대신 보람과 의미를 찾고, 서로를 향한 비난과 다툼 대신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여럿이 해내는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신앙인으로서 해야 하는 본연의 임무에 집중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제 청년 세 명이 왔었다.
군대 얘기가 나왔고 월급 얘기가 나왔는데, 한 자매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제 동생이 공익인데, 시간당 얼마를 받는지 한 번 계산을 해 봤더니, 시간당 500원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당신에게 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8. 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요한 12,24-26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찾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당신에게 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나로 남아 있으면
나는 나일뿐입니다.
당신에게 나를 강요하면
당신은 내게서 더 멀어져
역시 나는 나이고
당신은 당신일 뿐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나누어지면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내가 됩니다.
하나인 내가 여럿인 당신들 안에서
수많은 내가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당신 사이가 메워져
모두가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나누어지는 만큼
나는 더욱 커집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변화에
나를 맡기기가 솔직히 두렵습니다.
나를 나누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요
이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이 되고
당신이 내가 되는
기쁨을 누리고 싶지만
그 때를 기다리며
나를 나누고 나눌 만큼
멀리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나만 나누어야 하는지
이기적인 어리석은 물음이
때 없이 밀려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내가 되심으로써
나를 당신으로 만드셨음을 믿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내게 먹히심으로써
나를 살리셨음을 믿기에
당신 안에 나를 나누는 아픔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당신에게 기쁨과 희망을 심는
사랑을 살고 싶습니다.
당신과 내가 하나 되는
아름다운 순간에 도달하지 못해도
그날을 바라보며 기꺼이
나를 나누는 기쁨을 살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교회 내 봉사자로 살아가면서 섬김의 삶은 정말 모든 봉사 생활의 기본이 되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구조 안에서도 제도적으로 마치 서열이 정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는 고위 성직자가 있고, 고위 평신도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어집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세 교황님께서는 처음으로 당신을 하느님의 종들 중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도자일수록 종들 중의 종으로서 섬김의 영성을 이루어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찰스 콜슨은 미국 의회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가 국회를 방문하여 연설했던 순간이라고 회고했습니다. 미국 사람은 대부분 연설자가 연설을 마쳤을 때 아낌없이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었지만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가 연설을 마쳤을 때에는 다들 너무나도 가슴이 먹먹해서 한참 동안 오직 침묵만 감돌았다고 합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이 말이었습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된 봉사자들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직책의 고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더 낮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섬기며 낮아질수록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섬기는 자로서 온 삶을 이루셨으며 가장 큰 사랑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이루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참으로 아끼는 사람에게는 아낌이 없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가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도가 아닌 성인들 중에서 축일로 지내는 성인은 성 스테파노 부제 순교자와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뿐입니다.
성 스테파노는 잘 아시다시피 사도가 아닌 부제였지만 첫 순교자로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초석을 놓은 분이기에 우리 교회가 축일로 지내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는?
스테파노가 그리스도교의 초석이기 때문이라면 라우렌시오는 로마 교회의 초석으로 우리교회가 인정하기 때문이지요.
그의 순교가 로마에서 썩는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이 바로 로마 교회의 번성이고 로만 가톨릭의 국교화인 거지요.
그래서 오늘의 전례는 밀알 하나가 썩어 열매를 맺는다는 복음을 읽습니다.
그렇다면 왜 라우렌시오의 순교가 가톨릭을 로마의 국교가 되게 했을까요?
로마의 순교자는 라우렌시오 말고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왜?
그것은 라우렌시오가 자기 목숨 하나 하느님께 바친 것이 그의 사랑의 전부가 아니고 그의 공로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우렌시오는 자기 목숨만 하느님께 바친 것이 아니라 교회 재산의 관리자인 부제로서 교회가 주는 교회,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교회가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실로 자기 목숨만 바치는 순교는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여 다른 사람까지 구원케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하느님께 받은 것을 나누어주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하느님의 교회가 나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교회가 되고 교회가 보편적 구원의 성사가 되는 거지요.
라우렌시오 성인은 실로 순교자일 뿐 아니라 하느님 은혜의 충실한 분배자였습니다.
로마 황제가 교회가 보물을 갖다 바치라고 하였을 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대로 교회의 보물을 팔아 몽땅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이에 분노한 황제에 의해 불에 달궈진 돌판 위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죽을 때 그가 한 말과 행위는 참으로 영웅적일 뿐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써, 황제가 교회의 보물이 다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기가 보물을 나눠준 가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하였지요.
진정 교회는 하느님 은총과 은사의 분배자이어야 하고, 교회의 관리자는 라우렌시오처럼 하느님 재산의 분배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는 나누는 교회가 아니라 점차 부를 모으고 축적하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아 나누는 교회가 아니라 신자들로부터 재물을 긁어모아 축적을 하는 교회가 되어 가는데 그것은 우리 교회에 라우렌시오 같은 관리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 자신부터 깊이 반성을 하는 오늘이 되고 싶습니다.
우선 세상 것을 소유하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는 제가 되어야겠습니다. 받지 않고는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받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것도 넘치게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고 믿어야겠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참으로 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보물도 아낌없이 줄 수 있지요.
라우렌시오처럼 가난한 이들이 제가 아끼는 보물들이 된다면 말입니다.
하느님 중심中心의 삶 -섬김, 따름, 나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수도사제생활 30년 통털어 강론 주제로 참 많이 사용한 말마디가 ‘삶의 중심’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중요한 ‘삶의 중심’이란 말마디입니다. 삶의 기본이자 기초가 삶의 중심입니다. 삶의 중심이 본질적이라면 기타의 것들은 부수적입니다. 삶의 중심을 잃는 것보다 큰 재앙은 없습니다.
어제 면담성사중에도 새삼 깨달은 것이 삶의 중심입니다. 삶의 중심이 불분명하니 본말전도의 복잡하고 혼란한 삶이요 모래위에 집짓기 같은 삶입니다. 쉽게 무너지면서도 그 원인을 모릅니다. 하여 여전히 악순환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믿는 이들의 삶의 중심은 하느님입니다. ‘내 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 우리 수도자들을 하느님 만을 찾는 ‘하느님의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수도생활은 함께 사는 것이요, 함께 사는 것이 수도생활의 어려움이요, 함께 사는 것이 도닦는 것이라는 제 지론입니다. 함께 사는 것은 답이 없습니다. 너무 다른 사람들이 수도공동체를 이뤄 함께 살 수 있는 까닭은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인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아니곤 수도공동체는 불가능합니다. 삶의 중심에 저절로 따라오는 삶의 균형과 질서입니다. 구체적 하루 삶을 드러내는 수도원 일과표도 하느님 중심으로 기도와 공부와 일이 균형과 질서를 이루고 있습니다. 감정따라, 기분따라, 마음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일과표 따라 살아감으로 수도공동체의 견고한 일치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섬김과 따름, 나눔이 그 내용을 이룹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예감한 절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그대로 예수님 당신의 죽음으로 인한 결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비유의 핵심은 선교의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위해 죽음은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부활에 따른 풍요로운 결실을 상징합니다.
바로 애오라지 하느님 아버지 중심의 삶이었기에 이런 자발적 순교의 죽음도 가능합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순교입니다. 지금도 사랑의 순교적 삶을 기쁘게 자발적으로 사는 이들은 세상 곳곳에 많습니다. 이들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섬김과 따름, 나눔입니다.
섬김의 모범이신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파스카의 영성’이 있을 뿐입니다. 하여 분도 성인은 당신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평생 주님과 형제들을 겸손한 사랑으로 섬기며 주님을 따르는 수도형제들입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믿는 이들의 모든 공동체 역시,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섬김과 따름은 둘이자 하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따름으로 주님을 섬기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섬김과 따름의 삶이 바로 축복입니다. 다음 예수님 말씀이 입증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도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구원은, 주님은 멀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오늘 지금 여기가 바로 주님을 만나는 구원의 자리입니다. ‘섬김serving’과 ‘따름following’에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나눔sharing’의 삶입니다. 섬김과 따름은 나눔의 생활로 활짝 꽃피어나기 마련입니다. 사랑의 섬김과 따름, 사랑의 나눔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섬김-따름-나눔’입니다. 없어서 못 준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형제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제1독서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온갖 선행의 나눔을 통해 주님을 섬기고 따를 때 넘치는 주님의 축복이요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부단히 주님을 섬기고 따르면서 나눌 때 바로 거기가 구원의 자리요, 죽어가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저는 이런 희생적 사랑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을 만납니다. 말그대로 주님과 함께 공동체의 중심이 된 분들로 섬김과 따름, 나눔에 항구한 분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섬김과 따름과 나눔의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시편112,1.5-6). 아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 12, 24-26(성 라우렌시오 축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하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당신의 때가 왔음을, 곧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요한 12,23)하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묘하게도 그것은 생명력입니다. 생명의 힘이야말로 밀알을 죽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것은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입니다.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밀알은 먼저 땅에 떨어져야 하고, 떨어져 죽어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져야 하고, 그러고서야 비로소 땅에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죽음의 고통은 자기를 벗어버리고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곧 그 죽음의 고통은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요,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 25)
여기에서, “자기 목숨”에 대해서 쓰이고 있는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셈족의 언어관습에서 “사랑하다”라는 말과 관련하여 쓰여 “덜 사랑하다”,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다”라는 의미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대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자신의 발견이며, 참된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미래에 대한 신뢰와 의탁,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 26)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다.”(요한 12, 23)고 알리시면서,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당신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멘.
땅만 보지 말고 하늘을 보자 <요한 12, 24-2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도 하늘이 없으면 그대로 말라 주고 싹이 트지 못합니다. 밖에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려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만물의 생기를 돋워 줍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주실 것이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씀은 주님은 하느님이 보내신 은총이며 땅에 심어진 밀알같이 열매를 맺고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물은 땅에 있지만, 땅의 물이 태양의 힘으로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면 구름이 되어 다시 땅에 비를 뿌리지 못하여 땅에 떨어진 밀알이 생명의 싹이 트지 못하는 것같이 주님을 믿는 사람만이 하늘의 아버지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잘못은 땅만 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땅이 중요하지만, 하늘이 없이는 땅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 주님을 통해 하늘에 이르고, 주님을 통해 하늘의 은총을 받아야 살아갑니다.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으며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미사 때같이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는 소리 하늘에 다다르고 주님의 몸을 영하는 사람은 주님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 끝에 “주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며 주님을 섬김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밀알이 땅에 들어가 썩어 싹이 트듯이 다시 내가 죽어야 할 만큼 순종하려면 아버지의 손길, 마음, 씀씀이가 나의 희생물에 마주쳐야 합니다.
오늘 눈을 뜨고 일어나려고 하니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너무나 힘이 없어 그대로 10분 누웠다가 ‘아니야, 일어나야 해’ 그래서 겨우 일어났습니다. 매일 일어나자마자 기도하는 에페소 1장 17-23과 3장 14-21을 기도하면서 일어나 앉고, 물 마시고 준비하면서 “주님 어찌할까요?” 그러니 힘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살살 걸어서 성당에 가니 힘이 생겨 아침 기도를 하면서 미사까지 할 힘이 생겼습니다. 무사히 기도가 끝나 아침 식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하나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아버지께서 힘을 주셔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태양이 없이는 땅의 모든 생명이 생명을 보존할 수 없듯이 하느님 아버지 없이는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려면 주님의 믿음을 통해 내리시는 구원의 은총을 믿고 하늘의 아버지 사랑 속에 머물러 있어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주의 기도문 시작, “하늘에 계신 저의 아버지!” 이 한마디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기록에 의하면 라우렌시오 성인은 스페인에서 태어나 로마의 일곱 부제중 수석 부제였다고 합니다. 성인은 285년경 로마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고 하자, 교회 재산들을 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 사람들을 데리고 박해자들 앞에 나아가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라우렌시오 부제를 불살라 처형했다고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라우렌시오 부제는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재산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성인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벽장 속에 감춰진 재물이나 통장에 새겨진 숫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출 필요도 없고, 망설일 필요도 없이, 나눈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고, 나누면 나눌수록 힘이 되는. 사랑과 우정과 존중과 배려와 환대와 지지의 인격으로 새로 나 하늘 나라를 이루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 순간이 다가 아닙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돌아보니 제게도 끔찍하고 혹독한 십자가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면 다들 행복해죽겠다는 표정인데, 유독 내 하늘만 짙은 잿빛이었습니다.
왜 하필 제게, 하며 하느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하루하루는 어찌 그리도 길게 느껴 지던지요.
삶은 또 왜 그리도 팍팍하고 힘겹게 다가오던지요.
사람들은 왜 또 한결 같이 아군은 하나도 없고 다들 적군들 뿐이던지요.
세월이 흐르고 흘러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힘겨웠을까, 생각해보니 즉시 답이 나왔습니다.
‘죽지’ 못해서였습니다.
크게 내려놓으면, 이것 저 것 다 놓아버리면, 결국 자신을 좀 더 죽였으면 아무 문제도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내려놓기가 어려웠든가 봅니다.
그래서 그렇게 힘겹게 살았든가 봅니다.
현실의 십자가가 너무 크게 다가올 때 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이란 돌고 도는 것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세월,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지만, 사람이란 것이 참 묘한 존재라서 사노라면 또 잊혀지기 마련이고 극단의 상황에도 견뎌내며 적응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는 특별한 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다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로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느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분위기, 사방이 온통 절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상황, 땅이 흔들리고 산이 흔들리는 듯한 고통과 십자가를 체험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극단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극복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몇 십 년, 아니 평생 해결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는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도 마음 놓고 의지할 언덕, 견뎌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희생과 속죄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한 알 밀알이 되신 분, 우리 구원을 위해 제사상에 오른 한 마리 어린 양이 되신 분이십니다.
이토록 크신 하느님의 사랑 앞에 우리 인간이 취할 자세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며 우리도 희생양이자 속죄양이신 예수님을 따라 이웃들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일입니다.
우리 앞으로 끊임없이 다가오는 다양한 십자가 앞에서 의연하게 견뎌내는 일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말입니다.
“짧은 시간도 슬픔의 날카로운 경험을 통해 길게 느껴진다.”
그렇습니다.
슬프거나 지루할 때 시간은 너무도 천천히 흘러갑니다.
그러나 즐거울 때는,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요.
마치도 아름다운 영화 속 한 장면, 아니면 감미로운 꿈결 같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고통도 고통이 아닙니다.
불편함도 불편함이 아닙니다.
그저 모든 것이 다 좋고, 모든 상황을 다 너그럽게 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나를 금쪽처럼 여기시는 하느님, 나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께서 나와 늘 함께 현존하신다는 의식, 하느님께서 내 인생길에 늘 동행한다는 의식입니다.
지금이 지나면 또 다른 시간이 온다는 것,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특히 이 순간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순간이 다가 아니고,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것 얼마나 큰 위로요 다행인지 모릅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 한 가지는 내 고통, 내 십자가에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 그래서 기쁘게 견뎌나가는 일, 결국 죽는 일, 내려놓는 일, 크게 물러서는 일, 그리고 나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걸어가는 이웃들에게 사랑과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일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안에 있는
죽음과 생명입니다.
집착과 미련으로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놓아주어야 할
하느님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모든 것을 다시
얻을 수 있습니다.
죽어야 다시
깨어날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더 풍요로일 수 있는
우리 생명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은
부여잡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생명입니다.
죽는 밀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삶과 죽음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죽는 밀알의 모습에서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시금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죽어야 살고
죽어야 진짜
생명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죽음이 생명이고
생명이 죽음이듯
죽음없이는 결코
열매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집착과 미련을
내려놓읍시다.
학창시절의 기억이 하나 떠올려집니다. 아마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담임 선생님께서는 산수(요즘에는 초등학교에서도 수학이라고 한다면서요? 하지만 제 때에는 산수라고 했기 때문에 산수라고 씁니다)를 무척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채점을 한 시험지를 나눠주시고는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0점 맞은 사람 일어나.”
한두 명이 자랑스럽게 일어납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열심히 한 이 친구들에게 ‘박수’를 쳐주라고 말합니다. 박수를 치고 난 뒤에는 이번에는 “60점 이하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는 반평균을 깎아 먹는 X이라는 말, 돌대가리라는 말 등을 퍼부으시면서 사랑의 매를 때리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60점만 되어도 잘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00점에 비교하면 형편없이 낮은 점수라고 할 수 있지만, 틀린 것보다 맞은 것이 더 많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우리의 삶이 꼭 100점처럼 완벽할 수 없습니다. 절반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합니다. 제가 사제 서품 받기 전에 어떤 선배신부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당신자 100%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정말로 훌륭한 신부일까? 아니야.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어. 딱 51%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도 훌륭한 신부야.”
다른 이들을 누르고서 1등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 꼭 성공한 인생이 아닙니다. 최고만을 지향하다보니 다른 이들이 경쟁상대로만 보이고, 그래서 늘 혼자만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과연 행복할까요? 그보다는 절반 정도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삶, 그러면서 절반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면 진짜로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이 세상 안에서 최고의 자리를 탐내지 마십시오. 또한 나만을 생각하는 삶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밀알 하나가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나의 이웃들과 사랑을 나누면서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진짜 성공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만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순간의 만족을 주는 이 세상의 1등 삶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을 주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1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금 갖추고 있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나를 당장 죽여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물에 빠져 죽고 말을 잘 타는 사람은 말에서 떨어져 죽는 법이다.(회남자)
최고의 명품
이 사회는 이상하게도 경제적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치 ‘경제적 능력이 곧 인격’으로 대치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급승용차와 명품 옷과 신발과 가방 등에 얼마나 많이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그러다보니 명품을 취급하는 회사는 늘 성황을 누린다고 합니다. 특히 드라마나 영화에 배우가 입고 나온 옷이나 들고 있는 가방 등은 어떻습니까? 이 역시 명품으로 취급되면서 이를 입거나 들고 있으면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최고의 명품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입니다. 명품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명품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희귀성이 있어야 명품 취급을 받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나’를 대신할 또 다른 누군가가 있습니까? 세상 안에 하나밖에 없는 ‘나’야말로 최고의 명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명품이 더 귀한 가치를 받게 하려면 어떨까요? 명품에 이물질이 묻어 있으면 그 값어치는 떨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명품에 ‘죄’라는 이물질, ‘욕심과 이기심’이라는 이물질 등이 묻어 있으면 나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최고의 명품인 나를 더욱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더 이상의 이물질을 묻혀서는 안 됩니다.
파스카의 참 행복한 삶 -사랑의 비움과 나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죽고 부활하는 파스카의 삶을 통해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갈 때 참 기쁨, 참 평화, 참 자유의 참 행복한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과 독서가 참 행복의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이 엄중합니다. 요한복음 12장의 구성을 보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 ‘라자로를 죽이려는 음모’, ‘예루살렘 입성’에 이어 바로 오늘 복음은 당신을 찾아온 이방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죽음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뒤를 잇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예견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의 경각심을 일깨우십니다. 당신을 믿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길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삶을 고스란히 사셨던 성인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라우렌시오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삶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이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의 삶은 더욱 그러합니다.
세세대대 영원히 계속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풍요로운 은총의 열매들이 아닙니까? 오늘도 주님은 우리 모두 세상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의 삶을 살라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밀알의 성체로 오십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중심의 삶’을 사는 이요,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궁극의 사랑을 주님께 두는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모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바로 우리가 진정 할 일입니다. 하여 분도수도공동체뿐 아니라 믿는 이들의 공동체 역시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이들은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을 섬겨 따르는 이들은 늘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여기 섬김의 삶을 사는 이들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주님을 섬기며 따르는 이들은 끊임없이 죽어 사는 파스카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비움으로 충만한 생명을 사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자 당신을 비워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난은 우리의 부요함이 되었습니다. 이런 부요함에 머물러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우리를 나눠 비우는 파스카의 삶을 통해 깊어지는 주님과 일치의 충만한 삶입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가 파스카의 삶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교회 신도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촉구합니다. 옛 초등학교 교사시절 제자들에게 무수히 선물했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감동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파스카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참 아름다운 이야기책입니다.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모금활동을 펼치며 코린토교회에서 하신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발적 사랑의 나눔 활동 또한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 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저마다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가진 것이 없어 나눌 수 없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나름대로 하느님의 무한한 선물을 지닌 우리들입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어 사랑의 눈만 열리면 나눌 것은 끝이 없습니다. 다정한 말, 따뜻한 미소와 표정, 사랑어린 눈길, 손길 등 끝이 없습니다. 결국 나를 통해 주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크고 중요한 나눔은 ‘존재의 나눔’입니다.
이런 진정성 가득한 나눔이 그대로 자기를 비워 부요케 하는 파스카의 삶, 영원한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9장 마지막 구절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새삼 우리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 선물을 나누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선물인데 내 것이 어디 있나요.
하느님은 기쁘게 나누는 이를,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나눔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기쁨은 없습니다. 버리고 비움의 구체적 실현은 사랑의 나눔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나눔의 기쁨으로 충만한 파스카의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시편112,5-6). 아멘.
죽으면 열매를 맺는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9,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소유한 것이 무엇이든지 하느님 앞에 씨를 뿌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탈란트, 시간을, 능력을, 물질을,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몇 갑절로 늘려 주셔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의 밀알을 심는 것은 열매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원하면 그만한 정성과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밀알이 땅속에 묻히면 죽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만약에 씨앗이 땅속에 묻히길 거절한다면 아마도 새한테 먹히거나 짐승한테 밟혀 으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혀야 합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짐을 뜻하지 않고 생명을 낳기 위하여 뿌리를 내림을 뜻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얻기를 원하는 만큼 심어야 합니다. 얻기를 원하는 만큼 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위하여 감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때문에 지상의 생명을 거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 때문에 지상의 매력에 집착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기쁨이 더해집니다. 지금 세상에 대해 죽으면 매 순간이 새 생명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12,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삶을 기왕이면 밀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는 모진 박해를 예상하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며 “나는 주 하느님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니, 네 잔인한 고초를 두려워하지 않는도다.”하며 믿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로 그 믿음의 씨앗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입니다”(성 예로니모).
일상 안에서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한 배려를 하다가 그만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당신도 바뀔 때가 되었지 않느냐! 이제는 철이 들 때가 되었지 않느냐! 왜 나만 양보해야 하느냐! 이제는 당신차례야!”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묻혀 썩어야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12,24). 그렇다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의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차례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색을 내지 말고 끝까지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그날까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차지해야하겠습니다.
지금은 미약하게 보일 지라도 풍성하게 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밀알의 두려움을 극복하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2코린 6,1).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하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당신의 때가 왔음을, 곧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요한 12,23)하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그것은 생명력일 것입니다. 곧 생명의 힘입니다. 생명의 힘이야말로 우리를 죽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것은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입니다.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밀알은 먼저 땅에 떨어져야 하고, 떨어져 죽어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져야 하고, 그러고서야 비로소 땅에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죽음의 고통은 자기를 벗어버리고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할 것입니다. 곧 그 죽음의 고통은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요,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여기에서, “자기 목숨”에 대해서 쓰이고 있는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셈족의 언어관습에서 “사랑하다”라는 말과 관련하여 쓰여 “덜 사랑하다”,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다”라는 의미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대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자신의 발견이며, 참된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미래에 대한 신뢰와 의탁,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을 섬기는 일이며, 당신을 섬기는 일은 당신을 따르는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이는 우리 삶의 변형과정, 곧 참 생명에로의 변형과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아니 예수님과 함께 죽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생명에로의 변형이 옵니다. 그것은 그분을 섬기는 일이요, 그분을 따르는 일입니다.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또한 믿음이 없다면 섬기고 따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다.”(요한 12,23)고 알리시면서,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그것이 ‘당신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그리스도께 함께 죽고 있는가?
그러 하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요, 그분을 따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섬기고 있고,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나 자신이라는 우상인가, 혹은 세상의 명예나 성공인가?
만일,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십자가와 함께 제 몸을 쪼개고 나누어 형제를 섬기고 있을 것이고, 아버지의 뜻을 향하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 자신을 따르고 있다면 내 몸과 내 뜻을 향하여 있을 것이고, 세상을 따르고 있다면 세상을 섬기고 세상의 가치를 향하여 있을 것입니다.아멘.
복음: 요한 12,24-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그분의 일화 중에 석쇠 위에 누워서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이제 한 쪽이 알맞게 익었으니 뒤집어 놓게!” 하셨다고 한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로마에서 이교 신앙이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고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서는 죽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없이하는 것은 새로운 모습의 나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라고 하신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대 사회적으로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는,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렵고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거슬러 살고 또 거기에 죽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첫 발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과감히 내딛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인이든 다른 사회에서나 내가 여기에 멈추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뒤쳐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공동체의 일치의 대열에서 스스로를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라고 하신다. 나를 죽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영광을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 참 보화를 얻기 위해 썩어 없어지는 밀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2,24) 땅에 떨어져 죽어서 열매를 맺을 그 낱알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으로 다가가실 것임을 말해줍니다.
밀알은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는 결코 어떤 변화도 열매도 가져올 수 없는 '갇힌 생명'일 뿐입니다. 창조와 생명력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지요. 밀알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를 고발하시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시어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12,25)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을 위해서 살려는 사람은 죽을 것입니다.
이렇듯 제자들은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 세상의 무질서하고 이기적인 선(善)과 그러한 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겠지요. 이처럼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생명을 품지 않은 세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죽음으로 치달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생명을 주신 주님을 충실히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라우렌시오 성인(†258)은 죽음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의 재산 관리를 맡은 일곱 부제 중 수석 부제였습니다. 그는 더 많이 나누려고 심지어 성작까지 팔 정도로 지극한 사랑과 관대함으로 가난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로마의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였습니다. 그는 식스토 2세 교종이 사형선고를 받고 사흘 안으로 자신도 순교하리라 예언하자, 기뻐하며 교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이를 알게 된 로마 황제는 그에게 교회 보물을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라우렌시오는 교회의 재물을 고아와 가난한 이들, 소경과 절름발이들에게 나누어주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황제에게 가난한 이들을 데리고 가서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몹시 분노한 황제는 그에게 갖은 고문을 가한 뒤 석쇠 위에 눕혀 불살라 죽였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보물은 세상 재물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라우렌시오 부제는 예수님처럼 목숨 바쳐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과 모범은 로마의 회개와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됩니다. 우리도 이 성인처럼 영원한 생명을 그리워하고, 목숨을 바쳐 예수님을 따르는 가난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 특히 교회는 무엇을 보물로 여기는지 정직한 성찰이 필요할 때입니다. 세상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힘을 쓰는 부유하고 힘 있는 교회를 바라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가장 소중한 보화로 삼아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고, 늘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교회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권한을 하느님 백성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행사하고, 이미 권력이 되어버린 사업을 벌이는데 집중하는 교회는 더 이상 하느님의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12,24-25)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한 사람의 진정한 가치나 보여준 사랑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드러납니다. 아예 세상에서 사라질 때 현실은 비로소 한 사람에 대해서 올바른 평가를 합니다.
현실과 얽힌 관계들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람이 보여 준 모든 가치를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잘 볼 수도 없고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현실이라는 허위의 벽이 우리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기에 특히 함께 사는 형제자매들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함께 사는 사람의 가치를 우리가 눈으로 보고도 마음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 그리고 과거의 경험들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물러나야 우리는 그릇된 관념에서 벗어납니다.
죽음은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얽힌 모든 이해관계를 해방시켜줍니다.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고’ 사랑받거나 인정받으려는 허위의 ‘자기 목숨을 미워할 수 있을 때’ 자유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밀알 하나가 썩거나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은, 현실에 속박된 거짓 자아가 죽고, 참 자아로 새로 태어나 사는 것입니다. 무관심과 허위, 부정과 거짓의 가면을 벗고 사랑과 진리, 정의와 참 자아로 살아야 우리는 하늘이 주신 생명의 열매를 삶에서 맺게 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초짜 신부였을 때, 주일날 강론을 하고 나면 꼭 그 주간에 그 강론을 실천할만한 일이 생겼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주일날 복음을 화두로 던져주시고 그 주간에 그 복음을 실천하도록 숙제처럼 과제를 주시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실제로 실천했을 때 가슴 속에 기쁨이 샘솟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을 실천했구나!’ 하는 자각이나 자긍심이 아니라, 내 의지와 감성과는 별도로 생겨나는 마치 샘솟는 물처럼 내 가슴 속에 잔잔하게 고이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여러분도 복음을 실천할 때마다 그런 일을 자주 겪으시죠?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주님의 말씀을 현실에서 이룰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쁨과 평화.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과 일치하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내려주시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자비로우신 사랑과 주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총과 성령께서 내려주시는 평화의 일치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최원석 님
오늘은 아침에 비가 와서 대구 날씨가 좀 풀려갑니다. 지난주에는 많이 더웠어요 ..상쾌한 가을을 기다리게되네요.. 성공이라는 단어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밀알을 같이 놓고 보면 여러가지로 다른 느낌이 듭니다. 성공? 은 자신의 입지를 위에 올려놓고 다른 사람이 우러러 보게 하는 것이 통상적으로 사람이 생각하는 성공일것입니다. 권력, 명예, 부를 거머쥐면 성공하였다고 하지요 .. 그러면 성공하면 행복한가 ? 학교에서 공부하다보니 여러 교수님들을 만나게됩니다. 그런데 명성이 자자한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별 것 없다는 것에 결론을 내릴때가 많습니다. 어느학회 회장이야 하면서 자신의 명성을 드러내 보이는데 그러나 진정성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고 섬기는 이로서 리더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 자리까지 가기 위하여서 많은 정치 ?를 하면서 물밑에서 보이지 않는 온갖 부조리한 모습을 하면서 주변의 얼굴 불히게 기형적으로 일을 하여서 사람들로부터 근접하지 못하게 해서 회장에 억지로 올라가는 것을 종종 보게됩니다. 부의 축적도 그렇고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도 그렇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것들이 속을 들여다 보면 그렇고 그렇습니다. 왜 이렇게 그렇고 그런것일까요 ? 이것은 아마도 나를 너무 이기적으로 사랑하여서 그런것이지요.. 그래서 악취가 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밀알에 대하여서 말씀하십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썩지 않으면 열매를 맺기 어렵다고 합니다. 나를 죽여야 한다고 하십니다. 나를 죽인다 ? 이기적인 자아를 버리고 참 자아로 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즉 나의 육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추구하는 것을 버리고 참 자아 ..주님을 닮아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 가끔 신부님들의 강론.. 수녀님들의 말없는 행동..그분들의 행동을 보면서 일종의 생명수와 같은 물 향기를 맛을 봅니다. 왜? 그분들을 보면 향수가 나올까요 ?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십자가를 지고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 오늘 나의 삶에 임할때 집에서나오면서 오늘을 무엇을 하지 하면서 나 위주의 생각으로 가득차서 보내는 것은 밀알이 썩지 않고 한알 그데로 남는 것이지요 ..그러나 집에서 나올때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서 그중에 하나를 나의 마음속에 집어 넣고 오늘은 그것을 묵상하면서 나의 하루를 살아야겠구나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그것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좋은 열매를 맺는 삶과 같을 것입니다. 밀알이 썩는다는 것은 육적 자아가 없어진다.. 그 빈자리에 주님이 임하셔서 나를 일으켜 세운다 ..이말이겠지요 ..
완성으로 가는 내가 아닌 완전으로 가는 내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오늘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우리 교회 전례력을 조금 알고 오늘 전례력을 눈여겨 본 분은 왜 라우렌시오 순교자의 경축일을 축일로 지내지? 다시 말해서 라우렌시오 축일이 기념이 아니고 축일이지? 하고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 전례는 보통 사도들을 축일로 지내는데 라우렌시오 부제는 사도가 아닌데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그만큼 우리교회에 있어서 라우렌시오 성인이 중요하다는 뜻이며 로마교회의 기초를 놓는데 라우렌시오 성인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우리교회는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밀알 하나가 썩어 많은 열매를 맺는 얘기이고, 라우렌시오 성인은 하나의 개인으로서 훌륭히 산 정도가 아니라 바로 로마교회의 부제로서 훌륭히 살았고 로마교회를 위해서 썩는 밀알이 되었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부제들이 공동체 살림을 담당하는 거로 나왔듯이 라우렌시오는 교황 식스토 2세의 부제로서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였는데 로마 황제가 교회 재산을 탐내 교황이 순교하게 될 때 곧 뒤따라 순교하리라는 교황의 예언대로 라우렌시오도 순교하게 되었지요.
교회의 모든 보물을 황제에게 바치라는 요구에 라우렌시오는 모든 보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는 황제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보물을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왜 가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왔냐는 추궁을 분명히 받았을 것이고 이에 라우렌시오는 나의 보물은 바로 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저와 저희 수도회와 우리교회가 어찌해야 하는지 큰 가르침을 주고, 동시에 큰 부끄러움과 영적인 통증을 안겨주는 모범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정말 나와 우리 공동체의 보물인가?
부자나 큰 후원자는 존중하고 환대하고 감사를 드리고 가난한 사람은 덜 존중하고 마지못해 맞이하며 이분들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가?
옛날의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제일 사랑하고 반대로 부자들에 대해서 일종의 증오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자들에 대한 증오감이 없으며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들 대신에 부자들이 저를 차지하지도 않으며 가난한 분들과 고통 받는 분들이 여전히 제게는 우선관심자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이 진정 제게 보물인지, 그런 보물들이 내 곁에 있음에 감사하고 그렇게 존중하는지 이런 차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고,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저의 사랑이 교만한 사랑이고 시혜적인 사랑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가난한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 합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무척 존중하며 사랑하지 않으며, 보물로 사랑치는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많이 받아 많이 가지게 된 사랑을 여유 있는 차원에서 나누는 식입니다.
그리고 머리로는 가난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고 강의를 할 때, 특히 프란치스코가 나환자를 만난 것을 얘기할 때도 그렇게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프란치스코나 라우렌시오와 같이 대성인들 앞에서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겠지요?!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일깨워
주십니다.
죽음은
무덤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죽음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죽음과 열매는
이어져있습니다.
열매의 출발점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묵상할 때는
언제나 머리를
숙이게됩니다.
인간과 죽음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사랑이었음을
깨닫게됩니다.
예수님의 방향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밀알처럼
십자가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는 열매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얼마 전에 제가 아는 청년이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왔습니다. 다음 달에 결혼을 한다면서 청첩장을 들고 왔더군요. 이 둘은 상당히 오랫동안 연애를 했습니다. 물론 중간에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둘이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의 모든 사랑에는 선택이 필요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를 찾아왔던 청년은 오랫동안 사귀었던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어느 날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혼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다른 여자 역시 사랑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만을 사랑하고, 당신을 나의 소중한 반쪽으로 여기겠다는 뜻입니다. 즉, 그녀 외에는 다른 모든 이들을 거절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에는 분명한 선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선택을 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주님과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선택에서 갈등을 겪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분명히 기도 중에는 “주님, 사랑합니다.”를 끊임없이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입으로만 사랑을 고백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돈과 명예를 더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녀 간에 사랑한다는 말은 양다리 걸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사랑한다는 말이 세상의 것과 함께 양다리 걸친다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주님만을 첫째 자리에 모실 수 있는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음에도 다 포기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이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어야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사랑이라는 크고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배신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어떤 사랑을 따라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역시 세상 것에 대한 사랑보다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맡기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고, 화형이라는 가장 괴롭고 힘든 죽음의 순간에서도 주님께 대한 사랑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양다리 걸치는 사랑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만을 향한 사랑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을 끊고 대신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우리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 마음대로 사랑하면 행복할 것 같아도 우리 마음대로 못하는 그 무엇이 있어 비로소 사랑은 아름답습니다(박해선).
진정한 호의
시어머니께서 직장 생활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도와주고 싶어서 미리 알리지 않고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집안을 청소해주고 맛있는 반찬을 해서 냉장고를 채워주었습니다. 직장 일로 바쁜 아들 내외도 자신의 이 배려에 너무나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더 자주 방문하면서 집안일을 대신해주고, 심지어 집안의 인테리어를 모두 바꿔준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 점점 더 며느리의 표정이 안 좋은 것입니다. 굳은 얼굴, 기대보다 못한 감사의 표현과 표정을 보면서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는데…….’라는 불만과 서운함이 쌓여집니다. 이런 감정이 누적되면서 ‘미움’이 생기게 되었고, 서서히 불편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시어머니의 사랑에 감사할 줄 모르는 며느리의 문제일까요? 바로 경계의 침범 때문에 생긴 관계의 문제인 것입니다. 며느리도 자신만의 공간이 있지요. 그 공간에 시어머니가 들어와서 다 바꿔버리니 편하지 않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바쁜 생활에 도움을 주시는 어머니께 감사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경계를 침범했다는 생각에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호의를 가지고 한 행동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호의는 이렇게 더 큰 거부감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줘야 합니다.
지금의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불평불만을 주님께 던지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대부분 기도하지 않고 던지는 불평불만입니다. 주님께서 알아서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호의는 당신께서 원하는 것을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는 것에서 나옵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우리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나의 이웃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은 절대로 호의가 아닙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에서 연극 ‘햄릿’을 보았습니다. 교구장님과 교구청의 사제들이 함께 보았습니다. 문화 활동까지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교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연극을 했었습니다. 여왕 크리스티나, 결혼, 데미안을 무대에서 만났습니다. 무대를 만들고, 의상을 구하고, 대사를 외우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안에도 뜨거운 열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극을 마치면 아쉬움과 후련함이 찾아왔습니다. 함께 했던 동료들과 뒤풀이를 하며 연극보다 더 진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번 연극을 보면서 3가지 감동을 했습니다. 첫째는 출연 배우들의 나이입니다. 평균나이가 68세라고 합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열과 혼을 다해서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처음부터 길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춥고 배고플지라도 묵묵히 걷다보니,그분들이 존경받는 길이 된 것입니다.
둘째는 주옥같은 대사였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은 시작부터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 배신, 좌절, 분노, 원망‘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삶의 험난한 파도를 넘어야하는 인간의 고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아서는 해결 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버려야만 희망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셋째는 무대연출입니다. 기존의 연극은 무대가 있고, 객석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번 연극에서 객석은 모두 비워 있었습니다. 같은 무대에 배우와 관객이 함께 있었습니다. 관객은 배우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배우들은 관객과 함께 호흡을 하며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막이 올랐을 때 텅 빈 객석이 눈에 보였습니다. 연출자는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여러분들이 살아야 합니다.’ 무대가 객석이었고, 세상이 무대였음을 말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작은 객석일지 모릅니다.우리가 살아야할 무대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세상이라는 생각입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도, 이별의 슬픔을 안고 쓸쓸히 죽어간 사람도,불의의 폭력에 희생된 사람도, 피어나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꽃처럼 세상을 떠난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기쁨과 은총의 삶 -섬김과 따름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 공동체에 모든 것이 다 있었는데 한가지가 없었습니다.”
여러번 인용했던 예화입니다.
수도형제의 말에 즉시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기쁨입니다. 다 있는 데 기쁨이 없었습니다.”
공감했습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재산, 명예, 건강 모두 갖췄는데도 기쁨이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그 소유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지요. 진정 행복한 내적 부자는 기쁨의 사람, 희망의 사람, 평화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이웃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이런 기쁨, 희망, 평화일 것입니다. 진정 영적 삶의 표지도 기쁨과 유우머이지 우울함이나 심각함은 아닙니다. 심각함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란 말도 생각이 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4,4).
작년 성탄 때 선물 받아 출입구에 붙여놓은 바오로 사도의 옥중 서간에 나오는 성구입니다. 말 그대로 언제 어디서나 기쁘게 살았던 ‘기쁨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고백성사 보속시 말씀의 처방전 가장 많이 써드리는 1테살5,16-18절 까지 말씀 중 맨 첫구절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을 읽으며 첫 번에 마음에 와닿은 말마디 역시 기쁨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인지요. 모든 것이 은총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총이 차고 넘칩니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감사와 기쁨입니다. 매사 기쁘게 살 수 있고, 기쁘게 줄 수 있는 삶입니다. 가진 것 없어도 이런 기쁨을 지닌 이들이 진정 부자요 자유인입니다.
얼마 전의 유우머도 잊지 못합니다. 잠시 오전 간식 시간중 하우스에 들리니 일하다 휴식중인 두 자매가 농장 수사님이 준 수박을 먹고 있었습니다. 저도 몇 조각을 먹고 떠나면서 남긴 덕담에 모두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먹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또 보고 싶으면 오겠습니다.”
말 한마디 천량 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진실한 기쁨이 담긴 생각, 말, 행동 자체가 이웃에게는 참 좋은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이 기쁨의 삶의 비밀을 보여줍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는 삶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끈임없이 사랑의 비움으로 죽는 삶이 열매 풍성한 부활의 기쁜 삶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물론이요 제자들의 삶이, 성인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비움의 여정’은 그대로 ‘기쁨의 여정’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비움의 여정에 대한 축복을 말해 줍니다. ‘자기집착’이 아닌 ‘자기이탈’에서 오는 참 기쁨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길은 분명해 졌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섬김과 따름의 자기이탈의 삶이 바로 우리 삶의 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도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하여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하는 분도수도공동체입니다. 주님을 따름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이 바로 기쁨의 원천이요 하느님도 이런 삶을 사랑하고 존중하십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기쁘게, 주님을 잘 따르며 섬기는 삶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시편112,5). 아멘.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9,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소유한 것이 무엇이든지 하느님 앞에 씨를 뿌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 시간을, 능력, 재능을, 물질을,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몇 갑절로 늘려 주셔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데 어찌 열매가 풍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밀알을 심는 것은 열매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원하면 그만한 정성과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밀알이 땅속에 묻히면 죽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만약에 씨앗이 땅속에 묻히길 거절한다면 아마도 새한테 먹히거나 짐승한테 밟혀 으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혀야 합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짐을 뜻하지 않고 생명을 낳기 위하여 뿌리를 내림을 뜻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얻기를 원하는 만큼 심어야 합니다. 얻기를 원하는 만큼 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위하여 감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때문에 지상의 생명을 거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 때문에 지상의 매력에 집착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기쁨이 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12,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삶을 기왕이면 밀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순명으로 하면 주님의 일이 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내일일 뿐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는 모진 박해를 예상하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며 총독에게“나는 주 하느님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니, 네 잔인한 고초를 두려워하지 않는도다.”하며 믿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총독이 라우렌시오를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위에 눕혔는데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후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 하고 말했답니다. 바로 그 믿음의 씨앗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입니다”(성 예로니모).
일상 안에서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한 배려를 하다가 그만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당신도 바뀔 때가 되었지 않느냐! 이제는 철이 들 때가 되었지 않느냐! 왜 나만 양보해야 하느냐! 이제는 당신차례야!”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묻혀 썩어야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12,24). 그렇다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의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차례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색을 내지 말고 끝까지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그날까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차지해야하겠습니다.
지금은 미약하게 보일 지라도 풍성하게 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밀알의 두려움을 극복하십시오.“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2코린 6,1).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생명을 위한 생명의 봉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2,24) 한마디로 잘 살려면 잘 죽어야 하고,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이는 모든 삶의 차원에 연관된 근원적인 삶의 원리, 행복의 원리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힘 있고,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오늘의 사회에서 이런 가르침대로 살 수 있을까요? 신앙인들은 그와는 전혀 달리 오히려 더 많이 포기하고 소유보다는 물질이 주지 못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잘 죽을 수 있어야 영원히 살 수 있으니 거꾸로 가는 인생인 셈입니다.
개인 차원에서도 포기와 희생을 통하여 자기애와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인간적, 신앙적인 관점에서 성숙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것만 챙기고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내놓지 않는다면 어떤 사회나 공동체도 성장할 수 없을 것이 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12,25) 하느님과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내놓고 나누는 것을 지고의 가치로 삼는 사람이 참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라우렌시오 성인(†258)은 예수님을 본받아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중 수석 부제로서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지극한 사랑과 관대함으로 가난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그는 더 많이 나누려고 심지어 성작까지 팔 정도였습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의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식스토 2세 교종이 사형선고를 받고 사흘 안으로 자신도 순교하리라 예언하자 기뻐하며 교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로마 황제는 그에게 교회 보물을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라우렌시오 성인은 교회의 보물을 모으려면 사흘 정도 걸린다는 말을 하고 돌아와서는 재물을 고아와 가난한 이들, 소경과 절름발이들에게 나누어주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황제에게 가난한 이들을 데리고 가서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라고 하자, 몹시 분노한 황제는 그에게 갖은 고문을 가한 뒤 석쇠 위에 눕혀 불살라 죽였습니다.
이렇듯 성인은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에서) 그의 죽음과 모범은 로마의 회개와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목숨을 바쳐 사랑을 실천했던 라우렌시오 성인을 본받도록 합시다.
오늘도 자기만 생각하고 자신만 살려고 몸부림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기꺼이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다른 이들과 이 사회와 교회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우리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어떻게 잘 죽어 참으로 아름답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행복한 용트림이 이어지는 오늘이길 소망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쓴 ‘암병동’이란 책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병원에 환자들이 누워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주제는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권력, 또 어떤 사람은 고상한 삶, 또 어떤 젊은 여자는 연애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읽으면서 우리는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암이 걸려 당장 죽어갈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을 되찾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놓치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구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위해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으니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삶입니다. 어떻게 이웃을 즐겁고 행복하고 불편하지 않게 해 줄 수 있는가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당시 교황청의 모든 재정을 맡아보던 이였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돈이 필요하게 되자 교회를 박해하였고, 목숨을 담보로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교회의 재산을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모든 물적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가난한 이들을 황제 앞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가난한 이들이 바로 교회의 재산이라고 말했습니다. 성인은 달궈진 석쇠에 죽어야 함을 알면서도 본인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재산을 받아준 가난한 이들에게 감사했을 것입니다.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채우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불쌍한 이들에게 후하게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길이 존속하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치켜들리리라”(시편 112,9)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기쁘게 주는 이”를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주는 것이 곧 내 의로움의 본성입니다. 주지 않으면 의롭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생명까지도 나에게 주셨으니, 나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려는 노력을 해야 의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기쁘게’ 주어야합니다. 어떤 분들은 십일조를 내는데도 더 가난해진다고 불평을 합니다. 십일조는 내가 부자가 되기 위해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았으니 그 받은 것들이 주님의 것이라며 돌려드리는 신앙고백일 뿐입니다. 더 주시고 안 주시고는 주님이 결정하실 일입니다. 그리고 기쁘게 바치는 이에게는 반드시 부족함 없이 갚아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당신 의로움을 넓히기 위해 후하게 내어주는 의로운 이에게는 더 주시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어떤 인도 거지들은 돈을 받아도 감사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들 때문에 하늘에 재물을 쌓게 되니 오히려 자신들이 감사를 받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면 맞는 말입니다. 이웃에게나 하느님에게 대가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나를 나로 살게 해 주는 이들이고, 그들 덕분에 내가 하늘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낳고 키웠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자신도 부모님으로부터 그렇게 키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인도의 디팩 쵸프라는 아이들이 말을 알아들을 때부터 “너희들은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것인가만을 생각해라”고 되풀이해 말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자녀로 키우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너무 경쟁에만 치우쳐있고 아이들은 자기만 아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눌 줄 아는 자녀들로 키워야합니다. 그래야 구원받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요한 12,26)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누군가가 나를 극진히 대해 준다면 나는 그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을 겁니다.
내가 해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부탁드려서라도 해주고 싶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람을 극진히 섬겨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섬겨야 할까요?
지금 가진 것이 많고 힘있는 권력자를 극진히 섬겨야 할까요?
예. 이 힘든 세상을 좀 편안히 살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별로 힘도 없어보이고 가진 것도 많아 보이지 않지만 정말 내가 존경하고 싶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훨씬 값지지 않을까요?
그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인간이 줄 수 없는 더 큰 축복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존경하고 그분을 극진히 섬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겠지요?
여러분은 누구를 가장 극진히 섬기시나요?
물론 예수님을 그렇게 섬기실 테죠.
그분을 섬긴다는 것은 부자와 권력자를 섬기지 않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가난한 의인들을 섬기는 것이랍니다.
오늘 나는 누구를 섬기고 있나?
왜 그를 섬기고 있나?
화두로 삼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 2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을 향한
신뢰없이는
예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우리의 자아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아를 내려놓는
사람만이 온전히
예수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을 때
예수님처럼
우리또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삶은
밀알처럼
많은 열매를 맺는
변모의 삶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 모든 열매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맺게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이란
끊임없이 아버지
하느님을 향해
열려있는
삶이었습니다.
열매는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의 열매였습니다.
기쁨의 열매는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존중하시기에
우리또한 부활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참된 존중은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못마땅함
-이수환 신부님-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도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상당히 어렵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기 위한 시도를 한번 해볼까요?
‘미워하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밉게 여기다’, ‘못마땅하게 여기다’라고 나옵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목숨에 대한 생각(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못마땅할 정도로까지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도 다른 이를 위해 잠시 제 것을 잊어보거나 양보하거나 희생한 적은 있지만 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내 것, 내 목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랑은 얼마나 깊을까요?
재미난 실험 하나만 할까요? 지금 당장 내가 소유한 모든 것, 곧 재물, 생각, 목숨 등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해 보세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들이 초라해서 못마땅한 게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이라는 지향을 두고 그렇게 생각해 보세요. ‘내가 이런 옷을 입어도 될까?’, ‘내가 이런 집에 살아도 되고, 이런 차를 몰고 다녀도 되나?’
마음의 반응이 어떠세요? 내 것들에 대한 마음이 조금 달라짐을 느낄 수 있으세요? 저는 쓸데없는 것을 참 많이 가지고 있다고 느꼈답니다. 마음이 달라짐을 느끼셨다면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목숨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기도록 합시다. 단,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저께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새벽에 자전거를 끌고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낮에는 너무나 덥지만 그래도 새벽시간에는 자전거를 탈만 하거든요. 그런데 먼지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2시간 정도를 타니까 목이 아프고 먼지들이 눈에 들어가 따끔거렸습니다.
어제도 자전거를 끌고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어제는 너무나 기분 좋게 자전거를 탈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리가 너무나 깨끗했고, 먼지도 날리지 않았거든요. 하루 차이인데 왜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일까요? 자전거 타기 전에 소나기가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끗한 도로, 먼지가 날리지 않는 도로가 된 것이지요.
기분 좋게 자전거를 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역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어떤 이는 저의 이 체험을 두고서 자연적인 현상을 주님께 억지로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 또한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힘을 전해 줍니다.
어떤 식당에 갔는데 이 식당의 종업원이 다른 사람의 주문은 친절하게 받으면서 자신이 불러도 아는 채도 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기분 나빠서 ‘다시는 이 식당에 오지 않겠다’면서 식당을 나갔지요. 그러나 이 식당 종업원은 이에 대해 너무나도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자기는 화를 내신 이 분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고, 차별 없이 항상 친절하려고 노력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화를 내신 이 분은 자신이 무시 받고 있다는 생각에 위와 같은 행동을 하신 것이지요. 종업원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서 말입니다. 무시 받고 있다는 생각,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요? 그러나 만약 말 한마디라도 나눴다면 이 종업원이 얼마나 친절한지를 또 자신을 존중하고 있음을 깨달아서 기분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자기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얼마나 많은 사랑과 주님의 특별대접을 받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길만이 참된 행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주님을 따르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 자체를 부정하면서 세상을 따르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요? 참 행복을 위해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도록, 또 그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편견은 안개와 같이 세상의 가장 밝은 빛을 가린다(볼테르).
함께사는 세상에서
제가 아는 분 중에서 운전을 아주 잘 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 차를 타면 얼마나 편안한지 모릅니다. 또한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하는 주차 특히 아무리 좁은 곳이라도 망설임 없이 주차를 잘 하십니다.
이렇게 운전을 잘 하시는데 종종 교통사고가 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저는 운전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사고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분은 이렇게 운전을 잘 하는데도 큰 사고가 근례에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운전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운전 실력이 뛰어나도 다른 차들이 달려오면 별 수 없이 사고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나만이 아니라, 내 이웃도 함께 서로 도와주어야 교통사고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종종 혼자만 잘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갖출 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자기 버림이 숨어 있습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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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는 너무 잘 알려지고 익숙해짐으로 인해, 원래의 색을 잃어버리는 것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씀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한 감동을 느끼고, 그에 따른 나름대로의 각오를 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신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의 귀에 너무도 익숙한 말이 되어버리기에 이런 성서구절을 접하드라도 색다른 감응 없이, 무덤덤하게 듣고 흘려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닐까?
말이라는 것은, 말을 하는 이의 영향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받아들이는 이에 의해 그 힘을 발휘하게 되어있다.
받아들이는 우리가 너무도 익숙하기에 무디어져 버린다면 그 어떤 아름다운 말씀도 그 힘을 잃어버린다.
우리 모두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를 이가 없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의식하면서 하루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전체를 놓고 볼 때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무디어진다는 것이다.
늘 깨어 있으라는 그분의 말씀을 상기해 볼 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세상은 아름다움과 추함이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우리는 이 세상 안에 살아야 한다.
복음의 시작도 복음의 끝도 이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으라 하신다.
남 위에 서야 성공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이 세상에,
타인을 위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진리를 실천하라 하신다.
지금 나는 무척 식상한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솔직히 생각해보자.
나는 복음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플 때가 많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좀 더 충실하게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역사를 만들고자 했다면,
최소한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 자행이 되고 있는,
입에 담기도 싫은 온갖 종류의 악행들을 적지 않게 막을 수 있었으리라 믿는다.
일일이 열거 하지 않아도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한 모습은 그 종류만도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들에게 우리는 쉽게 손가락질을 하고,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손가락질이 세상을 하느님 보기 좋은 세상으로 바꾸어놓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거듭 이야기 하지만, 너무도 상식적이어서 식상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볼 일이다.
그 상식적이고 식상하리만치 잘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 우리가 한 것은 과연 무엇이 있는가를 말이다
어제 새벽,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무척 어둡더군요. 아마도 그 전날 태풍의 여파가 남아있어서인지 어둡고 비가 올 것 같이 잔뜩 흐린 날씨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일기예보만 믿고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땀을 흘릴 정도로 속도를 내며 자전거를 타다가 자칫 잘못했으면 넘어질 뻔했습니다. 글쎄 길가에 뱀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뱀을 피한다고 브레이크를 잡고 핸들을 급하게 틀어서 넘어질 뻔 했지요.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너무 놀라서 뱀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가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본 것은 뱀이 아니라, 밤사이 태풍으로 인해 떨어진 나뭇가지를 보고서 뱀이라고 착각했던 것이지요.
뱀과 나뭇가지. 전혀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얼핏 보았을 때, 그리고 어둡고 흐린 날씨 상황에서 뱀이라는 착각도 할 수 있더군요.
우리 인간의 부족함과 잘못된 판단으로 수많은 착각 속에 실수를 하며 살아갑니다. 분명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분명하지 않았던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저 역시 그러한 착각의 바다에 빠져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가 자주 있었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즉 주님의 뜻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과 참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밀알 하나만 보면, 너무나 작고 볼품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밀알에 땅에 떨어져 묻히게 되면 어떨까요? 싹을 틔워서 많은 열매를 맺는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됩니다. 즉, 지금의 작고 볼품없는 모습만을 보고 실망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의 관점과 주님의 뜻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고 볼품없는 모습에 머무르기 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닌,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지요. 이 길을 통해서 우리의 관점을 넘어서 주님의 관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한계를 우리 스스로 계속해서 만들어댑니다. 그래서 ‘~ 때문에 할 수 없다.’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한계가 없으신 분이지요. 그래서 무조건 주님의 뜻에 철저히 따라갈 때, 우리 역시 한계를 극복하여 주님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성공의 비결은 고통과 즐거움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즐거움을 활용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앤서니 라빈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이 순간이 다가 아닙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돌아보니 제게도 끔찍하고 혹독한 십자가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면 다들 행복해죽겠다는 표정인데, 유독 내 하늘만 짙은 잿빛이었습니다. 왜 하필 제게, 하며 하느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하루하루는 어찌 그리도 길게 느껴 지던지요. 삶은 또 왜 그리도 팍팍하고 힘겹게 다가오던지요. 사람들은 왜 또 한결 같이 아군은 하나도 없고 다들 적군들 뿐이던지요.
세월이 흐르고 흘러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힘겨웠을까, 생각해보니 즉시 답이 나왔습니다. ‘죽지’ 못해서였습니다. 크게 내려놓으면, 이것 저 것 다 놓아버리면, 결국 자신을 좀 더 죽였으면 아무 문제도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내려놓기가 어려웠든가 봅니다. 그래서 그렇게 힘겹게 살았든가 봅니다.
현실의 십자가가 너무 크게 다가올 때 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이란 돌고 도는 것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세월,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지만, 사람이란 것이 참 묘한 존재라서 사노라면 또 잊혀지기 마련이고 극단의 상황에도 견뎌내며 적응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는 특별한 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다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로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느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분위기, 사방이 온통 절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상황, 땅이 흔들리고 산이 흔들리는 듯한 고통과 십자가를 체험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극단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극복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몇 십 년, 아니 평생 해결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는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도 마음 놓고 의지할 언덕, 견뎌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희생과 속죄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한 알 밀알이 되신 분, 우리 구원을 위해 제사상에 오른 한 마리 어린 양이 되신 분이십니다.
이토록 크신 하느님의 사랑 앞에 우리 인간이 취할 자세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며 우리도 희생양이자 속죄양이신 예수님을 따라 이웃들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일입니다. 우리 앞으로 끊임없이 다가오는 다양한 십자가 앞에서 의연하게 견뎌내는 일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말입니다. “짧은 시간도 슬픔의 날카로운 경험을 통해 길게 느껴진다.” 그렇습니다. 슬프거나 지루할 때 시간은 너무도 천천히 흘러갑니다.
그러나 즐거울 때는,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요. 마치도 아름다운 영화 속 한 장면, 아니면 감미로운 꿈결 같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고통도 고통이 아닙니다. 불편함도 불편함이 아닙니다. 그저 모든 것이 다 좋고, 모든 상황을 다 너그럽게 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나를 금쪽처럼 여기시는 하느님, 나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께서 나와 늘 함께 현존하신다는 의식, 하느님께서 내 인생길에 늘 동행한다는 의식입니다.
지금이 지나면 또 다른 시간이 온다는 것,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특히 이 순간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순간이 다가 아니고,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것 얼마나 큰 위로요 다행인지 모릅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 한 가지는 내 고통, 내 십자가에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 그래서 기쁘게 견뎌나가는 일, 결국 죽는 일, 내려놓는 일, 크게 물러서는 일, 그리고 나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걸어가는 이웃들에게 사랑과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일입니다.
아끼는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끼는 사람을 위해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오늘 라우렌시오 축일을 맞아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두 살 때 돌아가셔서 제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것은 저의 아버지가 통이 크셨다는 것입니다.
외할머니나 저의 어머니가 자주 해주신 얘기는 제 아버지가 열심히 돈 벌어 보통 때는 허투루 쓰지 않고 아껴 썼지만 쓸 때는 통 크게 썼다는 그런 얘깁니다.
그런 얘기를 많이 듣고 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런 피를 유전자로 받아서인지 저도 아끼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종이를 아끼지 않고 함부로 쓰는 것을 보면 그까짓 종이 한 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까워죽겠습니다.
샤워를 할 때 물을 너무 세게 틀고 샤워를 하거나 물을 틀어놓고 이빨을 닦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보고 구두쇠라고 한다면 싫어합니다.
저는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꼭 쓸 곳에 잘 쓰기 위해서 아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쓰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끼는 사람을 위해 쓰기 위해 쓰는 것을 아끼는 사람이라는 얘깁니다.
오늘 우리는 라우렌시오 축일을 지내며 코린토 2서의 말씀을 듣는데,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고 합니다.
라우렌시오는 로마 교회의 수석 부제로서 보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복음 말씀대로 살았고, 이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라우렌시오는 교회의 보물을 아낌없이 가난한 이에게 나눠주곤 했는데, 일설에는 그 보물을 황제가 빼앗으려 가져오라고 하자 그는 보물 대신 가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약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는 진짜 가난한 사람들을 최고의 보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우렌시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진짜 보물로 생각했기에 교회의 보물을 아낌없이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최고의 보물, 밭에 묻힌 보물인 하느님 나라를 산 사람이라고.
멀리 퍼져 가는 희생 정신
-박진형 신부님-
‘가시고기’는 자식의 번식을 위해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어 놓는 물고기입니다.
산란을 하면 암컷은 미련 없이 떠나지만 수컷은 알을 지켜내며 갓 부화한 새끼들과 둥지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부화한 새끼들은 얼마 후 둥지를 떠나고 남은 수컷은 새끼를 보호하는 데에만 전념하다 결국 둥지 앞에서 죽고 맙니다. 그 후에 새끼들은 다시 둥지로 돌아와 죽은 수컷을 먹이로 삼는데 이처럼 수컷은 죽어서도 극진한 자식 사랑을 보여 줍니다.
남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일은 대단한 결심이 없고서야 결정하기가 힘듭니다.
제 몸을 희생할 정도로 나 자신을 포기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희생으로 더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빛나는 것은 없습니다. 밀알 하나의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희생은 값진 보석처럼 아름답습니다. 물론 희생 즉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만약 이 요건들이 충족된다면 그 선행은 빛을 더 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적극적인 선행 하나가 공동체에게 기쁨과 행복이라는 선익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이 점점 퍼져 나갈 때 선행이 또 다른 선행을 낳을 것입니다.
유시찬 신부님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묵상에 적합한 전형적인 성경구절입니다. 구절 하나하나의 의미를 깊이 천착(穿鑿)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알아들어야 할 것이며, 자기 목숨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라는 말씀의 뜻 그리고 당신을 섬기기 위해 당신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깊게 알아들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당신을 섬기기 위해 따르는 이들이 가져야 할 내적 태도 또는 행동양식에 대해 간결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비록 몇 줄 되지 않는 성경구절이긴 하지만 내포된 의미를 제대로 깊이 알아듣기 위해선 적잖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묵상을 할 때 우선은 성경구절을 바탕으로 나름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기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덧붙여 성령의 활동이 감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의 지성이나 이성의 한계를 넘어 더 깊게 알아듣는 것이 있어야 하며, 그 알아들음으로 영적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비로소 깊이 있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펼쳐나감은, 성령께 자기를 내어드리며 성령의 활동이 분출되어 올라오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마중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저 성령께서 다 가르쳐주시겠거니 하면서 성령을 바라보며 입만 벌리고 있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만 열심히 전개해 나가는 것도 안 될 일입니다. 기도도 모름지기 우리 자신과 성령의 합작품이 되어야 합니다.
밀알 하나가 썩지 않으면 …
- 최재도 신부님-
수원 가톨릭대학교 ‘학사동’ 앞에 보면 자그마한 기념비가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그곳에는 “그리스도의 향기” (2코린 2, 15) 라는 말씀이 있고 그 아래 ‘故 배문한 신부님을 추모하며’ 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 그곳에 있었기에 자연과 하나 되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알아볼 수 없습니다.
배문한 신부님은 수원 가톨릭대학교 초대 총장 신부님입니다. 1994년 여름 휴가차 동해안에 갔다가 물에 빠진 세 사람을 구하고 본인은 탈진해 돌아가신 분입니다. 신부님의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고자 학교에 기념비를 세워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는 신부님께서 평소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한 말씀이라고 합니다. 저는 신부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말씀을 접하게 되었을 때 말씀이 참으로 새롭고 힘있게 전해졌습니다. 실제로 그 말씀을 사신 분이기에 저에겐 신부님의 가르침이 더욱 힘있게 다가왔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고 하십니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몸으로 움직이기는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밀알처럼 죽으려면 내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밀알처럼 죽으려면 내가 발가벗겨진 것처럼 하느님 앞에, 사람 앞에 나서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기꺼이 죽었을 때 내 말은 힘있게 살아서 모든 이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배문한 신부님처럼 말이지요.
한 노총각이 편의점에서 칫솔과 초코파이, 그리고 휴지를 계산대에 올려놨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애인이 없구먼.”
노총각은 깜짝 놀랐지요. 마침 이발도 하고, 옷도 깔끔하게 차려입었기 때문에 전혀 노총각 티가 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신에게 “애인이 없다”고 곧바로 이야기하는 아주머니가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자신이 올려놓은 물건들을 다시 봤습니다. 칫솔, 초코파이, 휴지 때문에 애인 없는 것을 알았나 싶어서 따지듯 물었지요.
“도대체 뭘 보고 제가 애인이 없다고 판단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니 얼굴, 못생겼잖아.”
아주머니의 지례짐작이 애인 없음을 맞추기도 했지만, 사실 외적인 모습만으로 맞춘다는 것을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외적인 모습만을 강조하고, 그 외적인 모습이 가장 중요한 것인 양 착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잘되는 병원이 성형외과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개인이기주의라는 것은 잠깐 동안의 만족을 줄 뿐 영원한 행복을 우리들에게 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복음서를 통해서 자주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오늘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읽게 되는 복음 말씀에는 더 강한 어조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말 그대로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복음적인 표현으로 자기 목숨을 부차적인 것으로,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영원한 생명을 일차적으로 생각하고 현세적 삶을 그 수단이나 방법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죽음으로 인해 얻게 될 결실을 밀알에 비유하십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의 죽음도 세상에 참 생명을 가져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역시 이 죽음에 동참했으며, 오늘 축일을 지내는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역시 동참하여 이 세상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었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자신의 인생과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에게는 어김없이 보상을 해주고 영광을 안겨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웃음소리는 울음소리보다 멀리 간다(히브리 격언).
주님 안에서의 새로운 길
-김희준 신부님-
저는 개인적으로 등산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도회 입회하고 얼마 되지 않아 ‘등산광’인 선배 수사님을 따라 산 정상까지 오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수사님은 산 정상의 깍아내린 듯한 절벽 끝에 두 발로 버티고 서서는 연신 ‘아, 좋다!’ 감탄사를 발하셨습니다. ‘위험하지 않나? 저러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저는 두려운 생각에 땅바닥에 붙어 앉아서는 겁없이 벼랑 끝에 서 계신 수사님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사님께 여쭤 봤습니다. “수사님, 무섭지 않으세요? 떨어지면 어쩌시려고….”
그러자 수사님은 저를 보시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허허, 밑을 보지 말고 하늘을 봐야지.”
오늘 우리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의 축일을 기념합니다.
라우렌시오 성인뿐 아니라 다른 모든 순교성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하나같이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죽음 앞에서 그렇게 담대할 수 있을까?’라는 부러움 섞인 감탄을 하게 됩니다. 어디에서 그러한 용기가 나오는 걸까요? 순교는 용기에 달린 문제일까요? 저는 시선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순교성인들의 삶을 가만 들여다보면, 그들의 시선은 늘 하늘을 향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하건 죽자 사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제가 하는 일은 안 되는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하는 일이 크게 잘 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 이유를 저는 하는 일이 너무 여러 가지여서 힘이 분산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복음에 비추어 보면 제가 죽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 인생의 어느 순간부터, 지금으로부터 대략 20년 전부터 저는 어떤 일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오랫동안 앓아온 두통의 원인을 알고 나섭니다.
그때까지는 무엇을 하면 완벽주의자처럼 하나도 허술한 것이 없어야 했고 특히 결과에 집착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착의 결과가 신경성 두통과 탈모증의 원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인과관계에 대해서 깨닫고 난 다음부터 열심히는 하되 집착하지 않으며 힘을 쏟되 그것이 전부인 양 죽자 사자 하지는 않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내가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고, 오늘의 고린토 2서는 많이 뿌려야 많이 거둔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집착 때문에는 죽자 사자 해서는 아니 되지만 사랑 때문에는 무엇을 하건 죽자 사자 해야 합니다.
결과는 하느님의 뜻에 맡기되 나는 할 수 있는 한 나의 전부를 바쳐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만족과 성취를 위해 무엇을 하지 않지만 사랑하기에 나의 전부를 바쳐서 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밀알이 되어 나의 전부를 바칠까?
오늘은 이것을 묵상하는 하루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밀알 하나
-전삼용 요셉 신부님-
라우렌시오는 부제였지만 지금과는 조금 달라서 당시엔 바로 교황에 오를 수 있는 교황 수위권이 있는 부제였습니다. 그는 교황 시스토 2세 밑에서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로마 황제 발레리오는 지하무덤인 지금의 칼리스토 가타콤베에서 몰래 신도들과 미사를 지내고 있었던 교황 시스토 2세를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라우렌시오를 붙잡아 교회 재산을 반납하면 목숨을 살려주겠고 부자로 살게 해주겠다고 회유합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 재산을 정리하고 가져오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며 며칠만 기다려달라고 청합니다. 황제의 허락을 받은 라우렌시오 부제는 자신이 관리하던 모든 교회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리고는 약속된 날 황제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데려가,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교회의 재산은 물질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혼들이기에 라우렌시오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속은 것에 대해 화가 난 황제는 라우렌시오를 자신이 보는 앞에서 석쇠에 구워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생선 구울 때 쓰는 것처럼 철망과 같은 석쇠 위에 올려놓고 밑에서 불을 때기 시작합니다. 산 채로 올려놓았기 때문에 매우 뜨거워야 하는데 라우렌시오는 오히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불을 더욱 뜨겁게 올리라고 합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라우렌시오는 크게 외칩니다.
“이제 뒤는 충분히 구워졌으니 뒤집어 주시오.”
박해 때의 성인들의 믿음은 매우 영웅적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자살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은 자신을 위해 죽는 것이고 순교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자살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지만, 순교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증가시켜 더 많은 신앙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자살 하는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자살 하는 사람들의 많은 경우는 자신의 명예나 자아가 실추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그것을 만회하거나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이고, 반대로 순교하는 분들은 자신을 미워하기까지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언 듯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순교와 자살은 완전히 정반대되는 죽음입니다. 내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자살에 가까이 가는 것이고 내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산다면 순교의 삶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 가치로 따질 때는 순교만이 좋은 열매를 맺는 죽음입니다.
일본 지하철에서 술에 취해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이수현씨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생명을 먼저 생각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일본 사람도 아닌 한국 유학생이 선로로 뛰어들었습니다. 기차가 오는 것을 알고도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피하지 않고 사람을 구하려다가 자신의 생명까지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일본에선 전철 선로위에 떨어진 사람을 구한 사람 수가 8명, 10명씩 늘어났습니다. 너도 나도 뛰어드는 것입니다. 이수현씨가 많은 사람들 안에 깨어나고 있지 못하고 묻혀있던 사랑의 씨앗을 깨어나게 한 것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었으니 그의 죽음은 순교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미워했기에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그런 건 자살행위라고 하면서 자신의 자녀들에겐 그런 상황이 있으면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라면 옛 우리 순교자들처럼 자녀들까지 신앙을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말도록 교육해야 할 것입니다. 영웅적으로 죽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적으로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께 한 형제님이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신부님, 정말 감사할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오늘 아침 성당에 오다가, 성당 앞 사거리에서 어떤 차와 크게 부딪쳤습니다. 그러면서 제 차가 완전히 박살이 났지요. 저는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어나 보니 아무 데도 상한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저를 특별히 사랑하시는가 봅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이 말에 조용히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더 감사를 해야 하겠군요. 저는 그 사거리를 그렇게 많이 왔다 갔다 했는데도 아무런 사고 없이 오늘까지 무사하니까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역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됩니다. 저 역시 매 순간 주님께 감사를 제대로 표시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대신 어떤 곤란한 일이 생기고 그 일에 대해 주님께 기도를 한 다음 극적으로 해결이 되어야만 그때서야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선 신부님의 말씀처럼 어쩌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더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불행한 사건이 터지고 나면 평범하고 지루하게 느꼈던 날들이 오히려 행복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결국 주님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좋은 일이 생겼을 때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시간이 더 감사해야 할 시간이며, 행복한 시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주님을 섬기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배반하거나 멀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이렇게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행동은 언제 해야 할까요? 내가 어렵고 힘들 때, 내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감사의 표시로 하는 행동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것은 특별한 날에만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삶 안에서도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존중해 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일상의 삶 안에서도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르는 그래서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신 이 세상 안에서 행복을 체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알아듣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다.(박완서)
주님 안에서의 새로운 길
-최영균 신부님-
우리가 예수님께서 제공하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고 싶다면, 세속에 물든 나 자신을 씻어버리고 싶다면, 낡은 자신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은 신앙인으로 살면서 우리가 늘 갖는 질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씨앗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을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자연의 법칙 안에서 씨앗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씨앗은 자라고, 열매를 맺기 전에 반드시 대지에 자신을 묻어야 합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우리는 세례 성사를 통해서 죄로 인한 낡은 것으로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위대한 십자가의 신비, 십자가의 역설이 드러납니다.
죽음은 새로운 삶을 인도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게 하는 것,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죽음입니다.
녹색 순교
- 이동훈 신부님-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이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이라고 했듯이 우리 교회는 순교자들로 인해 발전하고 성장했다. 생명을 바친 순교는 가장 확실한 믿음의 증거였고, 그러한 증거를 바탕으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순교라고 하면 목숨을 바치는 붉은 순교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면서 교회는 순교의 의미를 확대 적용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이 애호하는 바를 기꺼이 포기하고 복음 삼덕에 충실한 것을 백색 순교라고 했다. 이후 아일랜드 수도자들은 고통을 극복하고 속죄하는 행위,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어떤 행위를 녹색 순교라 불렀다.
붉은 순교는 죽음을 상징하는 색깔을 사용했고, 백색 순교는 순결 혹은 포기를 상징하는 색깔을 사용했다. 그러나 녹색 순교는 색의 상징보다는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을 상징하며 선호하는 색깔이어서 그렇게 부른 듯하다.
유엔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패널(IPCC)은 지구 온난화로 인류가 향후 7년 안에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창조 세계는 생태계 파괴로 황폐해지고 인류를 비롯한 많은 생물종은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환경을 보전하려는 이들의 투신은 신앙에서 직접 뻗쳐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셨듯이 창조 세계를 지키고 보전하는 것은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다. 자연 자원을 남용하고, 함부로 파괴한 인간의 행위를 속죄하고, 생태적 삶을 살기 위해 따라오는 불편함과 고통을 참으며,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창조물을 잘 돌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지구를 푸르게 만드는 녹색 순교가 될 것이다.
독기가 아닌 사랑으로
-김찬선 레오날드도 신부님-
나이를 먹어가면서 오는 한 현상에 대해서 저는 판단이 안 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에 대한 저의 태도입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생명을 죽이고 잡아먹는 것을 못 보겠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고기를 안 먹는 채식주의자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음식점에 가면 산 낙지는 먹으면서 살아있는 낙지를 제가 보는 앞에서 펄펄 끓는 물에 집어넣으면 제가 뜨거운 물에 삶기는 것 같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먹을 때는 절대 시키지 않고 같이 먹을 때라도 쳐다보지 않지만 다 요리가 되면 또 잘 먹습니다.
그러니 제가 생명을 참으로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한낱 겁쟁이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옛날에는 공동체가 원하면 먹기 위해 동물을 제가 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순종으로 명하면 어쩔 수 없이 하겠지만 도저히 죽일 수 없습니다.
전보다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제가 겁쟁이가 된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저의 죽음에 대해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습니다.
실제 죽게 되면 어떨지 모르지만 갈수록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끔직한 죽음, 폭력적인 죽음은 갈수록 두렵습니다.
이런 저에게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는 경이입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의 생애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의 약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신자들이 교회에 바친 공동재산을 관리하던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부제였고, 258년 식스투스 교황이 사형을 받게 되어 슬퍼할 때 교황이 그 역시 3일 안으로 자신을 따라 오리라고 예언하자, 라우렌시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교회 재산을 나라에 바치라는 로마 집정관의 말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소유물들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에 분개한 집정관은 그를 체포하여 온갖 고문으로 괴롭히다가 석쇠 위에 눕히고는 구워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죽음과 표양이 로마의 회개와 로마에서 이교 종말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막상 그리 죽게 되면 그걸 견디고 이겨낼 힘을 주님이 주시겠지만 제가 감탄하는 것은 그 전에 그런 죽음을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어떻게,어떻게 석쇠 위에서 구워져 죽는 것을 보통의 그리고 정상적인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 이 또한 주님께서 함께 하신 표시입니다.
유다의 세 청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가마에 던져졌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아무런 화상도 입지 않은 것처럼 라우렌시오가 비록 육신적으로는 타 죽었지만 정신적 외상을 입지 않은 것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표시입니다.
사람은 극한 상황이 되면 자기가 살기 위해 독기가 발동하여 무슨 짓이든 저지르고 심지어 태연히 살인을 하기까지 하고, 상대에게 할 수 없으면 자신의 손을 칼로 찌른다던지 유리를 입으로 깨물어 먹는다던지 극단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살기 위해 이런 독기를 발휘하는 정도까지는 인간적 힘만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그것도 끔직한 죽음을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음은 하느님과의 사랑 관계에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살기 위한 독기는 자기는 살아도 열매가 없지만 자기가 죽는 신적 사랑은 자기가 죽지만 오늘 복음 말씀처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자기가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이 사랑은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로는 이해는 가지만 그리 살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순교와 자살의 차이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번은 어떤 신자로부터 순교와 자살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었습니다. 그 때는 순교는 믿음을 위해 자신을 이기며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고, 반면 자살은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또 자신을 위해 선택하는 죽음이라고 얼버무렸습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또 가만히 살펴보면 순교와 자살은 쉽게 구별이 되지 않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박해가 있을 때 제자들보고 그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달아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잡히실 때 나머지 사도들도 다 붙들려 순교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행히 사도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사도를 기둥으로 하는 교회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 박해가 가해지자 사도들은 그 곳을 떠나 세계 각지로 흩어졌고 그것이 온 세상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에서도 박해가 일어나자 베드로는 그 박해를 피해서 로마를 떠납니다. 떠나다가 십자가를 지시고 로마로 향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로 가신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지금이 순교할 때임을 깨닫고 다시 로마로 들어가 순교하십니다.
그러나 말이 순교이지 죽을 것을 뻔히 알고 다시 돌아가 죽는 것은 일종의 자살입니다.
오늘 또 한 분의 순교자도 어쩌면 자살처럼 보이는 길을 택합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황 시스토 2세 밑에서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였습니다. 라우렌시오는 부제였지만 지금과는 조금 달라서 당시엔 바로 교황에 오를 수 있는 교황 수위권이 있는 부제였습니다. 로마 황제 발레리오는 지하무덤인 지금의 칼리스토 가타콤베에서 몰래 신도들과 미사를 지내고 있었던 시스토 2세를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라우렌시오를 붙잡아 교회 재산을 반납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회유합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 재산을 정리하고 가져오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며 며칠만 달라고 청합니다. 황제의 허락을 받은 라우렌시오 부제는 자신이 관리하던 모든 교회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리고는 약속된 날 황제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데려가,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교회의 재산은 물질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혼들이기에 라우렌시오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화가 난 황제는 라우렌시오를 자신이 보는 앞에서 석쇠에 구워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생선 구울 때 쓰는 것처럼 철망과 같은 석쇠 위에 올려놓고 밑에서 불을 때기 시작합니다. 산 채로 올려놓았기 때문에 매우 뜨거워야 하는데 라우렌시오는 오히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불을 더욱 뜨겁게 올리라고 합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라우렌시오는 크게 외칩니다.
“이제 뒤는 충분히 구워졌으니 뒤집어 주시오.”
라우렌시오도 자신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했으니 자살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과연 자살과 순교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순교와 자살의 차이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살은 죽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순교는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가톨릭 신앙인들은 순교자들의 믿음 속에서 자라난 열매들입니다. 그러나 자살한 사람들에게서 어떠한 사람들이 그들을 모범으로 삼고 새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자살 하는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자살 하는 사람들의 많은 경우는 자신의 명예나 자아가 실추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그것을 만회하거나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이고, 반대로 순교하는 분들은 자신을 미워하기까지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언듯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순교와 자살은 완전히 반대되는 죽음입니다. 내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자살에 가까이 가는 것이고 내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산다면 순교의 삶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 가치로 따질 때도 순교만이 열매를 맺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을 죽이신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를 것을 결심해야겠습니다.
당신에게 나를 심고 싶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나로 남아 있으면 나는 나일 뿐입니다.
당신에게 나를 강요하면 당신은 내게서 더 멀어져 역시 나는 나이고 당신은 당신일 뿐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나누어지면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내가 됩니다.
하나인 내가 여럿인 당신들 안에서 수많은 내가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당신 사이가 메워져 모두가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나누어지는만큼 나는 더욱 커집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변화에 나를 맡기기가 솔직히 두렵습니다.
나를 나누는 것은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이 되고 당신이 내가 되는 기쁨을 누리고 싶지만 그 때를 기다리며 나를 나누고 나눌 만큼 멀리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나만 나누어야 하는가 라는 어리석은 물음이 때없이 밀려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내가 되심으로써 나를 당신으로 만드셨음을 믿기에, 하느님께서 내게 먹히심으로써 나를 살리셨음을 믿기에, 당신 안에 나를 나누는 아픔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당신에게 기쁨과 희망을 심는 사랑을 살고 싶습니다.
당신과 내가 하나되는 아름다운 순간에 도달하지 못해도 그날을 바라보며 기꺼이 나를 나누는 희망을 살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요즘 저는 사제관에 일찍 들어온 적이 거의 없습니다. 일찍 들어와야 밤 10시. 어제 같은 경우도 거의 12시가 되어서야 간신히 들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저의 습관을 잘 아시는 사람들이 아주 의아해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사실 요즘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송별식 자리 때문에 이렇게 늦게야 집에 들어올 수 있답니다.
제가 어디를 떠나느냐고요? 물론 아니지요. 제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한 달 동안 사목실습을 나온 부제님이 오늘 떠나기 때문에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본당의 몇몇 단체들과 청년들이 이렇게 늦게까지 송별식을 해주었답니다.
저도 그 자리에 함께 하다 보니, 요즘 힘든 새벽을 맞을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이제 부제님이 오늘을 기해서 집으로 돌아가니 이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어제 밤늦게 집에 들어와서 부제님의 한 달간의 활약상(?)에 대해서 떠올려 보았습니다. 짧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참으로 열심히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 달 동안 빠짐없이 강론을 쓰고, 신자들 앞에서 좋은 내용의 강론을 했지요. 그리고 모든 단체의 모임에 들어가 훈화를 했습니다. 또한 봉성체, 유아세례, 병자방문, 예비자 교리 등등…….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여름신앙학교에 모두 참석해주었고, 또 많은 조언을 통해서 여름신앙학교가 잘 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제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청년들과의 만남입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저의 습관 때문에 청년들과의 만남을 늘 길게 할 수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부제님께서는 청년들과 늦게까지 함께함으로써 본당에서 청년들이 활성화하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참으로 짧은 한 달이라는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바쁜 시간을 살았던 부제님이지요. 그런데 부제님께서는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을까요? 어쩔 수 없는 한 달간의 사목실습이고, 실습 후 본당신부가 자신의 성소를 결정할 수 있는 생활증명서를 쓰기 때문에? 아니면 본인 스스로 이러한 생활을 즐기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는 모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더 근본적으로는 이 교회를 만드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바쁜 한 달을 정신없이 보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마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처럼, 부제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고 그래서 간석4동 성당에서 한 달 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제님의 한 달간의 바쁜 생활을 떠올려 보면서, 우리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의 이치처럼, 우리 역시 교회 안에서 주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희생과 봉사의 삶을 통해 스스로의 욕심과 이기심을 죽여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삶 안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해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오늘을 만들어 봐요.
내 목숨은
-임문철 신부님-
“제주도는 언제가 제일 좋습니까, 어디가 좋습니까?” 하는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그러면 저는 항상 “제주도는 언제라도 좋고, 어디라도 좋습니다” 하고 대답하곤 합니다. 그냥 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이 섬 구석 구석을 다니면서 늘 떠올리는 생각입니다. 특히 한라산을 지날 때면 하얀 눈을 이고 있는 순결한 겨울이 좋고, 숨이 터질 듯한 짙푸른 숲의 여름이 좋고, 여린 싹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상큼한 봄이 좋고, 타오르는 단풍과 억새가 어우러진 가을이 좋습니다. 그러나 늦가을 찬 비에 마지막 잎새마저 다 져버려 헐벗은 가지들만 삭풍에 시달리는 모습은 처연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아름다움은 아닙니다. 그러나 연록의 새싹들이 내는 생명의 합창으로 가득한 봄 길을 걸을 때면 그 겨울의 처연함이 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구나 싶어 마음을 여미게 됩니다. 자연도 이렇게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보여주고 있는데, 나만 안 죽으려고, 안 묻히려고, 안 썩으려고 기를 쓰고 있구나 싶어서 절로 묵상이 됩니다.
변화 속의 신비
-이인주 신부님-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 존재자를 거슬러 죄를 짓는 것이라면 더 이상 변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공동선을 향한 것이나 존재자를 향한 변화는 필요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다. 생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성을 들인만큼 열매를 맺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도시에 산다 해도 조금만 노력한다면 생명의 신비가 무엇인가를 곧 파악하게 될 것이다.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잘 모릅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아파트에서도 생명의 신비를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다. 우선 꽃이나 작은 나무 아니면 고추나 상추 등을 베란다에 심어 생명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참으로 소중하다. 좀 귀찮고 힘들어도 꼭 그렇게 해보길 바란다. 그러면 집안 분위기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가족은 그 생명과 매일 대화를 해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그 생명과 나누는 대화 안에서 신비가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일상의 작은 변화에서도 생명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면 오늘 기념하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처럼 큰 변화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박해자들이 교회의 재산을 양도하라고 명령하자 라우렌시오 부제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로마 집정관 앞에 세우며 ‘이들이 바로 우리 교회의 보화’라고 했다. 하느님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되길 간절히 바란 라우렌시오 부제는 석쇠 위에서 장렬하게 순교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갔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여! 변화가 가져다주는 은총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오늘의 순교자를 통해 배우도록 하자.
심야 비상사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이들이 많아지다 보니 뒤치닥거리 할 일도 많아집니다. 오늘만 해도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 갑자기 열이 오른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담당 수사님은 왕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지체 없이 아이를 엎고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같은 시각 다른 수사님 한 분은 며칠 전 출가(?)한 아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습니다.
수사님 두 분 다 심야에 출동한 관계로 아이들 침실을 둘러보러 기숙사로 갔었습니다. 아이들은 수사님들의 고초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모르게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코고는 소리, 잠꼬대하는 소리에 녀석들이 얄밉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행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짜식들, 수사님들은 즈그들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있는데...잘도 자는구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나마 녀석들 사고 안치고 이곳에서나마 편안히 머리 눕히니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다 흐뭇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수사님들의 지속적인 희생, 일상적인 죽음을 통해 아이들이 활짝 꽃피어나고 얼굴에 생기가 도는 모습을 보며 예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음을 실감합니다.
오늘따라 열정으로 뭉쳐진 우리 형제들이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아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매일 체험하는 좌절감과 배신감이 상당할 텐데 뜨거운 열정으로 늘 새 출발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눈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어느 한 순간도 아이들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한 알 썩는 밀알의 향기를 맡습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을 아이들과 연결시킵니다. 이런 수사님들과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행복함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남남으로 만났지만 친 부자지간 이상의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이 집에서 저는 매일 하느님 나라의 한 귀퉁이를 엿봅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려는 아이들, 희망으로 똘똘 뭉쳐진 아이들이 자신을 밟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이기를 자처하는 우리 형제들의 삶에서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확인합니다.
-김영철 신부님-
사람은 누구나 그 무엇을 위하여 삽니다. 그 무엇을 위하여 노력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투자합니다. 그 무엇의 가치가 크면 클수록 많이 또 오래 노력하고 투자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전 생애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 무엇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한 분을 만납니다. 258년 로마시대에 순교하신 성 라우렌시오 부제입니다. 그분의 평소 삶이 어떠했는지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관한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라우렌시오는 빈한한 가정의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량한 모습이 교황에게 인정을 받아 학업을 마친 후에 로마의 일곱부제 중 수석 부제로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임무는 교회의 재산관리, 가난한 이들의 구호품 분배를 비롯하여 교회 내의 잡무를 모조리 보살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속적인 박해자들의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기는 직책인 거지요.
잡혀온 라우렌시오에게 로마 총독이 “나는 당신네 사제들이 성혈을 은잔에 담으며 당신들의 저녁 예식에 금촛대를 사용할 정도로 금을 펑펑 쓰고 있다고 들었소” 라고 말하며 관리하고 있던 돈을 내놓기를 명령했습니다. 이에 라우렌시오는 “교회는 참으로 부유합니다” 하고 대답한 후 “당신에게 가치있는 것을 보여 주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모든 것을 순서있게 정돈할 시간과 물품 명세서를 만들 시간을 주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라우렌시오는 이미 교황과 함께 체포되리란 것을 알고, 로마의 가난한 이들, 과부, 고아들을 찾아서 있는 돈을 모두 주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성합조차도 팔아서 주어버렸습니다. 3일 후 라우렌시오는 수많은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와 과부를 모아서 한 줄로 세워놓았습니다. 총독이 도착했을 때, 라우렌시오는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재산을 정리할 3일의 기간, 금은 보화와 재물을 잔뜩 기대했을 총독의 표정은 보지않아도 눈앞에 그대로 그려집니다.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와 과부들이 분명 라우렌시오에게는 교회의 보물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가 이렇게 다릅니다.
사기를 당하고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총독의 노기가 라우렌시오를 가만 두지 않았겠지요. 총독은 불타고 있는 장작 더미위에 석쇠를 얹고, 그 위에 라우렌시오를 올려놓으라고 합니다. 그 불타고 있는 석쇠에 눕혀진 라우렌시오는, “자! 한 쪽은 다 익었으니 좀 뒤집어 주시오” 라 하였고, 잠시 후 “이제 다 익은 것 같으니 뜯어 잡수시오” 하고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얼핏 들으면, 뜨거운 여름 날, 선들 바람이 부는 정자 나무 그늘아래서 돗자리 펴놓고 그 위에 빈 듯이 드러누워 한가롭게 주고 받는 농담 같습니다.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 과부를 그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로 생각한 라우렌시오. 석쇠 위에 구워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고통을, 마치 해가 뜨고 지는 일상사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라우렌시오. 과연 그것을 무엇으로 설명하겠습니까. 하느님의 대한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사랑할 때 목숨을 바칩니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기쁘게 바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감명을 느꼈던, “타이타닉”이란 영화에서, 배가 가라앉고, 배 안에 물이 차오지만,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서로를 살리려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많은 분들이 그런 사랑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가 여자를 살리고 자기는 차가운 물 속에서 얼어죽었지요. 비교가 조금 그렇습니다만, 바로 그런 애틋하고 열렬한 사랑이 하느님과도 가능하다고 알려 주시는 분이 바로 라우렌시오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기쁜 것입니다. 아니 내어줄수록 기쁜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내어주는 만큼 기쁨니까?
-김경식 몬시뇰 -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시겠다는 뜻을 내비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한 10,18)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모든 능력을 다 접으시고 십자가의 산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수많은 사람이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 라우렌시오도 그 중의 한 분입니다. 그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는 봉사자였는데, 박해자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258년 화형(석쇠 위에 산 채로 태워 죽이는 형벌)으로 목숨을 바쳤습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다음으로 로마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라우렌시오의 죽음으로 과연 교회에 많은 열매가 맺었습니다.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재산, 지위, 명예, 가족, 가문, 생명을 버리는 것을 본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좋은 것 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증거하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순교자들은 피로써 사람들에게 절대 주권자이신 하느님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떼르뚤리아누스가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이라”고 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원동력은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도 인류를 위한 희생양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땅에 떨어지는 밀알이 되도록 열정을 더 길러야 하겠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그분의 일화 중에 석쇠 위에 누워서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이제 한 쪽이 알맞게 익었으니 뒤집어 놓게!" 하셨다고 한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로마에서 이교 신앙이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고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서는 죽는 것으로 표현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없이하는 것은 새로운 모습의 나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될 것이다"(25절)라고 하시는 것이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대 사회적으로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는,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렵고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거슬러 살고 또 거기에 죽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첫 발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과감히 내딛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인이든 다른 사회에서나 내가 여기에 멈추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뒤쳐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공동체의 일치의 대열에서 스스로를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26절)라고 하신다. 나를 죽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영광을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나 자신의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뜻을 버리는 것, 즉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순교 정신이며, 순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라우렌시오 성인을 본받아 우리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최종수 신부님-
벽에 껌을 붙여두었다가 다시 씹고, 다시 붙여두었다가 씹곤 했던 어린 시절. 그땐 껌 하나면 일주일은 넉넉히 씹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또 껌이 귀했던 시절이라 밀을 손으로 비벼서 입에 넣고 오래오래 씹어 껌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몇 분 씹지 못하고 입에서 녹아 사라져 버렸지만요.
사랑은 희생 없이 자라지 않습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다른 사람의 가슴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또한 생명은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는 것처럼 썩지 않고 피는 싹은 없습니다.
꽃이 진 그 자리에서 탐스런 열매가 열리듯이 씨앗 하나 썩은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그 생명에서 수없이 많은 열매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간다는 건 사랑의 씨앗으로 왔다가 어느 자리에선가 썩어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고 가는 것이 아닐까요? 밀 하나가 땅에 떨어져 그 자리에서 썩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요.
그 씨앗은 썩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썩어서 푸르게 자라는 것도 있고, 열매를 맺어 추수를 기다리는 것들도 있고, 방아에 찧어져 허기진 배를 부르게 하는 것들도 있겠지요.
더러는 썩지 않는 것들도 있겠지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박혜원-
◆밤중에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에 봉고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왜? 그 교회 차는 어떡하고요?”,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시동이 잘 안 걸려요.” 덕유산 자락의 작은 교회 전도사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직 이른 새벽녘 다시 전화가 왔다. “차는 안 빌려도 될 것 같습니다.”, “아니, 어떡하려고요?”, “좀전에 시동이 걸렸거든요.”, “좀 있다 또 시동이 안 걸리면요?”, “지금부터 아침까지 계속 시동을 걸어놓을 겁니다.”
신자라고는 산 넘어 마을에 사시는 할머니 두 분뿐이다. 젊은 전도사는 일요일 아침이면 두 분을 모시러 가곤 한다. 할머니 두 분을 모시기 위해 새벽부터 차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리는 그는 대학원까지 나왔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우리 교회에서는 인근 시골의 작은 교회를 돕고 있다. 마음은 많이 돕고 싶지만 실제로 돕는 교회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작년부터 일 년에 한 번, 그곳 목회자들을 초대해 식사를 나누고 이야기도 듣는 시간을 갖는다. 어떤 목회자는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너무나도 고독하다고 말했다. 또 어떤 전도사는 어제 드디어 두 명의 중학생 신자가 생겨서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그들의 고독과 아픔 때문에 무지했던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그 앎이 퍼져 나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다들 대도시를 향해, 더 큰 교회를 향해 치닫고 있는 세태에 이러한 작은 밀알들 덕분에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것이리라.
-임범종 신부님-
환골탈태(換骨奪胎), 지금까지의 모양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뼈를 바꾸고 모양새를 바꾸자면 얼마나 큰 고통이 뒤따르겠습니까?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아주 유명한 어른을 위한 동화가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면서 다른 애벌레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노란 애벌레가 있습니다.
친구인 줄무늬 애벌레와 떨어져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꼬치를 짓고 있던 늙은 애벌레를 만나면서 삶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나요?”라고 묻는 노란 애벌레의 물음에 늙은 애벌레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절실히 날기를 원할 때 가능하단다.”
“너의 겉모습은 죽어 없어질 것이지만, 너의 참 모습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란다.
삶의 변화가 있을 뿐이지 목숨을 앗긴 것이 아니다.”
꼬치를 짓는 애벌레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죽음과도 같은 꼬치를 짓는다는 것은 곧 이 세상과 하직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감히 자신을 던져 꼬치를 지음으로써 흉한 애벌레의 모습을 벗어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자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죽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모습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맺고 있던 집착, 욕심 등을 끊어버림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커다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애벌레가 맛난 잎사귀에만 연연하며 꼬치 짓는 것을 주저할 때,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없듯이 내가 세상에서 죽지 못할 때 보다 높은 차원의 내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죽고자 할 때 예수님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거쳐야만 찾아오는 것입니다.
-박호준 신부님-
밀알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는 것... 어떤 열매일까?
태어나면서부터 받을 수밖에 없었던 상처....사회의 잘못된 가르침 쇠뇌되어 살아가고 있다. (뼈와 살 속에... 사뭇쳐 우리들 모두는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
그로 안한 몰이해와 마음의 상처는 서로 마음의 상처는 가만히 있지 않고 세상에 퍼져 나간다.
몇해전 지하철 참사를 생각해본다. 그 가족들을 통해 그리고 영적인 영역에서 분명 우리의 마음에 큰 영향... 어두움이 되었던가?
상처와 콤플렉스 역시 이성의 작용을 흐리게하여 판단하고 공격하게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
퍼져만 가는 세상의 어두움... 누군가 끊지 않으면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 우리의 후손에게 가슴 깊이 전해질 것이다. 세상의 빛이 되는 것, 썩어가는 한알의 밀알이 되는 것은 이런 어두우을 감내하고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 상처와 콤플렉스와 짜증은 그래서 우리는 섣불리 세상의 소금, 빛이 되려 하지만... 많은 열매를 맺겠다고 예수님을 따라서 죽어 보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내 친구의 직장동료의 무시와 비난... 배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내가 재일 싫어하는 부조리한 직장 상사라면... 발소리만 들어도 짜증나는 사람....내 뒤에서 나를 밟고 설려고 중상몰약을 일삼는 그 비겁한 동료라면... (그들과 우리 모두는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살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배워왔다.) 그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따르는 길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않는가?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삶이 세상에 빛이 되는 삶이고 그들 속에서 치유를 위해 어둠의 확산을 막는 것이라는 사실이라면, 우리의 결심과 고백은 의미를 모르는 소리가 아니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비난과 중상과 몰약을 감내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밀알하나가 땅에 떨어저 죽으면... 의 의미였다면 ... 축축하고 눅눅해지는 온 몸의 숨막힘 속에서 세포 하나하나가 섞어서 문드러지고 나서야 열매 맺는다는 무서운 이야기 였다는 사실이 이제는 함부로 따르겠다는 고백을 못하게 합니다.
상처와 콤플렉스로 너무나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워 “왜!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십니까?”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역전하시는 하느님을 늘 봅니다. 그 상처를 용서하고 일어서고 나면 .... 그와 비슷한 사람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며 기도하고 도우려는 저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허락하신 고통이 제가 진정으로 타인을 위해 기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죽었더니 산 것입니다. 사실은 죽여졌더니가 옳은 일이겠지만...^^ 여러분도 그러한 체험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김충귀 신부님-
독일의 한 작은 도시인, 뤼벡의 교회 마당에 서 있는 돌판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나를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도 우러러 보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도 걷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도 배우려 하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깨끗하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부유하다 하면서도 구하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문이라 부르면서도 두드리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하면서도 섬기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하면서도 존경치 않았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되새겨 보게끔 하는 좋은 글인 것 같습니다.
살면서 생활따로 신앙따로인 따로국밥 같은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것 같습니다.
신앙의 길과 삶의 길, 분명 같은 길이어야 할텐데, 많은 경우 신앙의 길은 온데간데 없고 삶의 길에 정신을 쏟고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본당에 있다보면 봉사하시는 신자분들 사이에 일어나는 작은 분열들을 접하게 되는데 이쪽 말도 들어보고 저쪽 말도 들어보면 결국 신앙적인 눈으로 바라보기보다 삶과 세속적인 눈으로만 바라 봄으로써 나중엔 감정싸움으로 흘러버리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봉사를 하다보면 서로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잃어버리는 우리의 신앙들을 보면서, 화해를 위해 본당신부로써 역할을 하려고 하지만 많은 경우 자기감정에 매여버려 마음이 좁아지는 신자들을 보노라면 가슴 아팠던 적이 많습니다.
그럴때마다 서로 기도해주자고 달래도 보지만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화해할 기색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참 바라보고 있는 신부도 답답하고 당사자들도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가 참 많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섬기다’라는 말은 타동사로써 윗사람이나 어른을 받들어 모시는 것을 뜻하며 또한 남을 아끼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즉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그 섬기는 대상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르며 동시에 그 섬기는 이를 아끼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섬기다라는 말의 뜻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절제할 수 있을 때에 잘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섬긴다고 하면서 그 섬기는 이의 뜻과 의견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 따라 한다면 과연 그것이 섬기는 이의 제대로 된 삶의 자세는 아닐 것입니다.
과연 우리 신앙인들은 누구를 위해 봉사하며 누구를 섬기는 신앙인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밀알의 비유를 통해 어떤 이들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을 섬기며 따르는 이들이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며,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들어 높일 것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봉사도 결국 예수님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따를 줄 아는 이들은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이들이고 함께 봉사하는 상대방을 존중하며 아낄 줄 아는 이들이 되어야합니다.
감정에 내 자신이 묶이게 되면 눈도 보이지 않고, 마음도 쪼그라듭니다.
그리고 가슴도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습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그냥 혹시 내버려두지 않습니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감정이지만 이 그릇된 감정을 우리는 신앙적으로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좋지 않은 감정으로 내 자신이 휩싸일 때 짧은 화살기도라도 하려고 하는 그런 의지가 있어야하며,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습관을 들일 때에 내 감정은 기도로써 성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습관을 안 들이는 것보다 들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신앙의 습관이 내 안에 옷 입듯이 자연스럽게 입혀진다면 어쩔 수 없는 그 감정들도 우리의 의지로써 서서히 길들여져 갈 것이고, 신앙의 길 위에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작은 밀알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며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 라우렌시오 성인과 생명의 역설(逆說)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은 258년 8월 10일에 순교한 로마교회의 부제 라우렌시오 성인의 천국 입성을 경축하는 날이다. 라우렌시오 성인만큼 복잡한 명함(名銜)을 가진 성인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라우렌시오 성인이 스페인을 비롯하여 로마, 뉘른베르크, 부퍼탈 등 수많은 도시들과 가난한 사람, 과부, 청소부, 세탁인, 요리사, 유리세공업자, 양조주, 소방수, 도서사서, 문헌 수집가, 학생, 대학생, 화상환자, 눈병환자, 좌골신경통 환자, 피부병 환자, 페스트, 열병환자, 연옥불로 고통 받는 영혼 등의 수호성인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330년경 로마에 라우렌시오 성당이 세워진 이래로 수많은 성당이 성인의 이름으로 불리거나 그를 수호성인으로 모신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성 라우렌시오는 성 식스토 2세 교황(257-258) 시절에 로마교회의 재정과 사회복지를 담당하던 일곱 부제 중 한 사람이었다.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253-260)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일차적으로 교황이 감옥에 갇혔다. 그 때 라우렌시오 부제는 자신이 교황과 함께 잡혀가지 않은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교황은 3일 후에 그도 자기를 따라 오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는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명하였다. 동시에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교회의 모든 재산을 제국에 헌납할 것을 강요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황제는 교회가 엄청난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 사제들이 성혈을 은잔에 담으며, 저녁 예식에 금촛대를 사용할 정도로 금을 펑펑 쓰고 있다고 들었다. 또 너희의 스승인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야 한다’고 했고, 너희의 신(神)은 돈을 만들어내지 않았으며 말씀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러니 너희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나의 제국에 바쳐라.”
황제의 말을 듣고 라우렌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교회는 참으로 부유합니다. 당신에게 정말 가치 있는 것을 다 갖다 보여주겠습니다. 그러니 3일간의 말미를 주시오.” 이에 3일간의 말미를 받은 부제는 곧바로 달려가 교황의 명대로 로마교회의 모든 재산을 고통 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3일후 수많은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와 과부를 모아서 황제 앞에 한 줄로 세워놓고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하고 간단히 말했다.
화가 치민 황제는 당장 라우렌시오를 쇠몽둥이로 때리고 석쇠 위에 쇠줄로 묶어놓고 불을 지피게 하였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은 성인은 순교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 것을 알고 황제와 형리들에게 놀랍게도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라는 유명한 말을 던지고는 하늘을 향하여 로마제국의 회개를 빌며 숨을 거두었다. 형리들 중 하나가 성인의 믿음과 인내심에 감동을 받고 회개하여 성인의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12,12-20)과 최후의 만찬(13-17장) 사이에 위치한 내용으로서 생명의 역설(逆說)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는 예루살렘에서의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예수께서 받으실 영광을 예언하고 있다.
생명의 역설(逆說)이란 죽어야 산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우리 인간에겐 아주 생소한 이론이다. 살기 위해서는 자기 삶에 집착해야 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미워하지 말아야 하며, 목숨과 건강을 부지하기 위해 온갖 좋은 것은 다 취해야 하는데 말이다.
죽어야 산다는 역설의 가장 좋은 예는 바로 밀알의 모범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24절) 밀알 하나가 죽는 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다. 그렇다고 죽음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밀알이 죽는 이유가 많은 열매를 위한 것이듯이 예수님의 죽음 또한 세상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
십자가와 죽음의 시간이 곧 예수께는 영광과 새 생명의 시간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생명의 역설은 곧 예수를 따르려는 모든 제자들의 추종법칙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각오와 준비를 하였을 때 진정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죽음으로써 새 생명에 얻을 것이고, 영원히 아버지 곁에 있게 될 것이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요한 12,24-26)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제가 이 복음 묵상을 쓰고 있는 곳은 여주군 강촌면 도전리라는 깊은 산골 마을이다. 밭에 심어 놓은 고추, 콩 등도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고 논에 심어놓은 벼들도 원기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변이 없는 한 아마도 올해는 대풍년이 될 것 같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자연만큼 하느님의 섭리에 잘 순응하는 것도 없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따가운 햇빛이 내려 쬐면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춤을 추고, 더우면 더운 대로 땀을 흘려가며 받아들이고, 추우면 추운 대로 옴추르며 그대로 견뎌낸다. 한번도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가꾸어져 나간다.
봄에 푸른 옷을 입히면 푸른 옷을 입고, 가을에 단풍 옷을 입히면 단풍 옷으로 갈아입고, 겨울에 옷을 벗기면 앙상한 살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하느님을 찬미한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항상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순응하는 것, 그것이 자연이다.
모든 자연은 이토록 하느님께 순응하건만 유독 인간만이 하느님의 섭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기를 든다. 추우면 춥다고 불평하고 더우면 덥다고 짜증을 부린다. 하느님의 섭리에 반항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병들고 나약해지고 추하게 변해간다. 인간이 하느님께 순응하면서 나이를 먹는다면 가장 아름다운 모습 즉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해 갈 텐데....
그러나 인간은 그 진리를 모른다. 자연이 아는 진리를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모르고 있다. 아니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그 진리대로 살지 않는다. 자연은 진리대로 살고 인간은 그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대로 살지 않는 것이 자연과 인간과의 차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인간들이 알아듣고 진리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 아는 자연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봄에 뿌린 벼 씨가 땅에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벼가 나서 무럭 무럭 자라고 있듯이 인간도 자라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은만큼 자라야 한다. 인간이 자란다는 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하느님께 대한 반항이 죽어야 하고, 하느님께 대한 불평이 죽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연이 하느님께 절대적인 순명을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섭리에 순순히 순응하는 모습으로 길들여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죽지 않기 때문에 툭하면 하느님께 또 이웃에게 악을 쓰고 대들고 이를 갈며 투덜대는 것이다. 벼들이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인간도 나이를 먹으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지 말고 다소곤히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며 나이 먹음의 무게이다.
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겸손을 라틴어로 "humilta"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땅은 가장 낮은 곳이며 누구나 밟고 다닌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어린이 어른, 미운 사람 고운 사람, 서양사람 동양 사람 흑인, 죄인이거나 의인이거나, 살인자이거나 강도이거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밟고 다녀도 불평이나 거부 한번 하지 않는다.
그뿐이랴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비를 받아들이고 햇빛을 받아들인다. 쓰레기를 받아들이고 침을 뱉으면 침을 받아들인다. 추위를 받아들이고 더위를 받아들인다. 대소변을 받아들인다. 땅은 거부하는 법이 없다. 불평하는 법이 없다.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어준다. 그것이 땅의 겸손함이다. 그것이 땅의 봉사요 섬김이다. 인간에 대한 봉사요 섬김, 자연에 대한 봉사와 섬김,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섬김이다. 그래서 땅이라는 humilta라는 단어는 겸손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알은 예수그리스도를 말하며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당신의 죽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섬기기 위해 가장 낮은 곳인 땅에 떨어져 고개를 떨구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분이시다. 그런데 과연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있는 곳에 우리도 함께 있는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봉사를 거부하고 겸손의 미덕을 멀리하고 있는가? 하나도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팔팔하고 뻣뻣하다. 모두 다 자기가 잘났고 왕이기 때문에 하느님도 이웃도 모두 다 떠받들어야 할 사람들이다.
자기 분수(꼬라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내가 믿는 분이 어떤 분인지, 내가 있어야 할 위치가 어디인지,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결과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참으로 명언임을 오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유태인 신학자 마르틴 부버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감옥의 간수장이가 랍비에게 물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이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러자 랍비가 "당신은 성서 말씀이 영원하며, 모든 세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는 것을 믿습니까?"하고 되물었다. "그렇습니다."하고 간수장이 대답하였다. 그러자 랍비가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시대마다 각 사람을 부르십니다. '너는 네 세상에서 어디쯤 도달했느냐? 너에게 주어진 햇수와 날수가 그렇게 많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의 어디에 있느냐?' 그러니까 하느님은 '너는 마흔여섯 해 동안 살아왔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거지요." 자기 나이를 언급하자 간수장은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랍비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말했다. "좋은 말씀이오!" 그렇지만 속 마음은 떨렸다.
하느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검토하고 그 삶의 방식에 대하여 책임지게 하신다. 부버에 따르면 이 결정적인 마음 살핌은 인간에게 있어 영적인 길의 시작이다. 그 작고 조용한 목소리,'너 어디 있느냐?'고 하는 목소리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길을 잃은 채 헤메이게 될 것이다.
아담은 그 목소리에 직면했고, 자기의 곤경으로부터 빠져 나갈 길을 발견하였다.
'너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은 우리 삶의 지도에서 '현 위치'와 같다. 지하철 역 안내판의 '현 위치'에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위치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 그 지점을 확인하고 나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