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과 안동댐 중간지점에 위치한 한국국학진흥원 연수원. 인근에 있는 봉화 백두대간수목원 탐방행사를 마친 팸투어 참가자 틈에 끼어 늦은 시각에 연수원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그러곤 방을 혼자 사용하는 바람에 이튿날 새벽에 나서는 산책도 나 홀로였다. 숙소에 도착할 때 불빛 사이를 스치던 진흥원 건물과 숲이 궁금하여 카메라까지 휴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새벽안개가 사위를 모두 덮어버려 덤벙대다간 벼랑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갈까 하다가 산책로 벤치를 겨우 찾아 걸터앉았다.
추분 지난 지 닷새나 되어 새벽기온은 제법 차가웠다. 걸친 옷이 눅눅해져올 무렵 무모하게 대기하는 사람이 안쓰러웠는지 안개는 서서히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 만큼 숲속 풍광들을 하나둘 보여주었다.
간밤 이곳 연수원 숙박시설을 이용한 3개 단체 100여 명 투숙객 중에서 동산을 오른 사람은 나 혼자였다. 어쩌면 생활에 불편을 줄 수도 있는 안개지만 살아오면서 안개를 싫어했던 기억은 나질 않는다. 백설이나 뭉게구름처럼 자연 속에서 나타나는 하얀색을 좋아하다보니 안개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몽환적인 안개를 신비스럽게까지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늘처럼 산책로 오솔길과 소나무는 물론 고즈넉하게 엎드린 진흥원 한옥 기와지붕까지 휘감아 보일 듯 말듯 몽롱하게 만드는 때문이다. 새벽부터 안개 속을 유영하면서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이 일러주는 인생경구를 접할 줄이야. 한글로 써서 눈높이로 산책로에 내건 글귀들은 연수원 성격에 맞추느라 그랬는지 주로 정신을 깨우치고자 하는 것들이었다. 순간 졸작 글에다 선현들 말씀도 함께 전하고 싶어졌다. 이 고장 안동이 낳은 퇴계 선생으로부터 공자 맹자 명심보감 채근담까지 있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아끼고 감싸기만 할뿐 가르치고 꾸짖길 소홀히 하는 것은 김을 매지 않고 벼가 잘 여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 옛 사람이 말을 쉽게 하지 않는 것은 실천이 그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 마음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 병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면 욕심은 그 병에 이르는 길이다. / 성냄이 심하면 기를 상하게 하고 생각이 많으면 정신을 상하게 한다. /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가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달기가 단술과 같다. / 바람이 대숲에 불고 지나간 뒤 대나무는 소리를 남겨두지 않고 기러기가 연못 위로 날아간 뒤 연못은 그림자를 남겨두지 않는다.’
가벼운 산책으로 주변 풍광을 살피면서 간밤의 숙취도 좀 털어보고자 나섰다가 만추 속 새벽안개를 만났고 다소 무거운 명상주제도 접했으니 이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아침에 안개가 끼면 맑다’는 속담엔 과학적 원리가 들어있다. 안개는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냉각되어 응결된 상태이므로 새벽에 안개가 만들어지려면 밤에 지면의 복사냉각이 빠르게 일어나야만 한다. 날씨가 맑으면 복사냉각현상이 활발해지면서 안개가 만들어졌다가 해가 뜨면 온도가 올라가 작은 물방울은 증발하면서 없어지고 맑은 날씨로 이어진다.
‘가을안개는 쌀 안개, 봄 안개는 죽 안개’라는 속담은 영농에만 매달려 살아온 조상들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가을에 벼가 패서 익을 때 안개가 끼면 날씨가 따뜻하여 벼가 영그는 것을 촉진시키게 된다. 반면 봄철 안개는 기온차가 심할 때 생기므로 햇볕을 차단하여 벼의 발육을 방해하고 병충해까지 안겨주어 수확량을 줄어들게 만든다. ‘보리안개는 죽 안개고 나락안개는 밥 안개다’나 ‘가을안개는 천 석을 올리고 봄 안개는 천 석을 내린다’는 속담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안개의 발생 원리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공기의 냉각과정에서 생기는 냉각성 안개와 증발과정에 생기는 증발성 안개로 나뉜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을에 발생하는 안개는 냉각성 안개 중에서도 복사안개로 불린다. 복사안개는 바람이 없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큰 맑은 날 새벽에 주로 만들어진다. 흐린 날에는 구름이 지표면의 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때문에 기온이 크게 떨어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맑은 날에는 열이 쉽게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에 야간에 지표 근처의 기온이 크게 떨어지고 일교차가 커지게 된다. 이때 차가운 지표면 근처의 공기가 이슬점 이하로 냉각돼 수증기가 응결하면서 안개가 형성된다. 즉, 복사안개가 형성되는 건 맑은 날이다. 하지만 제주도만은 가을안개 발생빈도가 상당히 낮은 편이며 복사안개보다는 해안가와 산간 지역의 지형적 영향으로 연안안개와 활승안개 등 다른 요인에 의한 안개 형성이 빈번하다.
안개를 좋아하다보니 8년 전 봄 부산 태종대 일대를 완전히 점령한 안개를 찍은 사진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을 떠올리게 하는 지독한 안개로 그야말로 사방천지가 오리무중이었다. 적당한 기회에 인터넷카페를 통해 선보일 예정이었는데 안동 가을안개를 만나면서 그 풍광을 함께 올릴 수 있게 되어 퍽이나 다행스럽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영도는 신선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지방자치시행 이후 부풀려 자기 고장을 홍보하는 자랑과는 다르게 중고교 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신석기시대의 유적 동삼동패총이 있는 영도다. 근현대에 들어선 동란 때의 피란민들과 가난을 못 이겨 남도에서 찾아든 이주민들과 선원들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영도변전소에서 3년 반 일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고 그때만 해도 섬은 낙후된 채 부산의 변방으로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영도는 도개식 영도대교를 현대식으로 복원한 후 국내외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근년 들어선 해양박물관과 국제크루즈터미널도 들어서 첨단해양관광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안개를 예찬하다보니 안개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지구 온난화 영향인지 요즘은 바다 건너 송도나 남포동에서 영도를 바라보면 거대한 안개가 하얗게 띠를 이루어 산중턱을 둥글게 에워싸는 걸 자주 보게 된다. 그 속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은 전망이 가려져 답답할는지 모르나 바깥에서 바라보면 지상이 아닌 천국의 어느 공간처럼 느껴지는 신비스런 풍광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