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용사와 명사
이동민
명사가 주인 역할을 하는 실체이고, 실존이다. 그러나 형용사의 도움을 받아서 온갖 모습으로 변용할 수 있다. 변용이 너무 심할 때는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허상이 실체의 행세를 한다. 형용사는 실체를 드러내기보다는 색칠하여 명사를 자기가 원하는 물상으로 변용시키는 재주가 뛰어나다. 형용사는 명사에 기대어 사는 기생충이라는 생각이다.
젊은 날의 나는 형용사로부터 많은 꾸밈 받기를 바랐다. 너무 많은 형용사가 감싸고 있으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어 헷갈린다. 젊어서인지 형용사에 둘러싸인 허상인 줄 모르고 사람을 잘못 평가한 일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느 모임에서 자신을 이번 구청장 선거의 후보자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런 사람일수록 말솜씨는 뛰어났다.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어서 그 사람을 좋게 평했더니, 선생님께서 또 넘어갔구나 했다. 하기야 워낙 언변이 좋으니, 하였다. 우리가 많은 형용사를 달고 다니는 이유는 사람들의 눈에 명사보다 형용사가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나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형용사의 꾸밈 받기를 소망하면서 산 삶이었다. 유명 학교에 가고 싶어 한 마음의 바닥에는 학교에 기대어 뻐기고 싶어서 였다. 대학입시를 공부할 때는 유명대학생임을 자랑하고 우쭐해 하는 나를 그려보곤 했다. 안동서 생활할 때는 법조인과 운동모임을 한 일이 있었다. 그분들을 지칭할 때는 으레 형용사인 직책으로 불렀었고, 명사인 이름 석자는 뒷전이었다. 나를 부를 때도 직장의 직책으로 불러주었다.
잡지사 담당자가 원고 청탁을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글의 본문보다 경력이 더 길더라고 했다. 인생살이는 뻔한데 무슨 경력이 그렇게 많느냐고 하였더니, 동네의 친목 모임에 이사라는 것까지 형용사로 사용하였다. 형용사가 많다고 명사가 항상 돋보이기만 할까.
형용사가 진짜의 모습을 그려내는가에 의심을 가지게 된 일이 있었다. 어느 문인이 자신의 작품집을 보내왔다. 경력이 아주 길었다. 첫 작품집인데 벌써 문학상을 받은 경력이 올라와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시는 분도 아닌데 싶었다. 내가 문학 단체에도 관여하면서부터 문학상의 가치에 회의가 생겼다. 나는 입학이 조금 어려운 대학을 다녔지만 문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대학이었다. 30여 년 전의 첫 수필집을 낼 때는 나의 경력에 그 대학을 졸업했다고 적었다. 내 문학을 돋보이려 한 것이 아니고, 그 대학을 다녔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것이 뻔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랬다. 내가 잘난 모습으로 보이도록 형용사로 색칠한 것이다. 그 대학의 졸업은 문학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다.
형용사에 강한 의구심을 가지는 일이 일어났다. 내가 성숙한 인간이 되어서 깨달은 것이 아니고, 반항심에서 나타났다. 내 자존심은 그를 나와 크게 다르지 않는 평범한 문인으로 여기는데, 그 분은 숱한 문학상도 받았다. 또한 출판사가 자기에게 의뢰하여 책을 낸다고 자랑했다. 그때까지 나는 책의 출판을 항상 내 돈으로 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현실이 그런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보인 반응은 이솦 우화의 ‘신포도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지 문학상이니 하는 작품 이외의 것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문학상을 받지 못한 내가 할 소리는 아닌데도 그렇게 말하면서 내 자존심을 추스렸다.
세월이 흘렀다. 문학상도 몇 군데서 받았고, 출판사에서 내 책을 여러번이나 기획출판으로 내어주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원로 문인으로 대접받는 나이가 되었다. 그만큼 나를 수식하는 형용사도 하나하나 늘어갔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책을 낼 때 내 경력난에 학력이 사라졌다. 젊은 날에 자랑으로 여겼던 일이 그때와 달리 지금은 ‘부끄럽다’라는 깨달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경력난에서 그 다음으로 사라진 것이 문학상 수상이다. 문학상이 사라진 것은 문학상에 대한 불신도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자기가 받지 못하니 옹니를 부린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나이가 들어서 내 생명을 약에 의존하느라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의 종류가 많아지면서 반대로 형용사는 줄이려 했다. 순수한 명사만을 남기려 하지만, 형용사 없는 나의 작품이 외면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여전하다. 그러니 무심함에서 얻은 깨달음이 아니고, 자존심을 다독이며 억지로 답을 찾으려 고심했기 때문이다. 찾아낸 답은, 내가 죽고 난 백 년 뒤, 이 백 년 뒤에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억지 희망이다. 그러려면 많은 작품을 남겨두어야 한다. 번잡한 형용사도 지워야 한다. 노년을 보내는 내가 컴 앞에 앉아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이유를 형용사를 지우고 명사만 남기려는 노력이라고 해본다. 그렇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