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보셔요, 내 연인이 산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 아가의 말씀입니다. 2,8-14
8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9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
10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1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12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13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 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4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복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와 복음은 기다림과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아가 1,1)인 아가는 일종의 ‘사랑 노래 모음집’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독서는 구혼 시절을 회상하는 여인의 노래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두 연인은 만남을 기대하며 서로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남자를 모르는 처녀로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와, 그에 앞서 아이를 낳을 수 없었지만 같은 분의 힘으로 세례자 요한을 가진 엘리사벳이 인사를 나눕니다. 그 만남의 기쁨은 엘리사벳의 태 안의 아기가 뛰노는 즐거움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던 만남이 이루어져 얻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라면 그 기쁨은 더욱 크다는 것을 화답송의 시편이 잘 보여 줍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분 안에서 우리 마음 기뻐하고, 거룩하신 그 이름 우리가 신뢰하네.”
주님 성탄을 앞둔 대림 시기의 막바지에서 구세주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아가의 표현처럼 구세주께서는 노루나 사슴처럼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십니다. 이처럼 사랑은 사람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것을 이루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아기의 잉태와 두 어머니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구세주께서 오시는 것을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은 행동을 촉진하는 힘입니다. 주님 성탄을 앞둔 우리 또한 어떤 역경 속에서도 오시는 분을 기쁘게 맞이하려면 힘차게 뛰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시간이 날 때마다 직접 운전을 해서 국내 성지순례를 다니고 있습니다. 새벽 3~4시에 출발해서 순례합니다. 성지에 사는 저이지만, 성지순례를 통해 얻는 은총이 너무 커서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벌써 3번째 완주를 앞두고 있습니다(성지순례 책자를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성지는 167곳으로 나옵니다).
언젠가 춘천교구 지역을 순례하다가 어느 순례객을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게 “신부님! 어느 성지가 제일 좋으셨어요? 신부님 계시는 갑곶성지는 빼고요.”라고 물으십니다. 잠시 생각하다가 인상 깊었던 어느 성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곳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잖아요.”라고 하십니다.
맞습니다. 지금 한창 성지개발 중이라 아무것도, 심지어 성당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이곳에 대한 인상이 깊습니다. 예전 갑곶성지의 초창기 때의 모습도 생각나고, 이곳의 미래를 상상하다 보니 계속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성지는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억나는 곳은 화려한 곳도 볼거리가 많은 곳도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곳입니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곳은 겸손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볼 것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곳보다도 감동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단단하게 굳은 마음이 아닌, 말랑말랑하게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반깁니다. 단순히 사촌 동생으로서 성모님을 반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화하신 메시아를 시편으로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소리로 외쳤다는 점은 그만큼 엘리사벳의 믿음이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믿음의 크기 때문일까요? 먼저 주님께서 겸손하게 다가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직접 주님과 함께 방문하신 겸손을 그의 마음은 주님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럽지만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알아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해 경배의 노래, 찬미의 노래를 바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의 관점을 버려야 합니다. 가장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가운데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겸손을 바라볼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 그러나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도 대가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 일한 만큼 노력한 만큼 받게 되어 있다(나폴레온 힐).
내가 행복한 이유
예전에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 피정 참석자에게 “내가 행복한 이유 100가지만 적어보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놀리듯이 “100가지만 적기에는 행복의 이유가 너무 적지요?”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저를 비롯한 피정 참석자들은 열심히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는 쓸 수 있었지만, 100가지나 되는 행복한 이유를 찾기란 너무 힘들었습니다. 힘들어하는 우리를 보신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이유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가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이유고, 음식을 먹을 입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이유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행복한 이유 100개는 너무 적은 숫자고, 작성하기에 너무 쉬운 문제가 아닐까요?”
행복한 이유를 우리는 이미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미 가지고 있으므로 할 수 있는 것도 당연히 너무 많습니다.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잘못된 마음이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