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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차분한 20대들의 알흠다운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파연
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중앙SUNDAY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1/10/09/6020993.html?cloc=nnc
일제는 우리 밤 문화도 크게 바꿔놓았다. 일제 침략사를 연구했던 임종국 선생이 밤의 일제 침략사에서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말한 것처럼
일본은 조선의 밤 문화를 창기(娼妓)문화로 타락시켰다. 우리 사회가 술과 여자에 빠질수록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란 계산도 한몫했다.
식민통치 구조
⑤ 공창(公娼)
대한제국은 1895년 갑오개혁 때 관기(官妓) 제도를 혁파했다. 이로써 관기는 국가의 예속에서 해방되어 자유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한 해 전인 1894년의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관기 혁파는 무의미해졌다.
1894년 6월 해군 중장 이도(伊東祐亭)가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에 온 것을 필두로 일본군이 속속 진주하자 일본 거류민회는 묵정동에 대지 70평을 구입해 유곽(遊廓)을 만들었다. 군대 진주와 더불어 유곽을 만드는 일본군의 이런 전통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뿌리인 셈이다.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대거 증파되면서 이 유곽은 8300여 평으로 크게 확대된다. 이 유곽지대가 일종의 공창(公娼)지대였다. 공창이 확산되는 데 큰 공헌을 한 두 인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일진회의 송병준(宋秉畯)이었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종합월간지
이토는 1906년 3월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할 때 육군 소장 무라다(村田淳)와 해군 소장 미야오카(宮岡直記), 통감부 외무총장 나베시마(鍋島桂次郞) 같은 공식 수행원뿐만 아니라 4명의 화류계 여성들도 데리고 왔다.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출신의 오카네(お柳), 표면상으론 이토의 전용 간호사지만 실제로는 정부였던 오류우, 비파(琵琶)의 명인 요시다 다케코(吉田竹子), 도쿄 신바시(新橋) 출신의 게이샤 사다코(條子)였다. 이토는 사다코를 4500원의 1년 출장 화대를 주고 데려왔는데, 당시 쌀 한 가마 값은 5원 정도였다. 그래서 주한 일본인들도 이토를 ‘풍류 통감’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풍류라는 게 성적인 의미임;;)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하자 시모노세키 시절 이토의 이웃이었던 닛다(新田又兵衛)가 한국으로 건너와 남산동에 천진루(天眞樓)를 열었다. 천진루 연회에서 닛다는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대장과 무라다(村田淳) 소장 사이에 앉아 ‘닛다(新田) 중장’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토는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醉臥美人膝,醒掌天下權)”는 한시(漢詩)를 지을 정도로 여자·술과 정치를 동일시했던 인물이었다.
임종국 선생이
일본이 사실상 공창(公娼)을 허용하면서 조선의 기생들은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뉘게 된다. 그 유래는 분명치 않지만 갑오개혁 때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관에서 풀린 기생들이 자신들을 몸 파는 기생들과 구분하기 위해 나눈 것으로 짐작된다. 일패는 과거의 관기들로서 몸은 절대 팔지 않고 가무를 선보였던 예인(藝人)들이다. 이들 중에 생활고에 시달려 은밀하게 매춘도 하는 기생들이 이패였다. 이패를 ‘숨어 있는 군자’라는 뜻의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근짜(慇懃-)’라고 불렀는데 그만큼 몸을 파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뜻이다. 삼패는 돈만 있으면 아무나 안을 수 있는 창부(娼婦)로서 세칭 가무 못하는 ‘벙어리 기생’이었다.
(가무를 못하면 '벙어리' 기생이라고 불렀단 것만 봐도
우리 나라 기생이 원래 가무를 중심으로 하던 예인들이란 걸 알 수 있지)
일본에서 건너온 기생은 대부분 3패에 속하는 저질들이었다. 이런 일본의 저질 밤 문화가 퍼지자 1908년 관기(官妓) 출신들이 한성(漢城) 기생조합을 만들었다. 한성 기생조합은 유부녀 기생들의 모임으로서 기예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예인들의 조합이었다. 그러자 송병준이 평양 출신의 남편 없는 기생들을 주축으로 만드는 것이 다동(茶洞) 기생조합이었다. 기생조합의 명칭이 권번(券番)으로 바뀌면서 다동 기생조합은 대정권번(大正券番)이 된다.
(존나 짜증나는 게 얘네가 요즘 게이샤 미화하잖아; 볼 때마다 어이가 음슴)
1929년도
하규일이 송병준의 심복 안순환(安淳煥)과 충돌한 후 독립해서 차린 권번이 경화권번인데, 안순환의 이력도 특이하다. 경시통감(警視總監) 와카바야시(若林賚藏)가 2대 통감 소네(曾<79B0>荒助)에게 보낸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안순환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전선사(典膳司) 상선(尙膳)으로 있으면서 이용구·송병준의 일진회에 가입한 자였다. 이런 안순환이 궁중에서 나와 1908년 12월 지금의 광화문 일민미술관 자리에 차린 요릿집이 한세월을 풍미하던 명월관(明月館)이었다.
일제 진출 이후 서울의 밤 문화는 이토 같은 색귀 통감과 송병준 같은 친일 색작 등이 주도하면서 과거의 기예(技藝) 중심의 품격은 사라지고 삼패 중심의 천박한 매춘으로 전락했다. 일패 기생들 중에는 애국자도 적지 않았다.
주요한(朱耀翰)이 발행하던
앞에 인용한
술자리에 여자를 동석시키는 현재의 잘못된 밤 문화도 알고 보면 그 뿌리는 일제시대에 있다. 1919년 기생들이 3·1운동에 대거 동참한 것은 밤 문화까지 잠식한 일제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다.
글이 너무 길면 굵은 글씨, 밑줄 친 부분이랑 큰 글씨만 읽어봐
그것만 읽어도 대충 파악 가능함
이번에 일부(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남자들의
룸살롱 후기 만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그러다가 이 기사를 발견해서
여시들도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퍼왔어.
중간에 글씨체 다른 건 내가 멋대로 주석을 단 거야 ㅋㅋㅋ;
그리고 기생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리 나라 사극에서 보통 양반들이 직접 기생집에 가서 놀잖아?
난 그것도 잘못된 거라고 알고 있어. 원래는 기생을 불러서
후원같은 데서 놀았다고 알고 있어.
유곽(몸을 파는 기생들이 있는 곳)에 직접 가서 노는 건
일본식 하급 문화라고 하더라고.
★요약★
원래 우리 나라의 밤문화는 기예를 하는 고급 문화였는데
일본 개새끼들이(이토 등) 우리 사회를 술과 여자에 빠져서
독립운동에서 멀어지게 하고 사회 자체를 하급 문화로 타락시키기 위해서
우리 나라 밤문화를 더러운 문화로 만듦
고로 지금 여자끼고 노는 남자들의 더러운 술 문화도
뿌리를 따지고 보면 일제강점기가 기원이라는 병신같은 사실!!^^
첫댓글 개새끼들.... 뭐 우리민족이 원래 색을 밝힌다느니 이딴말하더니.... 열받는다
아.....................................
삭제된 댓글 입니다.
222 기생은 '몸'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을 파는 사람들이었음. 그래서 예인이라고 하는 거고 본문에도 나오다시피 원래 우리나라의 밤문화는 기예중심이었다고 하는 거임
그렇구나... 생각해보니 겁나 열받네..... 여자끼고 노는 문화를 가졌던 장본인들은 지네들 게이샤를 예술인으로 포장해서 그걸로 이미지메이킹하는데......
기예하는 기생말고 매춘하는 기생도 있긴 있었나..? 여튼 여자 끼고 술먹는 문화는 일본에서 온거?
하 진격때문에 빡친가슴 이 글 보고 더빡친다 뻑킹 쪽빠리 새끼들은 뭐 하나 도움되는 게 없네 그래서 일본 언제 패망한다고요;;?
일본은 도움된거 세는게 더 빠르겠다... 나 타임머신이 발명되면 백제로 돌아가서 일본에 문물전해주는거 뜯어 말릴거야.... ㅠㅠㅠ
진짜 일본이 우리나라를 너무 더렵혀놧어 ㅠㅠㅠ너무 화난다..
일본섬숭이새끼들 찌꺼기는 존나 화수분이네 ㅅㅂ
어쩐지 병신같다했더니 일본에서 건너온거구나?
아헐 나 드라마영화보고 옛날부터그런줄알았는데 진짜 작가들 조심해야할듯
졸라 씹빨이다 ㅡㅡ
역시 악의 무리들이야
아 진심 ㅡㅡ 사람이 너무 빡치면 죽을수도 있을것같아ㅡㅡ 아 진심 너무 빡쳐 ㅅㅂ 아 ㅡㅡ
충격....진짜 일본은 인류의 암덩어리들인듯ㅡㅡ
이씨 일본놈들 진짜못됬어 ㅡㅡ 지금은 룸싸롱에서 여자끼고 술마시는 '돈많은사람들이하는' 그런것으로 바뀌었으니 ㅡㅡ
아오.....일본 생퀴들.....
진짜 답도없는 저질새뀌들ㅠㅠ
정말 나쁜건 이렇게 ㅠㅠㅠㅠ휴...언니덕에 좋은정보 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