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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장 검맹(劍盟)의 맹주(盟主)
거대한 지하광장.
이 곳에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던 만겁궁의 각 통로로부터 유인되어 온 군웅들이 모두 운집해 있었다.
말하자면 저마다 처절한 사투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그들이 연출해내고 있는 상황은 실로 미묘했다.
삼삼오오 짝을 이룬 채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얼굴에서 의혹과 불신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한 쪽에는 무당파의 도인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숫자는 처음 이 곳으로 들어올 때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나마 대부분이 중상을 입고 있었다.
그래도 사대신가의 인물들은 형편이 나아 보였다.
그들은 각처에서 모인 군웅들과 더불어 일단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이 지경에 이르러도 건재함을 과시하는 자들은 삼성림의 회천궁(回天宮) 소속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녹존성군을 중심으로 뭉쳐진 가운데 여전히 막강한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녹존성군.
수하들에게 둘러 싸인 그는 조금도 위엄을 흐뜨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중인들을 쓰윽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암계에 걸려든 것이오. 이 밀궁은 애당초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소."
녹존성군의 눈길은 무당의 도인들에게서 멈추었다.
"무당의 장문진인인 광무도장은 이 함정을 만드느라 꽤 노고가 컸을 텐데, 귀하들은 그 점에 대해 어찌 생각하오?"
그의 어조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추궁이라고는 하지만 미안한 마음보다는 불쾌감을 유발시키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무당의 도인들에게로 쏠렸다.
광수진인(光水眞人)이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탄식에 가까운 음성으로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본파를 대신하여 여러분들께 심심한 사과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번 일은 광무사형이 단독으로 저지른 일일 뿐 본파와는 무관합니다. 부디 이 이상의 곡해는 없으시기를 바라오이다."
그 말은 정녕 누가 들어도 도인다운 것으로써 자책과 비탄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하지만 녹존성군의 응수는 변함없이 냉오하기 그지없었다.
"흐음, 대단히 무책임한 말이군. 그럼 무당파는 이제껏 장문인을 별개로 놓고 지내 왔다는 말이오?"
그의 말속에는무당파를 경시하는 기미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삼성림과 칠대문파 간의 묘한 대치 관계를 단적으로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었다.
광수진인은 수치감으로 인해 얼굴을 붉혔다.
"무량수불... 중인환시리에 자파 내에서 일어난 일을 밝히고 싶지는 않소이다만, 상황이 이러하니 말씀드리겠소이다. 광무사형은 원래 광해대사형께 돌아가야 할 장문인 자리를 찬탈한 역도요. 우리도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았소이다. 그러나 잠시 무당을 떠나 계셨던 대사형께서 복귀하셨으니 이 문제는 불원간 무당의 법도에 따라 바로 잡히게 될 것이외다."
그의 자존심에녹존성군은 찬물을 끼얹었다.
"그것은 당신들 사정일 뿐이오.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무당의 장교진인이 보낸 서찰 때문에 오게 되었소. 그 책임은 대체 누가 질 수 있는 것이오?"
광수진인은 난감한 듯 눈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사실 그 자신도 피해자 입장이거늘 어떻게 응대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그가 더듬거리고 있을 때, 한 가닥 창노한 외침이 울렸다.
"그것은 노부가 책임을 진다! 무수한 인명을 해치는 죄과를 범했으니 내 목숨이라도 내놓으라면 내줄 수 있다."
군웅들의 시선은 모두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 쪽 벽이 열리더니 그 곳으로부터 백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바로 진일문이 이끄는 일행이었다.
그 옆에는 광해진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대사형!"
광수진인을 비롯한 무당의 도인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맞이했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미로 속에서 빠져 나와 재회를 하고 보니 기이한 감동이 그들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광해진인은 그들에게 먼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중인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책임을 짓되 무당을 모욕하는 언사는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 작금에야 기강이 문란해져 쇠퇴했다고 하나 조사의 영명함이 꺼지지 않았거늘, 누가 감히 무당을 욕되게 한단 말인가?"
그것은 녹존성군에 대한 정면 공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바람에 장내는 삽시에 조용해지고 말았다.
군웅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경악과 두려움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녹존성군의 안색이처음으로 변화를 일으켰다.
지난 수십 년간 삼성림은 무림의 성역이었다.
구대성군의 지위는 그 동안 당연히 각파의 장문인을 능가하고 있었고, 광해진인의 언사는 바로 이를 뒤집어 엎는 것이었다.
듣고 있던 진일문은 내심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언쟁은 나아가서는 삼성림과 칠대문파 간의 충돌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그렇게 된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
진일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즉시 중재에 나섰다.
"청컨대 두 분께서는 흥분하지 말고 냉정하게 대처해 주십시오. 지금 처지에 분열을 일으켜서는 아니되오이다. 그것은 마교를 도와주는 일밖에는 안됩니다."
마교라는 말에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자는 녹존성군이었다.
"마교......? 그럼 이 곳에 마교의 인물이 있다는 말인가?"
진일문은 녹존성군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의 심중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강한 적개심이 타올랐다.
삼성림의 인물, 특히 녹존성군이라면 불공대천의 원수가 아닌가?
그러나 그 자신이 말했듯 현재는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그렇소. 광무진인은 마교의 사주를 받은 인물이오."
"그럴 리가......?"
녹존성군의 얼굴에는 잠시 회의가 감돌았다.
그가 이 곳에 온 이유도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광무진인의 서찰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내용인즉 삼성림이 중원대정검회의 공정한 참관인이 되어 달라는, 매우 정중한 것이었다.
사실 삼성림과중원 칠대문파는 상호간에 꺼리는 사이였다.
마교대전 이후, 삼성림이 무림의 성역으로 부상하면서 칠대문파의 성세가 위축되자 자연스럽게 빚어진 현상이었다.
이번의 초청은그 의미가 각별하다 할 수 있었다.
삼성림의 지위를 은연중 올려주는 일이 되는지라 녹존성군 자신도 쾌히 응했던 것이다.
하지만 광무진인이 마교의 주구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렇게 되면 삼성림으로서는 조롱을 당한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녹존성군은 만면에 은은한 분노를 떠올렸다.
그것을 눈치 챈 진일문이 묘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이제 사가(四家)의 고인들께서 한말씀 하실 차례이니 그 분들로부터 자세한 얘기를 들으면 될 것이외다."
그 말에 녹존성군의 시선이 즉시 한 쪽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 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세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그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사운악과 당평, 그리고 팽전위였다.
즉 황룡사가보와 사천의 당가, 팽가도방의 가주들이었다.
그들을 향한 녹존성군의 추궁은 화살 같았다.
"어서 말해 보시오. 세 분께는 대체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사운악이 마지못해 헛기침과 함께 입을 떼었다.
"아무쪼록 이해를 바라오이다. 진즉부터 보고를 올렸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소이다. 우리 사가 나름의 큰 고충이 있었기 때문에......."
녹존성군의 냉랭한 음성이 그 말을 잘랐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려. 거두절미하고 속히 본론을 말하시오."
사대신가는 삼성림과의 관계에 있어 하나의 난점이 있었다.
그들은 이대 전부터 삼성림으로부터 막대한 영향과 지원을 받아왔다.
그 대신 사가는 그 때부터 삼성림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가신(家臣)이나 다름없는 예를 취해야 했다.
그런데 사가가삼성림이 모르는 가운데 무엇인가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자 녹존성군은 내심 충격을 입고 있었다.
그의 가느다란 눈이 날카롭게 삼인을 쏘아 보았다.
"도시 이해가 되지 않소. 어찌하여 사가의 일 중 삼성림에서 모르는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이오? 그래, 당신들이 이 곳에 온 이유가 마교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일이었단 말이오?"
사운악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실은 우리 사가의 적자들이 마교의 봉공(奉公)인 천년마등주에게 인질로 잡혀 있소이다. 우리들이 이 곳에 오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녹존성군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나도 광명총궁에서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단 말인가? 저들이 적자를 인질로 잡혔다면 그 동안 마교의 손과 발이 되어 놀아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사운악은 녹존성군의 표정 변화로 미루어 그의 심중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입술을 물더니 변명하듯 말했다.
"달리 생각지는 말아 주시오. 우리들은 적어도 삼성림에 위해가 되는 일은 한 적이 없소이다. 또한......."
그는 참담한 얼굴이 되어 덧붙였다.
"우리들은 다만 인질들을 찾기 위해서 이 곳에 왔소이다. 마등주가 여기에서 그 아이들을 풀어주기로 약속......."
"닥치시오!"
녹존성군의 눈에서 일순 기광이 뿜어져 나왔다.
"당신들은 너무도 일을 잘못 처리했소. 그런 일을 어찌 광명총궁에 알리지 않았단 말이오? 당신들의 행동이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소?"
사운악은 그만할 말을 잃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사가에서도 그 점을 우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삼성림과 의가 상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향후 무림 전반에 미치게 될 영향 때문에 그들로서도 머리가 희어지도록 고심한 바 있었다.
그러나 훗날의일은 어차피 그 때 가서의 일이고 당장 대(代)가 끊어지는 사태는 어쩐단 말인가?
우선 눈앞에 놓인 당면과제에 쏠리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다.
녹존성군.
불행히도 그는 그런 차원에서의 이해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구대성군 중에서 가장 냉혹한 위인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회천궁이 녹림(綠林)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녹림의 존사를 수하로 부리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비위를 거슬리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되는지는 무림인이라면 대개가 알고 있다.
상대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독수를 뻗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사운악은 삼성림과 등을 지는 것은 물론 그의 증오를 사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황룡사가보의 가주로써 나름대로 지존의 예우를 받고 살아온 사운악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형편없이 구겨지자 일편으로는 반발이 일기도 했다.
'우리 사가는 이제껏 삼성림에 맹목적일 정도로 충성을 다해 왔다. 이는 삼성림의 위세도 그렇지만 과거 어르신들께서 삼천공으로부터 구명지은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실수, 그것도 불가피한 상황을 두고 추궁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대체 내 이런 꼴을 다른 동도들이 어찌 보아줄 것인가?'
그는 장내에 모여있는 군웅들까지도 의식하게 되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런 기분은 당가가주나 팽가가주 역시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급기야 사운악은 더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우리 사가가 마교의 협박을 받아 몇 가지 일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러나 천지신명께 맹세하건대 그것은 본의가 아니었소. 이 자리에 계신 어느 고인이라도 우리의 입장이 되면 별 도리가 없었을 것이외다. 성군께서도 더 이상은 노부 등을 핍박하지 말아 주시오."
"흐음?"
녹존성군의 눈썹이 불쑥 치켜 올라갔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사운악의 언사는 분명 하극상이었다.
"핍박이라......?"
그는 곧 폭발할 것 같았으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정녕 당신들은 천년마등주의 부름을 받고 이 곳에 왔소?"
의외의 질문이었으나 사운악은 당황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소이다. 만일 인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당산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을 것이오."
녹존성군은 어느덧 완전한 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 특유의 차갑고 오만한 음성이 거듭하여 물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소. 이 곳은 무당의 광무진인이 만든 건축물이 아니오? 어째서 마교의 봉공인 천년마등주가 당신들을 이 곳으로 불러 들였단 말이오?"
사운악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우리도 모르는 일이오."
그들 사이에 진일문이 다시 나섰다.
그의 음성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무감하게 느껴질 정도로 침착했다.
"바로 그 상관관계가 오늘의 요지외다. 광무진인이 마교, 또는 천년마등주와 무관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오."
그는 녹존성군에 대해 그다지 무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가보의 인물들처럼 공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손윗 사람을 대하는 정도랄까?
이는 녹존성군의 지위로 볼 때에는 상식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아니나 다를까? 녹존성군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자네는 누군가? 본 궁주는 무명인의 말은 개념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일문의 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종전보다 다소 냉담해졌다.
"불초에게도 석 자의 이름은 있소이다. 진일문이라고, 아마 성군께서는 들어보신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소이다."
"진일문......?"
녹존성군의 얼굴에 잠시 한 가닥의 의혹이 어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 네 놈은......!"
녹존성군의 입에서 거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비로소 진일문이라는 인물이 과거 혈옥에서 사가보로 옮겨졌다가 자취를 감추어 버린 중죄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었다.
혈옥의 명부에지금도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자, 그는 일명 생살부(生殺簿)라 불리우는 삼성림의 이대 극비문서 가운데 생부(生簿)에 올라 있었다.
살부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보는 즉시 죽여야 할 죄인의 이름이, 생부에는 산채로 압송해야할 자들이 적혀 있었다.
진일문은 그 중에서도 왕중헌의 행방을 아는 유일한 인물로써 반드시 생명이 보존된 채 사로잡아야 할 인물로 정해져 있었다.
녹존성군의 눈이 일순 냉엄한 살기를 띄었다.
"진가 아이야, 내 묻겠다. 너는 그럼 왕중헌의 명령을 받고 이 곳에 들어 왔느냐?"
왕중헌이라는 이름은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군웅들은 그 이름을 듣자 한결같이 전율을 금치 못했다.
왕중헌이라면 희대의 마두로써 삼성림에 의해 무림의 공적으로 선포된지 오래였다.
그의 잔혹무비한 살수라면 소문을 들어 모두들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진일문은 군웅들의 표정을 보며 고소를 지었다.
"내 대답은 한결 같소. 왕사부는 단지 내게 학문을 가르쳤을 뿐이오. 나는 그 분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며 그 분의 명령을 받은 적은 더더욱 없소이다. 이 자리를 빌어 분명히 말하지만 왕사부는 왕사부이고, 나는 나요."
녹존성군의 눈빛이 더욱 험악해졌다.
"혈옥에서 네 입을 열게 하지 못했다고 본 궁주까지 너를 다루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가 이렇게 나오자 진일문도 더 이상 분노를 제어하지 못해 싸늘한 음성으로 응수했다.
"마찬가지외다. 당신도 과거 혈옥에서의 진모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 것쯤은 알아야 할 것이오."
두 사람의 거리라야 불과 삼장 안팎이었다.
그 사이에서 그야말로 숨막히는 살기가 감돌았다.
쌍방이 모두 일촉즉발, 건드리기만 해도 즉각 격전을 벌일 것 같은 기세였다.
이어지는 녹존성군의 음성이 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지금이라도 본 궁주가 삼성령(三聖令)을 꺼내 한 마디 명을 내리기만 하면 너는......."
"잠깐! 멈추어 주시오."
녹존성군의 말을 끊으며 한 사람이 나섰다.
그는 군웅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로서 이른바 노산초부(魯山焦夫)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별호와는 달리그의 무공은 이 곳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이는 무림 내에서도 위치가 굳건하다는 의미다.
나이가 든 만큼 그는 냉정하게 사태를 판단하고 있었다.
"중도에 끼어 들어서 심히 송구하나 회천궁주께서는 잠시 이 늙은이의 말을 들어 보시겠소?"
백염이 가슴까지 드리워져 품위까지도 갖추고 있는 노산초부의 말은 이 곳의 누구도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녹존성군도 안색을 가다듬고는 이에 응했다.
"편노사(片老師)는 무슨 하교가 있으신지......?"
노산초부는 편대치(片大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진중하게 말을 이어갔다.
"늙은이가 궁주께 한 가지 청하고자 하오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의 상황이 특수하니 당분간은 궁주께서도 이 곳의 법도를 따라 주십사하는 것이외다."
"이 곳의 법도?"
"말하자면 그렇소이다. 아시다시피 이 곳에는 가공할 기관들이 중첩되어 있어 아무리 무공이 강한 자라 해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소. 간적의 마수로부터 벗어나려면 우선 뭉쳐야 하며, 필히 이 곳 사정에 밝은 사람의 힘을 빌려야 하오."
노산초부 편대치의 말에는 일점도 틀린 것이라곤 없었다.
반박할 여지를 전혀 찾지 못한 녹존성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듣고 보니 편노사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는 것은 알겠소. 그런데 그것이 대체 저 소적(小賊)과 무슨 관계가 있소이까?"
편대치는 못박듯 확실한 어조로 답했다.
"우리들은 진소협을 잠정적인 영수로 결정했소이다. 궁주께서도 그리 알고 따라 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뭐, 뭣!"
녹존성군은 너무도 놀라 일시지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가 가진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놈이 무슨 능력이 있어 이 곳의 군호들이 기꺼이 영수로 정했단 말인가? 혹 놈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은 아닌지?'
그로서는 진일문이 행한 일을 알 리가 없었다.
기질과 무공으로 동시에 군웅들을 압도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진일문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여인이 이 곳의 기관을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의 표정이 어찌 변할지는 가히 불문가지였다.
그러나 녹존성군은 절대로 멍청한 위인이 아니었다.
그가 결정을 내리는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류의 흐름을 무시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짓이다. 앞으로 도 놈을 제압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는 그 길로 함구해 버렸다.
노산초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기 보다는 일단 사태를 관망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아무튼 그가 더 이상 말이 없자 군웅들의 시선은 진일문에게로 향해졌다.
그들의 눈이 모종의 기대감을 보이고 있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진일문은 중인들의 시선을 느끼자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의 양어깨에 군웅들의 생사가 걸려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육선고에게 전음을 보냈다.
"누님, 광무진인은 어디에 있소?"
육선고는 역시도 전음으로 대답했다.
"그 자는 아마 총기관을 관장하는 백팔밀전에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 곳은 안에서 출입을 차단하면 밖에서는 어떻게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 자가 그 곳에 숨어 있는 한 우리는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해요."
진일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아무런 방법도 없단 말이오?'
육선고는 대답대신 아미를 숙이며 생각에 잠겼다.
진일문은 그녀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더 말하지 않았다.
군웅들은 두 사람을 예의 주시하며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덕분에 장내는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 목숨을 내맡겨야 하니 어쩌겠는가?
잠시 후.
육선고가 고개가 천천히 들려졌다. 그녀는 다시 전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기관장치가 없어 안전지대에 속해요. 더구나 그 자는 백팔밀전을 벗어나지 못할테니 현재만 같으면 위해를 당할 염려는 없어요. 그러나 이대로 계속 대치하다가는 식량이 없으니 우리 쪽이 먼저 무너질 거예요.'
진일문은 묵묵히 그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호호... 반면에 그 작자도 아마 편안하게 앉아 그 때만을 기다리지는 못할 걸요? 왜냐하면 기관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이 곳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요. 그 자는 어떻게든 나를 제거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진일문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럼 누님의 말은......?'
육선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결심이 선듯 그녀의 입술 끝은 기이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진일문은 알 수 있었다.
육선고가 말을생략한 부분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를. 그러나 미처 그가 입을 열기도 전, 육선고가 잘라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에요."
진일문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되오! 그것은 절대로......."
육선고도 지지않았다.
"그 외에는 달리 대책이 없다고 했잖아요."
이제 그들 두 사람의 대화는 전음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인들도 모두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뭔가 절박하다는 것 외에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육선고는 그윽한 시선으로 진일문을 응시했다.
"동생이 곁에서 도와 주면 아무리 험난한 상황이 닥쳐도 능히 감당할 수 있어요."
진일문은 그녀가 어떤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을 미끼로 광무진인을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방법이 가장 확실했다.
광무진인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도 하고, 걸리적거리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그녀를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문제는 간단했다.
그러나 그렇게되면 육선고의 생명은 끝난다고 봐야했고, 그것은 진일문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최소한 여인의 목숨을 대가로 뜻을 이루고자 할 위인은 못되었다.
반면에 육선고는 진일문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자 매우 흡족해져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의 심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란 그녀에게 있어 커다란 기쁨이었다.
비록 그와 의남매를 맺었다고는 하나 그녀의 여심은 아직도 이성으로서의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한 번 시험해 보겠어요."
"누님!"
진일문이 외쳤으나 육선고는 일별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즉시한쪽 벽으로 걸어가더니 벽의 모서리를 더듬어 무엇인가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힘껏 눌렀다.
덜컹!
기이한 음향과함께 벽에는 이내 장방형의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녀는 군웅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그 구멍에 대고 뭐라고 말을 건넸다.
그 구멍은 일종의 창구였다.
백팔밀전과 직접적으로 소리통이 연결되어 있어 하시라도 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만겁궁을 설계한 인물이 바로 육선고였으니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진일문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그 자에게 조건을 제시했어요. 역시 그 자가 바라는 것은 멸천삼관의 도해였어요. 나는 도해를 넘기는 대신 이 곳에 들어온 군웅들을 무사히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 말은 군웅들을 거의 충격에 이르게 했다.
대체 그녀가 누구이길래 광무진인에게 그런 조건을 내걸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멸천삼관이 무엇이기에 그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인가?
진일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가 요구한 조건은 무엇이오?"
"간단해요. 도해만 넘기면 돼요."
진일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지 않을 것이오. 그는 아마 누님을 이 곳에 잡아두려 할 것이오. 그러지 않고는 안심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오."
"못당하겠군요. 동생에게는......."
육선고는 한 가닥 고소로 그의 말을 시인했다.
그러자 그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즉시 입을 열었다.
"나도 누님과 함께 남겠소."
탁하고 음랭한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노부도 남겠네."
광해진인이었다.
그는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진일문은 그가남겠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광해진인은 광무진인에 대한 것은 물론 무당의 숙제들을 피하지 않고 스스로 풀어 나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군웅들은 모두 잠자코 있었다.
그들은 내심 안도의 숨을 쉬는 한편 한시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할 따름이었다.
그것은 시시각각으로 위기 의식을 접해야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생명이란 누구에게나 소중하니까.
진일문은 그들을 둘러보며 담담히 말했다.
"여러분께서는 광무진인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 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소이다. 그러나 명심하시오. 완전히 이 곳을 벗어나기까지는 절대로 마음을 놓아서는 안되오이다."
군웅들은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개중에는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낮게 탄식을 불어내는 자들도 있었다.
육선고는 다시소리통으로 가더니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안색은 수 차례나 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진일문의 곁에 돌아와서 불쑥 물었다.
"당신이 이 곳에 남으려는 것은 인질로 잡혔다는 그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인가요?"
진일문은 그만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난감하여 잠시 동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 후에야 그는 굳어진 얼굴로 입술을 떼었다.
"그것도 하나의 이유는 될 것이오. 하지만 그 비중은 여타의 인물들을 탈출시키고자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소. 소제의 가장 큰 걱정은 역시 누님의 안위요."
"으음!"
이번에는 육선고가 말을 잃었다.
진일문의 말인즉 그녀가 절실하게 듣고 싶었던 답변이었으나 일면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포기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겨우 한 마디 했다.
"고마워요, 동생."
한편.
사대신가의 가주들은 서로 숙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다시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목적이 있어 이 곳에 들어온 이상 그것을 달성해야 했으나 이미 그들 사인 중 악군보가 목숨을 잃었으므로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소한 인질을구출해낸 다음이라면 몰라도 그러기 전에는 덧없이 목숨을 내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무림의 사대신가는 그 날로 봉문(封門)을 해야 되는 것이다.
한참 후에야 삼인의 가주들은 진일문에게 다가갔다.
"우리도 남겠소이다."
말을 꺼낸 자는 바로 황룡사가보주인 사운악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일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사운악은 아무래도 과거지사를 일소에 붙이고 편하게 진일문을 상대할 입장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토록 천시하고 경원하던 대상에게 의존을 하자니 심정이 착잡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진일문의 대답은 간단했다.
"고맙소이다."
자고로 때린 자는 그렇지 못해도 맞은 자는 두 발을 뻗고 잘 수 있다는 속언이 있다.
바로 지금 두 사람의 처지가 그러했다.
녹존성군도 빠지지 않았다.
"본 궁주는 삼성림을 우롱한 광무진인을 추궁해야할 뿐더러 대정검회의 결과를 알아야 할 의무가 있소. 역시 남겠소."
그의 결정을 끝으로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군웅들 중에는 더 이상 남겠다고 지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상황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대신가는 가주 삼인만이 남고 가솔들은 돌려 보내기로 했다.
무당파의 도인들은 광해진인으로부터 몇 가지 명을 전달받고 있었다.
그리고 녹존성군은 수하들 중 일곱 명의 녹의청년만을 자신의 곁에 두기로 했다.
기이이잉--!
굉음이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군웅들의 얼굴에는 제각기 놀라움과 두려워하는 기색 등 갖가지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개중에서 육선고만은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이어 사방의 벽이 움직이더니 새로운 여덟 개의 문이 생겼다.
그 문은 팔괘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는데, 실상 그것이야말로 귀수신장문의 사형제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었다.
"기관이 해제되었어요. 여러분들은 저 여덟 개의 문 중에서 오직 하나 뿐인 생문(生門)을 찾아 나가야 해요."
군웅들의 얼굴에는 일시지간 희색이 감돌았다. 하지만 의외로 선뜻 나서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당의 광수진인이 한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문이 생문일 것 같소만......?"
그는 애초 팔괘에 정통한 인물이었으나 현재로써는 스스로의 판단이 맞는지에 대해서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육선고는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지만 만일 기관을 해제하지 않았다면 생문은 휴문(休門)으로 위장되어 있을 테고, 그 상태에서라면 도장께서도 절대로 알아낼 수 없었을 거예요."
광수진인은 그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아울러 그는 내심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오호라, 부끄럽도다! 공부(工夫)란 평생 해도 모자라지 않음을 내 한낱 여인을 통해 배우게 되는구나.'
그것은 그가 작금의 사태를 통해 얻게 된 귀중한 교훈이었다.
마침내 군웅들은 생문을 통해 조심스럽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등에서는 하나 같이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워낙 험난한 고비를 넘기다 보니 마지막까지도 불안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시간이 그들에게는 흡사 억겁과도 같았다.
그들의 등뒤에대고 육선고가 외쳤다.
"호호호...! 모두들 기억해 두세요. 이 만겁수라동이 귀수신장문에서 만든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말예요. 앞으로도 이런 기관학의 총체는 다시 나올 수가 없을 테니까요. 호호호호......."
그녀의 웃음소리는 군웅들의 귓전에 차라리 예리한 비수가 되어 꽂히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귀수신장문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도, 그런 문파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번의 경험으로 인해 그들은 영원히 그 존재를 잊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귀수신장문 사형제들의 소원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수많은 무림인들의 희생까지도 포함하여.......
이제 광장에 남게 된 인물은 모두 열네 명이었다.
그들은 군웅들이 무사히 천사곡 밖으로 빠져나가기를 기원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이는 불안감은 지우지 못했다.
'과연 광무진인이 약속을 지킬까?'
설혹 그가 만겁궁 밖으로 군웅들을 내보내 준다 해도 천사곡에 매복이라도 있다면 사태는 또 달라진다.
하지만 그것은여기 에 있는 십사인의 선에서는 어떻게도 처리해줄 수가 없었다.
군웅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기이잉! 기이이잉--!
다시 굉음이 울리더니 여덟 개의 문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변화는비단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뜻하게 않게 사방의 벽이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녕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육중한 벽이 움직이자 바닥과 천정도 따라 마구 흔들렸다.
금세라도 전체가 붕괴되고 말 것 같은 순간이 도래하고 있었다.
"으음......."
중인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긴장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육선고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 기관 변화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이윽고 기관이작동을 멈추었다.
한 방향으로 또 다른 하나의 암도(暗道)가 나타났다.
정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시커먼 구멍처럼 보이는 그 암도는 마치 악마가 도사리고 있는 듯 일말의 공포감을 자아냈다.
중인들은 묵묵히 암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심정은각기 달랐다.
대부분 무림의 초절정 고수였으므로 이렇다할 불안이나 초조감은 없었다.
대신 분노나 투지등 광무진인을 향한 나름의 적대감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암도에서 불쑥 한 인영이 나타났다.
"아니! 저 자는......."
중인들은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나타난 자가 너무도 의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사장삼을 입었으며 목에는 백팔염주를, 손에는 선장(禪杖)을 잡고 있는 한 명의 노승이었다.
나이는 대략 칠순 가량이었고, 청수한 얼굴에는 온화한 기품이 넘쳐흘렀다.
황룡사가보주인 사운악이 신음처럼 부르짖었다.
"으음, 원광선사(圓光禪師)......."
원광선사라면 당금 소림사의 장문방장이다.
이 곳에서의 그의 출현은 중인들에게 있어 커다란 충격이었다.
역대에 걸쳐 소림은 중원무학의 본산이라고 일컬어진다.
소림의 장문방장이라면 중원무림의 영도자라고 할 수 있었다.
과거 마교대전에서도 당년의 장문인이었던 백료선사(白了禪師)가 중원무림의 맹주로써 군웅들을 이끈 바 있었다.
원광선사.
암도에 서 있는 그는 바로 백료선사의 대제자였다.
그의 출현으로 인해 장내의 분위기는 뜻하지 않은 국면으로 이어졌다.
"오랫만이외다, 선사."
삼가의 가주들이 먼저 그를 향해 포권례를 취했다.
사대신가는 소림사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다.
전대의 가주들도 그러했거니와 그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세월 동안 사가의 가주들은 소림과 친교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더구나 사대신가의 현 가주들이라면 직접 소림을 방문하여 원광선사와 안면을 터놓았던지라 인사를 청한 것이다.
"아미타불......."
원광선사도 합장불호로써 그들의 인사에 답했다.
불문의 고승답게 그는 대체로 담백한 표정이었다.
웬만해서는 세사 따위에 동요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홍안에는 온화한 미소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녹존성군.
그는 상황이 엉뚱하게 돌아가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뿐, 예의 같은 것은 취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는 나이나 경륜은 원광선사보다 아래일지 몰라도 신분으로 보아서는 뒤지지 않았으므로 그럴 필요도 못느꼈다.
지난날 그들 구대성군은 칠인의 장문인들을 격파한 적이 있었다.
그 일로 인해 삼성림과 칠대문파는 상호존중의 관계를 표방하면서도 내면상으로는 언제나 틈이 있었다.
원광선사가 조용히 걸어 나오더니 녹존성군에게 합장했다.
"아미타불... 성군께서는 그간 별래무양하셨는지요? 미처 마중하지 못한 죄, 무겁소이다."
녹존성군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검회의 참관인으로 초청을 받았다는 것은 허울일 뿐이지, 마중은 커녕 생각지도 않던 고초들을 겪다 보니 오히려 감정이 상해 있는 판국이 아닌가?
그는 차가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방장께서 삼성림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본 궁주도 알고 있소이다. 그러나 소림이 이렇게 객(客)에 대한 예를 모르다니 정녕 뜻밖이외다."
원광선사는 불호와 더불어 답했다.
"아미타불... 사정이 여의치 못해 본의 아니게 결례를 했소이다. 삼성림에 대해 별다른 사감은 없소이다."
녹존성군은 여전히 냉소했다.
"검회는 어떻게 되었소이까? 본인이 알기로 이번 검회에서는 칠파가 검맹을 결성하고 맹주를 선출한다고 들었소만?"
원광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맹주는 선출되었습니다. 저희 칠파는 앞으로 일맥(一脈)이 되어 행동할 것입니다."
그 말에 녹존성군은 물론 삼가의 가주들, 심지어는 진일문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원광선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원의 칠대문파는 무림 개사 이래 분수령이 되어왔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이 자리잡고 있어 사실상 통합을 이룬 적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검맹이 결성되었다면 그것은 무림사에 일대 변혁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것이 어째서 만겁수라궁 내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은 충분히 제기될 수 있었다.
녹존성군의 안면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럼 맹주는 대사가 맡으셨겠구려?"
원광대사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외다. 노납은 그저 검맹의 일원일 뿐이오."
"흐음?"
녹존성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중인들 역시도 불길한 예감으로 인해 하나같이 경직된 얼굴로 원광대사를 응시했다.
검맹의 수장(首長)에서 소림이 제외되었다면 그 다음은 당연히 무당이다.
그렇다면 당금의 칠대문파는 소림사의 방장인 원광대사를 젖혀 두고 무당의 광무진인을 추대했다는 말이 된다.
중인들은 서로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은 상대의 눈에서 피어오르는 분노의 불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광대사는 나직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시주들은 노납을 따라 오시오. 검맹의 맹주께서 여러분을 초청하셨소이다."
진일문.
그는 내심 기가 막혔다.
'검맹의 맹주가 초청을 한다고? 이미 만겁수라동에 들어와 있거늘 새삼스럽게 무슨 초청을 받는단 말인가?'
녹존성군도 이순간만은 그와 똑같은 심경이었다.
'초청이라? 대체 또 무슨 수작을 벌이려는 것인가?'
첫댓글 즐감요!!!!
잘읽고갑니다
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굿,,즐감,,,
감사합니다
즐감요.
쟴납니다
감사히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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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았습니다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