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피겨 1호는 미나리밭에서 나왔다[송혜진 기자의 느낌] 올림픽 꼴찌는 지금도 스케이트를 탄다… 50년 전 '원조 김연아' 김혜경
1968년 2월 10일 프랑스 남동부 그르노블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경기. 한국 최초의 피겨 국가대표인 18세 김혜경이 프리 스케이팅을 마치고 내려와 심사위원들이 내놓은 종합 채점표를 확인했다. 6점 만점에 2.4점, 32명 중에서 31등이었다. 경기 도중 기권한 캐나다 선수가 32등이었다. 다시 말해 꼴찌였다. "말도 안 돼…." 김혜경은 혼잣말을 했다. 미나리밭에서 경기했던 '원조 김연아' 피겨(figure)는 영어로 도형(圖形)을 뜻한다. 당시 피겨 스케이팅 경기엔 지금은 사라진 컴펄서리(compulsory)라는 도형 종목이 있었다. 피겨 스케이트 날의 안쪽과 바깥쪽을 자유자재로 움직여가면서 빙판 위에 8자·십자(十字)·S자 같은 각종 도형을 그려내는 종목이다. 1990년까지 치러진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선 이 컴펄서리가 전체 점수의 60%, 프리 스케이팅이 40%를 차지했다. 김혜경은 “컴펄서리가 우리나라 선수들에게는 특히나 어려운 과제였다”고 했다. "정빙기(얼음을 고르게 하는 기계) 없던 시절… 선수 엄마들이 마대자루로 빙판 밀어" ―왜 유독 어려워했던 겁니까. “잔재주가 안 통하거든요(웃음). 한국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뜯어보면 재주가 제법 있잖아요? 나도 다른 선수들도 프리 스케이팅 종목은 꽤 흉내 낼 줄 알았어요. 싱글 악셀 점프(공중에서 한 바퀴 도는 것)나 스파이럴 같은 정도는 따라 할 줄 알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컴펄서리는 그게 안 통해요. 매일 꾸준히 피가 나도록 연습해서 기량을 쌓아야 하는 종목이거든. 실내 스케이트장도 하나 없는 나라에서 컴펄서리를 제대로 연습했을 리가 있겠수(웃음)?” 아무리 스케이트가 인기라고는 하나 당시로는 돈이 꽤나 많이 드는 운동이었다. 일부에선 ‘사치 운동’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실내 스케이트장을 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해정 당시 대한피겨스케이팅협회 총무이사(現 빙상연맹 고문)와 박영진 협회장이 제3공화국 국가재건 최고회의까지 들어가 설득한 끝에 1964년 서울 동대문에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스케이트장이 비로소 문을 열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연중무휴로 여는 스케이트장이었다. 입장료는 10원, 1시간 활주료는 20원이었다. 실내 스케이트장이 생기면서 우리나라 피겨 스케이터들도 훈련이라는 것을 제대로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어떤 훈련이었죠? “8자 도형·S자 도형 꼼꼼하게 그리기…(웃음), 그런 거죠. 지금에 비하면 당시 선수들 실력이 보잘 것 없을 수 있겠지만 열정 하나만큼은 요즘 못지않았어요. 경기 있는 날에는 조금이라도 더 연습하고 타려고 새벽 5시부터 달려가서 몰래 담 넘어 들어가고 그랬으니까요. 그때는 빙판을 다듬는 정빙기도 없었어요. 아무래도 빙질이 안 좋을 거 아녜요. 우리 엄마를 비롯한 선수 엄마들까지 새벽에 같이 담을 넘어 들어와서는 마대자루로 빙판을 죽어라 밀었어요(웃음). 그 위에서 우리는 스케이팅을 한 거고요.” 김혜경은 우리나라 선수로서는 최초로 사비를 털어 1965년 3월 일본 홋카이도까지 가서 한 달 동안 전지훈련도 받았다. 김혜경은 “당시 일본 가서 충격 꽤나 받았다”고 했다. ―일본 선수들이 아무래도 더 잘했겠죠. “그 정도가 아니었어요. 일본은 당시 이미 메달리스트를 내놓을 정도로 피겨 강국이었거든. 그때 일본 선수들 움직이는 걸 힐끔 보면서 속으로 정말 놀랐죠. ‘우리가 하는 게 어쩌면 제대로 된 피겨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고. 근데 그래도 또 일본 애들 앞에서 기 안 죽으려고 애썼어요. 내가 스핀 하나는 제법 잘했거든요. 그 앞에서 보란 듯이 보여주고 그랬죠. ‘우리가 비록 피겨를 책 보면서 배웠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된다!’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말이지.” 그래도 꼴찌는 용감했다 1968년 1월 14일 김혜경은 한국 피겨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다. 진명여고 2학년, 18세 때였다. 남자 선수로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광영이 출전했고, 이화여중 3학년이었던 이현주 선수가 여자 피겨 선수로 나란히 선발됐다. 당시 올림픽 선수단 감독이었던 이해정 빙상연맹 고문(90)은 “본래 여자·남자 한 명씩만 뽑으려고 했으나, 당시 선수들 실력이 다들 고만고만한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더 출전시키자’는 피겨스케이팅협회 의지에 따라 여자 선수 둘을 뽑아 데려갔다”고 회고했다. ―올림픽 출전권이 나온 게 놀라운데요. “지금처럼 100여개 나라가 올림픽 메달에 도전하던 때가 아녜요. 고작 32개 나라가 출전했는걸. 동계올림픽엔 하계올림픽과 달리 돈이 없으면 제대로 배울 수 없는 운동 종목만 있잖아요. 어느 나라에서건 국가대표선수로 뽑혀서 출전 신청을 하면 웬만하면 받아줬어요(웃음). 우리도 그렇게 엉겁결에 올림픽에 나간 거죠.” 프랑스 파리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고, 다시 열차를 타고 그르노블에 닿았다. 선수단이 올림픽 선수촌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우리나라 대사관 직원들이 달려와 반기면서 김치부터 꺼냈다. ‘힘내라’는 뜻이었다. ―그르노블 올림픽 선수촌에서 김칫독을 열었다고요? “우리가 뭘 알았겠어! 당시 옆 테이블에 영국 선수들이 여럿 앉아 있었는데, 밥 한참 먹다가 돌아보니 다들 김치 냄새를 못 견디고 사라져 버렸어요. 그땐 왜 그런지도 몰랐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우리가 정말 대단히 용감무쌍했던 거야(웃음).” 프랑스 올림픽 선수촌 환경은 매번 낯선 전율로 다가왔다.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실내 연습장 온도였다. 서울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이 항상 덜덜 떨리게 추웠던 것과 달리 그곳 연습장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이광영 선수가 연습하다가 “너무 더워서 못 타겠다”고 할 정도였다. 김혜경은 미국 선수와 연습장을 함께 썼다. 그가 그르노블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부문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미국 스케이터 페기 플레밍이었다. ―페기 플레밍이 바로 옆에 있던 기분이 어땠나요. “제정신이 아니었지(웃음). 넋 놓고 보고만 있었어요. ‘와, 올림픽 나오면 이런 걸 다 겪는구나’ 했던 것 같아.” 유니폼은 어머니가 벨벳을 손수 바느질해서 만든 것으로 입었다. 당시 서울에선 저지나 라이크라처럼 죽죽 늘어나는 천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올림픽 경기에 쓸 음악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김혜경은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을 찾아가 당시 최신 장비로 3분짜리 녹음테이프를 만들어갔다. 그러나 정작 경기에선 그 테이프를 틀지 못했다. ―왜죠. “너무 지직거려서(웃음). 우리나라 최첨단 장비로 녹음했는데 음질이 나빠도 너무 나쁘다는 거죠. IOC에서 결국 저를 위해 새로 녹음테이프를 만들어줬어요. 그걸로 경기를 치렀죠. 우리나라 수준이 그만큼 낙후됐던 거예요.” 김혜경은 그러나 결국 32명 중 31위를 했다. 함께 출전했던 이현주 선수가 30위였다. 우리나라 선수가 끝에서 나란히 1·2등을 한 것이다. 이현주 선수는 올림픽 경기 이후 일본으로 빙상 유학을 떠났다가 결혼해 쭉 외국에 살았다. ―꼴찌한 게 부끄럽진 않았나요. “창피하기도 했죠. 근데 또 서럽지만은 않았어. 내가 올림픽까지 나와서 외국 선수들과 경기를 치렀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내가 비록 지금 꼴찌지만, 이 실패 덕에 우리도 언젠간 잘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또 싹 텄어요. 그래서 폐막식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공작새 깃털을 수놓은 한복을 입고 춤까지 췄죠(웃음).” 내가 올림픽 나간 지 50년, 평창서 올림픽이 김혜경은 올림픽 경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스케이트 선수 생활을 지속했다. 1970년엔 핀란드 유니버시아드에 참가했고, 1973년에는 미국 유명 아이스쇼단인 ‘홀리데이 아이스 쇼단’에 입단했다. 1975년에는 쇼단에서 만난 영국인 제리 윌리스(72)와 결혼했고, 같은 해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 프로페셔널 선수권 대회에 참가해 동메달도 땄다. ―선수 생활과 쇼단 생활은 완전히 다르지 않나요. “다르죠. 때론 화려하고 때론 외롭고…. 헬가(Helga)라는 이름으로 외국에서 쭉 활동했거든요. 일본에서부터 시작해서 동남아를 돌고, 유럽으로 건너갔다가 나중엔 미국·중남미를 거쳐 중동도 갔어요. 남편하고 계속 아이스쇼단에서 활동하다가 나중엔 ‘제리 앤드 헬가 윌리스’라는 공연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갈라쇼 하고 다녔고요. 평생 얼음 위에서 산 거나 마찬가지예요. 결혼식 날도 공연을 세 번이나 해야 해서 피로연 같은 건 아예 건너뛰었고, 아이도 안 낳았어요. 가끔 그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후회 없는 인생이었어요.” 김혜경은 올해 가을부터 영국 블랙풀 근처에 있는 한 대학에서 스포츠 과학을 공부할 예정이다. 스케이터로 살면서 대학 졸업 못한 한을 이제야 푼다고 했다. ―뒤늦게 공부하는 게 쉽진 않을 텐데요. “입학도 겨우 했어요(웃음). 학교에 내 지난 경력을 쭉 써서 보냈더니 기초 필수과목 몇 개를 1년 동안 이수하는 조건으로 입학시켜줬어요. 평생 몸을 움직였으니, 이젠 머리도 좀 움직여 봐야죠.” ―그동안 한국에 돌아오고 싶진 않았나요. 김혜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 “매번, 매 순간 그랬죠. 그래도 그냥 무작정 돌아올 순 없었어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때 그래도 올림픽 선수였으니, 정식으로 우리나라 정부에서 근사하게 초청받아서 돌아가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웃음). 그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어요. 근데 내가 올림픽 나간 지 50년 만에 드디어 평창에서 동계 올 림픽이 열린다잖아? 미나리밭에서 전국체전 하던 나라에서 어느새 김연아 같은 선수까지 나왔고. 더는 엉덩이가 들썩거려서 못 있겠더라고. 한국에 와야지 안 되겠더라고.” 김혜경은 잠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만히 속삭였다. “이젠 다들 나를 잊었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그동안 한국을 잊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매초, 매 순간 그리워해왔으니까….” |
출처: 하늘나라 -2-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나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