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본동초등학교19,20회
 
 
 
카페 게시글
삶의 이야기 스크랩 김혜경(67) 50년 전 `원조 김연아` - 2017.5.6.조선
하늘나라(홍순창20) 추천 0 조회 355 17.06.15 08: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올림픽 피겨 1호는 미나리밭에서 나왔다



[송혜진 기자의 느낌] 올림픽 꼴찌는 지금도 스케이트를 탄다… 50년 전 '원조 김연아' 김혜경



4세 때부터 발레 수업
TV도 인터넷도 없을 때 스핀·스파이럴 동작들 외국 책 보며 혼자 익혀

스케이트장도 없던 시절
초창기 전국체전은 청계천 미나리밭서 겨울에 얼음 얼면 경기

엉겁결에 올림픽행
프랑스 스케이트장 가니 너무 따뜻해서 놀랐죠… 김칫독 열었다가 눈총도




올림픽은 나갔는데…
죽죽 늘어나는 천 못 구해 엄마가 벨벳 옷 직접 지어
한국서 직접 녹음한 음악 음질 나빠 경기에 못 써

꼴찌는 용감했다
창피했지만 괜찮아요, 덕분에 스케이트 계속 타…
올림픽 출전 50년 만에 올림픽 개최한다니 신기

여전히 얼음판 인생
전세계 돌며 '아이스쇼' 남편도 쇼단서 만났죠
결혼식날도 공연 3번 해…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1968년 2월 10일 프랑스 남동부 그르노블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경기. 한국 최초의 피겨 국가대표인 18세 김혜경이 프리 스케이팅을 마치고 내려와 심사위원들이 내놓은 종합 채점표를 확인했다. 6점 만점에 2.4점, 32명 중에서 31등이었다. 경기 도중 기권한 캐나다 선수가 32등이었다. 다시 말해 꼴찌였다. "말도 안 돼…." 김혜경은 혼잣말을 했다.

한국에서 그는 늘 1등이었다. 4년 동안 전국체전, 동계빙상대회에 여자 피겨 싱글 선수로 나가 챔피언을 딴 것만 다섯 번이었다. 학교 운동장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면 같은 학교 친구들이 수십 명씩 몰려나와 구경하고 박수를 쳤다. 누군가는 이렇게 외치곤 했다. "혜경이가 최고다!" 그런 그가 우리나라 최초로 올림픽 여자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 나와서 꼴찌를 한 것이다. 김혜경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때였다. "수고했다." 이해정 감독이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김혜경은 이 감독을 올려다보고 이내 눈을 감았다. 울고 싶지는 않았다. 눈을 감은 채 그는 이 감독에게는 말했다. "있잖아요 선생님, 저 꼴찌 했다고 주눅들지 않을 거예요. 스케이트 계속 탈 거예요." 이 감독은 씩 웃었다. "두말하면 입 아픈 소리 하는구나. 당연하지!"

49년이 흘렀다. 지난 4월 21일 서울 목동 진명여고 강당에서 열린 개교 111주년 기념식에서 김혜경(67)은 다시 떨리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쏟아질까 봐 덜컥 겁이 났다. '2017 자랑스러운 진명인' 상을 받는 자리였다. 200여 동창이 그를 향해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꽃다발을 가슴에 안은 채 김혜경은 마이크 앞에 섰다. 서툰 한국말로 그는 더듬더듬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 심정은 한국어로도, 영어로도 표현할 수가 없어요. 제대로 된 단어를 못 찾겠어요…. 저를 한국이 기억하고, 이렇게 불러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시상식을 마친 김혜경을 서울 한 호텔에서 만났다. 그에게 "스케이트를 계속 타겠다던 그때 그 약속을 지켜왔느냐"고 물었다. 김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지난 49년 동안 세계를 돌면서 쉬지 않고 스케이트를 탔어요. 요즘도 무대에 서요." 평창올림픽이 열리는 내년은 그가 한국 피겨 선수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한 지 꼭 50년이 된다.


이미지 크게보기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에서 사진 찍자”고 했더니 한국 최초 올림픽 피겨 국가대표였던 김혜경은 잠시 주저했다. 자신의 스케이트를 안 들고 왔는데, 남의 것을 빌려 신고서는 제대로 된 피겨 동작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김혜경은 그러나 결국 빌린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판에 섰다. 67세 나이에도 악셀 점프를 하고 스파이럴을 했다. 나중엔 “이만하면 됐다”는 사진기자에게 “다시 찍자”고도 했다. “아까 그 동작은 어딘가 엉성했다”면서. 그는 여전히 프로였다. / 이태경 기자


미나리밭에서 경기했던 '원조 김연아'

―요즘도 무대에 서신다고요?

“그렇다니까요. 작년 크리스마스엔 영국 웨일스 카디프 지역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했어요. 내가 아이스 쇼 단원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요. 몇 달 전에는 영국 블랙풀에서 ‘댄싱 돌 온 아이스’를 공연했고. 아직도 20대 단원들과 호흡을 맞춰요. 비록 나이 먹고 체력이 예전 같진 않지만, 그래도 몸 좀 풀면 웬만한 동작은 여전히 할 수 있다오. 진짠데? 영 안 믿기는 눈치네(웃음)?”

김혜경은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평북 신의주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건축가였고 어머니는 의대까지 다녔던 신여성이었다. 당시 만주와 신의주에 살던 몇몇 인텔리들 사이에선 아이스 스케이팅이 유행이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들이 스케이트라는 낯선 물건을 들고 나타나 얼음판에서 신고 쓱쓱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다. 김혜경의 어머니도 금세 스케이트에 열광했다. 빙판 위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몸짓이 그렇게 모던하고 근사해 보일 수가 없었다. 마침 일본 피겨 대회에서 챔피언을 따냈던 모루오카 미츠코가 압록강에서 공연했다. 그 쇼를 보면서 어머니는 “나중에 딸을 낳으면 꼭 피겨 스케이팅을 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부모님은 서울로 피란을 내려와 김혜경을 낳고 광화문에 자리를 잡는다. 전쟁 직후 모두가 배고팠던 시절, 김혜경은 어머니 꿈과 극성 덕에 네 살 때부터 발레를 배웠고 여섯 살 무렵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보통 유복한 집안이 아니었나 보네요.

“그랬었나 봐요. 그 당시 엄마가 내 발레 옷하고 발레 슈즈를 일본에서 수소문해서 구해왔어요. 그걸 동그란 통에 양산하고 같이 넣어서 어깨에 메고는 엄마 손 붙들고 전차를 탔죠. 남산 아래 송범 선생이라는 분이 발레 가르치는 학원이 하나 있었는데, 거길 오가던 기억이 지금도 어렴풋하게 나요(웃음).”

서울에 실내 스케이트장이 없던 시절이었다. 전국 체육대회 동계빙상대회는 보통 겨울철 강물이 꽁꽁 얼 무렵 열렸다. 초창기 전국체전도 그래서 청계천 미나리밭이나 한강에 얼음이 얼면 그 위에서 했다. 피겨 스케이팅은 3~4분 안에 기량을 보여주는 스포츠다. 3분짜리 음악을 녹음하는 기술이 없던 시절, 김혜경은 경기를 치를 때마다 SP판을 들고 다녔다고 했다.

―SP판, 그 작고 까만 음반요?

“응, LP가 보급되기 전에 나왔던 그거 말이에요. 나처럼 그나마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아이들이 그걸 들고 다녔어요. 나는 보통 요한 슈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 강’ 음반을 들고 다녔나 그래요. 요즘엔 피겨 선수들이 무슨 음악을 어떻게 고르느냐도 비밀에 부칠 만큼 음악이 중요하잖아? 그땐 그런 것 없었어요. 대회에 가면 심판이 나 같은 아이에게 그 SP판 하나 받아서 전축에 걸고 음악을 트는 거죠. 그 판으로 온종일 다른 아이들도 경기하는 거예요. 시계 갖다 놓고 3분쯤 지나면 심판이 바늘을 탁 들어요. 그러면 다음 선수가 다시 나와서 스케이트 타는 거죠! 가끔 SP판이 겨울에 꽁꽁 얼어붙으면 깨지기도 했어요. 그럴 땐 어떻게 했게? 심판이 입으로 노래를 불러줬어요! ‘따라라라~’ 하고(웃음).”

김혜경은 그 시절부터 제법 재능을 보였다. 그가 몸을 움직이면 주위에서 다들 “우와, 쟤 좀 봐!” 했다. 덕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진명여중 빙상반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도 그는 자연스러운 프리 스케이팅 동작을 선보였고, 금세 학교에서도 유명해졌다. 모두가 어깨너머로는 머리칼을 기를 수 없던 시절, 학교에서 ‘경기를 위해 머리를 올려 묶는 게 편하다’는 김혜경의 요청을 유일하게 받아들여 머리 기르는 것을 허락했을 정도였다.

―스핀이나 스파이럴 같은 동작을 그 시절에 했다는 건가요? 어떻게 배웠죠?

“어떻게 배우긴, 책 보고 배웠지(웃음). 그땐 TV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아녜요? 서울대 나오고 영어 잘하는 선생님들이 일본 유학 다녀와서 책을 구해왔어요. 그걸 우리에게 번역해주고 거기 실린 그림을 보여주면서 가르쳐줬죠. 그걸 따라 하면서 우린 프리 스케이팅이라고 연습한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좀 어이없지만요(웃음).”

우리는 피겨를 책으로 배웠다

1968년 그르노블올림픽에 출전할 당시 김혜경이 받았던 ID 카드. ‘대표선수(delegation)’라고 적혀 있다.
1968년 그르노블올림픽에 출전할 당시 김혜경이 받았던 ID 카드. ‘대표선수(delegation)’라고 적혀 있다. / 김혜경 제공


피겨(figure)는 영어로 도형(圖形)을 뜻한다. 당시 피겨 스케이팅 경기엔 지금은 사라진 컴펄서리(compulsory)라는 도형 종목이 있었다. 피겨 스케이트 날의 안쪽과 바깥쪽을 자유자재로 움직여가면서 빙판 위에 8자·십자(十字)·S자 같은 각종 도형을 그려내는 종목이다. 1990년까지 치러진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선 이 컴펄서리가 전체 점수의 60%, 프리 스케이팅이 40%를 차지했다. 김혜경은 “컴펄서리가 우리나라 선수들에게는 특히나 어려운 과제였다”고 했다.



"정빙기(얼음을 고르게 하는 기계) 없던 시절… 선수 엄마들이 마대자루로 빙판 밀어"



―왜 유독 어려워했던 겁니까.

“잔재주가 안 통하거든요(웃음). 한국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뜯어보면 재주가 제법 있잖아요? 나도 다른 선수들도 프리 스케이팅 종목은 꽤 흉내 낼 줄 알았어요. 싱글 악셀 점프(공중에서 한 바퀴 도는 것)나 스파이럴 같은 정도는 따라 할 줄 알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컴펄서리는 그게 안 통해요. 매일 꾸준히 피가 나도록 연습해서 기량을 쌓아야 하는 종목이거든. 실내 스케이트장도 하나 없는 나라에서 컴펄서리를 제대로 연습했을 리가 있겠수(웃음)?”

아무리 스케이트가 인기라고는 하나 당시로는 돈이 꽤나 많이 드는 운동이었다. 일부에선 ‘사치 운동’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실내 스케이트장을 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해정 당시 대한피겨스케이팅협회 총무이사(現 빙상연맹 고문)와 박영진 협회장이 제3공화국 국가재건 최고회의까지 들어가 설득한 끝에 1964년 서울 동대문에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스케이트장이 비로소 문을 열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연중무휴로 여는 스케이트장이었다. 입장료는 10원, 1시간 활주료는 20원이었다. 실내 스케이트장이 생기면서 우리나라 피겨 스케이터들도 훈련이라는 것을 제대로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어떤 훈련이었죠?

“8자 도형·S자 도형 꼼꼼하게 그리기…(웃음), 그런 거죠. 지금에 비하면 당시 선수들 실력이 보잘 것 없을 수 있겠지만 열정 하나만큼은 요즘 못지않았어요. 경기 있는 날에는 조금이라도 더 연습하고 타려고 새벽 5시부터 달려가서 몰래 담 넘어 들어가고 그랬으니까요. 그때는 빙판을 다듬는 정빙기도 없었어요. 아무래도 빙질이 안 좋을 거 아녜요. 우리 엄마를 비롯한 선수 엄마들까지 새벽에 같이 담을 넘어 들어와서는 마대자루로 빙판을 죽어라 밀었어요(웃음). 그 위에서 우리는 스케이팅을 한 거고요.”

김혜경은 우리나라 선수로서는 최초로 사비를 털어 1965년 3월 일본 홋카이도까지 가서 한 달 동안 전지훈련도 받았다. 김혜경은 “당시 일본 가서 충격 꽤나 받았다”고 했다.

―일본 선수들이 아무래도 더 잘했겠죠.

“그 정도가 아니었어요. 일본은 당시 이미 메달리스트를 내놓을 정도로 피겨 강국이었거든. 그때 일본 선수들 움직이는 걸 힐끔 보면서 속으로 정말 놀랐죠. ‘우리가 하는 게 어쩌면 제대로 된 피겨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고. 근데 그래도 또 일본 애들 앞에서 기 안 죽으려고 애썼어요. 내가 스핀 하나는 제법 잘했거든요. 그 앞에서 보란 듯이 보여주고 그랬죠. ‘우리가 비록 피겨를 책 보면서 배웠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된다!’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말이지.”

이미지 크게보기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그르노블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임원들의 모습(①). 이광영, 김혜경, 이현주 선수와 이해정 감독(왼쪽부터)이 나란히 섰다. 1975년 스페인에서 열렸던 세계 프로페셔널 선수권 대회에서 김혜경은 동메달을 땄고(②), 이후 영국인 남편과 함께 전 세계를 돌며 아이스 쇼를 기획·공연하며 지냈다. 2016년 멕시코 공연에선 젊은 단원과도 호흡을 맞췄다(③). / 김혜경 제공


그래도 꼴찌는 용감했다

1968년 1월 14일 김혜경은 한국 피겨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다. 진명여고 2학년, 18세 때였다. 남자 선수로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광영이 출전했고, 이화여중 3학년이었던 이현주 선수가 여자 피겨 선수로 나란히 선발됐다. 당시 올림픽 선수단 감독이었던 이해정 빙상연맹 고문(90)은 “본래 여자·남자 한 명씩만 뽑으려고 했으나, 당시 선수들 실력이 다들 고만고만한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더 출전시키자’는 피겨스케이팅협회 의지에 따라 여자 선수 둘을 뽑아 데려갔다”고 회고했다.

―올림픽 출전권이 나온 게 놀라운데요.

“지금처럼 100여개 나라가 올림픽 메달에 도전하던 때가 아녜요. 고작 32개 나라가 출전했는걸. 동계올림픽엔 하계올림픽과 달리 돈이 없으면 제대로 배울 수 없는 운동 종목만 있잖아요. 어느 나라에서건 국가대표선수로 뽑혀서 출전 신청을 하면 웬만하면 받아줬어요(웃음). 우리도 그렇게 엉겁결에 올림픽에 나간 거죠.”

프랑스 파리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고, 다시 열차를 타고 그르노블에 닿았다. 선수단이 올림픽 선수촌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우리나라 대사관 직원들이 달려와 반기면서 김치부터 꺼냈다. ‘힘내라’는 뜻이었다.

―그르노블 올림픽 선수촌에서 김칫독을 열었다고요?

우리가 뭘 알았겠어! 당시 옆 테이블에 영국 선수들이 여럿 앉아 있었는데, 밥 한참 먹다가 돌아보니 다들 김치 냄새를 못 견디고 사라져 버렸어요. 그땐 왜 그런지도 몰랐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우리가 정말 대단히 용감무쌍했던 거야(웃음).”

프랑스 올림픽 선수촌 환경은 매번 낯선 전율로 다가왔다.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실내 연습장 온도였다. 서울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이 항상 덜덜 떨리게 추웠던 것과 달리 그곳 연습장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이광영 선수가 연습하다가 “너무 더워서 못 타겠다”고 할 정도였다. 김혜경은 미국 선수와 연습장을 함께 썼다. 그가 그르노블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부문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미국 스케이터 페기 플레밍이었다.

―페기 플레밍이 바로 옆에 있던 기분이 어땠나요.

제정신이 아니었지(웃음). 넋 놓고 보고만 있었어요. ‘와, 올림픽 나오면 이런 걸 다 겪는구나’ 했던 것 같아.”

유니폼은 어머니가 벨벳을 손수 바느질해서 만든 것으로 입었다. 당시 서울에선 저지나 라이크라처럼 죽죽 늘어나는 천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올림픽 경기에 쓸 음악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김혜경은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을 찾아가 당시 최신 장비로 3분짜리 녹음테이프를 만들어갔다. 그러나 정작 경기에선 그 테이프를 틀지 못했다.

―왜죠.

너무 지직거려서(웃음). 우리나라 최첨단 장비로 녹음했는데 음질이 나빠도 너무 나쁘다는 거죠. IOC에서 결국 저를 위해 새로 녹음테이프를 만들어줬어요. 그걸로 경기를 치렀죠. 우리나라 수준이 그만큼 낙후됐던 거예요.”

김혜경은 그러나 결국 32명 중 31위를 했다. 함께 출전했던 이현주 선수가 30위였다. 우리나라 선수가 끝에서 나란히 1·2등을 한 것이다. 이현주 선수는 올림픽 경기 이후 일본으로 빙상 유학을 떠났다가 결혼해 쭉 외국에 살았다.

―꼴찌한 게 부끄럽진 않았나요.

“창피하기도 했죠. 근데 또 서럽지만은 않았어. 내가 올림픽까지 나와서 외국 선수들과 경기를 치렀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내가 비록 지금 꼴찌지만, 이 실패 덕에 우리도 언젠간 잘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또 싹 텄어요. 그래서 폐막식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공작새 깃털을 수놓은 한복을 입고 춤까지 췄죠(웃음).”

내가 올림픽 나간 지 50년, 평창서 올림픽이

김혜경은 올림픽 경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스케이트 선수 생활을 지속했다. 1970년엔 핀란드 유니버시아드에 참가했고, 1973년에는 미국 유명 아이스쇼단인 ‘홀리데이 아이스 쇼단’에 입단했다. 1975년에는 쇼단에서 만난 영국인 제리 윌리스(72)와 결혼했고, 같은 해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 프로페셔널 선수권 대회에 참가해 동메달도 땄다.

―선수 생활과 쇼단 생활은 완전히 다르지 않나요.

“다르죠. 때론 화려하고 때론 외롭고…. 헬가(Helga)라는 이름으로 외국에서 쭉 활동했거든요. 일본에서부터 시작해서 동남아를 돌고, 유럽으로 건너갔다가 나중엔 미국·중남미를 거쳐 중동도 갔어요. 남편하고 계속 아이스쇼단에서 활동하다가 나중엔 ‘제리 앤드 헬가 윌리스’라는 공연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갈라쇼 하고 다녔고요. 평생 얼음 위에서 산 거나 마찬가지예요. 결혼식 날도 공연을 세 번이나 해야 해서 피로연 같은 건 아예 건너뛰었고, 아이도 안 낳았어요. 가끔 그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후회 없는 인생이었어요.”

김혜경은 올해 가을부터 영국 블랙풀 근처에 있는 한 대학에서 스포츠 과학을 공부할 예정이다. 스케이터로 살면서 대학 졸업 못한 한을 이제야 푼다고 했다.

―뒤늦게 공부하는 게 쉽진 않을 텐데요.

입학도 겨우 했어요(웃음). 학교에 내 지난 경력을 쭉 써서 보냈더니 기초 필수과목 몇 개를 1년 동안 이수하는 조건으로 입학시켜줬어요. 평생 몸을 움직였으니, 이젠 머리도 좀 움직여 봐야죠.”

―그동안 한국에 돌아오고 싶진 않았나요.

김혜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 “매번, 매 순간 그랬죠. 그래도 그냥 무작정 돌아올 순 없었어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때 그래도 올림픽 선수였으니, 정식으로 우리나라 정부에서 근사하게 초청받아서 돌아가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웃음). 그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어요. 근데 내가 올림픽 나간 지 50년 만에 드디어 평창에서 동계 올 림픽이 열린다잖아? 미나리밭에서 전국체전 하던 나라에서 어느새 김연아 같은 선수까지 나왔고. 더는 엉덩이가 들썩거려서 못 있겠더라고. 한국에 와야지 안 되겠더라고.”

김혜경은 잠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만히 속삭였다. “이젠 다들 나를 잊었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그동안 한국을 잊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매초, 매 순간 그리워해왔으니까….”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