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단풍이 물드는 가야산의 해인사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해인사에 가는 것은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라는 잘못된 정보로 해인사에 가는 것은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였다. 해인사는 이미 여러번이나 다녀왔으므로 홍미가 떨어진 것도 원인이었다.
얼마 전에 누가 전해주는 정보는 새로웠다. 서부 정류장에서 정기적으로 해인사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1시간 간격으로 해인사에 가는 시외버스였다. 종착지가 절의 경내 주차장이니 대중교통편으로 절집 답사를 다니는 우리 부부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내 차를 운전하고 다닐 때는 10분이라도 기다리는 것을 불편해 했다. 그래서 조금만 기다리면 버스를 탈 수 있는데도 버스 승강장에서 멍히 기다리는게 싫어서 택시를 탔다. 절집 답사를 다니면서부터 버스를 한 시간 쯤 기다리는 것에 이골이 났다. 시간이 조금 오래가 되더라도 차가 출발할 때까지 푸근한 마음이 되어 기다린다.
서부 정류장에 갔다. 1시간 간격으로 해인사 행 버스가 출발했다. 우리 부부는 10시에 출발하는 버스의 승차권을 구입했다. 거의 만차일 만큼 승객이 많았다. 노년이신 분이 많았고, 옷차림으로 보아서는 시골의 농사군들 같았다. 나처럼 해인사에 간다는 분도 몇 분 보였다. 그들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나이기 들어 보였다.
차는 국도로 달려서 고령을 경유하여 해인사로 갔다. 경주로 가는 길은 익숙하다. 들녘이 너르고, 마을의 집들이 도회지 주택처럼 깨끗하다. 그러나 해인사 가는 차의 창 너머로 보이는 시골 마을의 풍광은 다르다. 골찌기를 이루는 산세 때문에 산이 마을의 뒤까지 바짝 다가와 있다. 산자락을 따라서 길게 늘어선 마을이 많다. 마을 앞에는 나무들이 늘어서 있거나. 당나무처럼 보이는 나무도 있다. 거의 대부분의 마을은 앞으로 냇물이 흘렀다.
마을에 바싹 붙어 있는 뒷산과, 개울과, 마을 앞의 숲들, 숲을 빠져나온 길이 논밭 사이로 꾸불텅하게 그어져 있는 모습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수필을 공부하시는 분들이 쓴 고향의 글에서 더러 느껴지던 시골 마을 모습이다. 우리보다 조금 앞선 세대들이 즐겨 불렀던 고향노래의 가락에서 그려낸 정경이 바로 이런 모습이리라.
예전에 88 고속도로로 달리다 보면 산 골짜기를 끼고, 늘어서 있는 집들과, 그 집들 사이로 꾸불퉁하게 뻗어나가는 골목길까지, 향수 심리를 불러 주었던 정경들이, 국도로 달리는 버스라선지 차창 너머의 풍광이 더 정겹게 다가온다.
1시간 너머 시골길을 달린 버스는 해인사로 들어가는 입구 고을인 야로면과 가야면을 지난다.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생활 도자기를 굽는 도요지였다. 길 옆의 언덕베기에는 깨어진 사금파리들이 널려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대신에 도자기 전시관이란 건물이 몇 채 보인다. 이제는 도예라는 이름으로, 생활자기가 아닌 예술품으로 도자기를 만들어서 전통을 이어가나 보다. 영남대 경제과 교수님이 여기서 만든 도자기와 옹기가 어떻게 유통되는 지를 다룬 책을 발간하였다. 나는 그 책에서 또 다른 내 나름의 읽기를 했다. 지게에 옹기를 위험해 보이도록 많이 지고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는 모습이며, 시골 장터에서 옹기를 파는 ------, 그 시대의 아랫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흥미롭게 보았다. 내가 어릴 때 옹기를 머리에 이고 와서 보릿살과 바꾸어 가던 아줌마도 생각난다. 이곳을 지날 때면 옹기 마을, 또는 사깃골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할아버지, 또 더 할아버지가 살아가던 모습을 떠올리곤 하였다.
지금은 새로 지은 시멘트 건물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거리도 한결 깨끗하다.
야로면과 가야면을 지나니 울울한 나무들이 터널을 만든다, 차는 나무 터널을 지나, 단풍이 곱게 물든 가야산 골짜기로 들어갔다.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는 가야산의 봉우리들이 보인다.
영조 때의 지리학자 이가환은 가야산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경상 일도에 암석으로 된 화산(火山 - 바위가 삐죽삐죽하게 솟은 산을 풍수에서 이르는 말)이 없는데 오직 이 가야산만이 바위 꼬쟁이가 줄줄이 이어져서 불꽃이 공중으로 솟아 오르는 듯하니, 높고 수려하구나.”
산의 생김이 예사 산과는 다르다. 가야산은 합천, 고령, 성주의 세 고을에서 모두 영산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근본적으로 산악신앙을 가진 땅이니, 불교 이전에 우리의 토속신앙지 였음은 당연하다. 나는 절집을 찾아다니면서, 절의 자리가 우리 토속신앙터라는 생각을 가지고 흔적을 찾으려 하였다. 더구나 산 아래 고을인 고령은 옛날 대 가야의 터전이다. 가야의 고분들이 수없이 남아있다.
아니나 다를까. 가야의 시조를 낳은 여신이 바로 가야산 산신인 정견모주이다. 정견모주는 천신인 이비가지에 감응하여 아들을 낳으니 대가야와 금강가야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모신신앙에서 천신신앙으로 바뀌는 것을 보여주는 단군신화와 같은 유형의 신화이다. 신성한 신앙지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아득한 조상이 신앙하였던 성지인 가야산은 뒤에 북쪽의 유목민이 남하하여 통치세력이 되어도 가야산은 여전히 신성지였다. 그 신성지에 후발 종교인 불교가 들어와도 가야산은 여전히 신성지이다. 그래서 해인사가 이 산의 자락에 터를 잡았다.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 명산이라는 지리산, 덕유산, 속리산이 모두 왜군의 더러운 발에 짓밟혔으나 가야산만은 그들이 범접하지 못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산의 성스러움을 더 돋보이게 한다. 그래선지 불교와 직접적이지 않는 전설도 많이 가지고 있다.
신라 말의 비운의 여왕인 진성여왕이 말년에 이곳에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다. 그 보다는 신라말의 최치원이 당에서 귀국하여 경주에 갔다. 육두품 신분인 최치원은 신라 왕족의 골품제 때문에 자신의 뜻을 펼칠 수가 없었다. 실망한 최치원은 경주를 떠나서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녔다. 가야산에 그의 흔적을 많이 남겨두었다. 가야산 골짜기에서 홀연히 사라졌다는 전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최치원의 행적을 보면 절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많다. 그러나 가야산 자락에 남아 있는 전설은 불교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아마도 신라 조정에 불만이 많았던 이곳 백성들이 만들어 낸 전설이리라.
가야산, 합천이라 하면 무어니, 무어니 해도 해인사가 유명하다. 오늘 내가 시외버스를 탄 이유도 해인사를 찾아가기 위해서 이다. 해인사의 창건년대가 신라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애장왕 때(802)이다. 이때는 선불교가 신라에 들어오던 시기이고, 이 때는 경주에서 먼 지역에 선 사찰들이 들어서던 시기이다. 강원도의 선림원지에서 보았듯이 화엄사찰이 선종사찰로 옷을 바꾸어 입던 시기였는데, 그런 시기에 화엄 십찰 중의 하나라는 해인사를 여기에 지은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내가 좀 더 공부를 해 보아야 겠다.
이 절은 매표소가 절 아래 4km나 되는 지점에 있다. 여기서부터 걸어서 들어가기는 너무 멀다, 그래서 매표원이 버스에 올라와서 승객에게 절에 들어가는 입장료를 미리 걷우었다. 우리 부부는 신분증을 내미니, ‘무료요’ 하고 지나쳤다.
버스 종점은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600m나 더 지나친 곳에 있었다. 해인사 입구에 많은 사람이 내렸는데, 우리는 모르고 종점까지 갔다. 승객이 해인사 입구를 으레 알리라 싶어서 였겠지만 기사 아저씨의 안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에 내려서 해인사 길의 입구를 찾으려 다시 걸어서 내려왔다. 여기서 1.2km를 걸어올라 가야 해인사 일주문이다. 우리 부부가 절집을 찾는 이유가 걷기 운동을 하자는 것이니 오르막이긴 해도 괜찮은 거리이다.
해인사는 젊은 날부터 여러 번이나 다녀간 절이다. 추억도 많다. 그 중에는 우리 부부가 결혼하기 전에 버스를 타고 이 절을 다녀간 일이 생각난다. 신혼 때도 다녀갔다. 손으로 꼽아보니 50년 쯤 전이다. 이제 노년이 되어 다시 찾아왔으니, 옛 그때에는 오늘을 생각하였을까.
해인사로 오르는 길에는 가을 단풍이 절정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길을 가득 메운다. 대구의 동성로 같고, 고향인 건천의 장날 같다. 우리 부부는 쉬엄쉬엄 걸어서 올라가면서 이 나이에 다시 찾아오게 해주니, 감사의 마음을 정견모주에 올릴까 부처님에게 아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