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암대종사님 존영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홍암대종사님,과 제자들 1946년 대종교총본사가 만34년만에 조국에 환국하여 대종교총본사에서 찍은 기념사진 ( 대종교 임정 국무 위원분들) {일제의 모진 탄압과 박해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여 동경성에서 대종교 할동 기념사진} ▲ 중국 화룡시 청파호 인근에 백두산을 향해 안장된 대종교 3종사 묘역. 홍암 나철홍암대종사님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모셨다. 가운데가 홍암 나철홍암대종사님, 왼편이 북로군정서 총재 백포 서일종사님, 오른편이 대종교 2대 도사교 무원 김교헌종사님 묘다. 반미특위(일본잔재 청산경찰)의 실패로 일본잔재들의 기득권 세력의 득세로 대종교는 탄압되고 30십만명 대종교 순교자 독립운공자 선열님들은 지금도 무시을 당하시며 대접을 못받으시는 슬프고 안따가운 현실, ,,, 인류 평화와 배달조국 광복을 위하여 10만명의 고귀하신 위대한 순교와 빛나는 30만의 무명 독립투사들의 영혼을 달래 드리며, 명복늘 빌며 다시 기억 하자 --- 성용탁 선도사 --평화포럼 강의 hp 010-6609-4989 1904년 백봉신사는 32인과 함께 백두산에서 수도를 하던중 한울의 묵계 계시를 받고 보본단 석실에서 발해시대 문왕이 보관한 고대 천신교의 고귀한 여러경전을 찿는다 그리고 단군교표명서를 발표하고 제자를 통해 홍암대종사님께 전수한다 『삼일신고』와 『신사기』신가 등 즉 발해 고왕의 삼일신고 예찬문(御製三一神誥贊文), 고왕의 동생 대야발의 삼일신고서(三一神誥序), 고구려개국공신 마의극재사의 삼일신고 독법(三一神誥讀法), 발해 문왕의 삼일신고 보존기((三一神誥奉藏記)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고대로 부터 천신교 경전이 발해국 문왕까지 삼일신고가 전해진 경위가 밝혀져 있고, 그 뒤에 대종교까지 전하여진 경위는 백두산의 백봉과 백전 등 32인이 1904년 10월 3일에 발표했다는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단군교포명서에서 백봉신사는 “본교는 4천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본래 있던 종교다”라고 밝혔다. 이어 “본교가 흥하면 천지가 다시 새롭고 산천이 다시 빛나며 인민이 번창할 것이고, 본교가 쇠하면 상하의 지위가 바뀌고 음양의 질서가 어그러져 만물이 흥왕치 못한다”고 설파해 놓았다 홍암대종사님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절망적으로 치닫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후일 대종교 중광에 함께 참여한 정훈모와 1908년 11월 네 번째 도일을 시도하여 국운을 돌리려는 노력을 하지마는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 즉 일본 동경에서 신교(神敎: 전래 단군신앙) 수행의 우두머리였던 백봉신사의 제자인 두일백(杜一白) 노인을 만났던 것이다. 두일백 노인은 홍암에게 단군신앙 관련 서책인「단군교포명서」와「고본신가집(古本神歌集)」 그리고「입교의절(入敎儀節)」·「봉교절차(奉敎節次)」·「봉교과규(奉敎課規)」등을 전해주며 “羅公의 금후 사명은 이 단군교포명서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미 1905년 11월 백봉신사의 제자였던 두암(頭岩) 백전(伯全)에게서 「삼일신고」와 「신사기(神事記)」를 전해 받은 바 있는 홍암은, 민족의 절망적 현실 앞에서 새로운 선택을 모색하는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의식을 통해 영계(靈戒)를 받고 귀국 길에 올랐다. 그리고 마음에 다시금 새긴 것이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이다. 이러한 가치는 홍암대종사님이 국운의 쇠퇴와 함께 평소 품어 온 가치로, 그의 후견인이었던 김윤식에게도 국망도존(國亡道存)에 대하여 여러 번 피력해온 것으로도 확인된다. 다만 그 정신의 의미가 단군대황조님 사상임을 이 시기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존(道存: 단군대황조님사상)으로써 미래의 희망을 찾고, 그 구체적 방법으로 단군대황조님 신앙의 중광(重光: 다시 일으킴)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은 홍암 대종사님 개인으로 본다면, 과거의 족쇄였던 유교적 자아의 껍질을 벗고 민족적 자아로 변모하는 것이며 민족적인 면에서는 단절되었던 민족문화의 거대한 줄기를 세우는 역사(役事)이기도 했다.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더불어 「단군교포명서」를 선포하고 단군신앙을 다시 일으킨다. 그리고 홍암대종사님을 비롯한 그 중심인물들은 과거의 몰민족적 자아를 탈각하는 종교적 통과의례의 하나로, 과거의 이름을 외자로 모두 개명(羅寅永은 羅 喆, 崔東植은 崔 顓, 姜錫華는 姜 虞,金敎獻은 金 獻, 申圭植은 申 檉, 趙琬九는 趙 亮, 曺成煥은 曺 煜으로 바꿈)했다.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온다. 즉 역사 속에 침잠되어 오던 단군신앙의 부활을 통해, 당시 주권을 잃어버린 암울한 민족사회 전반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민족정체성의 와해 속에서 방황하던 수많은 우국지사들과 동포들에게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하게 된다. 특히 「단군교포명서」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국망(國亡)이라는 수모를 당하게 된 역사적 원인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함께 도존(道存)이라는 정신적 일체감을 통한 치유방안을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국학중흥의 당위적 방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단군신앙의 원형인 선교(仙敎) 혹은 신교(神敎)의 계승의식을 분명히 천명하셨다 [단군교포명서]를 받은 나철대종사님은 1909년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망했으나 정신은 존재한다)뜻을 깨닫시고 1909년(기유년)인 단기 4366년 정월 15일 자시를 기해서 한성 북부 제동 취윤정 아래 8통 10호 육간 초옥 북벽(北壁)에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祭天)의 대례(大禮)를 거행하신다. 동지 오기호, 강우, 최전, 류근, 정훈모, 이기, 김인식, 김춘식, 김윤식 등 수십 인과 함께 행하며 단군교 중광을 공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고려중엽 천신교(대종교)가 700년만에 다시 문을열고 4366년 역사의 대광명한 한얼빛이 다시 떠오른날이 대종교 중광(重光)절 이다 교주로 추대된 나철대종사님은 교리를 정비하고 교세를 넓혀 1910년 2만 1,539명의 교인을 확보했으며 이름도 대종교로 바꾸며 교세 확장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리고 몇년후 그당시 일본의 탄압을 피해 중국 만주에 망명한 약 40만동포중에 80%에 해당하는 30만이상 동포가 대종교 신앙인 교인이 된다 1910년대부터 1945년 해방전까지 무장 독립 투쟁에 너,나 할것없이 모두 활발히 참여 한다 대종교 중광으로 나타나는 홍대종사님의 정신은, 국권회복을 위한 정치·외교 항쟁의 배경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중심자리에는 홍암대종사님의 의형제로서 대종교 최초의 시교사(施敎師)였던 신규식이 있었다. 신규식은 홍암에 의해 생명을 건진 인물로, 홍암의 순교(殉敎) 당시 추도만장을 통해 “조선 오백 년 간에 둘도 없는 선비요 대종교 사천 년 이후 제일의 종사”라고 홍암을 추앙했던 분이시다. 신규식은 박찬익·조성환과 더불어 형제의 의를 맺고 대종교 정치·외교 항쟁의 삼두마차를 형성한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대종교 신앙에 철저했다는 것과 중국어에 능통한 중국통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상해(신규식)·북경(조성환)·만주(박찬익)로 거점을 나누어 긴밀한 연락과 더불어 활동함과 동시에, 대(對) 중국외교를 발판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배후 지원에 대종교의 역할이 100% 절대적이었다는 평가도 이들의 노력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신규식 대형님의 주선으로 건물과 장소와 자금등 적극적인 토대와 발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종교가 반드시 부흥해야 한다고 생각한 인물이다. 까닭에 1912년 그의 주동에 의해 결성된 동제사(同濟社)도 단군신앙에 몸을 담고 있거나 그것에 크게 영향 받은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신규식이 동제사를 발판으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민족의 동량을 길러 낸 것이나, 『진단(震檀)』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킨 배경에도 대종교의 정신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1918년에 조직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의 일선 실무를 담당했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 역시, 신규식을 중심으로 한 동제사의 대종교 인사들과 박달학원 출신의 청년들이 중심이 된 단체라는데 주목된다. 임시정부수립의 산파 역할을 한 신규식을 위시하여, 이동녕·이시영·박은식·박찬익·조성환·조완구· 이상룡·김동삼·윤세용·현천묵·김좌진·김승학·황학수·이범석 등, 당대 항일운동의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모두 대종교도로서 임정 요직을 맡는 것이다. 임정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도, 신규식·박찬익과 더불어 의형제를 맺고 어천절(御天節) 찬송사까지 읊었던 인물이다. 또한 대종교 국내 총책임자였던 강 우(姜虞)가 무오년인 1918년에 이미 이승만을 고유(告由)로써 대종교에 입교(入敎)시킨 기록이 있음을 볼 때, 대종교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암시 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湖石先生文集」, 『독립운동사자료집』제12집(문화투쟁사자료집), 1977. p.517. ] 이런 점은 당대 대부분의 지도층 인사들이 대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정서적으로 국교적(國敎的) 대종교관(大倧敎觀)을 갖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백범 김 구 역시, 그의 사상적 이상의 좌표를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에서 찾았던 인물로 기회 있을 때마다 “배달민족으로서 대종교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는데, 그의 이러한 언급은 국교적 대종교관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낸 말이라 할 수 있다.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로도 불리는「대한독립선언서」는 대종교 정신에 의하여 발표된 정치· 외교 항쟁의 상징적 선언으로 후일 무장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선언이다. 이 선언은 대종교도들이 주축을 이뤘고 이승만·안창호와 같은 인물들도 참여했는데, 중국·만주·노령· 미주 등에서 활약하던 해외독립운동지도자들이 총망라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 선언의 내용적 특징 또한 대종교적 영향이 강하게 투영되었다는 점이다. 즉 단군대황조에게 무력으로 빼앗긴 조국을 무력으로 되찾겠다는 혈전주의에 대한 맹세와 조국독립의 기원을 갈망하는 내용이 주종을 이룬다.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는 39인서명중에 33인이 대종교 교도가 된다 무오독립선언으로 기폭재가 되여 3.1운동이 전개된것이다 홍암 대종사님이 1910년 개천절이라고 명명하고 기념한데서 유래한다. 이 개천절은 대종교라는 종교적 기념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범민족적 기념일로 승화되어, 망명동포들에게도 민족정체성의 상징일로 각인됨은 물론 민족의식의 고취와 조국독립의 의지를 다지는 기준이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1919년 임정수립 당년도부터 개천절경축행사를 공식으로 거행하여 정치· 외교 항쟁의 문화적 중심을 굳건히 다졌다. 또한 이 행사에는 임정관계자 및 교민들 그리고 중국 측 인사들과 일부의 상하이(上海) 외교사절까지 참여하는 대규모였다. 이것은 개천절이 이념과 정파를 초월하는 민족대동단결의 구심체 역할과 함께, 조국독립을 위한 항일운동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 유구한 문화를 바탕으로 자주문화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 세웠음을 보여주는 상징일로 기념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종교는 구한말과 해방 직전까지 항일무장투쟁에 따른 10만 순교와. 우리말 지키기와 한글 사전편찬, 역사 바로세우기 등을 통하여 우리민족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종교 교단 이다. 상해임시정부 ,독립무장투쟁,한글,문화,역사,독립투사,등 독립운동의 모든 집결지가 대종교였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독립운동의 아버지라 일커는 분이 대종교 홍암 대종사님 이시다 홍암대종사님의 뒤을 이여서 독립운동의 정신적 총 지도자로서 김교헌 무원종사님, 서일 백포종사님,윤세복 단애종사님 이렇게 독립운동 36년동안 이여저 갔다
또한 대종교 성직자,교직자,일반신도 모두가 독립운동가 였던것이다 그수가 무려 50만명 이상인 것이다 지금 안타갑게 대종교는 다른 종교들에 비해 무관심과 망각 속에 묻혀있는 종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종교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혁혁한 발자취는 섣부른 말로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크고 높은 찬탄과 경외의 대상이 되고도 남는다.
사상가이자 역사학도였던 2대 종사 무원 김교헌은 조선 역사에 만주를 포함시켜, 조선의 역사를 신라와 발해, 고려와 요금, 조선과 청 등의 남북조시대로 정리했다. 이런 사관은 이상룡 정인보 유인식 유근 안재홍 장도빈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한글 운동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 것도 대종교 교도였다. 한글의 아버지로 꼽히는 주시경은 애초 기독교 세례교인 이었지만, 대종교에 입교한 뒤 한글의 체계화 및 대중화의 초석을 놓았다. 그의 직계 제자인 김두봉 조선어연구회 회장은 홍암의 6인 시자 가운데 수석시자였고, 조선어학회 간사장이었던 이극로는 윤세복 종사가 가장 아끼던 제자였다. 홍암이 김두봉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윤세복은 이극로를 후계로 점찍기도 했다. 이극로는 윤세복의 지원으로 유럽 어문학을 체계적으로 배워 한글을 체계화할 수 있었다. 조선어학회를 함께 이끌었던 신명균 최현배 이병기 권덕규 이윤재 이희승 등도 대종교 교도였다. 언어학자이자 역사학도였던 정신은 북로군정서와 신민부의 핵심요원이었다. 그는 <사지통속고>를 남겼다. 한글과 함께 에스페란토를 사랑했던 백남규(한국에스페란토학회장 역임) 역시 대종교 비밀결사인 귀일당 요원이었다. 국학 운동을 이끈 위당 정인보도 대종교 교도였다. 역사학, 양명학, 한학 등 국학의 거두였던 정인보는 ‘얼이 빠지면’ 학문도 헛것이고, 예교도 빈 탈이며, 문장은 허깨비가 되고, 역사정신 또한 공허하다고 강조했다. 한국문학 통사를 확립하려 했던 자산 안확이나 현진건 이병기도 마찬가지였다. 현진건은 <동아일보>에 ‘단군성적순례’를 연재했다 . 임정의 건국 기본이념으로 채택된 조소앙의 삼균주의,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안호상의 한백성주의는 모두 홍익인간 정신을 사상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밖에 민족경제 실천에 앞장선 안희제,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 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등도 신심이 두터웠다. 대종교의 역할과 위상이 이렇다 보니, 해방 후 집권한 이승만도 대종교를 무시할 수 없었다. 대종교를 국교로 정하여 적극 지원하겠다는 약속으로 초대 내각에 이시영 부통령, 이범석 총리, 안호상 문교부 장관, 명제세 심계원장, 정인보 감찰위원장, 신성모 국방장관을 포함시킨 것은 그 때문이었다. 민세 안재홍은 미군정청 민정장관이었다. 물론 집권 초기 이들에게서 정통성의 단물만 취하려는 이승만과 홍익인간에 기초한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꿈꾸던 이들이 함께 갈 수는 없었다. 김두봉 이극로 정열모 유열 정인보 권덕규 안재홍 명제세 등은 6·25 전쟁 이전 월북하거나 전쟁 중 납북됐다. 대종교를 소외시키려던 이승만에게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이승만은 대종교를 국교로 한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반민특위 일제청산 경찰을 해체시키고 대종교인과 독립투사의 애국지사들을 팽하기 시작하며 일제 잔재들을 등용하기 시작 하였던 것이다 독립군을 토벌했던 일제의 만주군 장교 박정희에게도 대종교는 불편했다. 이들의 시대를 거치며 대종교는 국수주의적 신화이거나 시대착오적 신앙으로 매도됐다. 그와 함께 독립투쟁 과정에서 희생당한 10만여명의 넋과 민족의 제단에 저희 몸을 바친 선각자들의 희생도 모두 지워졌다.
아래글 독립운동명단은 모두 대종교 성직자 교직자등 지도자분들 이시다 ◑상해 임시정부 임원 대종교인: 이시영,박은식,조완구,신규식,박찬익,이상룡,안재홍,김규식, 신채호,이동녕 조경환,민필호,황학수,이광,등 22인 ◑한글우리글 지키기: 주시경,정인보,이극로,신영균,최현배,김두봉,이병기,권덕규,이윤재,이희승,등 ◑영화:나윤규 ◑경제: 안희재 ◑비행사: 안창남 ◑마라톤:손기정 ◑문화 : 안학,현진건, 이병기,안재홍,등 ★무장독립투사 : 북로군정서 총재=서일,총사령관=김좌진,참모장=이장녕,사단장-김규식,,등 연성대장= 이범석,홍범도,이상룡,조성환,나중소,현천묵,이정천,이정양,이홍래, 현천묵,계화,이장녕,조병준,최해,박영준,윤복영,오광선,이범석,궝영만,,등등 ★무오도립선언서 : 김교헌,조소앙,신규식,김좌진,김동삼,박성태,박찬익,손일미,여준,조성환, 한홍,황상규,신채호,이범윤,김학만,문창범,윤세복,,이광,이시영,이탁,허헉, 이상룡,이세영,임방, 이종탁,최병학,박은식,이동녕,신규식,이동휘, 북로군정서의 무장독립군 부서는 다음과 같다, 이 분들은 모두 대종교 교직 간부들 이시였다 ★총재: 서일(대종교 교직,전강) ★총 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이장녕★사단장 :김규식 ★여단장: 최해 ★연대장 :정훈★연성대장 : 이범석★경리: 계화★길림분서(分署)고문 :윤복영 ★군기감독: 양현 ★사관연성소장: 김좌진★교관: 이장녕★교관: 이범석★교관: 김규식 ★교관: 김홍국★교관: 최상운 ★임오교변 : 윤세복,권상익,김서종,나정련,안희재,나정문,오근태,이재우,이창언,강철구,이정, 성하식,김진호,안용수,이종수,권영준,김두천,이성빈,서윤제,김영숙,윤정현, 이용태,최관, ★오기호,이기,이용태,니현익,전희균,김인식,정관,이홍수,정원택,맹주천,이상설,오기현,황학수 이광,이인,신덕영,백남규,김승학,유근,윤세이,신성모 안재홍 ,김영숙,조만식,안호상,명제세, 등 ★광복후 대종교인 초대 정부내각 : ▲이시영=부통령, ▲ 이범석=총리, ▲안호상=문교장관, ▲명제세=십계원장,▲정인보=감찰원장,▲신성모=국방장관, ▲안재홍=민정장관,등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바로 독립투사 대종교인을 정부수립에 민심수습과 정부 기초수립 작업에 이용만 하고 반민투위(일제잔재 청산전담 경찰)을 해체하면서 대종교인들 모두 해임 팽 시켰다 또한 일본잔제와 미군정과 이승만정부는 임정정부의 지도자급 단체 귀국 과 독립군 지도자, 독립군단체의 귀국을 철저히 막고 방해하며 일본군 잔재들을 대다수 기용하여 군대을 조직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바로 일제때 일한 경찰,군인장교, 일제국사 학자,등 을 일본 앞잡이 악명높은 일제 잔제들을 수 없이 등용 시켰다 등용된 일본잔제 그들은 독립투사 척결,독립투사을 빨갱이로 매도,역사왜곡, 가짜 독립투사 명단 작업, 대종교 탄압 등 수없는 악행을 저질르며 재산,권력을 차지하며 기득권을 누리며 호의 호식 하였다. 지금도 일본잔제 그들과,많은 후손들은 기득권을 갖고 권력,재산을 쥐고 호의,호식 상류층으로 많은 부루를 형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근대 한국사를 보면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광복후에서도 역사가 너무나도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는다. 마치 한국의 독립투쟁사가 아니고 일제의 식민지 경략사 같은 느낌... 사이비 독립운동을 벌인 이승만이나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아들인 안창호의 흥사단 운동,기독교 독립운동의 주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며 크게 잘못된 기록인 것이다. 실제로 배달 조국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서 불굴의 신념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던 무장독립운동 계열의 사람들이 광복운동사의 주류로 사실로 기록 되어져야 한다. 또한 끊임 없이 광복이 오고야 만다는 신념을 갖고 전파한 독립 투사들이 진실하게 기록되여야 한다. 많은 이들이 구한말에 나철대종사께서 대종교를 창시한 것으로 알고 대종교가 하나의 신흥 민족종교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한국사의 크나큰 큰 불행이다. 대종교가 민족사에서 복권되는 날이 한국사가 바로 서는 날이 될 것이다. 대종교는 창교된 것이 아니라 중광 했다고 하는 이유는 이미 옛 고대 신시 개천으로 한얼님의 진리가 인간 세상에 최초로 내려온 때부터 있어온 민족 종교이며 인류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이어 오면서 면면히 이어지는 천선교(天仙敎)를 근세에 이르러 다시 일으킨 것이므로 중광(重光)이라 말한다. 그러기에 대종교 역사가 4478년이 되는것이다 나철홍암대종사님께서 삼일신고와 신사기. 단군교 포명서를 건네준 백봉신사님과 도인들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예전부터 내려오던 비전(秘傳)의 옛 천신교의 법통의 바통을 이여받아 현대 근대에 크게 일으킬 적임자로 나철홍암대종사님을 선택 하셨으며,그리하여 그 한울바통을 이여 받으신 나철홍암대종사님은 비로소 민족혼의 부활을 위하여 바른 민족 전통과 신앙이 필요함을 깨닫으시고 국수망도가존 즉 나라는 망해도 민족 뿌리정신은 살아있다는 신념으로 대종교 중광에 나섰던 것이다. 홍암대종사님은 무엇보다 우리 ‘독립운동의 대부’다. 그 이유는 홍암 대종사님 의해 근대 단군대황조님의 구국론이 고개를 들었고, 그 집단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의 총본산이 형성되어 총체적 저항의 에너지를 발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대 독립운동에 관여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홍암 대종사님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특히 1916년 홍암대조아님 순명조천에 의해서 사실상 본격적인 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홍암 대종사님을 ‘근대 국학의 스승’으로 볼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 국학의 근본적 뿌리랄수 있는 문.사.철이, 우리 모습의 문.사.철로 등장하는 게 홍암 대종사님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다. 우리 국어운동 자체가 사실상 홍암 대종사님의 대종교 중광에 의해서 본격화된다. 주시경, 김두봉, 이극로, 최현배 등의 대부분의 한글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홍암 대종사님의 절대적 영향 속에 있었다. 우리 국사도 마찬가지다. 대종교 중광 이전의 국사라는 것은 철저한 중국 유교중심의 역사관인데, 유교 중심의 역사관을 뒤집고 또 당시대 일제의 침략 속에서 일제 식민주의 사관에 정면으로 도전해서 우리 모습의 역사, 우리가 주인 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홍암 대종사님이이다. 그의 제자였던 김교헌, 또 그 영향 속에 나타난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등의 인물들이 홍암 대종사님에 젖줄을 대고 있다. 마지막으로 철학적인 면에서 보면, 사실상 조선의 국시였던 유교철학과 주변부의 불교철학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유교나 불교 이전의 우리 철학, 현묘지도의 철학을 되살려 놓은 장본인이 바로 홍암 대종사님이시다. 홍암 대종사님은 전래되어온 경전을 재반포해서 삼일(三一) 철학을 20세기에 처음으로 체계화 시켜서 제창했다.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철학을 우리 스스로의 모양으로서 돌려놓은 인물이 바로 홍암 대종사님 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가 주인이 되는 문.사.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하나의 문화적인 현상을 보더라도 우리의 수행, 민속, 제전 이런 것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전래되어온 모습으로서 되살려서 그것을 볼 수 있게끔 만들어준 인물이 역시 홍암 대종사님 이시다. 그래서 홍암 대종사님은 우리 문.사.철을 중심으로 한 국학의 진정한 스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암대종사님은 ‘신리대전(神理大全)’을 저술하여 단군대황조님의 신앙의 사상적 틀인 삼신일체 한얼님 신관 사상을 철학적으로 정확하게 규명하시여 대종교는 민족을 초월하여 인류종교로 정립 하셨다
대종교는 국내의 기반 뿐만이 아니라 1910년에는 옛 우리 배달강토인 북간도에 교당을 마련하여 조국 독립운동의 거점을 확보 하였다. 1911년에는 나철대종사님에 의해 파견된 신규식은 중국 상해에 독립운동의 발판을 구축했다.
나철 대종사님은 일제의 박해와 탄압를 피해 1911년7월21일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 청파호로 옮겼다. 일본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대종교의 만주 진출은 신앙의 자유와 교세를 떨치기 위함이었다. 1910년 10월에 이미 북간도지사를 설치하고, 11월에는 박찬익을 앞세워 청산리에 시교소를 두었다. 1911년 6월에는 화룡현 학성촌을 중심으로 활발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1911년에는 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했고, 군관 학교를 세워 무장 항일 세력 양성에 힘쓰게 된다. 특히 1912년에는 나철대종사님을 중심으로 박찬익·박승익·심근·현천묵·백순·조창용· 기길(대종사님의 부인) 등이 백두산 북녘 화룡지역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 하였다. 500여 가구가 한꺼번에 입교하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1000 여 명이 동시에 입교하는 사례도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포교활동이 이루어 졌다. 대종교는 중광후 1년안에 신도가 3만명 가까이 모여들었다 특정 지역이나 마을주민 전부가 입교하는 등 교세는 급속하게 확산 되었다. 그리고 청호와 서울, 상해, 소왕청에 4도(道) 본사(本司)를 두었다. 조선반도와 중국, 러시아 연해주 등 조선민족이 사는 곳에 학교를 세워 포교 활동과 민족교육을 힘썼다. 배달학교,신흥무관학교,동창학교,동명학교,사관연수관학교,등 많은 민족학교를 세웠다 정인보,이시영,지석영 ,김좌진,등,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수없이 대종교에 입교 하였다. 이들이 1920년대의 항일독립운동 전선에 나타나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인 배경에 대종교가 있다.
노령·연해주 지방을 관할하는 동도교구, 남만주로부터 중국 산해관까지 관할하는 서도교구,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는 남도교구, 북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북도교구, 중국·일본 및 구미지역을 관할하는 해외교구 등의 5개 교구를 획정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의 본산으로서 위상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김좌진·윤복영,·이범석·,여준·이홍래·정신·이동하·한기욱 등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종교인들이 무장독립운동의 지도자급으로 활동했다. 1940년대 까지의 임시정부-북로군정서-청산리 대첩-봉우전투 - 흑하사변-임오교변- 조선어학회 사건의 맥은 대종교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대종교는 민족정신과 전통의식의 담지자로서 조선사람들을 각성시키고, 광복의 의지를 북돋았으며,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투쟁 하였다. 대종교는 민족역사의 바른 흐름과 전통에서 자연스럽게 광복을 위해 노력 하였기에 사대주의/제국주의를 거부하고 민족의 광복을 위해 나아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일제가 철저히 탄압한 것이 사회주의/공산주의 였지만, 그보다고 더 극악하게 탄압한 것은 대종교였다. 당시 일제는 대종교를 종교를 가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인식하였었다.
당시 기독교는 선교사의 영향과 보수근본주의 영향으로 정교 분리를 내세우며 독립운동을 외면하는 흐름이었으며, 천주교는 일제에 영합하는 상태였고(안중근의사는 천주교도였지만 사형전에 천주교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불교는 일제의 침략에 휘말려 실제로 대처승단화 하였으며 (한용운 선사 등 일부의 저항이 있었지만 소수에 그쳤다), 유림은 친일세력으로 변신하였다. 투철한 신념과 확신으로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해방전까지 액하감옥에서 마직막 순교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마직막 해방전 끝까지 투쟁하였던 독립운동 세력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대종교 이다.
그리고 대종교는 시대상황에 따라 중광과 함께 조국을 찿기 위하여 항일운동의 선봉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일제하에서 일본이 공산당보다도 더 탄압을 받은 것이 대종교인 것을 보면, 일제가 얼마나 대종교를 싫어했는지 알수가 있다. 이에 대해 일제는 1915년 총독부령 제83호 ‘종교통제안’을 만들어 대종교를 종교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단체로 불법화 시킨 후 국내 포교를 금하였다
이에 항거하여 나철 대종사님은 황해도 구월산에서 1,한얼님을 위하여, 2,대종교를 위하여. 3,세계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이 한몸 대신 한얼님전에 받치신 이신대명(以身代命)으로 순명3조(殉名三造)의 유언을과 중광가,예언 등 남기시고 대종교 중광 8년후 54세일기로 순교 하셨는데, 일종의 호흡수련법인 조식법(調息法)을 써서 호흡을 멈추어 순국하신 것은 최고의 수행경지에 들었음을 나타내셨다. 1917년에는 윤세복, 박은식, 신채호, 조성환, 홍명희, 조소앙 등 대종교 핵심인물 14명 명의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한 바 있다. 1918년 대한(무오)독립선언 또한 대종교가 주도를 했다. 독립군 및 독립 운동단체 결집을 위해 연해주의 1918년 김교헌, 박찬익, 김좌진, 신채호,이시영, 이상룡, 이범윤, 조소앙, 박찬익,등 민족지도자,39인 연서로 조소앙이 집필하였다고 알려진 무오독립선언서는 일제의 대한제국 병합의 참탈이 사기의 강압과 무력폭행 침략에 의한 것이므로 한일합방은 무효임을 선언하고 대한민국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선포하고 육탄혈전의 무력으로 일제에 맞서 독립을 완성할 것을 <무오대한독립선언서(戊午大韓獨立宣言書)>를 화룡현에 있던 대종교총본사에서 발표하면서 무오독립선언을 토대로 2,8동경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되여 독립운동에 활기를 붙기 시작했다. 또한 3.1만세운동의 결실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당시 의정원 29명 중에서 대종교 원로가 21명이었고,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 중에서 11명이 대종교였다고 한다. 3분의 2 이상 대종교 교인 이였다 그리고 실제로 무장독립운동단체를 만들어 일제와 싸웠다. 서일, 김좌진,윤세복,김혁, 이상룡 등 대종교인들이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흥업단, 신민단, 대진단 등 독립군을 만들어 마침내 청산리 대첩,봉우대첩을 대승으로 이루어 내었다.
청산리 전투에 대승을 거두신 백포 서일종사님은 함경북도 경원 태생으로 경술 국치후에 동만주로 망명하여 홍암대종사님의 말씀에 감화 되시여 31세에 대종교에 입교한 분이시다. 서일 종사님은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직접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중광단은 정의단으로 확대 개편되고 나아가서 북로군정서로 발전하였다. 김좌진,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사관연성소 출신들로 이들을 주축으로 청산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백포 서일 종사님은 한학과 역리(易理)에 능통하신 분으로 불교와 신학(神學)에도 조예가 깊어 ‘회삼경’ ‘삼일신고 도해 강의’, ‘신리 주해(神理 註解)’, 종지강연, 삼일문답 등을 저술하셨다.
서일 총제님으로 계시던 북로군정서의 독립군 2천8백명의 독립군은 80%가 대종교의 교인들이였다 그리고 독립군 군자금을 대종교 신도들이 100% 충당하였다 2800명으로 일본군3천300명의 일본군을 모두 섬멸하는 세계 역사의 유레가 없는 대승 이였으며 독립군은 70명을 고귀하신 희생을 당했다 대종교인들과 독립군들을 향해 가해진 일제의 보복과 참살은 가혹하고도 끈질겼다. 소련으로 망명한 독립투사들은 일(日)공사 요시자와의 위협 사주를 받은 소련으로부터 무장해제를 강요당하는 소위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는 직격탄을 맞았고 다시 일본군의 보복을 대비 하기 위해 밀산 당벽진에서 전력을 정비 하는중 간교한 일본군은 중국의 산악 지대 전투에 밝은 중국 마적단 고산직을 매수하여 야밤에 일본군 야포까지 동원하여 급습하니 우리독립군은 속절없이 비참히 참화를 당하는 통분한 일이 벌어졌다 토비(土匪)들의 습격까지 겹쳐 급격히 힘을 잃게 됩니다. 동포들의 희생과 수많은 청년독립군들의 희생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였다 수천명의 애국지사 독립군은 태국기와 사랑하던 가족 사진을 가슴에 품고 비통한 죽음을 당하였고 동포마을에 있던 대종교 교당 건물은 불태워지고 대종교 교인들은 어린아이,아녀자,노인 ,닥치는대로 살인,방화로 모조리 다 원통한 죽음을 당하였다
이 비참하고 비통한 현실을 보시고 백포 서일종사님은 1921년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8일)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이런 유언을 남기고. 귀신도깨비 날뛰고 뱀과 돼지가 물어 뜯어 인족은 피투성이 되고 해는 저물어 길은 끊겨도다 인간은 어디로 갈 것인가 ? 라는 한탄시를 읊으며 이 모든 참화가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고 뒷산에 올라 페기법으로 스스로 41세 한창나이에 순국 하셨으니 정말로 한울도 울고 산천초목이 다 통곡하며 울었다. 그러나 순국하신 서일 성자는 말이 없으셨다 김교현 무원대종사님는 그당시 최고의 대학자 였으며 1910년 대종교에 입교 하셨고 서울 종로의 조계사터 99 칸 대궐같은 집과 많은 토지를 팔아 모두 만주에 와서 민족학교를 세우시고 교적 발행과 독립자금을 충당하셨다 만주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중 1916년 홍암 나철 대종사님이 순교하시자 교통을 전수받고 활동에 나서 1922-1923년간에 46개의 시교당을 설치하셨다. 신단민사 신단실기 단조고사의 상고사 역사를 정리 집대성 으로 집필하시고 만주에 34개소, 국내 6개소, 러시아지역 3개소, 중국본토 3개소였다. 이를 보면 일본의 악할한 탄압을 피해 대종교의 확장은 옛 배달나라땅 만주지역 동포를 중심으로 대종교를 포교하며 독립운동의 주류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무원종사님은 밤,낮으로 원도와 교리와 역사집필에 정진하시며 포교에 매진 하신다 사랑하던 대종교 시교사 신규식 가족이 일본군 의해 몰살당하고 많은 동포가 일제에 학살당하는 여러 비보를 듣으시고 식음을 끊고 차디찬 혹한의 냉방에서 상심의 병환과 동상으로 57세로 순교 하셨다 대종교의 3세 교주를 지낸 단애 윤세복 종사님은 1910년 10월 12일 홍암 나철 대종사님를 만나 큰 감명을 받은 후 입교하여 밀양의 수만석의 대부호의 토지를 몽땅 팔아 대종교포교,교육사업, 독립자금으로 충당하셨으며 만주 환인현에서 대종교 시교사로 일하면서 동창학교를 설립하시고, 액하감옥에서 삼법수행의 삼법회통을 집필 하시며 밤낮 원도와 포교와 독립운동에 밤,낮으로 매진하셨다.
조국이 해방이 되여 1946년 단애종사님은 대종교총본사 간판을 짊어지시고 교우들과 함께 34년만에 조국에 환국 하시여 교리 연구와 후배 양성에 매진하시였다 일제 액하 감옥에서 일본경찰에 심한 고문을 당하시여 그 휴유증으로 1960년 파란만장한 80세로 순교 하셨다 1925년 일제는 “대종교 주요 간부인 서일종사님이 대한독립군의 수령으로서 그 교도를 이끌고 일본에 항전하였으니 대종교는 곧 반동군단의 단체로서 종교를 가장한 항일단체이니 중국에서 영토책임상 이를 해산시켜야 한다”는 것에 의해 일제 통제에 있는 일제만주국에서의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져 대종교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대중국외교통이었던 박찬익이 활약하여 1929년 포교금지가 풀리지만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 다시 활동이 금지 되었다. 그럼에도 단애 윤세복 종사님은 1934년 대종교 선도회를 조직하여 포교와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39년에는 대종교 교적 간행위원회를 발족하여 2만권에 이르는 대종교 서적을 간행하였다. 이극로의 ‘널리 펴는 말’을 트집잡아서 국내와 만주, 중국에서 대종교 박해사건을 일으킨다. 국내에서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알려진 것이며 만주와 중국에서는 ‘임오교변’이었다. 1942년 임오교변으로 단애 윤세복 종사를 포함한 25여명의 전국의 대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다 체포되시여 일본 경찰의 악란한 고문으로 10명이 순교 하셨다. 그 10분이 임오 십현감 이시다 대종교는 대종교를 접하였던 당시의 한국인에게는 모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신채호와 박은식은 대종교에 입교한 뒤 그전까지 가졌던 고루한 유학에서 벗어나 민족의 자주정신을 깨우치고 단군조선부터 고구려, 발해를 이어 내려온 민족 전통에 그대로 접목하여 역사와 철학을 완성시켰다. 신채호 선생의 ‘동국 민족고유의 도가,선가, 낭가 사상을 정립한 것이며, 박은식의 몽배금태조는 과거 사대모화적인 유교정신의 잔재를 청산하면서 느낀 자기 고백의 회심서(悔心書 : 뉘우침의 글)인 것이다. 국학과 한문화보급 운동에서도 대종교 지도자들은 그 중추적 역할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에선 민족주의란 존재하지 않았다. 중화주의만 존재했을 뿐이다. 신채호도 대종교를 경험한 이후에야 민족주의적 사관을 체계화 했다. 단재는 윤세복(대종교 3대 종사)이 회장이던 광복회에서 부회장을 맡았고, 신규식의 초청으로 상하이로 가서 대종교 종립학원인 박달학원을 설립하고 한국사를 강의했다. 그가 <조선상고사>를 집필한 것은 봉천 회인현의 대종교 종립 동창학교 교사 시절이었다. 박은식 역시 애초 중화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다. 입교 후 <대동고대사론> 등을 통해 유교적 사대주의 청산을 강조했다. 조선어학회의 기둥이었던 주시경 선생 또한 배재학당을 졸업하면서 받은 기독교 세례를 버리고 대종교로 개종하였으며, 국어사랑의 바탕을 단군대황조님 신앙에서 찾아 민족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어학회를 이끌었던 이극로 선생은 단애 윤세복 종사님에게 감명을 받아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당시 조선어학회가 국내의 대종교 비밀 결사조직을 실제로 담당하였다. 민족자본가로 독립운동의 군자금을 대었던, 독립투사로 알려진 백산 안희제 선생도 대종교 정신을 토대로 민족경제를 위해 노력하였던 분이시고 임오교변 때 순국하셨다. 일본이 참탈당한 그 당시 대종교가 처음부터 해방전 끝까지 목숨을 걸고,받히며 장렬한 무장투쟁을 하는 동안 기독교나 다른 종교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일제에 영합하는 태도를 취하였던 점과 큰 대조가 된다. 대종교는 중광한 이후 바로 항일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나가 민족의 독립과 미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군에 맞서서 치열한 항알투쟁으로 끝까지 싸웠던 배달민족 뿌리 종교이다. 그 당시 대종교인 모두가 하나같이 오직 조국광복과 민족뿌리 정신을 찿고, 인류평화를 위해 농사를 지으면서, 재산,돈,등 모든것을 아낌없이 독립운동에 받치며 자신들은 헐벗고 굼주림을 고통속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까지 살신성인으로 기꺼히 조국을 위하여 희생 하셨던 것이다 무려 10만명 이상의 대종교 교인분들의 선열님이 일제의 의해 순국하셨던 그 위대하신 선열분들 생각하면 우리는 너무 부끄럽고 면목이 없다 이러한 순수한 10만분들 이상 희생한 종교신앙,단체가 세계어느 곳에도 찿아 볼수가 없는것이다 그러나 대종교는 광복이후에도 국내 실권을 장악한 친일파들과 친일잔제 와 기독교만을 절대시 하는 기독교도들에게 노골적인 박해를 받으며 대종교는 점점 쇠락하여 졌다. 미군정에 박해를 받고 이승만정권에 등용된 일제 잔재들에 박해를 받고 일본 군인장교 노릇한 일제 앞잡이 군인장교출신 사람들에게는 대종교는 눈에 가시였다 독립투사분들을 다 내쫓고 팽하고 정치,교육,경제,경찰,군대,사법권 등 모든 기득권자들은 거의 일제잔제들 친일파들 이였으니 (만주에서 대종교 독립군 섬멸에 앞장섰던 조선족 일제 장교) 그래서 이승만 정권과 5,16군사정권은 대종교가 세운 홍익대학,경희대학,단국대학,국민대학을 강제로 다 빼앗아 대종교의 인제 양성을 차단하여 단기연호를 폐지 하며 대종교 발전을 막았다 이러함의 역사가 민족적으로 보면 참 불행한 역사인 것이다 예컨대 대종교인들은 일본인과 일본앞잡이 일본잔재 조선인에게 늘 박해와 살해위험이 뒤따랐다. 대종교인 대부분이 독립운동의 지도자급들 인데다가 하는 일도 일본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한글국어보존 운동과 배달역사바로세우기 아니면 무장투쟁을 선도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과 일본앞잡이 조선인들에게 참혹한 박해와 가난과 순교의 길 아니면 참살을 당해 고혼으로 떠도는 사람들이거의 대부분이 대종교인 이다. 대종교의 순국선열분들은 모든 것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바쳤기에 광복 후에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는 기억하는 이들이 별로 없음은 한국사의 너무나도 큰 비극이다. 그러나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들이 있으며, 한국사에서 일제 강점기가 공백이 아닌 당당한 투쟁의 역사로 기록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은 독립운동으로 그때 가신 영령들에게 최소한의 감사와 진혼곡을 올려드려야 하며. 삼가 명복을 빌여 드리며, 위로해 드리며 대접 하여 드려야 한다 민족적 고유 전통 위에서 조국광복과 인류평화를 위해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구현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대종교가 흘린 10만 선열님의 고귀하신 피와 땀에 대해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대종교의 무장독립의 수 많은 순국선열님 이 아직도 독립유공자의 대접도 못받으시고 푸대접에 잊혀저 가는 통탄할 현실이다, 목숨,재산,가족 모두다 조국광복에 다 받치신 대종교인이신 독립유공자 선열님들을 과거 정부에서는 독립유공 1 -2 등 공신도 안드리고 대종교신도라는 이유 때문에 3 -4등의 푸대접 공신을 드린 경우가 많다 정말 가슴을치는 어이없는 일이다 지금도 독립운동 방송에 다른 종교인들의 독립운동 명단은 매스컴등에 선전되면서 , 독립운동의 총 본부 중심 역활을 한 대종교(大倧敎)는 대(大) 자도 안보낸다 왜그럴까? 대종교가 독립운동의 역활이 70-80%을 차지하니 대종교가 거론되면 모두가 위축이되고 친일잔재들이 들어나 위축이 되고 잘못된 역사판도가 바뀌는 것이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것이다 친일파가 수많이 득세하여 민족주의자들 독립투사분들을 역 청산한 바탕위에 비틀려 거꾸로 선 한국의 현대사가 바로 잡히는 날, 대종교의 인류평화와 조국 광복의 희생이 다시 평가 받을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바로 우리배달나라의 정체성이 바로서며 단군 대황조님께서 위대하심이 드러나며 세게적인 한울의 천리가 드러나며 대 국운이 도래 할것으로 본다 일제로부터 조국이 해방이 되였지만 외세의 힘에 의한 해방을 맞이하다 보니 외세들은 대한민국이 하나로 통일 독립되는것을 막았다 조선반도는 세계지리에 천혜의 요새이므로 엄청난 강대국이 될수있는 여건이 되므로 소련과 미국은 조선반도 분단을 원하고 일본은 맞장구를 치니 우리 한민족은 다시 미소 양국의 이데올로기 체제 사상 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북으로 갈렸고, 6.25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남북 분단은 돌이킬 수 없는 한많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70여년 동안 정말 불행한 한 많은 역사가 된것이다 만약 해방이 되고 바로 분단이 안되고 남북이 하나로 통일되며 일제가 청산되고 개혁과 개방을 민족정신으로 이루워 갔다면 우리나라 조국은 독일보다 중국보다, 일본보다 더 강대국이 되여 미국, 러시아, 대한민국이 세계최대 강대국으로 되여 일본이 대한민국을 감히 무시 못하는 쩔쩔매는 초강대국 복지국가 대한민국이 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불행하게도 외세 강대국의 농간으로 남한은 일제청산도 못하여 왜곡된 가짜 국사역사를 배우고 서양의 기독교 자본주의 사상의 영향 아래 자유시장경제 질서와 반쪽 기울어진 자유주의 체제로 나왔고, 북한은 서양의 유물론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 아래 국가계획 경제질서와 사회주의 체제로 나왔다. 그래서 우리조국은 완전한 통일을 못하고 같은 민족끼리 분단으로 원수가되여 총부리를 서로 가슴에 겨누고 있는 가슴아픈 일이다 남북 분단의 원흉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 체제 경쟁은 끝난지 오래지만, 아직도 외세의 농간에 남북은 여전히 분단 상태다. 한반도라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를 가지고 수천 년을 함께 살아온 단일민족이 아직도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70년을 지내고 있다니, 참으로 한많고 한심하고 부끄럽고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힘에 의해 전쟁으로 이루어지는 통일은 또 하나의 큰재앙을 가져올 뿐이다.
조선반도의 조국의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러시아,중국,일본이 분명히 개입되여 조국은 완전 초토화 되며 더 불행한 2차 3차 분단이 이루워 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 미국,러시아,일본,중국,은 우리 조국이 남,북한이 통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방해하게 되여있다 통일된 조국 대한민국이 엄청남 강대국이 될 소지가 있어 두렵기 때문이다 통일은 반드시 우리 한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평화적으로 차근차근 이루어 나가야 한다.
남한과 북한의 국가 지도이념은 모두 외래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
조국의 정통성이 바로 서며,바른 역사가 정립 되며,사대주의와 일제잔재를 바로 청산하여 질때 ∼∼∼∼∼ 그때가 되어야 배달계레가 대 천운을 맞이하며 대 국운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10만이상의 애국선열님의 고귀하신 희생 바탕 터전위에 서있는 대종교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오직 한얼님의 성령의 정통성 천법통(天法統)의 중심의 맥을 계승한 대종교가 크게 중창으로 가야함을 꼭 밝히고자 한다 그래야함이 조국 통일,세계평화의 길을 찿아가기 때문이다 자,,,,,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우리는 진정 대종교는 모두의 등한시로 바람앞에 촛불같이 절대 절명에 있다 첫째는 대종교 신도들이 책임이 무겁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의 책임이 크다 우리는 정말 10만이상 순교하신 선열님께 너무 잘못을 짖고 고개을 들수가 없다 대종교가 어떤 종교인데 이지경에 낭떨어지에 막판에 몰리게 하였단 말인가! 김구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배달게레로서 단군대황조님 자손이 아닌 사람 없고 대종교인 아닌사람이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대종교인 이다 고조선 배달나라가 2096년동안 신시 태평시대를 누렸던것은 한울의 천신교(대종교)가 교정일치(敎政一致)로 모든 백성이 하나가 되여 생활화 되여기 때문이다 그후 우리 천신교를 등한시 하여 침체될때 국운이 쇄퇴하고 잠시라도 천신교가 부흥할때 국운이 상승한 역사를 알수있다 우리가 민족이 남북이 전쟁없이 평화통일되고 대 천운의 국운을 맞이하기 위하여서는 한배검(단군대황조)님 진종대도(眞倧大道)가 크게 광명하게 떠올라야 한다 바로 진종대도의 원 맥의 자리 대종교가 크게 부흥 하여야 한다 다같이 절대절명의 대종교를 일으켜 세울 우리들의 지헤와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란다 홍암대종사님의 예언대로 천신교 중창(重創)하여 홍익인간 이화세게를 이루워 진다고 하신 말씀이 꼭 이루워 지기를 오늘도 원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종교 선도사 : 성 용 탁 올림 대종교 중광 근대사 독립운동사를 일부 단편적 밝히 글입니다 이웃,사회등 많이 퍼날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시경이 말모이를 위해 일일이 정리한 자필 원고 [주시경 김두봉 이극로 말모이 뜻 조선
개천4478년 6월 28일 대종교 선도사 : 성 용탁 올림 hp010 - 6609 - 4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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