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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한시 짓기와[作詩]와 漢詩 해석解釋 하기.
먼저 전체적인 글 내용의 이해를 구하고 논리적 판단의 잣대가 되도록 도움이 될 만한
만당晩唐 시절 잘나가던 詩 한 수首를 筆者 한종서韓鍾瑞의 해석으로 읽어보도록 한다.
感事 감사 于濆 우분
花開蝶滿枝 화개접만지 : 꽃이 피니 꽃가지에 나비가 가득하고
花謝蝶還稀 화사접환희 : 꽃이 시들면 나비는 돌아옴이 드물다
惟有舊巢燕 유유구소연 : 이에 많은 새들의 옛 둥우리의 제비는
主人貧亦歸 주인빈역귀 : 주인이 가난해도 또다시 돌아오누나.
謝 : 시들다. 마르다.
惟 : 이에.[발어사 : 화제話題를 돌림].
有 : 많다. 넉넉하다. 有가 많다. 넉넉하다라는 사용 예 :詩經 中 爰衆爰有.
舊巢 : 새들의 옛 둥우리.
이 글을 읽노라면 五言律詩 임에도 첫행과 둘째행에 동자同字가 쓰여졌고
셋째행에 쓰인 惟와 有의 사용의 뜻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다를 것이며
측성仄聲과 평성平聲의 성율聲律의 구애拘礙 받지 않았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위 글은 만당晩唐 시인 우분于濆의 대표적인 감사感事라는 글이다.
만당晩唐 시인 우분于濆은 詩에 뛰어났음에도 시류時流에 기뻐하지 않았고
성률聲律에 구속되어 경박하게 되는 것을 꺼려하여
고풍古風 30편을 짓고 스스로 일시逸詩[빼어난 시]라 칭했다.
于濆은 咸通 함통 2년[861]에 진사가 되었고 사천판관泗川判官까지 벼슬을 지냈다.
생몰 연대나 출생지는 분명치 않으나
唐 僖宗 희종 의 乾符 건부[874-879]까지 생존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우분 외의 이태백을 포함한 많은 시성詩聖들 께서도 同字를 사용한 것과
성율聲律을 무시한 글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잠시 시성詩聖이라 일컫는 李白 [이태백]의 유명하고 간단한 詩 한 首를 읽어본다.
靜夜思 정야사 李白 이백
牀前看月光 상전간월광 : 침상 앞에서 손을 이마에 얹고 바라보는 달빛이
疑是地上霜 의시지상상 : 여기 지상의 서리와 닮았구나
擧頭望山月 거두망산월 : 머리를 들어 산 달을 바라보고
低頭思故鄕 저두사고향 : 머리 숙여 고향을 생각함일쎄
看 : 손을 이마에 얹고 바라보다. [梁簡文帝 賦 脈脈兩相看].
月光 : 달빛.
疑 : 닮다. [書經 罪疑惟輕].
是 : 여기. [論語 夫子至於是邦也 부자지어시방야].
地上 : 땅 위[지상].
低頭 : 머리를 숙임.
이 글에서 이태백은 첫행과 셋째행에 月을 반복 사용했음을 볼 수 있다.
이태백의 詩를 간략하게 하나 더 들여다보면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
내용을 담고 있는 독작獨酌이라는 글을 한국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천하의 이태백도 字의 쓰임에 구애받지 않았음일진 데
漢字의 각 訓을 문맥의 흐름을 좇아 해석할 줄도 제대로 읽을 줄 조차 모르는
한국사람들이 도데체 무얼 안답시고 성률이 어쩌구저쩌구 입방아를 찢고
字의 音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면서 해석은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또한 해석을 할 때 가장 중요한 단어를 낱글자로 풀어내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고
안타까우며 가엾은 일이 아니던가.
漢詩는 어찌어찌한 형식을 갖춰서 써야 한다는 말을 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노라면
구역질이 난다.
인터넷, 서점 진열대에 놓여진 책자의 해석은 90% 이상이 짝뚱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대학교수랍시고 신분상의 이름을 버젓이 끼워팔기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뻔뻔하다.
채근담菜根譚 후집後集 47의 문장文章을 빌려 적어 보면
一字不識 而有詩意者 得詩家眞趣
일자불식 이유시의자 득시가진취
일자무식이라도 시심이 있는 자는 시인의 참다운 정취를 맛볼 수 있다 하였다.
이는 문장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서 좋은 시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심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시인詩人이라 불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사물事物[모든 일과 물건]에 마음이 부딪혀 일어나는 감정을 서정敍情이라 한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그 누구라도 이런 상황을 접하고 겪음에 남겨지는 글이
살아 있는 詩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더러 픽션[fiction 허구]을 詩랍시고 쓰시는 분들은 소설을 쓰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일찌기 장자莊子께서 남기신 말씀 中
내편內篇 대종사大宗師를 읽다 보면 유방지외遊方之外라는 글이 있다.
이는 일정한 형식이나 도덕의 틀을 벗어난 곳에서 행동한다.
즉 번거로운 세속의 예절 같은 것은 모두 털어버리고 돌아보지 말고
세속 밖에 있으면서 無爲의 일에 몸을 맡기는 것이 바람직 한 것으로
곧 일정한 형식의 틀 밖에서 노님을 말하고 있다.
作詩를 하며 즐긺에 있어서 문장의 형식, 문법등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있게 자신 만의 글 세상을 내보이며 정해진 道 이상의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고 이해를 하고 싶다.
잠시 옛 중국의 연대표 일부를 읽어보자.
수隋 : 581-618 양씨楊氏王祖
당唐 : 618-907 이씨李氏王祖
후당後唐 : 923-936 이씨李氏王祖 : 돌궐 사타부突厥沙陀部 출신
이존욱李存勗 이 후량後梁을 멸망시키고 낙양洛陽이 도읍하여 세운 나라.
4代 14년 만에 후진後晉의 고조高祖인 석 경당石敬塘에게 망함.
남당南唐 : 서씨徐氏王祖[祖 : 서지고徐知誥 937-975]
송宋 : 960-1279 조씨趙氏王祖
원元 : 1271-1368 몽고족 홀필렬忽必烈이 세운 王祖
명明 : 1368-1644 주씨朱氏王祖
청淸 : 1619-1912 누루하치가 세운 후금국後金國으로 출발하여
그의 아들 태종이 1636년 청淸으로 개칭했음.
詩가 부흥復興 했던 옛 중국 王祖 일부를 살펴보았다.
漢詩는 당송대唐宋代에 가장 활발하게 발전을 이룬 사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작금昨今에 漢詩의 작법作法을 논論할 때 기준이 되는 형식形式인
사성四聲 : 평성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入聲을 알아 보면,
측성仄聲 [上聲 去聲 入聲]과
평성平聲 [上平과 下平을 두루 일컬으며 모두 낮고 순평順平한 소리로
글자의 왼편에 방점傍點이 없는 글자로써 가장 낮은 소리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詩에는 각 단어單語가 쓰여지게 되는 바 글에 쓰여진 명사의 자격은 이렇다.
명사名辭 : 하나의 개념을 나타내며 명제命題를 구성하는 데에 요소가 되는 말로써
단어의 수효와 문법적인 품사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재現在 대한민국에서 漢詩를 논論하는 형식의 구애拘礙[꺼리낌]은
과연 옳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정의 하면 지독하게 잘 못된 권위주의적 발상의 처사라 정의할 수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고 본인 스스로 잘 할 수 없는 일이니 남이 漢詩를 쓴다고 하면
사실인즉 본인이 할 수 없는 일을 남이 하는 것에 대한 뒤틀린 심사의 잣대를
들이대어 뭐가 틀렸느니 말았는니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 漢字 공부를 중국인 보다 더 완벽完璧한 사람이 있을까?
물론 "없다"라고 간단하고 단호한 말로 대답할 수 있다.
이 말을 부정한다면 당신은 漢字를 일 만자一萬字 이상 섭렵했는가고 묻고 싶다.
각 글자가 가진 그 많은 훈訓을 모두 기억하고 모든 단어의 뜻을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한국에 존재한다면 기꺼이 허리를 굽혀 절 올리며 스승으로 받들고 싶다.
그런 이가 존재 한다면 나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신분의 귀천을 떠나 낮게 엎드리리라.
필자도 내심 일 만자는 족히 공부 되어 있다고 자부하나 손에 자전을 놓으면 불안하다.
그런 완벽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앞에서 배움 한 것을 뒤에 가면 잊어버리게 되는 바 손에서 자전을 놓아서는 곤란하다.
대학의 漢文學 교수랍시고 자기 이름과 학교를 명기하여 인터넷에 버젓이 올려놓은
사실을 보면 漢詩를 즐겨 읽으며 오랜 세월 한학漢學에 정신줄 놓고 살아온 필자로써는
황당하기가 이를데 없다.
중등학교 6년 동안은 漢字공부 수업이 있긴느 하지만 이는 부단히 형식적이고
학생들은 입시과목에 치중하던가 아니면 漢文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바
보편적으로 객관적 판단을 한다면 가족의 이름, 주소 정도만 쓸 수 있어도 성공이다.
이는 각자 득한바의 漢字 공부의 현실적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대학에서 漢文學 4년을 전공하여 중등 교사 혹은 대학 교수가 되었다 하여
실질적인 실력은 그 직함에 미치지 못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그들이 매우 큰 공부를 이뤄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그 정도의 과정을 거쳐지낸 이력의 소유자이니 실력과 무관하게 자리에 있다.
漢文 공부는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많은 부분의 學力을 쌓기 만만한 공부가 아니다.
인터넷에 올려놓은 漢詩 해석解釋을 보노라면 정녕 그 해석이 괴이하여
구경거리로 될 만한 꼴 보기 좋은 것이 무릇 가관可觀이다.
본인 개인이야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사람이 되든 말든 괜찮겠지만
학교 이름은 왜 써넣어서 학교 망신을 대량으로 시키며 조롱거리를 생산하여
학교 교수 구성원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것인 지 묻고 싶다.
그러나 그 해석이 오역誤譯이 되었든지 바른 해석解釋이 되었든지 간에
해석의 말미末尾에 해석자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매우 바른 행위로써
무책임한 것과 책임감이 있는 차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니
그것에 대하여는 교육자의 사명 같은 것이기에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중국에서 고등교육을 이수한 자도 漢字가 가진 다양한 뜻을 아는 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실 예로 필자筆者의 한문학漢文學 강의講義를 듣던 학생들 중에도 중국 사람이
여럿 있었으나 그들 역시 한국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던 것을 경험하여야 했다.
물론 그들은 한국어에 약한 이유도 이해가 부족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글 해석에 있어서는 대용량의 자전을 펼쳐들고 일일이 글자의 뜻을 찾아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며 자기 공부의 완성이라 할 수 있음이다.
그렇다면 七言律詩를 예로 들어 경쾌하게 설명을 드리기 위해
많이 읽혀지고 있는 나대경羅大經의 송풍회우松風檜雨의 결구結句를 살펴보자.
一甌春雪勝醍醐 일구춘설승제호
1 2 3 4 5 6 7
한 사발甌의 봄눈春雪에 우유와 갈분을 타서 쑨 죽粥보다 훌륭하네勝
※ 醍醐 제호 : 우유에 갈분[葛粉 칡가루]를 타서 미음같이 쑨 죽[粥].
漢詩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앞부분에 쓰인 글자와 뒷부분에 쓰인 글자가
뒤죽박죽으로 섞이지 않는다.
중국 어순語順상으로도 1과2가 짝을 이루는 말이고 3과 4가 짝을 이루며
5 6 7에 쓰인 글자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면 그 순서가 섞여도 상관없다.
1 2가 짝을 이루어 해석되어야 하고 3 4가 짝을 이뤄 해석 되어야 하는 것이다.
5 6 7은 그 5 6 7의 글자 범위에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중국 글자인 점을 고려하여 2가 1을 선도 하는 것이 보편적이며
마찬가지로 4가 3을 선도 하는 것도 간과看過 되어서는 않되며
단어가 사용되었을 경우
1과 2, 3과 4가 단어를 이룰 수 있고 5 6 또는 6 7은 어떻게 쓰여도 상관이 없다.
2와 3 또는 4와 5는 단어의 짝을 이루지 않는다.
명사의 경우에는 대부분 한국에서 사용하는 어순과 비슷한 쓰임의 단어가 많으나
가령 아버지를 부친父親이라고 하는 것은 같으나 아버지를 좀더 높여 부를 때는
중국에서는 공부公父라 하고 한국에서는 부공父公이라는 차이 정도가 있으니
글을 해석할 때 이런 점에 유의하여 한글 큰 사전이나 중국어 자전字典을 열심히
뒤적여 찾아보는 것이 매우 유익한 공부가 될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는 명사는 그대로 소리를 옮겨 해석에 사용해도
큰 탈이 없겠으나 위 글에 쓰인 바와 같이 알 수 없는 글은 꼼꼼히 그 해석을 찾아
옮겨야 됨이다.
실례로 "이 풍진風塵 세상"이라는 말이 있다면 여기서 풍진風塵은 시대 상황에 따라
그 뜻이 변하는 바 그것이 의미하는 뜻을 직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 한글 소리대로
풍진이라 해석에 쓴다면 큰 잘못이다.
전쟁통의 세상이면 풍진風塵은 "전쟁의 북새통"이라는 뜻이고
보편적으로는 "세속의 속된 일"이라는 상황에 따른 유동적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詩는 詩처럼 해석되어야 산문散文으로 보여지지 않는다고 억지를 쓰는 바
문장에 있지도 않은 말을 차용하여 어물쩡 사기를 치는 행위도 바르지 못한 것이다.
漢詩를 해석하는 작업은 공부를 하는 과정이지 알량한 지식으로 겉멋을 부리고
엉뚱한 호기를 부리는 얇팍한 짓을 해서는 공부에 발전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문장을 완성함에 시인께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흔적이 역력한 데
漢字의 뜻도 제대로 알 지 못하는 이들이 제멋대로 재단하여 해석을 해놓으면
漢字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해석해 놓은 한글만 읽고 좋다고 믿으며
그 사기를 쳐놓은 글을 이리저리 퍼나르며 질 낮은 내용의 공부를 하면서
스스로 바보가 된 것 자체도 모르며 이러쿵 저러쿵 감탄을 하는 모습에 안타깝다.
漢字 漢文 공부에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온 열정을 투자하여 얼만큼의 큰 성과를
거두어 시건방을 떠는 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국 사람들이 漢詩作法에 대한 정의를
하면서 주제넘은 짓을 한다면 이미 그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위에 옛 중국의 漢詩가 발전했던 시절의 연대표를 적어 놓았지만
당송대唐宋代 이전에도 고시古詩가 흔하게 존재 했었고 당송대唐宋代 그 이후에도
청나라에 이르기 까지 新詩가 엄연히 활발하게 쓰여졌던 사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현재의 한국韓國 사람들이 도데체 漢字와 漢文에 대하여 얼만큼의 경지를 이뤘기에
시詩의 성율聲律을 논하며 마치 자신이 漢文 세상의 기득권 층인양 뻣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음에 그져 한심스러운 마음 뿐이다.
이런 것을 두고서
"일도 제대로 못하는 종놈이 연장 탓만 한다"는 얘기가 생각남은 왜일까?
이쯤에서 백중지세百中之勢라는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예부터 문인들이 남의 글을 경시輕視하는 풍조에서 비롯된 말이다.
자기가 쓴 글이나 남이 쓴 글에 별다른 차이가 없음에도 남의 글을 하찮다고
폄하해 버리는 돼먹지 못한 풍조가 남긴 고사古事가 바로 백중지세百中之勢 다.
이런 멍에를 과감히 탈피하여
앞에서 말씀을 펼친 부분들을 漢詩를 읽고 쓰는데 참고하고 세상사 살아감에 있어서
여기저기 사물事物에 부딪혀 일어나는 감정感情을 한 줄 글로써 펼쳐보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즐거운 일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그런 글적 구성이 원칙인양 돼먹지 못한 자들이 내뱉는 세치 혀 끝의 말에 현혹되어
구애를 받지 말고 각자 공부한 漢字를 마음껏 활용하여 용감하고 씩씩하게 표현해
자신의 글 세상을 펼쳐 자기가 아는 만큼 그 이상의 발전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대한민국 인터넷의 한시전문漢詩專門 카페에서 말하는 漢詩를 지을 때의 법칙,
漢文學을 하는 기득권 층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詩의 형식 따위는 잊어라.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만큼의 글자로만이라도 마음껏 마음에 부딪혀 일어나는
감정을 詩로 승회시켜 보도록하라.
앉은뱅이도 백날 천날을 가면 천리에 이를 수 있고
10층 탑도 한 삽의 흙에서 비롯되었으며
하늘을 이고 있는 태산도 티끌을 소홀히 하지 않고 모아진 결과라 하지 않던가.
漢字 한 글자는 한글의 한 단어요, 漢文 한 단어單語는 한글의 한 문장이다.
한글과 漢字는 뗄 수없는 유기적 관계인 것이다.
공부에 뜻이 있는 者 모두가 장족의 발전을 이룰 수 있기를 祝願드린다.
글/노래. 鳳雛 韓鍾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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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긴글 읽다가 보니 ,,,,,,,,이제야 큰 ,,스승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한시의 형식만 ,,,,너무 따지지 말고 ,,,,,,시심'이 깃든 ,,,,,,시 한수가 더욱 소중하다는 말씀에는 무한정 공감을 느껴 보네요,,,,저도 한시를 한번 지어 보고 싶어도 ,,무슨 무슨 ,,,복잡한 형식론에 ,,,그만 주눅 들어서 ,,,,시 한수를 지어 보질 못했는데 ,,,,,님의 글을 읽어 보니 ,,좀 마음이 가벼워지네요,,
시한수에 깃든 ,,,,,작자의 깊은 뜻을 ,,잘 살펴 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번역하는 ,,,,바도 ,,,,,,이제는 더욱 심사숙고 ,,하여 ,,지은이의 뜻을 ,,,최대한 ,,,,음미해볼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겠네요,,,
밤늦은 시간에 다녀가셨군요 詩한수 님!
그래요.
형식에 구애받지 마시고 자신있게 써보세요.
부족하오나 소생이 글벗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이 아침 詩한수 님과의 데이트가 즐겁습니다.
오늘은 또 바람이 차갑습니다.
아침나절엔 옷깃을 여며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