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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는 울산 문화유산]청동기 시대 집터 위의 고층 아파트 묘한 공존 | ||
40) 무거동 옥현 유적 | ||
[2008.07.22 22:39] | ||
국내 최초 논·집터 동시 발견 학계 관심 집중 2002년 5월 유적 전시관 개관 옛 생활상 재현 한 유명한 역사가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던가! 2008년 7월, 과거는 어디에서 어떠한 형태로 현재와 공존하는 것일까? 오늘도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난다. 벌써 10여년이 지났다. 논과 밭, 낮은 야산, 그 속의 작은 마을이 있었던 옥현 일대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절반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남은 절반의 공사가 시작될 즈음, 매장문화재(땅에 묻혀 있는 문화재)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이 일대에서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집터와 청동기시대 논이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마을유적과 논이 처음으로 같이 발견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곳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이곳에 살았던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대체로 작은 개울 옆에 형성된 얕은 구릉 위에 등고선을 따라 집을 지었다. 정사각형이거나 직사각형 바닥을 한 그들의 집 70여 기가 발굴되었다. 청동기인들은 구릉 위의 땅을 파고 들어가 바닥을 고른 뒤, 땅에서 습기가 올라오는 것을 막으려고 바닥에 열처리(불다짐)를 하였다. 흙으로 토기를 만들어 구우면 물을 담아 사용할 수 있듯이, 그 원리대로 바닥처리를 했던 것이다. 모든 발명이란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법! 자연으로부터 금속을 얻어 그것을 녹여 무기와 장신구, 의례용품을 만들어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이들이었기에 어쩜 바닥 방수처리쯤이야 간단한 작업이었을 지도 모른다. 오늘과는 다른 현명함과 유능함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닥을 다진 후엔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여 고정시킨 뒤 지붕을 덮었다. 바닥처리는 되었지만 비오는 날 집안으로 들어오는 빗물처리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빗물을 피하려고 집 가장자리에 구덩이를 파서 물이 밖으로 빠져나가게 했나 보다. 음식을 조리하고 추위를 견디기 위해 집안에 화로를 설치하였다. 규모가 작은 집은 하나, 크고 긴 집은 두 개의 화로를 놓았다. 일반인에게 이 정도라면 다른 지역 청동기인들의 집과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집터 안에서는 무늬 없는 토기 조각, 돌칼, 돌화살촉, 돌도끼, 돌끌, 반달모양돌칼, 그물추, 방추차 등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어라! 집터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47호라는 이름을 가진 집터이다. 당시 어떤 이가 기발한 생각과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나 보다. 집 테두리 형태는 여느 집과 같게 만들었지만, 더 나아가 이중벽을 설치하여 바람을 막을 생각까지 했다. 내부에 칸막이를 설치하여 실제 생활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사용했다. 통로끝 부분에는 이중창처럼 벽체를 이중으로 세웠다. 그 기발함이 놀랍다. 그러한 해석을 내 놓은 연구자의 이해 또한 흥미롭다. 우린 청동기시대 복층 주택을 만난 것이다. 이렇듯 놀라운(?) 집을 짓고 산 청동기인들은 무얼 먹고 살았을까? 전통적인 방식대로 동물을 사냥하고, 물고기와 조개를 잡아먹기도 하고, 나무열매를 따 먹기도 했을 것이며, 좀 더 나은 방식의 농사를 짓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수로를 이용해 물을 가두어 논농사를 짓기도 했다. 집 바로 근처에 논이 있어 관리하기 좋았을 것이다. 검게 드러난 그들의 논은 참 작기도 하다. 1평에서 3평 정도의 크기다. 굳이 논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겠다 싶다. 논둑에 서면 웬만한 피는 다 뽑을 수 있었겠다. 병충해 방지와 물대기 작업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나 보다. 청동기시대에서도 앞 선 시기에 이용되었던 논이란다. 역사책에서 보아왔던 '본격적인 벼농사' 시작의 증거를 여기에서 발견하게 된다. 청동기시대 전기의 논이 청동기시대 집터와 함께 발견된 최초의 사례라는 점만으로도 옥현유적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유적에 대한 관심은 곧 유적보존운동으로 이어졌다. 유적을 살리기 위한 서명운동과 문화행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아파트 공사를 계속하는 대신, 시행업체에서 유적전시관을 지어 울산광역시에 기부채납한다는 합의가 이루어 졌다. 이렇게 과거의 역사는 과거 속으로 사라져 갔다. 2002년 5월 말, 약속대로 옥현유적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08년 7월 토요일 오후, 이곳을 다시 방문하였다. 옥현주공 1·2단지와 3·4단지 사이 동쪽 끝에 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전시관에는 청동기 시대 옥현 마을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제1 전시실과 벼농사의 역사를 내용으로 하는 제2 전시실이 있고, 전시실 밖에 움집 두 채가 복원되어 있다. 뭔가 아쉬운 느낌이다. 현재 옥현유적전시관는 내게 무슨 의미로 다가오는가? 10여 년 전 바람 부는 겨울날 발굴조사로 한 껍질 벗겨진 채 존재를 드러내고 있던 청동기시대 집터와 논 유적에 대한 내 과거의 기억과 지금 눈앞에 보여지는 현재의 모습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 괴리감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과거와 현재의 공존! 참 어려운 작업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무성의로 왜곡된 과거만이 전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옥현유적전시관이 새로운 단장을 준비하고 있단다. 아담하지만 실속있는 마을 역사유적전시관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하고, 동네마다 역사문화교육의 핵심 기초공간인 전시관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는 그날을 기대하며, 그리고 옥현유적전시관이 그 선두에 서 있길 기대하며 여름날의 뜨거운 햇살 속으로 씩씩하게 들어선다. 글·사진=내림터사랑 원영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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