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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7월 15일 연중 제15주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마르코 6,7-13)
Jesus summoned the Twelve
and began to send them out two by two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아모스는 북쪽의 예언자였다. 당시 북쪽 임금 예로보암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 아모스는 그를 꾸짖는 예언을 전한다. 아마츠야 사제는 아모스에게 유다 땅으로 떠날 것을 권하지만 아모스는 더욱 강하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해 주셨다. 남은 일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사는 일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만을 의지하라는 암시다. 가진 것이 없으면 애절한 마음이 된다. 그런 마음으로 평화를 전하라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한다. 그들에게는 힘이 있다. 주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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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족하면 청하고 없으면 매달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힘’은 그들과 함께 있었던 셈입니다. 제자들은 그 힘에 이끌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그러니 선교에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다른 것은 준비 못 해도 ‘이 힘’은 지녀야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제도’를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을 갖추고 많은 이가 동참하면 ‘힘’이 생긴 것으로 판단합니다. 세속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은 다릅니다.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누가 어떤 마음으로’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숫자가 많아도 ‘하느님의 힘’이 함께하지 않으면 결국은 시들고 맙니다. 거창하게 출발했지만 소리 없이 문을 닫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교는 ‘마음먹기’가 아닙니다. 주님의 ‘이끄심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사도들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지만 힘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에게 매인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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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합니다. 연인으로, 친구로, 또는 아내나 남편으로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합니다. 주님의 선택은 자유롭습니다. 주님께서는 장점이나 탁월함 때문에 선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그분의 자유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그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들어갈 학교를 선택하고, 우리가 배우고 싶은 교수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를 제자로, 사제로, 수도자로, 교사로, 선교사로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어떤 직분이나 처지에 있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당부하십니다. 아니, ‘지금 여기’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의 나라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소명의 삶 살 때 은총 커진다
-배광하신부-
거룩한 부르심
▤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 가운데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유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수도원이나 신학교에서 성소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 가운데 사연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트럭 행상을 하다가 문득 사제가 되고 싶어 검정고시를 통과하여 성소에 발을 들여놓은 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입원했다가 병실에서 부르심을 받은 이, 여자들만 있는 집안에서, 여자들만 있는 대학, 회사를 거쳐 사제가 된 이, 실로 아주 다양한 부르심으로 성소를 택한 이들이 많습니다.
세속적으로 잘 나가던 길을 버리고 사제 성소를 택한 이들까지 모두가 어느 날 주님께 붙잡힌 이들입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참으로 오묘하시어 놀랍기만 합니다. 그 옛날 아모스 예언자도 자신의 부르심 받은 이야기를 아주 솔직 담백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아모 7,14-15).
그렇습니다. 구약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 그리고 오늘도 부르심을 받는 이들의 대부분 공통점은 그들이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이며, 우연한 기회에, 특별할 것 없는 방법으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점지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필연적인 관계에서 그리 되었다는 사실을 사도 성 바오로는 오늘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 1, 4-5).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부르심을 받은 그분의 자녀인 것입니다. 실로 아무 것도 자랑할 것 없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지존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참된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셨다는 넘치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무 두려움 없이 힘 있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부르심 받은 이들의 사명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문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우둔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하루에 한 자씩 한문을 읽히도록 종이 위에 한 일자(一)를 쓰셨습니다.
“이것이 한 일 자이니라, 이제부터는 매일 매일 한 자씩 한문을 배우도록 하여라.”
아버지께 종이를 건네받은 아들은 밤새도록 읽고 또 썼습니다. 아침에 마당을 쓰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큰 지게 작대기로 땅 바닥에 한 일자를 크게 쓰시며 물었습니다. “이게 무슨 자이냐?” 아들이 도무지 무슨 글인지 몰라 계속 머리를 갸우뚱거리자, 답답한 아버지는 아들의 뒤통수를 때리며 “밤새 외웠는데 그래 한 일자 하나 모른다는 말이냐?”하며 호통을 치시자, 깜짝 놀란 아들이 대답합니다. “그렇습니까? 한 일자가 밤새 그렇게 커졌단 말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움 받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듣고 또 들었습니다. 그러나 듣고도 이내 잊어버리고 삽니다. 기억은 해도 믿음이 없어 세상 것에 더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 일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우매한 아들처럼 세상 것을 끝내 끊어 버리지 못하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파견의 소명을 내리신 주님께서는 오늘 다시금 믿음을 깨우쳐 주시고 계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이면 족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동행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예전에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살아야 할 삶의 자세를 쓴 글을 읽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 안에 살기로 준비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소명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항구히 소명의 삶을 살 때, 은총은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
-구요비 신부-
내 가 주임신부로 사목하던 본당에서 세례를 받으신
불문학 교수님이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조르쥬 베르나노스 저 / 정영란 역)
를 최근에 선물로 받았다. 주님은 찬미를 받으소서!
이 책을 밤을 꼬박 새워 읽으며 심오한 영적독서를 접하
는 심정이다. 조르쥬 베르나노스는 불란서의 가톨릭 작가
인데 인간의 내면에서 해파리처럼 입 벌리고 있는 권태와
허위, 공허와 위선 안에 짙게 드리워진 악의 세력과 싸우며
살아가는 사제를 주인공으로 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젊은 사제의 모습 안에는 아르스 본당의 요한 비안네
성인의 삶과 영성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작가는 자주‘범용
(凡庸)한 사제는 추하다’라고 가혹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는
데 이 작품 안에서는 범용한 사제에게까지도 따뜻한 시선
과 연민의 정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사제는 위암의 병고
를 늘 짊어지고 신음하며 살고 있는데 내성적 성격으로 유
약하고 서툴며 비효율적인 사목으로 자주 실수를 한다. 하
지만 사람들을 우직하게 사랑하며 그 영혼들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는다. 약점투성이의 무능해 보이는 이 젊은 사제
의 순수한 마음 안에 깃들어 있는 영적 감수성이 병들어 있
는 영혼들의 내면세계를 꿰뚫어 보는 혜안으로 번득인다.
이 마을의 유지인 백작 부인과의 우연한 만남과 긴 영적
대화 중에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을 증오하고 거부해 온 이
귀부인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평안히 있을지어다’하고 나는 부인에게 말했었다. 그리
고 그녀는 이 평화를 무릎 꿇고 받았었다…. 내가 그 평화
를 부인에게 주었다. 자기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렇게
줄 수 있다는 것은 이 얼마나 신묘한 일인가! 아아 우리들
두 빈손의 그윽한 기적이여!”(252쪽)
죽기 전의 편지에서 이 귀부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 조
그만 아기에 대한 절망적 추억이 저를 모든 것에서 별리하
여 무서운 고독 속에 몰아넣어 두고 있었는데 이제 다른 어
린 아이 하나가 이 고독에서 저를 끌어내 준 것 같이 생각됩
니다…. 신부님은 정녕 어린이시니까요. 좋으신 주님께서
신부님을 그대로, 또 영원히 지켜주시기를!(244쪽)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며 요청하시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이 어린이의 마음이다(마태 18,3-4): 길
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8절)“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는 예수
님의 말씀처럼 제자의 부르심은 파견을 위해서이다. 즉 예
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따르는 참
다운 제자로 살아갈 때 또한 부활하신 주님(kyrios)의 사도
로서 그리스도 안에서(in persona Christi) 일할 수 있다. 여기
에 제자들이 지녀야 할 마음의 가난, 어린이의 정신이 중요
한 것이다!
‘어린이는 바로 자신의 무력감에서 제 기쁨의 근본 원리
를 겸허하게 이끌어 낸다. 어린이는 모든 것을 제 어미에게
맡긴다. 제 온 목숨, 인생 전체가 어머니의 시선 속에 있는
데, 그 시선은 바로 미소이다.’(베르나노스)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全無)’안에서 주님이 모든 것
(全部)을 채워주시고 사도들 안에서 함께 일하신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
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12-13절)
무소유를 넘어선 소유"
-이기양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상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모자랄 텐데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제자들이 그처럼 준비없이 세상에 나가면 이틀도 안돼 노숙자 신세가 돼버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끼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왜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 말씀을 철저히 따랐던 제자들은 노숙자가 되기는커녕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는, 그전에 볼 수 없었던 아주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육신의 힘에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만 의지했기 때문에 영적인 힘이 생겼던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이 말씀은 신부인 저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신부들이 부임지를 옮겨갈때 보면 '지팡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꽤 많은 짐 때문에 난감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저런 이유로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 복음 말씀과는 상반된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 6,31)는 예수님 말씀을 삶에서 체험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 어떤 행사를 하게 되면 열심히 준비합니다. 몇 달 혹은 몇 주일씩 준비하고 점검하고 또 점검합니다. 행사가 잘 끝났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준비했던 사람이 다시는 성당 일을 하지 않겠다고 두문불출합니다.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상처도 많이 받았고 너무나 많은 시간을 빼앗겨 이제는 자기 할 일에만 전념해야겠다고 감정을 드러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동수칙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준비보다도 하느님 안에 머물면서 하느님 힘으로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기도는 빼놓고 예산이며 일정, 옷이며 먹을 것 등을 챙기는 데만 골몰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사전 준비는 말할 것도 없고 돌발 상황까지 예측해 완벽하게 준비했지만 무엇보다도 행사 준비에 앞서 기도하며 하느님 뜻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에 생긴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 뜻을 헤아리는 데 중심을 두었다면 상처 받는 일도, 사람들 평가에 그렇게 민감해질 이유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세상살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 세상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는 많이 다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재산에 의지하게 되면서 사람도 잃고 돈도 잃는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되는 안타까운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재산보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은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한 직장인의 퇴근길 골목 어귀에 호떡을 구워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9시 정도가 되면 호떡을 굽는 것을 끝마쳐야 될 것 같은데, 호떡 장수는 늘 늦은 시간까지 호떡을 구웠습니다. 호떡이 옆에 잔뜩 쌓여 있는데도 싱글벙글거리며 계속 호떡을 굽는 호떡 장수를 보고 하루는 그 직장인이 물어보았습니다.
"장사를 끝낼 시간에 무슨 호떡을 그렇게 싱글벙글하며 열심히 굽고 계십니까?"
그러자 호떡 장수가 대답했습니다.
"잘 팔려도 즐겁고 안 팔려도 즐겁습니다."
"아니, 안 팔리면 다 버릴텐데 즐겁다니요?"
"어차피 재료는 다음 날 쓰기 어려우니 다 구워 갖고 집에 가는 길에 고아원에 나눠주고 가는데 거기에 있는 아이들이 정말 좋아합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참 재미있고 하루를 정리하는 기쁨으로 아주 그만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있어서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많은 부분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입을 것도 먹을 것도 돈도 말고 오직 하느님만을 중심에 모시고 살라는 말씀을 삶에서 실천한다면 오늘 제자들처럼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영적 능력을 받게 되어 행복한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행자의 준비물
부산 선교사목국
정해진 것도 아니지만 어떤 이는 여행의 정의를 ‘내가 사는 집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 곳인지를 알기위해서다’는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여행은 모르는 곳을 가보고 참 좋은 면도 있지만 여러 가지 불편 또한 분명한 사실이고 그래서 내가 사는 집만큼 좋고 편한 곳은 없습니다.
여행을 해보면 자주 다녀본 사람의 가방은 비교적 간편한데, 그 반대의 경우 가방은 상대적으로 크다는 생각입니다. 이유는 짐을 챙기다보면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감히 필요한 짐을 두고 간편하게 떠나는 것이 즐거운 여행의 첫째 조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면 여행에 가방이 무거우면 그 여행은 즐거움이 아닌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인사이동을 하고 이사를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너무 많은 짐은 우리 인생의 또 다른 짐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지팡이 이외에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거지로 살라는 말씀이라기보다 복음 선포자가 현실의 먹고 사는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지나친 짐은 여러 가지 삶의 무게로 다가올 수 있지만 특히 복음 선포자인 사제에게 있어서 많은 짐은 분명코 긍정적 요소보다 부정적 요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짐, 부가 영원한 생명에 절대적 가치가 아님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적당한 짐의 양과 부의 척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나치게 집착하고 쌓아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태도라 생각됩니다. 복음말씀을 통해 내가 영원히 거쳐할 곳에 있을 짐과 양식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나기정 신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도 잘하기 위한 ‘조건’을 따지고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주님의 당부 말씀은 전혀 필요치 않음을 강조하신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무슨 힘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주님을 진정으로 믿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럼으로써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이에게는 언제나 하느님의 능력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이 들려준다. 사도직 사명은 이렇게 긴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세속적 집착을 떠나야 한다. 오직 복음에 대한 열정과 주님께 대한 신뢰심을 가져야 한다. 오로지 예수님의 권위에 의지할 때 구원은총의 협력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할 복음 내용을, 조건을 따지고 상황을 들먹이며 비판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또한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사회적 이익 앞에서 항상 자유로워야 한다. 세상의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또한 인간적 지식이나 재물이나 명예의 능력보다는 주님의 능력에 더 의존해야 한다. 그것이 진실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먼저 가져야 할 첫째 자세이다.
소유’와 ‘무소유’
-이상록신부-
여름이 길어지고 봄가을겨울이 짧아지는 오늘이다.
무더위가 폭염으로 이어지는 오늘, 너무 더워 열대야까지 발생하는 오늘이다.
비가와도 폭우로 이어지는 오늘이다.
100년 전 여름과 10년 전 여름이 그리고 오늘의 여름이 다르다.
이렇게 매일매일 같은 오늘이지만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고
오늘이 바뀌는 만큼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인 우리도 바뀌어 간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교회인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 생활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오늘이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파견’하여 함께 일하기를 당부하셨다.
둘 이상을 공동체로 본다면 교회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함께 살고 함께 나누고 함께 봉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떠나는 사람은 봉사자로서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소유하지 않음=무소유’의 삶을 살라고 당부하신다.
‘무소유’는 떠나보내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떠나는 열두 제자들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대변할 것이다.
성직자, 수도자(의 청빈은 당연하리라)와 일반신자들이 열두 제자처럼 ‘무소유’의 삶을 당부 받은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복음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아마도 ‘무소유’로 인한 답답함보다
차라리 ‘소유’함으로써 얻는 편리와 자유로움이 더 좋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넉넉함이 여유로 이어지고 여유가 있다면 신앙에 그 만큼 더 투신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을 뒤집어보면 신앙에 투신할 수 없는 것이 넉넉한 ‘소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럼 우리는 ‘소유’에 대해 알아보자.
무엇을 ‘소유’라고 하는지를 알아야 내가 ‘소유’인지 ‘무소유’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소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팡이와 신 그리고 옷은 가지되 여분은 가지지 말고 빵과 여행보따리 그리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다.
곧 움직이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은 가지되 나머지는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주님께서 지니라고 말씀하신 지팡이와 신 그리고
옷을 가지는 것이고 빵과 여행보따리, 전대의 돈은 가지지 않으려 하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소유’로 인한 답답함보다 차라리 ‘소유’함으로써 얻는 편리와
자유로움을 가지고 싶다고 할 것이다.
‘소유’한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려한다면 ‘소유’가 ‘무소유’로 이어질 것이고,
‘무소유’한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다시 말해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것이다.
결국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가지지 않느냐보다는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듣고 받아들이느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소유’와 ‘무소유’는 재물의 유무가 아닌 예수님 말씀을 가지고 세상논리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예수님 말씀을 가지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세상논리 속에 파묻혀 예수님 말씀을 평가하게 될 것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나는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듣고 받들어 따르려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하루였으면 한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정애경 수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 이성 간이든 동성 간이든 특별한 훈련이나 목적을 위해 잠시 동안이라면 모를까 인생 자체를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 최초의 인간 아담도 하느님의 눈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 창세 2, 18)주셨고 예수님께서는 “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마태 18,20)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동안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시범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아직 하느님 나라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실습을 통해 미래의 ‘복음 전파자’ 로 준비시키려는 것입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현장에서 배운 복음을 직접 전하라고 그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마르 6,7) 하셨습니다. 둘은 인간관계의 기본이며 최소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협력하는 것도 다투는 것도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공동체가 어떻게 될지는 두 사람에 의해 결정됩니다.
파견받은 제자들의 성향을 보면 베드로는 어부인데다가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이며 나서길 좋아하고 큰소리치지만 결국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께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했고, 마태오는 제자이기 전에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소외 받던 사람입니다. 시몬은 열혈당원이라는 과격한 성향의 정치 집단의 일원이었기에 사람들이 상당히 싫어했을 것입니다. 토마스는 동료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한 제자입니다.(요한 20,24 .25 참조) 이렇듯 몇몇 형제만 빼고 남남에 출신·성장·믿음이 다 다른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다양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마르6,7) 하실 때 어떤 기준으로 보내셨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 안 맞는 두사람이 짝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형제인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짝이 되고, 야고보와 요한이 짝이 되었다면 죽이 잘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혈당원 시몬과 세리였던 마태오가 짝이 되었다면 관계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는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고, 특히 유다 이스카리옷과 함께 짝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마음 맞지 않는 사람과 짝을 맺어주시면 이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마음
이 맞아야만 영적 성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야 전교가 잘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안 맞는 사람과 짝을 이루어 함께 일하게 하시는 것은 그를 위해 기도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라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없기에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이 파견은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세우시기 위한 작업이며 동시에 제자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성령을 통하여 영원히 함께 계시겠지만 제자들은 앞으로 홀로서기를 해야 하며 주님 외에는 어떤 것도 의지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의존합니다. 돈 많은 사람은 돈을 의지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머리를 의지합니다. 부모가 잘사는 사람은 부모를 의지하고 권력 가진 사람은 권력에 의지합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기에 주님을 의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파견받은 자는 주님이면 족하지 그 이상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목적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고 아픈 이들의 병을 고쳐주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주인이시기에 복음을 전하는 이들 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관심과 보호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 그동안 가르쳤던 것을 실제로 확인하시고자 선교의 원칙을 알려주십니다. 먼저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빵도 여행보따리도 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 것은 선교여행을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단 제자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신고 있는 신발과 한 벌의 옷과 지팡이뿐입니다.(8-9절 참조)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위해 지팡이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는 들짐승을 쫓고 수풀을 헤쳐 길을 내고 또 몸을 지탱해 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행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것도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제자들이 인간적인 수단, 곧 양식이나 돈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말고 전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만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는 주님의 일을 하러 나가기 때문에 주님께서 친히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마련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자의 길을 열어주시고 친히 돌보아 주
시는 것입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가뭄을 선언한 후 주님의 말씀대로 요르단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을 때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과 저녁에 빵과 고기를 날라다 주었습니다.(1열왕 17,5 -6 참조) 주님께서는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나리꽃도 아름다운 옷으로 입혀주시는데(루카 12,24-27 참조) 하물며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주님의 자녀들을 친히 돌봐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간편한 차림으로 전도 여행을 나가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 파견받은 사람들이 마음 써야 할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한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 선포에 온 힘을 기울인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먹이실 뿐만 아니라 넘치도록 영원한 상급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는 것, 이것이 파견받은 이의 또 다른 준비일 것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양승국신부-
<오직 한 가지>
저 같았으면 한 몇 달 사목실습지로 파견되는 제자들을 위해 몇 가지 챙겨줬을 것입니다. 우선 안쓰러운 마음에 일인당 교통비 20만원씩, 식비 30만원씩, 또 혹시 모르니까 비상시 쓰라고 체크카드 하나씩, 또 연락이 되어야 하니까, 휴대폰 하나씩...
그것만으로 되겠습니까? 일일이 챙겨주지 않아도 각자가 다 알아서 챙겼겠죠.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자동면도기, 편안한 신발, 우산, 갈아입을 속옷 10벌, 혹시 모르니까 밑반찬, 고추장, 읽을 책 몇 권...
그러다보면 큰 배낭 하나로 모자랄 것입니다. 끌고 다니는 초대형 여행가방도 안 되겠지요. 아마도 작은 승용차 한 대가 필요하겠습니다.
보십시오. 이것 저 것 챙기다보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장거리 여행 다니다 보면 가방 때문에 힘들어 죽습니다. 때로 가방에 든 소지품, 귀중품, 달러나 유로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여행도 제대로 못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복음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결국 예수님의 지론은 간단합니다. 청빈한 삶을 기반으로 한 강렬한 하느님 체험, 하느님을 향한 일편단심, 그것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을 향해 그토록 어려운 요구를 던지신 스승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분은 보다 효과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 일정한 거처 없이 이곳 저 곳을 떠돌아다니시던 노숙인이셨습니다. 그분 스스로도 자신을 향해 ‘이 세상 어디에도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이방인’이라고 자처하셨습니다.
찢어질 듯 가난한 분들 가운데, 극심한 고통을 겪고 계신 분들 가운데, 철저하게도 혼자인 이웃들 가운데 신앙이 아주 돈독한 분들이 많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 어딜 가도 의지할 곳 없다보니 오로지 마음 둘 곳은 단 한군데, 하느님 뿐, 하느님만이 모든 것, 하느님만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분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삶 전체, 자신이 지닌 에너지 가운데 100% 전체를 아버지 하느님께로만 향하기 위해 다른 방향의 통로들을 모두 차단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느님 아버지만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극도의 가난을 솔선수범해서 실천하셨기에 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이 쏠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힘과 능력 전부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음 선포만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셨습니다.
천주교 박해가 잦았던 시절,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하셨던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평균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선교지의 상황이 열악했고, 시시각각 생명의 위협 앞에 노출되어있었다는 표시겠지요.
우리나라로 건너오셨던 선교사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서 “한국으로 선교를 떠납니다.”라는 인사말은 “나 죽으러 갑니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으로 떠나오시기 전, 부모님이나 동료들에게 미리 지상에서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비장한 마음으로 멋진 유서도 써놓고 선교지로 출발했습니다.
오직 하느님 한분만이 전부였던 그들이었기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등 뒤로 내던진 그들이었기에,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었던 그들이었기에 가능한 삶과 죽음이었습니다.
기적은 믿음에서
-이훈 신부-
오늘 말씀에서 많은 이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주위의 어떤 이가 예수님은 아닐까? 하고 자문해봅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일상에 너무도 평범하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너무 가까이 계시기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병자 몇몇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주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믿음과 기대와 희망이 없다면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실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믿음 안에서는
모든 것이 기적이 되며, 기쁨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것에
놀라고 계십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서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하루하루 기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을 행하지 않는 우리 삶에 대해 예수님도 놀라고 계실지
모릅니다. 반면에 많은 이들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자 듣고서
놀랐다고 전합니다. 진정 무엇에 놀라고 그 놀라움에 대한 반응이 무엇인지에
따라 우리는 믿을 수도 있고,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지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하루이면 좋겠습니다.
행복을 주는 사람
-전삼용신부-
어렸을 때부터 제 인생의 모토는 행복이었습니다. 조부모님의 죽음이 제 인생의 첫 기억이라 어차피 죽는 인생 행복하게 살아야한다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의 첫 목표였고 이것은 사실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변한 것이 있다면 행복해지는 방법입니다.
처음엔 돈도 많이 벌고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공부했고 기도했고 운동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사회 구조상 행복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군대 제대하고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공장에서 운전기사 일을 하는데 한 번은 공장 봉고차의 범퍼를 약간 찌그러뜨린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혼나지 않기 위해 밤새 범퍼를 뜯어 찌그러진 것을 폈습니다. 한 번은 펑크 난 차를 계속 몰아서 타이어 자체를 갈아야 했습니다. 펑크만 때우면 얼마 안 되지만 타이어 자체를 갈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사장님께 혼이 났습니다.
또 한 번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호 위반을 하여 경찰에게 걸렸는데 벌금을 지불하기가 너무 아까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군에서 제대할 때 함께 맞춘 반지를 보여주며 결혼한 사람인데 벌써 벌점이 15점이 있어서 이번에 또 벌점을 맞으면 한 달 면허 정지가 되기 때문에 회사도 잘리고 가족도 굶어야 한다고 말하자 경찰은 저를 잡고 있는 것이 미안했는지 가정도 있으시니 앞으로는 조심해서 운전하시라고 하며 저를 보내주었습니다. 그 십분 동안 한 거짓말이 제 평생 한 거짓말보다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짧은 직장 아르바이트 생활이었지만 사회생활이 참 어렵다는 것을 조금은 맞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사제들의 삶은 참 자유로웠습니다. 돈 걱정도 안 하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또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도 좋았습니다. 결혼을 못 하는 것이 흠이었지만 그것을 매일의 십자가로 생각하기로 하고 인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니 저의 솔직한 성소 동기는 저의 행복을 위한 어찌 보면 매우 이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저의 행복을 위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으나, 사제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아가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남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진리였습니다. 아무 걱정 없이 잘 사는 사람일지라도 자녀가 잘못 되는 것을 보면 혼자만 행복할 수 없는 것처럼 어차피 사람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 사제가 되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지 않을 수 없고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행복하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랑은 마치 물과 같습니다. 나는 물이 지나가는 파이프입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전달해주기를 원한다면 먼저 내가 물탱크에 닿아있어야 합니다. 내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교만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만 사랑이 가능했다면 사람은 혼자 그리스도 없이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맞닿아 있지 않다면 우리 안에 사랑의 물이 흘러들어올 수 없습니다.
흐리지 않는 물은 썩습니다. 사랑의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공기와 같아서 멈추어계신 분이 아니고 끊임없이 흐르는 분입니다. 따라서 사랑을 다른 이에게 주지 않는 사람에겐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물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물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는 내 자신도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깨달은 행복론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려 할 때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가득 채우시고 내가 이웃에게 안 좋은 것을 주려고 할 때는 내 안이 안 좋은 것으로 가득 찹니다. 왜냐하면 나는 파이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지팡이 외에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돈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남김없이 주라는 뜻입니다. 주는 것이 사랑이고 사랑은 남김없이 베풉니다.
사랑할수록 더 주고 싶은 것입니다. 미운 놈은 아무것도 주기 싫지만 아니, 오히려 나쁜 것만 주고 싶지만, 사랑스런 사람에게는 눈까지 빼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가난함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난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난해지니까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줄 줄 아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으로 그를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다 나누어주고 얻어먹으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집에서 떠날 때까지 머물며 그 집 신세를 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얻어먹는다는 것 또한 크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다 나누어주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어먹고 살기 위해서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도 버려야합니다. 자신까지 버리는 사람만이 자기 것을 챙기지 않고 거침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쏟아 부어 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래서 잘 주는 사람은 잘 받을 줄도 압니다.
미사 시간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머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빌어주면서 내 자신이 평화로 가득 차고 또 내가 빌어준 평화들이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겹으로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사시간에 한 번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줘 보십시오. 그리고 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한 번 느껴보십시오.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더 평화로 가득 차게 될 것임을. 내가 다른 사람을 축복해주는 만큼 내 안은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축복은 주님으로부터 와서 나를 통하여 다른 이에게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를 축복하는 것이 내가 축복 받는 것이고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이 내가 사랑으로 가득 차는 것이고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어른 미사에서도 물론 느끼지만 어린이 미사에서 이것을 훨씬 많이 느낍니다. 어린이들은 보통 미사시간에도 목이 찢어져라 성가를 부르지만 평화의 인사 후에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할 때는 다른 때의 두 배의 목소리가 납니다. 그런 목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와 찬미의 목소리, 그것은 행복을 주신 하느님께 우리가 당연히 드려야하는 예배입니다. 이 ‘감사(Eucaristia)’가 바로 ‘미사’입니다. 이웃사랑의 계명을 통해 나를 행복하게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가 곧 미사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주어야 받는다는 진리는 이렇게 축복을 빌어주는 작은 것 안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온 것이 바로 이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 즉 생명과 성령님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써 오히려 당신 안에 생명과 사랑이 가득 차게 되신 것입니다.
흐리지 않으면 비어있거나 썩어버립니다. 사해가 그것이고 그 반대의 예가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예수님은 받은 대로 베푸는, 아니 베푸는 대로 받아서 생명이 풍성한 갈릴래아 호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갈릴래아로 가라고 이르시는 것도 이 이유 때문입니다. 주는 것은 사랑이고 부활이지만 주지 않는 것은 썩는 것이고 죽음입니다.
이 진리만 깨닫는다면 우리는 주는 것 안에서 참 행복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저의 인천교구 사제서품 동기는 총 11명입니다. 이 11명은 본당, 교구청, 특수사목에서, 그리고 유학 생활이라는 공간 안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지요. 그런데 본당신부를 하고 있는 4명 중에서도 3명이 현재 신설본당을 맡고 있으면서 많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설 본당이라고 해서 뭐가 어렵겠냐고 말씀하시겠지만, 본당이라는 건물조차 없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람을 모아야 하고, 조직을 구성해야 하고, 더군다나 가장 큰 일인 본당이라는 건물까지 지어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저 역시 2004년에 아무 것도 없는 성지에 와서 생활해 보았기 때문에, 신설본당 신부가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노력을 하게 되네요. 그런데 만약 제가 이곳 성지를 오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무것도 갖추어있지 않은 이곳 성지의 체험이 없었다면, 신설본당을 맡은 동기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 누구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없이 ‘나만 힘들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을 것 같네요.
같은 병 또는 같은 처지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끼리 서로 고통을 헤아리고 동정하는 마음이라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이 저에게 생긴 것이지요. 즉, 제가 나름대로 어려운 생활을 해 봤기 때문에, 그러한 생활을 하고 있는 동기들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저의 경험을 보면서,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어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일까요? 사실 어려움을 체험해보았던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어려움 안에서 사랑의 부족함을 더욱 더 많이 느꼈고, 그래서 사랑의 부족함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이 왜 필요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그 파견 전에 하시는 말씀을 보면, 조금 치사하기도 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사랑한다면 더욱 더 많이 챙겨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어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제자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고생 좀 하라고 이렇게 파견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의 나눔을 하라는 이유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자신이 직접 어려움을 겪어야 남의 아픔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신 것입니다. 그래야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픔을 더욱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처지를 한탄하시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하지만 이는 그런 체험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주님의 특별한 보살핌이 아닐까요?
모든 것이 넉넉할 때 사랑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부족할 때 제대로 된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음을 잊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오늘을 만드세요.
어려움 속에 있는 분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도를 전합시다.
빠다킹신부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백남국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방으로 파견하고 계십니다. 또한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엄격한 여행 규칙을 제시하시면서 어느 것보다도 복음선포가 우선해야 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물론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복음 선포자의 여행 규칙은 교회 초창기의 특수한 상황에서 요구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완전한 무소유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청빈의 정신만은 지금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필요한 것을 넘어 더 나은 안락한 생활, 더 나은 생활환경에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복음선포는 당연히 뒷전으로 밀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신자분들에게 어떤 봉사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드리면 거부하는 가장 첫번째 이유가 대부분 경제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먹고사는 것이 바빠서 맡을 수 없다고 핑계를 대거나, 조금 생활이 안정되면 열심히하겠다며 기다려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도 못하겠다고 딱 거절하지 않고, 먹고살 만하면 이것저것 다 하겠다니 고마울 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죠.
우리는 하느님께 파견받아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쁜 가운데서, 다 갖추지 못한 가운데서, 모자라는 가운데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사실 다 갖추고 나면 더 바빠지는 것이 그때부터는 가진 것을 잃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니까요.
거센 풍랑에 맞서는 신앙인
- 홍승모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런 충고를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마르 6,8-10). 이 말씀에 따르면 복음 선포자들은 의식주에 관해서 어떤 보장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늘 누군가의 도움으로 먹고 살라는 뜻일까요? 우리는 이 궁금증을 아모스 예언서(제1독서)에서 풀 수 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자신의 처지가 양 떼를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나 가꾸던 별 볼일 없던 농부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아모 7,15)고 명령하셨기에 예언자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모스는 자신의 소유나 능력 때문에 하느님의 사람으로 뽑힌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모스의 고백을 제자들의 파견과 연결시켜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팡이나 여행 보따리나 돈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오늘 제2독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행 보따리나 전대에 있는 돈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넘치도록 받는다는 것입니다(에페 1,8). 우리가 이런 사실을 빨리 깨달을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뜻을 지혜롭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에페 1,9). 이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통찰력입니다.
복음 선포자의 기쁜 소식은 자신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비롯됩니다. 복음 선포자는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려고 파견받은 것이 아닙니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는 말씀에서 나타나듯이, 주님의 백성을 위해 사명을 위탁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점점 꺼져가는 촛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촛불의 기름은 한계가 있지만, 주님의 은총은 무한합니다.
문제는 믿음 속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거센 풍랑입니다. 거센 파도가 몰아치면 우리의 내면은 불안에 요동칩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가진 지팡이나 여행 보따리나 전대의 돈, 그 어떤 것도 소용없습니다. 사실 불안은 그것을 해소하고 의지할 만한 방법이나 사람이 가까이 있지 않다고 느끼는 유혹에서 옵니다. 이런 불안을 떨쳐 버리고 신뢰심을 키워 주는 분은 늘 함께 계시는 예수님뿐입니다. 그러기에 시편은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나는 듣고자 하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정녕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가까우니 우리 땅에 영광이 머무르리라”(시편 85,9-10). 오직 주님만이 평화와 영적인 복을 베푸시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든지 언젠가는 거쳐야 할 내면의 거센 풍랑과 맞서야 합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서공석 신부-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에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들을 회상하면서 그것을 배워 실천하려 하였습니다. 복음서들은 그들이 그런 노력을 하는 과정에 기록으로 남긴 문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복음서는 기원 후 70년경, 그러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4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초창기 교회 상황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당부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말씀 안에는 예수님이 과거에 실제로 하신 말씀도 있고, 또한 초기 교회의 활동 상황과 제자들의 마음다짐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여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겪었고, 그분이 죽음 후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는 사실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실천을 역사 안에 지속시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이나 신분을 받았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의 율사와 제관들은 하느님이 그들에게 권한과 신분을 주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권한과 신분을 받았다고 믿는 이들은 우월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과 제도는 경직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경직성이 없고 하느님의 일만 보이는 하느님 자녀의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섬김이 있고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며 서로의 의견을 듣는 유연한 공동체입니다. 남의 발을 씻어 주는 종과 같이 겸손한 자세로 서로를 섬기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는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들 자신도 실천하고 사람들도 실천하도록 권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신비스런 지배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인간을 지배하는 나쁜 힘, 곧 더러운 영들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합니다. 인간 안에 무질서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 시대 사람들은 쉽게 ‘더러운 영’ 혹은 ‘악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신체적, 정신적 질병과 사회적 모든 무질서는 이 ‘더러운 영’의 조화라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복음 선포는 그런 무질서의 해악(害惡)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기적으로 회당에서 정신병자를 고친 이야기를 전하면서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저분이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1,27)라는 사람들의 반응도 함께 전합니다. 결국 제자들이 받았다는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들도 지속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가벼운 몸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사실 그 시대 사람들은 여행할 때 많은 것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가벼운 차림으로 다니라는 말씀입니다. 가진 것이나 옷차림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시대에 남의 눈에 띄는 복장으로, 불편에 대비하여 많은 것을 갖추고 다니는 사람은 권력이나 재물을 가진 강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흉내를 내지 않고,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답게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닌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얼마든지 민폐를 끼쳐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초기교회는 가정 교회였습니다. 신자들 중 넓은 가옥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 집을 공동체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습니다. 이런 집을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가 발족하였습니다. 따라서 집 하나가 집회 장소로 정해지면, 그 집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 그 지역 신앙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로 사도의 편지들을 보면, 제자들이 선교 여행 중 거점으로 정한 곳은 항상 가정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집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 안의 특수 계층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마르코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신앙인들은 선교를 어느 신분과 관련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충실히 살아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권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과 옷차림에 구애받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신체적, 사회적 무질서의 해악에서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도록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건강, 상호간의 신뢰와 사랑,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되찾아 주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오늘의 인류 사회는 조직에 있어서 유연함을 추구합니다. 제국주의, 봉건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보다 더 유연한 것이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오늘 민주주의 사회는 자발적 시민운동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더 큰 유연함을 향한 행보입니다. 앞으로 세계는 인간의 창의력을 존중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하는, 더 유연한 조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통신 매체들은 모두가 정보를 쉽게 공유하게 해 줍니다. 세상은 상호 의사소통이 원활한 다원(多元)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스스로를 개방하고 유연하게 현실에 대처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실효성을 지닙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경직된 개인과 집단은 고립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유럽 교회가 신앙인들로부터 외면당한 것은 성직자를 중심으로 경직된 중세적 조직을 교회가 고수한 데에 그 원인의 하나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일을 신앙인들의 삶 안에 되살려내는 데 실효성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습니다. 과거 유럽 중세 사회에서 얻은 언어와 옷차림과 제도적 경직성을 벗어 던지고,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의 사람들과 함께 사는 교회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관을 쓰고, 거창하게 입고, 권위주의적인 언어로 가르치는 교회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함께 생각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서로 섬기는 유연한 교회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복음선포의 사명
-조욱현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두 가지 기본적 사상을 전해주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가지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셨다”(에페 1,4)는 것과, 이 구원계획은 제자들의 복음선포를 통하여 실현된다는 것이다(마르 6,7-13 참조). 오늘의 중심 주제는 복음선포이다. 오늘 우리의 활동들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 계시다.
제1독서: 아모 7,12-15: 나의 백성에게 가서 말을 전하여라
제1독서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목자이면서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인 아모스를 선택하신 것을 전혀 뜻밖의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택하실 때 하신 것같이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 아모스는 자신의 예언적 소명이 절대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한다고 한다. 왕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말하는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만일에 왕의 마음에 드는 말만 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배반할 수 있다. 예언자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하느님을 선포해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거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언제 어디에서나 부정과 불의와 부패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자유로운 예언사상의 전형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바로 나자렛의 목수(마르 6,3)인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고(마르 1,14참조) 세상이 심판 받을 때가 되었다(요한 12,31 참조)는 사실을 선포한 충실성과 진실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복음: 마르 6,7-13: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구원계획을 첫 번째로 실행하시는데 아모스의 경우와 같은 모습이다. 그들의 사명 역시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적 사명이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사도들의 파견은 인간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존하라는 것이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며 신발은 신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신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고 분부하셨다”(8-9절). 즉 이 말은 그 규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한 “열정”이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리라는 무한한 신뢰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이제는 사람에 대한 신뢰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협조자가 된다.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그 고장을 떠나기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10절). 그러나 때로는 거절당할 수도 있다.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는 고장이 있거든 그곳을 떠나면서 그들을 경고하는 표시로 너희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어 실현되고 있는 약속의 새로운 땅에 가까이 갔느냐 못했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전교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복음선포와 구원의 활동을 계속한다(12-13절 참조). 이렇게 교회는 세상에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반영시키고 그분의 모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성과는 어느 정도 우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현대의 복음선교 76).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우리의 복음선포가 아모스의 경우나 그리스도의 예언적 선포와 같이 권력이나 힘 앞에 항상 자유로운가?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할 용기를 항상 가지고 있는가?(로마 1,14참조).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가 아니면 우리의 능력을 믿는가? 극단적인 경우에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버릴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제2독서: 에페 1,3-14: 하느님의 구원계획-그리스도 안에 완성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이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10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 anakefalaiosasthai, recapitolare’라는 말은 전에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다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지배권을 다시 인식시키고자 하는 창조의 근본적 의미가 다시 드러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 구원계획은 우리들의 협력, 특히 교회가 실현하여야 하는 것이며, 이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비록 고달프게 느껴져도 우리가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그 사명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 주님께 파견 받은 제자들과 같이 힘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신앙생활을 머리로만 할 수 없다 | 구슬이 서말이라도…
- 김영수 신부 -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도 신앙이 여물지 않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워 보내신 주님의 파견은 제자들에게 구슬을 꿰어 보배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한 훈련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 놓으신 능력-사랑의 능력-을 발휘하게 합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신’ 주님께서 모든 신앙인들에게 주신 권한은 사람들을 자기 자신 안에 오그라들게 하는 이기심과, 자신의 평안만을 위해서 스스로 쌓은 담 속에 갇혀 지내는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삶으로 이끄시는 성령의 힘입니다.
세상에 나아가 신앙의 기쁨을 선포하는 신앙만이 우리를 참된 신앙인으로 키워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내 도움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지 않다면, 내 용서와 위로와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흩어진 구슬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난 5월 25일 통계청에서는 작년도에 실시한 ‘인구주택총조사 전수집계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 가운데에 종교인구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2005년 11월 1일 현재 우리나라의 천주교 인구는 514만6천명으로 10년 전인 지난 1995년의 295만 1천명보다 74.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10년간 국내 천주교 신자만 219만5천명이 늘었다는 보고입니다. 이 기간에 전체 종교 인구가 237만3천명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증가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 천주교 신자 수효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발표한 신자 수보다 약 48만 명이나 많은 것으로 집계되었다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비해 다른 종교들의 신자 수는 감소한 반면 가톨릭 신자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결과와 교회가 파악한 신자 수보다도 스스로 천주교 신자라고 응답한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많다는 보고를 접하면서 한편으로는 천주교 신앙의 고귀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결과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을 천주교 신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파악한 숫자보다도 48만 명이나 많은 514만 명에 이른다는 것은 아직도 천주교회가 사람들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러한 면에서 신앙을 선포해야 하는 신앙인의 사명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수치가 곧 우리 교회의 신앙생활 국면을 그대로 나타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 수효가 10년 만에 74.4%나 증가했다는 것이 한국천주교회의 성장추세를 반영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는 신앙생활을 쉬는 신자 수가 전체 신자의 35%를 넘을 뿐 아니라 매년 영세자의 80%이상이 1년 이내에 냉담을 하고 있으며, 주일미사 참례자 비율도 계속 감소하여 이제는 26%선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신자통계에 따른다면, 주일미사 참례자의 비율은 20%선에 불과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비신자 숫자도 1999년을 정점으로 해마다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라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514만 명에 이르면서도 신자 의무의 하나인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사람들은 120만 명 수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간의 큰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신앙을 실천하며 세상에 신앙을 증거하는 신앙생활 보다는 신앙을 자신의 생활 범위 안에서만 영위하려는 신앙의 사사화(私事化)의 경향이 깊어지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결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 신앙을 선택하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동기를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것은 관념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평안만을 추구하는 폐쇄적이고 미성숙한 영적퇴행의 결과를 가져올 위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선포한 기쁜 소식에 대한 심오한 신앙고백은 머리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에페 1, 12) 신앙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만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선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힘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은 자신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새롭게 변화시키고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복음은 세상의 지혜로써 선전되는 구호나 광고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증거 되고 선포될 때에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둘씩 짝 지워 보내신 예수님은 우리들을 짝 지워 파견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복음 선포의 현장입니다. 사람들을 참된 가치와 진실한 삶으로부터 갈라놓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앙하게 합니다.
겸손하고 소박한 영혼들
-양승국 신부-
저희 살레시오회가 한국 땅에 진출한 지 벌써 50년이 됐습니다. 50년을 넘어서면서 아쉽게도 몇몇 선배님들께서는 먼저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한 평생 수도생활을 해오시면서 인간적 나약함이나 부족함이 없지 않으셨겠지만, 다른 무엇에 앞서 수도자로 삶을 잘 마무리 지으셨다는 것 자체로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저희 공동체에서 오랫동안 모시고 있었던 할아버지 수사님의 장례식 때가 생각납니다. 돌아보니 수사님은 젊은이들로만 이뤄진 저희 공동체에 큰 선물이자 기쁨이었습니다. 기나긴 투병생활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지요. 늘 장난스런 얼굴로, 손을 꽉 쥐시며 후배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시던 재미있던 어르신이셨습니다.
수사님을 땅에 묻고 돌아와 수사님께서 머무셨던 방에 들어갔는데, 어찌 그리 황망하던지요. 수사님께서 남기신 소지품을 훑어보면서 다시 한 번 수사님의 가난하고 검소한 삶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겨놓고 떠나신 것은 겨우 낡은 옷가지 몇 벌, 이젠 구식이 된 라디오 하나, 쓰시던 안경, 틀니, 다 합해서 한 상자도 되지 않았습니다.
단 한번도 당신을 위해 물건을 사지 않으셨던 분, 거의 외출이나 외식을 하지 않으시며 공동체에서 머무르시던 분, 단 한번도 공동기도에 빠지지 않으셨던 분, 언제나 먼저 소매를 걷어붙이시고 삽을 드시던 분, 참으로 좋은 모범을 저희 후배들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건강문제로, 또 성소문제로 오락가락할 때였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아 결국 '떠나기로' 거의 마음의 결정을 짓고 수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수사님께서는 길게도 아니고 딱 한 말씀만 해주시더군요.
"서원한 수도자가 가긴 어딜 가! 그냥 계속 가! 가다보면 길이 생겨!"
단 한마디 말씀, 단순한 말씀, 투박한 한마디 말씀이었지만 선배로서 방황하는 후배에게 건네주신 참으로 값진 말씀이었습니다. 수사님께서 제게 건네주셨던 그 말씀을 이제 저는 후배들에게 다시 건네주고 있습니다.
지난달 저희들은 또 다른 선배 수사님 한분과 작별했는데, 수사님께서는 한국 살레시오회 초창기 회원이셨기에 어쩔 수 없이 평생토록 수도원에서 궂은일만 도맡아 해 오셨던 무척이나 겸손했던 분이셨지요. 형제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풀면서도, 자신을 위한 식탁에는 멸치 한가지로 족했던 분이셨습니다.
'새까만' 후배들이 줄줄이 버티고 있음에도 언제나 가장 먼저 공동체 경당에 도착하셔서 이것 저것 미사 도구를 챙기시던 분, 자그마한 체구의 수사님께서 덩치가 산 만한 후배들 고민을 자상하게 들어주시고, 일일이 등을 두드려주시던 수사님은 진정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의 거목이셨습니다.
그런 수사님 영정 앞에 저희 후배 100여명이 모였지요. 한 목소리로 크게 연도를 드렸습니다. 연도를 드리고 있는데, 수사님 트레이드마크였던 빙긋이 웃으시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툭툭 등을 두드려주시던 손길도 느껴졌습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목소리가 제 귓전을 울리더군요.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도 수사님께서는 수도자로서 좋은 모습을 저희 후배들 머릿속에 깊이 각인시켜주고 가시더군요. 떠나시기 오래 전에 장기 및 시신 기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늘 하시던 말씀이 이랬습니다.
"어디든 흔적 남기지 말고 내리(살레시오 캠프장이 있는 서해 바닷가, 수사님의 노고와 진한 애정이 깃든 곳) 앞바다에 뿌려줘!"
장례미사가 끝난 후 장지나 화장터가 아니라 병원으로 떠나시는 수사님을 배웅하던 저희 후배들은 다시 한번 수도자로서 봉헌생활을 갱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한가지 당부말씀을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한평생,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수도자로서 삶에 충실하셨던 선배님들, 그분들이 오랜 풍랑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셨던 이유, 한결같이 든든한 바위 같던 이유, 그리고 영예롭게도 수도자 신분을 간직한 채 삶을 잘 마무리한 배경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주님 말씀 따라 한평생 청빈지도를 생명처럼 지켜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외에 비본질적이고 부차적 요소들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총의 저녁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갔던 수사님들의 영혼, 그리고 먼저 떠나가신 모든 겸손하고 소박한 영혼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기쁘게 당신 나라에 받아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무얼 그리 재십니까?
- 최용혁 신부-
신학생 시절, 복지시설에 봉사를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버려진 아기들을 맡아서 돌보다가 입양시키는 기관이었는데 처음 봉사를 나가던 날 엄청나게 긴장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혹시나 잘못해서 아기를 떨어뜨리면 어떡하지? 기저귀 채우는 법도 모르는데 아기를 제대로 돌볼 수나 있을까? 아기가 자꾸 보채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등 온갖 걱정이 머리 속을 어지럽혔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처음 봉사 나간 저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기를 보는 일이 아니라 방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방바닥을 걸레질하면서 다른 봉사자가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잠을 재우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봉사 나갔을 때에는 어깨 너머로 배운 걸 그대로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첫 아기를 가진 엄마가 아기를 낳자마자 완벽한 엄마일 수는 없습니다. 밤에 징징대는 아기와 씨름을 하고, 목욕시키는 법을 몰라 허둥대면서 서서히 엄마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처음 교편을 잡은 선생님이 첫 수업부터 완벽한 교사일 수는 없습니다. 학생들과 여러 가지 일들을 헤쳐나가면서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그러면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심지어 돈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떠나라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은 주님이 채워주신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자들은 준비 없이 떠났고 훌륭히 복음 선포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가끔 신자들을 보면 봉사라는 단어에 기겁을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시작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과연 그분 생각대로 때가 되려면, 준비를 다 갖추려면 언제여야 할까요?
며칠 전 의정부교구에서 처음으로 사제가 되신 새 신부님들을 바라보며 몇 년 전에 있었던 제 자신의 서품식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때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정말 행복했었습니다. 이제 신부가 되었으니 다 이룬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발령받은 본당에서부터 제 자신의 미흡함을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그때 돌아가신 원로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제는 수단을 입고 관에 들어가야 비로소 사제인 거야.” 평생을 살면서 사제가 ‘되어가는’ 것인데 벌써 ‘되었다’고 생각했으니 참으로 어리석었지요.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나와 함께 걸으시며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시는 주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시간도 없고, 능력도 부족하고, 믿음도 미약하고, 봉사하라는 말에 눈치만 보고, 잘 사랑하지 못하고, 잘 용서하지도 못하는 그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로 더 채우려 해 봤자 그다지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냥 시작합시다. 우리가 시작하면 이미 반은 간 것이니, 나머지 반은 주님이 함께 가주실 것입니다.
존재의 이유
-김성남 신부-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 1,4-5)
이러한 하느님의 심오한 세상 구원 계획이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 받은 12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세상 끝날까지 실현 된다는 것이 오늘 성경 말씀의 주제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 즉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선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아모스는 목자요, 돌 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이다. 그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하느님께 선택되어 하느님 나라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게 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경우에도 아모스 예언자와 같은 상황이 적용된다. 예수님께서도 사도들을 부르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며 세상에 파견한다. 복음 선포 사명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다. 복음 선포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가장 큰 은총이요 하느님의 축복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의 사명은 하늘로부터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지팡이 이외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은, 무엇은 가져가고 무엇은 가져가지 말고 가 아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무한한 신뢰심의 중요성을 말한다.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고 해서 복음 선포 사명의 모든 상황과 조건이 만사형통 탄탄대로를 걸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미친 사람이란 소리도 듣고 내어 쫓기고 거절당하며,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죽을 각오까지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이 복음 선포를 그 누구보다 죽기까지 충성스럽게 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부귀영화를 주고, 특혜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편안하게 신자 생활 접어두고 어렵게 복음 선포해야 하는가? 복음 선포의 사명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이유이자,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예수님 존재 이유의 처음과 끝이다.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고 우리 삶이 지속되는 한 절대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우리 마음에 들면 하고,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는 신자생활의 존재 이유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다. 아모스도 예수님의 12제자들도 살아가는 존재 이유를 따라갔을 뿐이다. 요즈음 신자들의 생활을 보면 복음 선포의 사명감이 점점 희박해 지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절대적 존재 이유를 잊고 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아모 7,12-15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제 2독서 : 에페 1,3-14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복 음 : 마르 6,7-13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상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모자랄 텐데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 생각으로는 이런 조건으로 제자들이 세상에 파견되어서는 이틀도 안되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하나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되어버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끼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예수님의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돈도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의지하라는 가르치심입니다. 먹을 것이 많고, 소유하는 것이 많으면 당연히 거기에 신경을 쓰게 되고 정신은 해이해지기 쉽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하느님께 가는데 소홀해지기 십상입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이 말씀은 신부인 저에게나 수도자인 수녀님에게 있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신부들이 부임지를 옮겨갈 때 보면 ??지팡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짐이 몇 트럭씩 되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가끔씩 경험합니다. 다른 것들이 많으면 거기에 의지하게 됩니다. 본당 신부가 복음에 의지하며 살아갈 때 본당 공동체는 복음적으로 변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적인 사람들이 앞장서서 본당을 이끌어 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속된 사람들이 감히 공동체를 흠집 내는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도 차츰 차츰 복음적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본당 신부가 돈에 대한 편리에 익숙해 있다면 돈 있는 사람들과 비복음적인 사람들이 공동체의 물을 흐리기 십상이고, 또 음식이나 취미 생활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면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몰려다니게 되는 것을 경험을 통해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파견 나가는 제자들에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 다시 한번 귀담아 듣고 실천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사제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데 과연 24시간 하느님께만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신자들을 통해서 성직자의 삶이 더 의미 있고 깊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몇 해 전, 구정 전 날쯤으로 기억됩니다. 누가 찾아오셨다고 해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보니까 80세가 넘은 할머니 한 분과 60세가 다 되어 보이는 자매님 두 분이 선물을 하나 들고 오신 것입니다. 얼굴은 낯이 좀 익는데 잘 아는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구정이 되어 본당 신부에게 인사를 와야 하는데 몸이 많이 불편하셔서 아내 되시는 분과 따님을 대신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사 대신 편지를 써서 보내셨습니다.
?’제가 몸이 아파서 찾아뵙지 못하고 처자를 대신 보냅니다. 조그만 선물을 보내니 성의로 알고 받아주십시오.?“
얼마나 큰 정성입니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심이 보이는 본당 신부에게로 드러난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도 본당 신부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간접적으로 느끼듯이, 신부도 역시 신자들의 복음적인 삶을 통해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이 지팡이 하나만 있어도 이렇게 서로 간에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나누며 풍요롭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복음적인 삶입니까?
그런데 이렇지 않고 다른 것에 의지하여 살면 힘들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만 의지하면서 살아갈 것을 당부하십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가정 안에서 부모, 자식간에 또 형제간에 사랑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에 기대서는 안됩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가정은 이끌어져야 하고, 사랑이 중심이 되어 자녀들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렇지 않은 모습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가정이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돈과 출세를 중심으로 가정과 사회가 움직이고 그로 인해 많은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돈의 유혹에 너무나도 많은 가정들이 빠져 있고, 단지 사회적인 출세를 위해서 자녀를 교육시키는 부모들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중심이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될 때 가정의 풍파는 끊이지가 않습니다. 그 결과도 나쁠 수밖에 없지요.
어떤 형제가 직장 생활을 하다가 건설업종의 사업을 하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사업이 잘 되는 겁니다. 1년도 되지 않아서 매출이 100억 이상씩 올라가고 급성장을 하니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 수 밖에요. 이렇게 남편은 주변 사람들과 끊임없이 새벽 1시, 2시까지 어울려 지내고, 자녀들은 조기 유학을 다 시켰으니 아내는 할 일이 없는 겁니다. 매일 골프를 치러 다니거나 노래방에 다니고, 그러다가 그것도 성에 안차니까 백화점에 레스토랑을 열었습니다. 이제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각자 바쁘게 된 겁니다. 이렇게 각자 놀아도 재미있는 것이 나가면 돈이 있으니 주변에서 모두 이 부부를 잘 대우해 주는 것이지요. 무슨 말이건 다 들어주고 서로 만나 달라고 줄을 서는 형편인 겁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쉬는 날 부부가 만나면 서로가 너무 불편합니다. 다른 친구들은 무슨 이야기이건 다 들어주고 굽신거리며 듣기 좋은 말들만 하는데 남편은 일만 시키고 또 아내는 싫은 소리만 해대니 이제 제일 재미없고 제일 싫은 사람이 남편과 아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만나기만 하면 싸우게 됩니다. 어제 왜 늦게 들어왔냐고 싸우고, 나 늦게 들어온 것을 왜 참견하느냐고 싸우고 이렇게 맨날 싸우다가 결국 어느 한쪽에서 이혼 소리가 나오고 법원에 가서는 이혼 판결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남편은 그래도 이혼만은 꺼리는데 아내는 남편 없이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런 상황인데 장사가 잘 되겠습니까?
레스토랑이 망하고, 바로 I.M.F 가 터지면서 건설업계 사업을 했던 형제의 재산은 한 순간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다 떠나버리고 만나자는 사람 하나가 없는 겁니다. 이쪽에서 만나자고 그러면 돈 이야기가 나올 것이 뻔하니까 모두들 슬슬 도망가고 피하기만 할 뿐 안 만나 줍니다. 이렇게 남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부부는 각자 너무나 허탈해 하다가 결국 둘이 다시 살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할 것도 없으니 갈 데도 없게 된 이 부부는 지금까지 헤어지지 않고 잘 살고 있습니다. 돈이 가정을 해체시켰다가 돈이 없어지자 다시 가정이 회복된 것이지요.
이렇게 삶의 중심이 돈이 되면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해 집니다. 그렇다고 돈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중심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가족 사랑이 중심이 되어야지, 돈이나 출세가 중심이 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사람은 더욱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빌 게이츠에 이어 세계 두 번째 부자로 뽑히는 워렌 버핏이 자기 재산의 85%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370억 달러, 우리 돈으로 35조원에 이르는 금액입니다. 오마하의 현인(Oracle of Omaha 혹은 Sage of Omaha)으로 불리는 그가 후진국 교육사업과 에이즈, 말라리아, 결핵 퇴치 등을 위해서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그의 생활은 검소함으로 유명합니다. 운전사나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지 않으며 살고 있는 집 역시 1958년에 3만 1500달러, 우리 돈으로 2970만원에 구입한 집에 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버핏은 ??많은 돈은 자식을 망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재산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이는 세계 제일의 부자인 빌 게이츠 역시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많은 돈은 자식을 망친다?‘는 신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렇듯 돈에서 자유로운 그들의 기부가 본인들은 물론 전 세계인들을 행복하게 함을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반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돈이나 재산은 내가 편리하고 좋은 데에 쓸 때 그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지 돈이 중심이 되어버리면 결국 사람을 망가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상 가장 큰 유혹이 돈에 관한 유혹입니다.
이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직장인이 있었는데 그가 매일 집에 들어오는 골목 어귀에 호떡을 구워서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9시 정도가 되면 호떡을 굽는 것을 끝마쳐야 될 것 같은데 항상 늦게까지 호떡을 굽고 있는 것입니다. 호떡이 옆에 쌓여 있는데도 계속 호떡을 구우면서 싱글벙글 하는 호떡 장사의 모습을 보고 하루는 그 직장인이 물어보았습니다.
?’장사를 끝낼 시간에 무슨 호떡을 그렇게 싱글벙글 하며 열심히 굽고 계십니까??“
그러자 호떡 장사가 대답했습니다.
?’잘 팔려도 즐겁고 안 팔려도 즐겁습니다.?“
?’아니 안 팔리면 다 버릴텐데 즐겁다니요??“
?’어차피 재료는 다음 날 쓰기 어려우니 다 구워 가지고 집에 가는 길에 고아원에 나눠주고 가는데 거기에 있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참 재미있고 하루를 정리하는 기쁨으로 아주 그만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있어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삶의 질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것을 움켜쥐고는 나는 이것 밖에 없는데 왜 있는 놈들은 안 내놓느냐고 불평불만 하며 살아가면 삶은 늘 힘겨워지는 겁니다. 사랑은커녕 욕심만 부리면 부릴수록 점점 더 살아가기가 각박해지고 힘겨워지는 것이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돈에 가치를 두면 우리의 삶은 불행해지고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언제나 허덕이게 됩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지할 때만이 삶의 가치가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겁니다. 부모 자식간에, 부부간에, 형제간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사소한 문제는 그 안에서 다 해결이 되고 어려움은 있지만 언제나 평화와 희망이 넘치는 기쁜 공동체가 됩니다. 요즈음 보는 것처럼 돈이 그 중심에 오면 그 돈 때문에 부모를 버리고 형제와 다투고 왕래도 없는 비참하고 불행한 관계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돈이 아니라, 출세가 아니라,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의 중심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가족 간에 서로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나치게 출세와 돈에 치중하고 있습니까? 출세와 돈 쪽으로 중심이 가 있다면 그 비중을 반으로 줄이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배 이상 올리십시오. 그러면 풍요로워집니다. 가족 간에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고, 가정 안에서 서로가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며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내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역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며, 신자들 역시 세상의 불순물들을 버려 버리고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늘 소망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건설될 것입니다.
무소유를 가능하게 하는 소유
-상지종신부-
하느님의 사람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언제 어느 곳에라도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자유롭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소유입니다.
무소유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인에게 있어 무소유란 단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분명 자유를 위한 무소유를 가능하게 하는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신앙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믿음의 벗'이 바로 신앙인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다른 무엇을 소유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복음 선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곧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신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혼자가 아니라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는 것은 곧 험난한 복음 선포의 길을 홀로 걷게 하시지 않고 서로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줄 동반자를 항상 보내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지만 오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때때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의 길이 더욱 힘겹게 다가오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힘겨움에서 벗어나고자 여러가지 인간적인 방법에 의지하려고 하고, 점점 더 많은 것을 가져야 안전하게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에 의지할수록 점점 더 함께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의식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지면 더욱 불안해지고 이제 더 많은 가져야만 합니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단지 당신의 권세만을 주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믿음의 동반자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감으로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벗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결코 외롭지 않은 길, 그러나 인간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외롭고 고통스럽게 다가올 수 있는 복음 선포의 길에 벗들이 함께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벗들을 알아보는 순간, 앞으로 걸어가야 할 주님의 길을 걷는 우리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집니다.
사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도 혼자 걸어온 길은 아닙니다. 힘겹게 느껴졌던 순간, 포기하고 싶었던 그 순간에도 분명 누군가 우리와 함께 걸어왔습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믿음의 벗들이 말입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 이 순간 함께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앞으로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장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누군가 항상 옆에서 함께 걸어왔습니다. 앞으로 지금까지 보다 더 힘겨운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겠지만, 분명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값진 선물입니다.
주님의 길을 걸어오면서 함께 했던 많은 벗들을 떠올려 봅니다. 얼마나 고마운 이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은 자신이 걸어가야 할 주님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 또 다른 벗들과 함께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그들 역시 이제는 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길을 걸어갈 때, 예수님의 권세가 내적인 힘이 된다면, 예수님께서 짝지어 주신 믿음의 벗들은 외적인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세와 믿음의 벗들에 힘입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당당하게 주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함께 걸어가고 있는 벗들을 소중하게 맞아들일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이 벗들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 역시 예수님의 선물로서 다른 믿음의 벗들에게 주어져, 그들의 지친 발걸음에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동반자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내가 하느님의 힘으로 사는가?
-박상대신부-
마르코복음사가는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12명을 뽑아 사도로 선발한 내용(3,13-19)과 12제자를 실제로 파견하는 내용(6,7-13)을 시간적으로 거리를 두고 보도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마태오복음사가는 마르코의 떨어져 보도된 두 내용을 함께 엮어 10장에 보도하고 있는 있으며, 그 구조가 훨씬 더 논리적이고 내용도 풍부하다. 우리는 지나간 주간, 즉 연중 14주간 수(10,1-7), 목(10,7-15), 금(10,16-23), 토요일(10,24-33)에 그 내용을 평일복음으로 묵상하였다. 마태오가 전하는 파견설교의 마지막 부분(10,34-11,1)은 연중 15주간 월요일 복음으로 듣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하고 싶다면 지난주간의 수, 목, 금, 토요일 복음을 다시 한번 묵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지배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내세우려면 권력이 있어야 한다. 그 권력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보다 더 강해야 한다. 세상의 권력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모양도 다양하다. 힘, 돈, 지식, 관계, 조직, 무기 등이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 노력에는 온갖 부정한 방법들이 동원됨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세상 한 가운데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파견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서 자신을 내세우도록 불림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복음을 이 세상에 전하도록 불림 받은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지키기도 어려운 여장규칙을 제시하시고 때로는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복음을 증거해야 함을 요구하신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선교방법은 초기 그리스도교를 형성하고 이를 반석 위에 세우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2000년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교회는 안팎으로 많이 변했다. 교회는 초기의 선교방법을 놓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으며, 이 고민은 오늘날 바로 우리의 고민이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잠시 서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나의 삶 속에 진정 메아리치고 있는 지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내 안에, 내 삶 속에 얼마만큼 하느님의 힘이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진정한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 숨쉬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