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계 고등학교에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진도에 쫓겨서, 교과서적 지식을 적당히 먹기 좋게 잘라 학생들에게 집어 넣어 주다가, 혹은 정말 하기 싫은 객관식 문제풀이를 하다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회의가 들때...
항상 내가 역사를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 합니다.
'역사는 여러 인간들의 군상들을 살필 수 있는 학문으로서, 이에 대한 탐구와 사색을 바탕으로 나 자신을, 내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지 않은가...'
아이들과 이러한 생각을 항상 공유할 수 있는 수업을 꿈꾸는데.... 현실이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은것 같습니다. ^^*
영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문화 군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먹구름에 항상 가려 있었던 비운의 왕이었습니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아버지는 죄인이 되어 비참하게 죽을 수 밖에 없었고,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음에도 우여곡절 끝에 결국 궁중의 암투 속에서 왕이 되었지요.
이러한 정조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것은 정적의 제거와 자신의 세력 강화를 통한 왕권의 안정화 였겠지요.
결국 정조 즉위 이후 차례차례 아버지를 살해한 장본인 들에게 복수해 나가고, 규장각과 장용영의 설치로 왕권을 다져가게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화성의 축조는 기득권을 가진 노론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천도를 염두에 두고 세운 신도시가 아닌가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후세 사람들의 해석이고 유추일뿐 근거는 없습니다.
사실상 정조는 애초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라기 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화성을 건설하게 됩니다.
붕당정치니, 탕평책이니, 왕권 강화니 어쩌니 하는 정치의 문제를 떠나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나이에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었으니,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상처 입었으며, 얼마나 아버지가 그리웠겠습니까...
특히 정적들이 우글거리는 궁에서 끊임없이 신변의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죄인의 아들로서 세손이라는 위치는 아버지의 부재가 더욱 치명적으로 가슴에 한으로 사무쳤을 것입니다.
결국 반대파를 제거하고 어느 정도 정국의 안정을 취한 뒤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행궁(-임금이 나들이할 때 잠시 머무르는 임시 궁궐)을 짓는 등 여러 기구를 정비하지요. 그리고 이어 수원부를 화성으로 승격시키고 거대한 성을 쌓게 됩니다.
길지가 아닌 땅에 아버지가 묻힌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다, 드디어 이장하던 날 정조는 신하들 앞에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듯 어린날에 상처받은 효성 깊은 군주는 아버지 묘를 찾아 긴긴 여정을 떠나곤 했지요.
(- 정조는 아버지 묘소인 현릉원(-현재는 융릉으로 불림)으로 참배를 갈 때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아 한강을 건넜습니다. 이 화려하고 위풍당당한 군주의 행차 그림이 '화성능행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결국.... 역사는 사람의 이야기다... 라는 점을 수원 화성이 다시 각인 시켜주기도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