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 들어 새로운 삶의 둥지를 튼 양산이다. 살아오면서 인연이 전혀 없었던 고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 마지막을 맞아야할 도시로선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세인들이 일러주는 ‘노년에는 살던 곳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는 충고를 가볍게 생각하고 이주를 결행했으니 내심으론 불안감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살던 곳을 벗어나지 말라는 주문은 청장년시기에 사귄 이웃들과 가까이 붙어살아야 쓸쓸한 노년의 삶이 덜 버겁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고립무원으로 시작한 양산에서의 삶이었지만 십여 년 세월을 지나면서 정이 들었는지 이제는 포근함마저 느끼게 된다. 오랜 세월 대도시 부산에 살면서 양산을 도시 변방의 시골로 치부했었다. 그러다 한창 젊은 시절에 몸담은 직장에서 양산 북정지역에 들어서는 롯데칠성음료가 전기수용을 신청해 와서 업무수행 차 방문했었다. 산업단지의 신호탄으로 대기업 음료회사가 들어설 때만 해도 양산은 농촌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번째 양산에 발 디딘 것은 부산시가 크게 늘어난 취수용량을 감당하지 못해 물금취수장에서 강 건너 김해 매리취수장으로 일부를 떠넘기는 공사를 벌였을 때였다. 그때 양쪽 취수장이 위치한 낙동강 주변 풍광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데 뒤에 알고 보니 고운 최치원 유적지인 임경대가 바로 그곳이었다.
30년 전엔 직접 양산에 몸담아 1년 반을 근무했다. 부임하자마자 양산으로 옮겨오는 부산물류기지에 전기를 공급해야 할 설계도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류기지를 시작으로 소주와 정관지역에도 산업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평산 덕계 기장지역엔 아파트단지들이 빠른 속도로 조성되었다. 도시발전 속도로 양산이 급격하게 변모한 시기를 꼽으라면 아마도 이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일본 고베대지진이 터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지진여파로 민방위교육이 강화되면서 강사인 나도 금정구청 민방위교장을 매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씩 드나들어야 했다. 직장 사무실 인근 양산톨게이트에서 고속도로에 올라 15분이면 교육장에 닿을 수 있어서 차질 없는 대관업무협조가 가능했다. 하지만 민방위교장은 구청교육장만이 아니었다. 지하철 범어사역 구내에도 별도의 작은 교육장이 있었고 민방위 대원수가 많은 부산대학과 파크랜드 그리고 종교시설 범어사는 구청관계자를 따라 강사가 직접 현장을 찾아가서 강의를 해야 했으니 회사 업무까지 겹쳐 이중삼중고가 아닐 수 없었다.
양산으로 이주하자마자 신학기였고 양산대학 신재생전기에너지학과의 요청으로 1년간 출강하게 되었다. 현직을 물러난 후 부산 D전문대에 10년 넘게 출강한 경력을 인정해서 불러준 것 같았다. 덕분에 지역을 아는 교수들로부터 양산에 사는데 필요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고 순박한 학생들을 만나 캠퍼스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었다. 학생들과 포스코 본사 홍보관과 월성원자력발전본부를 견학했고 시내에 소재한 양산타워 신재생에너지 발전시설도 둘러보았다. 타워는 쓰레기를 연료로 사용하는 지역난방으로 전국 기초단체들이 견학을 올 정도로 높은 열효율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던 곳은 양산문화원이었다. 양산에 이주한 다음해 가을 문화원에선 '실버인터넷문화해설사' 과정을 개설하였다. 그러곤 인터넷을 통해 뽑은 10여 명에게 양산을 대외적으로 알릴 수 있도록 우수한 강사진을 구성하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게 해주었다. 현장체험으로 통도사를 비롯한 지역 내 명소들을 두루 답사한 것은 물론이다. 그렇게 정성을 들였지만 문화원 내부 사정으로 배출한 인력을 현장에 투입하질 못했고 후속 교육도 이어지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현직 35년 동안 대도시에 살면서 마음속으론 늘 번잡하지 않은 시골의 전원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전원주택을 꿈꾸던 시기에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유택을 하늘공원에 정하면서 양산과의 깊은 인연이 맺어졌다. 그러나 내가 꿈꾸던 전원주택은 진척 없이 그대로였다. 전원생활이 싫어서가 아니라 대도시를 떠나면 죽는 줄 아는 아내의 편견이 문제였다. 황혼이혼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게 전원생활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장병어린이후원회원의 양산신도시 아파트를 방문하고 돌아온 아내의 생각이 바뀌어 있었다.
산으로는 둘러싸였지만 평지이고 도심을 끼고 흐르는 하천변에도 운동기구 등 주민 편익시설이 너무 잘 갖추어졌더라는 찬사였다. 그날 아내는 신도시 중심에 들어선 국립대학 종합병원은 눈여겨보면서도 황산공원 앞을 남북으로 길게 흐르는 낙동강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 전원주택은 아니지만 양산에 호기심을 가진 이상 아내의 마음이 바뀌기 전 이주를 서둘러야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살고 있는 아파트를 일사천리로 처분하고 신도시 아파트를 물색했다. 그렇게 일단 번잡한 대도시를 벗어났으니 시쳇말로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이주 후 처음 일이 년은 아내 모르게 가끔씩 지역 내 원동 등 시골부락을 찾아다니며 전원주택에 나 혼자만의 창작공간을 전세라도 들고자 기웃거려 보았지만 마땅한 집은 나타나질 않았다.
망팔인생에 접어든 지금은 전원주택도 힘에 부칠 것 같아 망설이고 있다. 몇 십 년 동안 친목모임을 함께 해오는 지인들이 그동안 멀리서 안 빠지고 모임에 참석해준데 대한 보답이라면서 이제 부산에서 양산을 거꾸로 찾아오고 있다. 아내나 나나 찾아주는 이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지하철역까지 마중 나가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여 지역 내의 명소를 순방한다.
방문하는 이들의 의견을 물어 양산타워에서 춘추공원 워터파크 임경대 황산공원 배내골 법기수원지를 돌면서 문화원에서 주워들은 풍월을 읊어대는데 나름대론 관광해설사 역할을 해보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그런 정성이 조금이라도 전해졌는지 방문한 이들은 양산이 별천지로 변했다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현직 때부터 산행을 함께해온 은퇴자산악회 멤버들을 초대하여 오봉산과 천성산 천태산을 함께 오를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 준비단계로 일전엔 낙동강 건너 동신어산을 먼저 올랐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산으로 빙 둘러싸인 양산신도시를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과 함께 카메라에 담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기대한 대로 산에서는 살고 있는 아파트를 포함한 신도시 전체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나타났다. 하지만 몸담은 지역을 인터넷카페에 올려 자랑하는 것은 삼가야할 것 같기도 하다. 인터넷카페에 포스팅 한 ‘동신어산’은 517명에 불과한데 일주일 뒤 올린 ‘양산국화꽃축제’는 5,421명이나 조회자수를 기록하였으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처음 양산에 이주하여 봄철이면 양산천변에서 펼치는 유채꽃축제를 열심히 지인들에게 영상으로 알렸다. 반세기 전만 해도 봄에 결혼하는 신혼부부들이 제주도를 직접 찾아야만 볼 수 있던 유채꽃이 이젠 전국으로 퍼진 때문에 펼치는 축제였다. 유채꽃단지는 회원 수 9백을 바라보는 부산문인협회 홈페이지에도 올리면서 지하철역에서 행사장을 찾아가는 길까지 알렸다. 엎드려 절 받는 식이지만 그래도 꽃을 둘러보고 답례를 보내오는 이들이 고마웠다. 양산시보에다 가끔씩 '독자사진'으로 지역명소를 투고하여 싣는 것도 아름다운 양산의 명소를 공유하고 싶은 때문이다.
양산 이주 2년 뒤 예정에도 없던 직장은퇴자 단체를 덜컥 맡아 고심했다. 설상가상으로 연임까지 6년을 봉사하게 되면서 부산 서구청 옆 사무실까지 출퇴근이 힘들어 사무실 가까운 곳으로 이사할 계획까지 세웠었다. 하지만 아내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느 시인은 '지금 앉은 자리가 꽃방석'이라고 노래했다. 일흔 고개를 넘긴 아내는 자신이 앉은 자리가 꽃방석인줄 알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우리네 삶도 일순간일 터인데 지난 십여 년 양산의 자연과 이웃에게서 받은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