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는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저녁때의 대연회를 기대해서인지 다들
가볍게 샐러드와 과일, 빵 정도로 때울 생각이었고 최소한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도 이
의가 없었다. 다만 당사자들이 알지 못하는 묘한 분리감이 공중을 떠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가 몇살때였더라..."
"13살이요."
"아니 나말고 너."
"전 그때 10살이었어요."
"어린애가 용케도 살아남았군. 오스만은 그런 점에서는 쓸데없이 철저한 놈인데."
"뭔가 사고가 생겼었어요. 죽었는 지 살았는 지 확인할 여건이 아니었죠. 시체밑에 숨어서
머리를 웅크리고 있었기에 보지는 못했지만 '젠장!'이라고 외쳤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해
요."
살라딘은 이야기를 하다말고 옆에 앉은 마르자나의 머리 위에 손을 툭 얹었다. 침울한 기억
에 어두워졌던 표정이 조금씩 웃음을 되찾는 것을 보면서 살라딘도 같이 웃었다.
"물어볼게 하나 있는 데 말이야."
반면 버몬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얼굴 한구석을 찌푸리고 있었다.
"참치 샐러드와 갓구운 빵을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어떻게든 네 녀석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기 위한 나름대로의 술책이지. 듣고 불편해질 정
도의 양심이 남아있다면 좀 뉘우쳐."
"좋아. 좋다고. 사과를 하라면 하고 뉘우치라면 뉘우치지. 하지만 이건 엄연히 불공평해. 왜
냐하면 이제 투르에는 아스타니아 침략에 대해서 해명할 늙은이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잖
아. 이 상황에서 우리만 사과를 해야한다는 건 분명히 어불성설이다."
"그렇게 섭섭하다면 내가 하지. 내 조부의 이름도 있으니까."
"......댁한테? 안받으니 못하지."
"반응이 수상하군. 내 사과는 못받겠다는 건가?"
"당신이 하는 사과따위, 어디가서 선전포고로 오해받아도 할 말 없어."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스타일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니 역시 어린애
로군."
"아하, 미안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 말로 다시 사람을 도발하기엔 너무 자주 써먹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긴 그 단순한 머리에도 익숙해질 만큼 많이 써먹었긴 했군. 이제 또 뭐가 있을까..."
"......정말 이 여자가!!"
"참으라니까. 덤벼도 본전도 못 건지면서 이게 대체 몇번째냐?"
"그 점은 형제가 똑같군. 원래 좀 닮은 녀석들이긴 했지만."
"닮아요? 대장이랑?!"
'저 사람이?!'라는 구절은 여러가지 핑계로 생략.
"그래. 어렸을 땐 정말 닮았었어. 지금도 보라고. 머리나 피부색때문에 그렇지 이쪽이 몇년
만 더 살면 판박이처럼 보일 눈매잖아. 입가부근도 그렇고. 동생쪽이 좀 더 어머니를 닮은
것 같기는 하지만."
살라딘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물었다.
"얀이 우리 어머니를 어떻게 알아?"
"여성스럽게 생겼다는 뜻이다. 바보."
"하지만 대장은 본전은 건졌다구요. 아니지. 본전이상이잖아요. 옛날 일기토 할때 결국 인질
로 잡았으니까."
"그때 말고. 그 전에."
"에?! 옛날에 만난 적이 있었던 거야?!"
"........그럼 내가 지금 눈 앞에 있는 저 축소판이랑 이야기한 내용이 대체 뭔 줄 안거냐?"
"누구더러 축소판이래, 축소판이!"
소연의 매서운 촌평이 화살로 날아가 다른 사람의 가슴에 툭툭 박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유
나는 엘핀스톤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쉴레이만 5세의 장남인 사피 알딘의 동복누이가 지금 현재 투르의 술탄인 세라
자드님이신거죠."
"상당히 기형적인 왕위계승도로군요. 그러면 이제 선대의 직계혈육 중 남은 이는 아무도 없
다는 겁니까?"
"아뇨. 아마 딸 몇명은 남아있을 걸요. 물론 이미 오래전에 남의 가문에 시집가서 살다가 이
번 외란때 내 손에 씨가 말랐겠지만. 결국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아마... 몇 대쯤 위의 외척
가문이나 방계혈족들은 남아있을 지도 모르지만 왕위계승권은 오래전에 박탈되었을 거고,
폐하가 여성이라는 것을 핑계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기에도 턱없을 만큼 피가 흐려진 상황
인거죠. 불안정하지만 명분은 충분해요."
"그... 사피 알딘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좋은 질문이군요. 하지만 어째 그 질문은 당신이 아니라 버몬트가 물었어야 했을 것 같은
데."
"..............."
"아니면 당신이 듣고서 전해줄래요?"
엘핀스톤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약하게 한숨을 쉬고는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유나씨. 난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어떻게 불편하게 만들던 당신의 의도
또한 좋은 것이라는 걸 확신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게임말처럼 갖고 놀지는 말아요. 나를 포
함한 그 누구도 당신에게 대항할 만큼 강하지 못하지만 받아치지 못하는 자를 공격하는 건
당신의 철학에 위배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반성하죠. 그래봤자 나는 멈추지 않을 테지만."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자기위안같은 겁니다."
".......자포자기하지 말아요."
"포기하는 데도 각오가 필요합니까? 나는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대체 뭘?"
"내 결심."
".............."
"하기 전까지가 오래걸려서 그렇습니다. 다짐하는 게 힘들어서 그런 것 뿐이에요. 일단 한번
정하고 나면, 그 누구도 그걸 못 바꿀 겁니다."
"..............."
"그 다음엔 기꺼이 여유를 갖고 당신의 술수에 장단을 맞춰드리죠. 그러니 지금은 하지 말
아요."
"글쎄... 그 다음이 있으려나..."
"예?"
"아니, 아무것도. 사피 알딘이란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했죠?"
"그렇습니다만..... 어째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듯 한 표정이군요."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소연과 경님사이에서 뭔가 쑥닥거림과 비슷한 눈빛과 옅은 웃
음이 스쳐지나갔다.
"후후후후...."
"뭐냐, 너희들, 왜 그렇게 웃는 것이냐?"
"거기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사피 알딘이란 사람은 유나에게 있어서..."
"어이어이어이;; 지금 무슨 이야길 하려는 거야!"
몸을 일으켜서 경님의 입을 막으려고 유나가 손을 뻗었지만 냉큼 물러서는 건 경님이 한 발
빨랐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일종의 첫사랑이에요!"
소연이 외쳤다. ............다 들었다. 열댓명 모여 앉아 밥먹는 데 무슨 공간이 그리 많이 필요
하랴. 대강 조용히 떠드는 이야기도 5할 이상은 귀에 들어왔는 데 대놓고 외친 저 말을 못
들을리 있으랴.
"이봐! 죽은 사람 놓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내 첫사랑은 폭스 멀더야!"
"뭐야, 죽든 말든 상관없잖아. 그 사람은 일종의 아이돌이니까. 그리고 폭스 멀더는 유니텔
에서 얼마든지 다운받을 수 있는 데다 케이블에서 재방송까지 하잖아. 희소가치에서 비교가
안되지."
"끄응...;;"
"아무튼 하던 말 계속하자면, 영원히 이루지 못하고 남아있는 꿈, 그렇기에 더욱 영원속에
존재하는 왕국. 보이지만 넘을 수 없는 수평선. 뭐 그런 거예요. 첫 동경이고 첫 이상이고
첫 사랑이죠. 충성이란 행동양식이 이 녀석이랑 워낙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 것 뿐, 어쩌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어요. 물론 여기엔 아주 치명적인 아이러니가 하나 존재하는 데...."
"됐어. 죽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거지. 됐지? 이제 그 이야긴 끝내자고."
유나가 얼마나 남사스러워하건 말건, 경님과 소연은 뒷일도 생각안하고 신이 나서 떠들어댔
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지 않은 사람이지. 말은 똑바로 해야지. 사람인 이상 결점이 없
을 리 없으니까. 게다가 넌 네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건 말건 그의 결점에 눈감아주는 사람
이 아니잖아. 그에 대한 너의 동경, 너의 사랑이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그 사람처
럼 되고 싶은 마음이니까. 너에게 있어 살아있다는 건 결점투성이라는 것과 동의어 아니었
어? 사랑이라는 건 상대의 결점을 알아가는 과정이었고. 난 최소한 네 머리속에선 그렇게
생각되고 있는 줄 알았는 데. 그래서 '나는 그를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
다'라고 말하지 않았었냐구."
"...........알긴 뭘 알아. 이 기집애들아. 나중에 두고 보자."
으드득- 이빨가는 소리에도 경님과 소연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깔깔깔 웃어댔고 유나는 귀
밑까지 완전히 벌개져서 밥그릇에 고개를 쳐박고 열심히 주어진 음식물을 소비하는 데 주력
했다. 그리고, 엘핀스톤은 더욱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 데요?"
옆에서 뿌드득 뿌드득 거리는 소리가 샐러드 볼에 울려서 더욱 무시무시하게 들려왔지만 엘
핀스톤은 호기심에 모든 것을 무시했다.
"으음... 일단 상당한 미남이고,"
"만백성을 상대로 선언하고 명령하는 데 어울리는 근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
어요. 특별히 이런 점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납득해버리고 마
는... 예, 마치 태양같은 사람이었어요."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이었죠."
"좋은 오라버니였고, 아마 좋은 아버지도 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위대한 왕이었지. 왕관은 그에게 있어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었어."
모두다 경님과 소연의 말을 듣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을 때, 목소리는 정반대편에서 들
려왔다. 마치 파도가 물결치는 것처럼 다시금 고개들이 그쪽으로 돌려지는 모습은 약간 코
메디 같았다.
"형?"
"그의 삶이... 그렇게 짧았다는 걸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할 지경이지만.... 어쩌면 그는 전
설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일지도 모르지. 언제나 희망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가 죽은
뒤 한동안 내게는 절망뿐이었지만."
".....그를 좋아했어?"
"그를 대신해 죽고 싶었을 정도로."
".............."
"그가 '친구'라고 불러주는 한 마디에 너를 잠시 잊을 정도로."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는 지 고개를 숙여버리고 마는 동생의 뺨을 쓰다듬어주면서 살
라딘은 어쩐지 노인같은 표정을 지었다.
"뭐야.. 형도 왕이었으면서..."
어린애같이 삐죽대는 버몬트의 말에 살라딘은 묘하게 엄히 대꾸했다.
"아니, 난 단한번도 왕이었던 적이 없어. 왕관을 쓴다고 해서, 아버지가 왕이었다고 해서 왕
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난 그를 보며 그것을 깨달았지."
"..........."
"난 네가 그런 왕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어깨 위에 느껴지는 무게가 열 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버몬트의 축 처진 어깨를 힐끗 보던
얀이 가볍게 한마디 했다.
"뭐, 너라고 못할 일은 아니야. 그 사람도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건 아니니까. 어렸을 땐
꽤나 시건방진 헛소리를 늘어놓는 상자 안의 보석에 불과했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열심히 밥그릇에 매진하고 있던 유나의 고개가 광속에 가까운 속
도로 들렸다.
"......기억해요?!"
"응?"
"어렸을 때 만났던 걸 기억한단 말이에요?! 맙소사, 그는 죽을 때까지 당신이 그걸 전혀 기
억 못한다고..... 합!"
얼씨구 얼씨구, 유령과의 밀회담을 만천하에 공개하려고 갖은 애를 쓰는 구나, 써. 유나는
속으로 마구 울면서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 지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당신, 그를 만났었나? 하지만 분명 당신이 나타난 건...."
"그럴리가요. 우린 한번도 만난 적 없어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는 듯 소연이 일축해버리자.... 그 놈의 변덕도 팥죽같지. 또 뭔가
슬슬 긁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만나요. 우리가 투르에 도착했을 때 이미 폐하께서 술탄이 되신 후였
는 걸."
"얼레? 그러고보니 유나가 정말 그걸 어떻게 알아? 세라자드가 말해줬어?"
"세라자드도 그 자리에 없었어."
팩 하니 쏘아붙이고는 유나는 자못 토라진 듯한 표정을 하고는 탁 소리가 나게 식기를 내려
놓고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아, 저도요."
엘핀스톤이 따라 일어섰다.
"......당신은 뭔데 같이 일어서요?"
"정말로 다 먹은 거 뿐입니다."
"그렇다고 같이 일어날 건 없잖아요. 할 일 없으면 이 녀석들이랑 놀아주고 있으라고요."
"아까 미처 궁전을 다 못돌아봐서요."
"................."
"정말 보면 볼수록 웅장한 건물이군요."
옆에서 나란히 따라오는 엘핀스톤을 바라보며 유나는 심각하게 자신이 전생에 금발머리들과
지독한 원수라도 졌나 곰곰히 고찰해보고 있었다. '이 남자, 분명 맨 처음엔 도시락급이었는
데 어느새 잡아먹지도 못할 매머드가 되어서 달려드는 거지?' 자신이 몇몇 캐릭터에 한해서
는 엄청난 레벨업 병기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유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마침내 고민
하다 미쳐서 자기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울부짖기 직전, 엘핀스톤이 수위를 넘은 담
에게 물꼬를 터주었다.
"나는 당신이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인 줄 알았는 데요."
일정수준이상의 독설 어빌리티는 행사자의 정신상태와 상관없이 일정수준의 방어기제를 갖
추고 있는 법이다. 유나는 말한 사람 무안하게도,
"그래서요?"
라고 냉큼 쏘아붙였고, 요령없기로는 0순위를 다투는 이 남자, 다시 버벅대기 시작했다.
"아니요... 뭐, 그렇다는 거지요. 의외랄까."
"흥,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방랑햅네, 하는 것 치곤 대책없이 시야가 좁군요."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법이라고 하니까."
"대꾸는 잘하지. 쳇."
"그러는 그쪽은 자기가 보는 걸 남이 보지 못하면 신경질내는 타입이잖아요. 제대로 설명도
안해주면서."
"........100점 만점에 89점은 받을 만한 평가지만 나도 사람이에요. 보고 싶지 않은 것과 보여
주지 않는 것은 못봐요."
"당신은 무섭습니다."
뭐?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이 백주대낮에 밥 잘 처먹고 이게 무슨 소리야?
".....뭐라고요?"
"당신의 존재는 위협적이라고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든, 싫어하는 사람에게든. 그러니
까 조심하세요."
"실례합니다만! 당신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는 데요!"
"간절하게 사랑받는 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의 누이가 맨 처음 느낄 감정 중
배신감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말문이 떡 하니 막혔다.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리가 있나!
"오라버니 대신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오라버니 대신에 사랑받고 충성받는 사실에 순진하
게 감사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군요."
문득 수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그때부터. 재깍 공격모드로 전환할 만큼 속이 좁지는 않지
만 어쩐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왜 그 말을 당신의 입에서 들어야 하는 지는 설명되지 않아요. 무슨
꿍꿍이죠? 당신이 세라자드의 안부에 대해서 신경써야 할 이유가 있나요?"
"설명해야 할 수 있는 이유라면 조금도 없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라면?"
"프라이버시의 영역이라고 말씀드리죠."
"프라이버시 침해가 내 최고의 특기이자 공적이죠. 한때 댁 사촌동생에게 했던 것처럼 당신
도 들쑤셔볼까요? 당신에 대한 내 집착이 버몬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다고 해도 못할 것
같아요? 당신이 받을 상처가 두려워서 내가 물러설까요? 당신이 그보다 결백하다고 생각해
요?"
(공격모드로 전환할 만큼 속이 좁지는 않다는 주제에 이 선전포고는 뭐냐;;)
파랗게 독기가 오른 눈을 쳐다보면서 엘핀스톤은 두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하나는 괜히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한 것이 아닐까하는 막연한 후회와,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
그 갸날픈 여왕은 절대로 옥좌 위에서 홀로 죽어가진 않을 것이다.
이 사람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녹녹치 않은 일이겠지만.
"내 결백함은 흰 옷과 같은 겁니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에요?"
"빨면 다시 깨끗해지죠."
유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당신, 이제 보니 꽤나 교활한 사람이군요?"
"당신 말대로 나는 희생자가 아닙니다. 희생자를 자처하면서 순교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그랬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았겠죠."
"..........."
"나는 언제나 내 삶을 살았고 주어진 선택 내에서는 항상 최선이었습니다. 남의 눈에 어떻
게 보였던 간에 내 인생은 내 것이었고 그 통제권이 남의 손에 들어가있었던 적은 없어요.
그로 인해 내가 불행했든 후회했든 그것은 나의 문제입니다. 표류하는 나뭇잎처럼 떠밀려서
살아온 자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살아남았다, 이거군요?"
"비꼬지 마십시오. 내 인생은 꼬일대로 꼬였을 지언정 남의 손 위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
니다. 그렇게 내버려둘 수도 있었지만, 어쩌면 결과적으로 그것이 나았을 지도 모르지만 나
는 도망치고 거부하고 회피해서 끝끝내 다른 사람한테 그 길을 미루었습니다. 내 의지로 불
행을 택했습니다. 이제와서 이곳에 있는 것은 전적으로 그것이 나의 의지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경고다. 유나는 더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벽을 느꼈다. 넘치는 에너지덩어리가 아
닌 이상 타인의 삶에 끼어들어 그것을 뜯어고친다는 것은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다. 성질머
리가 뻗치는 대로 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울었다.
지금 이 사람은 내게 끼어들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끼어들 생각따위 애시당초 없었어. 당신
을 '어른'이라고 정의했던 건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이라고 정의한 것과 마찬가지야. 당
신에게 별 특별한 집착이나 애정도 없는 데 내가 왜 상관하겠어. 하지만 역시 이렇게 단호
하게 거부당하면 조금은 아파. 그건 내가 쉽게 상처입고 쉽게 상처주는 어린애이기 때문이
겠지. 물론 당신이 이렇게 치고 들어오는 건 나를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어요. 그녀 하나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대신이라고 생각한 적 따위 단 한번도 없어요."
"그러면 그걸 말해주십시오. 그대로 믿어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대용품이 될 뻔했지만 끝내 벗어난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대용품이 되고만 사람에게 베풀
어주는 동정인가요?"
"설마. 그런 값싼 것을 흘리고 다닐 만큼 저도 풍요로운 인간은 아니라서."
"그럼 뭐예요? 당신이 왜 그녀에게 신경써요?"
"일종의 동질감이라고 해두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다행히 이번엔 헛소리라고 하진 않는 군요?"
"딴 말하지 말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굴레 중에, 가장 벗어나기 힘든 것은 억압이나 폭력이 아닌 사랑
의 이름을 쓰고 달려드는 것이죠."
엘핀스톤은 목에 걸린 낡은 로켓을 만지막거리며 말했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맨처음 봤을
때만 해도 분명 하고 있지 않았는 데.
"자유와 행복이 동의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자유로워 진다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행
복한 사람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에요. 평생 내가 추구한 것이 자유였다고 해도 나는 그로
인해 불행했으니까."
"..............."
"그 사람은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을 테니까, 꼭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자, 잠깐만, 좋은 뜻인 건 알겠는 데요. 그, 그 말은 내가 아니라 필립 왕자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지금은 당신에게 해야 할 것 같은 데요. 모든 에너지가 당신에게서 오니까."
"끄응, 태풍의 핵이라는 것과 뭐가 다른 거죠?"
"그건 고요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마법사라면 정말 재미있었을 텐데요."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별 뜻 없습니다. 마력은 내부의 에너지니까..... 나눠받을 수 있는 거라면 좋을텐데....."
".......자꾸 되묻는 거 같아 조금 미안하지만 뭐라고요?"
"잔인해져야 할 때 잔인할 수 있는 것은 미덕이라고 생각하죠?"
"그거야 물론.... 근데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유나는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눈동자가 왼쪽으로 돌아가며 잠시 생
각하는 듯 하던 그녀는 딱 잘라 대답했다.
"당연하죠."
"그럼, 내게 그 미덕을 조금만 나눠주겠습니까?"
"................"
엉뚱한 선문답같았던 대화가 슬슬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유나의 표
정이 착 가라앉았다. 느리게 뻗어나가는 손이 조금씩 떨렸다. 그 손을 마주 잡는 엘핀스톤의
손도 결코 편안해보이진 않았다.
"......그 아이가... 동생의 이름으로 부탁하면.. 나는 분명 거절하지 못하겠지요."
"......미안해요."
"예?"
"그 녀석곁에 당신이 남아주길 바랬어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괜찮습니다. 당신은 나보다는 그 아이를 더 사랑하는 거 같으니까."
"정말 미안해요."
"그러니까 당신에게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이 사람은 어른이야. 유나는 그제서야 정작 말하는 자신도 정확하게 몰랐던 그 의미를 조금
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내게 기대지 않을 거다. 세라자드가 그랬듯이, 심지어
클라우제비츠가 그랬듯이 자신의 짐을 애정과 함께 주고서 같이 앞으로 나가자고 말하지 않
을 거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짐은 자기가 책임질거야. 그것이 아무리 무모하고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해도, 그 무게에 짓눌러 죽는 한이 있어도 이것이 무거우니 덜어달라고 부탁하진
않을 것이다. 그 심정을 알아. 어째서 인지 나는 그 심정을 알아. 미친 듯이 괴롭고 아플 땐
오히려 단 한마디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두려워서가 아니야. 그렇게 소리쳤는 데 외면당
할까봐 무서워서도 아니야. 응석부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엔 이것보다 더 힘들고 고
된 사람도 있어. 겨우 이것으로 꺾이고 싶지 않아. 나는 이보다 강한 사람이야. 응석부리고
내 아픔을 돌아봐달라고 말하는 것이, 그 무게에 그대로 눌려 죽는 것보다 부끄러웠어.
"행복해지세요, 라고 말하진 않을 게요.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는 건 아니니까."
그는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도 기왕이면 그렇게 되는 편이 좋은 겁니다."
"미르샤."
"네. 폐하."
예전에 입었던 하얀 원피스만을 입고 틀어올린 머리도 치렁치렁하게 푼 채 경대 위에 엎드
려 물끄러미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청순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
다. 화려한 예복에 맞춘 옅은 색조화장도 지우자, 아직 앳띈 얼굴은 여자라기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나... 이상하지 않아?"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보기에 말이야. 갑자기 이런 치렁치렁한 옷이나 입고..."
"예쁘기만 한데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흐음, 하고는 세라자드는 다시 푹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버렸다.
"......마음 먹은 대로 잘 안돼. 싫고 짜증나. 유나씨한테도 막 싫은 소리 하고 싶고.... 무엇보
다 앞에서 뭐라고 떠드는 사람들한테 그만 입 좀 다물라고 소리치고 싶어."
미르샤는 그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뭔가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작은 주먹을 꽉 쥐더니 세라자드 옆으로 작은 의자를 질질 끌고 와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머리 속으로 한번 리허설. 음, 이제 실전.
"그럼 언젠가 한번 기회잡아서 해버려. 뭐 어때. 말 좀 듣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호흡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순식간에 말해버렸다.
대뜸 튀어나오는 반말에 세라자드는 굉장히 놀란 눈으로 미르샤를 쳐다보았다. 미르샤는 얼
굴을 붉히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러니까 트...특별한 경우에만이야. .....바로 지금같은 때라 할 수 있지. 뭐....에...또..."
"미르샤!"
세라자드는 자기 몸의 반밖에 안되는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미르샤는 그 조그마한 손바
닥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여주었다.
".....고마워... 고마워. 정말 고마워..."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 일은 아닌 거 같지만 뭐, 아무려면 어때. 우리 둘 뿐인데. 안 그래?"
"응, 응. 그럼. 아무려면 어때."
'이러다가 우는 거 아닐까' 싶어서 미르샤는 은근히 불안해졌지만 정말 뭐 어떤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러고 싶었던 것을. 이 몸이 아닌, 지금은 오만해보일 정도로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다른 몸 안에서조차 그녀는 한없이 약하고 어려보였는 데.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하루 아침에 부모를 잃어도, 살던 집이 박살나도 그렇게까지 절망적
이진 않았다. 엄마 아빠가 그리웠지만 그보다는 배가 고픈 게 더 힘들었어. 할머니가 무척
많이 보고 싶었지만 그건 잠들 때 너무 추웠기 때문이야. 그리고 다행히도 그들이 죽은 모
습을 볼 기회도 없었어. 그들은 그저 하늘나라로 가버린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
게다가 혼자도 아니었어.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열댓명은 더 있었지. 갈 곳이 없었던 것도
아니야. 요새 안에선 굉장히 밝고 쾌활한 사람들이 다정하게 이름을 물어봐주고 먹을 것을
줬으니까. 깨끗한 옷과 잠자리, 먹을 것이 나오고 힘들지 않게 적당한 일도 주어져. 그 평온
하고 아늑한 곳에서 제일 힘들어보이는 사람은 언제나 이 언니였는 걸.
"가끔 불안하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전 승하하신 선대 술탄을 뵌 적이 없지만 그 분
이 살아계셨다면 분명 느끼지 못했을 거였겠죠."
"선대 술탄입니까?"
"예. 현 술탄께서 즉위하시자 마자 재상께서 건의하신 일이죠. 즉위식때 운명하셨지만 엄연
히 군주의 반열이십니다. 현 술탄 세라자드님께선 이스파히니가 아닌 사피 알딘님의 뒤를
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자는 거였죠. ........무엇보다 방금 벌어졌던 사태로 보면 재상님의
개인적인 소망일 가능성도 크긴 하지만 말입니다."
"맨 마지막 말을 잊지 않은 게 당신답네요."
"......그나저나 이제 밥들 다 먹지 않았어?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모여있는 거야?"
"구질구질하다니, 천년에 한번 올까말까한 친목도모의 찬스에 그렇게 초치지 마라."
"넌 네 친구 안 따라가냐?"
"그럼 너도 형 따라가야지. 자, 그러니까 앉아있어."
"그러려면 네가 가야할 거 아냐!"
"경님이도 내 친구인걸."
"예~ 여기 있어요~"
대체 어떻게 하다가 이런 상황이 온건 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엘핀스톤과 유나가 빠져
나가자 널찍널찍하게 떨어져 앉아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뭉치기 시작해서, 식사는 이미 엊
저녁때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디저트니 뭐니 해가며 마지막에 나오는 요구르트까지 떠먹어가
며 기신기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아, 버몬트 식으로 말하면 경님이는 엘핀스톤씨를 따라가야 하는 건가?"
버몬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에?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
"그렇게 따지면 그렇군요."
"뭐가 그렇게 따지면이냐? 애시당초 말도 안되는 논리를 가지고 덤비니 일이 이 모양이지."
"경님이가 엘핀씨 따라가면 나는 유나 겸 경님이가 가는 곳으로 가야하는 거네?"
"그만 좀 집착해.;;"
"그나저나 엘핀스톤씨, 유나 따라나갔잖아. 둘이서 무슨 이야기할까?"
"으음...."
그리고 장마철에 비내리는 빈도와 비슷하게 발발하는 소연의 지뢰밟기가 시작되었다.
"이 녀석 이야기라는 데 100골드!"
".............."
소연이 당당하게도 손가락을 가르킨 상대는 두번 말하면 입 아플 버몬트.
......밟아도 아주 대박으로 밟는 구나. 소연양.
".....그렇게까지 확신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100골드라니, 간이 배 밖에 나왔어? 진심이야?"
"어이어이... 소연아...;;"
"뻔하잖아! 그 두사람의 공통된 화제라곤 그거밖에 없는 걸. 하나는 갱생시키려다 포기했고
하나는 갱생&학대에서 갱생 쪽에 화딱지 나서 온리 학대로 전환한 사람이니까."
"너 유나한테 지나친 정직함은 명줄을 짧게 만든다는 소리 늘상 듣는 주제에 왜 이러는 거
야;;;"
"에잇! 한번 죽지 두번 죽냐!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
"그거... 어쩐지 많이 논점에서 벗어난 이야기같은 데요."
"게다가 말의 앞뒤도 안 맞아."
"싸움 걸고 싶은가보지. 냅둬."
"냅둬요? 정말? 지금 저 모습을 보면서도 얀님은 그런 말이 나와요?"
"..........할 수 있다면 철회하고 싶긴 하다."
"저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만."
살라딘은, 정말 진짜 의미로, 아무런 잡념이나 사심없이 옆에 앉아있는 자신의 동생이 '무서
워'졌다.
"어, 어이.. 존....?"
그는 조심스럽게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밝은 색의 금발머리가 어쩐지 불에 달군 쇠처럼 시
뻘개보였다. 은근슬쩍 더운 수증기도 막 뿜어져나올 것 같은 데...
"와아~ 증기기관이다."
"좋아하지마! 이 바보야! 누가 초래한 사태야, 이거!"
경님은 생전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바보라는 말을 써봤다.
"뭐?! 어째서?! 내가 왜 바보야! 너도 있는 데 내가 왜 바보냐구!"
"이봐! 너무하잖아! 그리고 난 최소한 너보단 바보짓 안했어!"
"헹헹헹~! 정말? 정말정말정말? 옛날에 살라딘 머리 자를 때 웬일로 염색했냐고 공개적으로
폭로할 뻔 했던 게 누구였더라?"
"히끅!"
"딸꾹질로 넘어갈 것 같으냐!"
"왜 이런 데서 쓸데없이 기세등등이십니까. 제정신이시라면 최소한 그 위치에서라도 벗어나
보시죠."
"뭐야, 케먈.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건데요?"
케먈은 우아하게 스푼으로 차가운 푸딩을 떠서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동작이 물흐르듯
여유로웠던 것 때문일까. 순간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연은 케먈을
끝까지 쳐다보았다. 입안에 들어갔던 스푼이 빠져나오고 그가 푸딩의 말캉말캉한 맛을 모조
리 음미하며 '으음..' 이라는 소리를 냈을 때까지도 대식당은 평화로웠다. 마침내 그가 푸딩
한 스푼의 맛을 모조리 음미하고 남은 덩어리를 목구멍 뒤로 넘기자,
"그 자리는 검이 닿는 범위거든요."
라는 대답과 동시에 소연의 앞 테이블에 날카로운 엑스칼리버가 떨어졌다. 칼날 두께의 3분
의 2정도가 박혔다가 칼을 들어올리자 스윽 소리를 내며 빠져나왔다.
"죽.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으이그!"
호들갑 떨며 자리를 옮기는 경님.
"저 정도 도발에 넘어가다니 역시 약하군."
"무슨 여유야! 제발 좀 말려봐!"
"내가 왜? 형인 네가 나서라."
"으아아아악! 잘 나가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얀과 살라딘의 때아닌 만담.
"아아, 역시 애들은 싸우면서 커야지요."
"그런 말 진짜로 웃으면서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진심인 걸요. 한동안 잠잠하다 했지요."
".......당신을 보면 당신을 수하로 부리고 있는 재상의 고충에 진심으로 동정이 갑니다."
"핫핫핫!"
".......제가 보기엔 두 사람다 만만치 않던걸요."
".................."
"................."
케먈과 아델라이데 사이에 얼떨결에 껴버린 마르자나. 그리고 말이 없는 두 늙은이.
"....오래 끌까?"
"설마. 대장이 어떻게든 말리겠지."
".......그러고보면 대장 어렸을 때랑 좀 닮은 것 같기도 해."
"판박이다."
"그때 기파랑 대장이 어떻게 말렸더라?"
"걷어찼지."
"하지만 그때 대장은 키나 작았잖아. 저 멀쑥한 청년을 어떻게 걷어차?"
"걷어차지 못하면 쥐어박기라도 하겠지.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발라와 무카파.
"헹~ 말로 안되니 칼이냐~ 니가 그래봤자 내 옷자락이라도 하나 벨 것 같나부지?"
"너 거기 안서?!"
"너 같으면 서겠냐? 갑자기 지능이 9살 시절로 돌아갔나, 왜 이러실까?"
"너 잡히면 정말 죽었어."
"무게 깔고 말해봤자 조금도 안무섭다네. 브라더 콤플렉스씨."
"야! 너 뭐라고 했어?!"
"찔리시나 보지? 브라브라브라콘!"
"........꼭 그렇게 연달아 불러야 돼?"
"그런 거엔 왜 신경쓰시는 건가요?"
"아, 아뇨. 여자애가 남자애한테 브라브라하니까 좀 그래서요;;"
"????"
"그냥 넘어가요. 모르는 게 정신에 좋아요."
"그나저나 오늘 저녁에 대연회가 있다고 했는 데 저렇게 냅둬도 돼요?"
"......안되겠죠?"
"......말릴까요?"
"......되겠어요?"
"......역시 안되겠죠?"
"그래도 역시 말려야할텐데..."
"그러니까 그게 되겠어요?"
"끄응, 역시 힘들...."
"지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면서 멍하니 서 있는 겁니까! 좀 말려보란 말이에요!"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희도 목숨은 하나뿐이라서..."
"정말 이 사람들이...!"
그 와중에도 버몬트는 신나게 탁자들을 찍어 부수고 있었고 소연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열
과 성을 다해 상대를 약올리고 있었다.
정말로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델라이데였다. 사실 그때의 그녀는 약간 감정적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주군에게서 감지한 어떤 특별한 징조. 그 후로 그녀는 잔뜩 예민해진 어미새
가 자식에게 다가오는 모든 위험을 내치려는 것처럼 버몬트를 감싸고 돌려고 했다. 문제는
올빼미의 날개로는 독수리 새끼를 감싸줄 수가 없었다는 거였지만.
"이제들 그만...."
그리고 나름대로 발랄했던 시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콰광-! 커다란 울림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창문과 문틈 사이로 스며들어와 빼곡히 찼다.
육감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영역의 힘으로 대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침입
이며 공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외벽이 통채로 날아가는 것을, 밖에 나와있던 유나와 엘핀스톤은 바로 눈 앞에서 목격했다.
그 자욱한 흙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엘핀스톤과 유나는 등을 맞댔다. 무모한 정도로는
죽을 만큼이었지만 나름대로 계산은 서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등을 맞댄 채 괜히 보이지 않
는 상대를 노려보려고 기력을 빼는 대신 둘은 슬슬 궁전 안으로 이동해갔던 것이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는 데도 전투감각은 신기할 정도로 들어맞아서 둘은 이윽고 흙먼지가 가라앉
아 상대가 보일때까지의 시간을 이용해 궁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사실 감각이라기보
다는 엘핀스톤의 일방적인 배려였지만.
그리고 조금씩, 마치 깨끗한 천에 오물이 스며들듯이 피골이 상접한 언데드들과 아직 언데
드화되지는 않았지만 하쉬쉬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광전사들이 얼마전에 보았던 좀비늑대들
을 몰고선 장엄한 술탄궁의 무너진 외벽을 넘어 그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전에 만났던 좀비늑대들과 같은 배후세력일까요?"
"확실히 그 외는 없을 것 같은 데요."
"아드리아노플의 잔존세력은?"
"그들에겐 이 정도의 여유가 없어요. 분명.... 내가 생각하고 있는 자가 맞을 거예요."
"그럼 일단 적이 누군지는 안다는 거군요. 다행입니다."
"아뇨. 그 말은 지금 이 녀석들을 해치우고 재빨리 세라자드를 찾아간 다음에 해야해요."
"당장 달려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오히려 그녀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게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저들이 모르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군요."
"예. 저도 그렇긴 해요. 다만....!"
선두에 있던 5마리의 늑대가 달려드는 것으로 본격적인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등돌리고 달아날 수도 없는 거잖아요!"
재빨리 엘핀스톤을 등 뒤로 돌리고 광선검을 뽑아들었다. 청록색 빛무리가 위잉 소리를 내
며 위압적으로 뿜어져나왔다.
"어? 어째서 이걸 쓰려니 새삼 굉장히 민망해지는 거지;;"
"왼쪽에 3마리, 오른쪽에 2마리!"
칼날은 마치 채찍처럼 휘어돌면서 왼쪽의 3마리를 순식간에 반토막냈다. 칼날에 걸리는 무
게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름다운 빛무리는 그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날이 되어 가죽도,
근육도 뼈도 무시한 채 그 아래 있는 것을 썩둑썩둑 잘라버렸다.
"와아...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이거 꽤 감이 좋은 걸."
"지금, 그런 말 할 때입니까?!"
무엇보다 손에 걸리는 힘이 없다. 그렇기에 까닥하면 자기가 자기를 벨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의 유나는 그런 게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광선검의 빛이 반사되어 청록빛으로 물든 눈이 사악하게 빛났다.
"오랜만에 스타일리쉬하게 가볼까?"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할 소리냐고요, 그게;;"
엘핀스톤은 이 사람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던 생존본능의 충고에 귀기울이지 않았던 자
신을 조용히 책망했다.
알고 있었어. 늘 알고 있었지. 결코 그것으로 끝이 아님을.
"언니!"
"미르샤, 도망쳐!"
세라자드는 거의 반강제적으로 미르샤의 팔을 잡아끌어 술탄의 침실에 있는, 외부로 통하는
비밀통로에 그녀를 집어넣었다.
"싫어! 안돼애!"
"거리는 짧아! 어서 달려가서 사람들을 불러와!"
".............."
"어서!"
아이의 망설임을 짧았다. 통통 튀어오르는 듯한 발소리가 들리고 그 너머, '절대 죽으면 안
돼!'라는 울음에 가까운 외침이 들렸다.
사랑스럽고 똑똑한 아이다. 세라자드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도
저랬다면 어머니가 날 좀 더 사랑해줬을까?
이상하다. 이상하게 머리속이 차분해. 마치 이 눈앞에 이 검은 전사가 내 모든 질문의 해답
이라도 되는 것처럼.
회색 빛 윤이 나는 검은 갑주, 보통 사람의 1.5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신장과 두터운 근육
질의 몸. 눈조차 가린 거대한 헬멧 아래 입가는 찍어낸 듯한 무표정. 찔러도 피 한 방울 나
오지 않을 것 같은 무기질적인 창백함. 펄렁이는 망토가 스스슥 옆으로 움직였다. 천천히 허
리춤에 매달린 것을 집어든다. 광선검이다. 언젠가 자신이 부여하고도 신기해서 유나의 것을
만져본 적이 있었다. 그 치명적인 날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 빛은 따뜻하고 상냥했다. 그 주
인이 그렇듯이. 그러나 저것은 달라.
.....아무도 없어.
이상하게 두렵지 않아. 마치 이 순간을 그 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나뿐이다. 나뿐이야.
누구도 도와줄 사람은 없어. 이렇게나 선명하게 깨닫게 되다니,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정말 이상하군. 나는 '그 날' 이후 어딘가 잘못 되어버린 것 같다.
".....당신이 들어줄 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그림자처럼 움직이던 검은 전사의 몸이, 딱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췄다.
"늘 이야기해보고 싶었어. 한번쯤은. 아니, 아마도 이게 최초이자 최후이겠지만."
세라자드는 마법을 시전하려는 것처럼 두 손을 올려 손끝을 가슴 앞에서 마주 대었다. 언제
라도 마력을 모아 그대로 쏘아낼 수 있도록.
"내게서 뭘 원하는 거지?"
그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에도 세라자드는 그 불청객이 움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굉장히 기계적인 동작으로 반걸음 뒤로 물러섰기 때문이다.
"그녀야? 미안하지만 그건 내줄 수 없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야. 그녀의 의견따위
상관없이 내가 줄 수 없어. 절대로 안돼. 아니면 이븐 시나가 그랬듯 결국 목적은 나인가?
하지만 그것 역시 안돼."
처음엔 흐릿했던 생각이 정작 말하면서 정리될 때가 있다. 지금의 세라자드가 그랬다. 그녀
는 이 눈 앞에 있는, 그 정체도 알 수 없는 암살자에게 지금까지 생전 단 한번도 취해본 적
없는 명령자의 태도로 말했다. 사실, 이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감히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보겠나. 하지만 한가지 드는 의문점은, 어째서 그 누구도 아닌
이 불청객 앞에서인가. 어째서 이 자 앞에서만 이렇게도 쉽게 말이 나오는 걸까? 단순히 그
가 나를 살해하러 왔기 때문에?
"살고 싶어서도, 내가 꼭 살아야만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서도 아니야. 다만 내 자신이 당
위로서 생각하고 있어. 나는 살아야만 한다고. 그것이 기쁜 일이 아니라도, 그것이 즐거운
일이나 보람찬 일이 아니라도 나는 살아야해. 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어서도 아니야. 먼저
떠난 사람의 짐을 대신 지기 위해서도 아니야. 지금 살아있으니까 나는 계속 살아있어야 해.
계속 고민했어.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망설이듯 보이지 않으려고 하면서 계속 고민했어.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고 말이야. 내게는..... 내게는 그 사람도 소중했어. 이븐
시나. 아마도 당신들의 동료.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마 영원히 할 수 없겠지만 그
래도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해. 그 사람이 나를 배신했건 어쨌건. 그러나 나
는 그 배신으로 인해 한가지는 배웠어."
"..............."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 손에 날 죽일 권한은 넘겨주지 않을 꺼야."
"그러니까 당신은 대답을 해야 해. 어차피 절대로 날 죽일 수 없겠지만 대답을 해야만 해.
어째서 나야? 왜 나지? 아니면 나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투르의 술탄이기 때문인가?"
"............"
초조함도 느끼지 않으면서,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끄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하
면서 세라자드는 재촉했다.
"어째서 나야? 대답해!"
누구였을까. 대체 누구였을까. 그는 그 검은 갑주를 쓰고 그 얼굴을 헬멧으로 가리기 직전
과연 누구였을까. 그 눈으로 무엇을 바라보았을까. 그 마음에 무언가를 느끼기는 했을까. 아
름다운 것을 보며 감동한 적은 있을까. 맛있는 음식에 감탄하고 맛좋은 술에 감사하며 하루
해가 지는 것을 보며 살아있길 잘했다고 느껴본 적은 있을까.
.......아니면 단지 모든 것은 그 임무를 위해서였을 뿐인가.
최초. 그리고 최후. 시즈는 조용히 자신의 멸망을 알고 결심했다.
단 한마디라도, 단 한마디라도 나의 말을, 당신에게.
사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살아왔으니까. 기실 지금 이 모든 짓은 그
저 투정일 뿐이지.
".......당신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재촉해놓고 오히려 흠칫 놀랐다. 어쩌면 그 음성이 어울리지 않게도 지극히
인간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우리가 계속해서 기다렸던 이도, 계속해서 사랑하고 원망해왔던 이도, 그리고 계속해서 죽
여왔던 이도 당신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누군가의 누이여서도 아니고, 누군가의 사랑하는 이
라서도 아니며, 누군가의 친구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저 당신이었습니다. 그것 하나만으로
저희는 탄식하고 원망하고 기도하고 숭배했습니다. 그저 당신에게."
".....무슨.....뜻?"
"이제야..... 그 기다림이 끝났는 데..... 그 긴 시간들이, 긴 기억들이 접혀지는 데..... 어리석은
종들은 분노하는 군요. 그저..... 그것 뿐입니다. 우리들의 마스터."
"................."
그는 천천히, 세라자드의 발치 아래 무릎을 꿇었다.
"그 대답을 들었으니 됐습니다."
".....무엇을? 당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아니오. 계속해서 물어왔고, 이제야 받았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검을 옆에 내려놓고 머리를 숙여 그녀의 발 위의 입맞췄다.
"그러니 죽여주십시오. 당신의 손으로."
마치 신하가 그 주군에게 진상하듯이 올린 광선검을, 세라자드는 반사적으로 집어들었다. 머
리속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어떤 법칙도 당위도 떠오르지 않았다. 손은 제멋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번도 검을 잡아본 적이 없는 가느다란 손이 스위치를 올렸다. 그때
까지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떨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그녀는 그것을 적당한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검은 가벼웠다.
"저의 피를 잊지 마십시오."
가위로 종이를 자르는 것보다 쉽게, 하나의 목이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뿜어내는 피도 없
었다. 잘못 흘린 잉크처럼 카펫 위에 점점이 물들던 피는, 이내 곧 육신과 함께 먼지로 화해
그야말로 흔적만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떨지 않았다.
조금도 떨지 않았다. 뿌듯함도 없었지만 죄책감도 없었다. 그런 것이 들 리 없었다. 머리는
명쾌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처럼. 5에서 2를 빼면 3이 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소
리내어 말한 것처럼.
스위치를 껐다. 빛의 칼날은 사라지고 뭉툭한 손잡이만이 남았다. 세라자드는 그것을 한참동
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걸음걸이로 경대에 다가
가 작은 서랍을 열고 그 안에 집어넣었다. 서랍을 닫았다. 침입자의 흔적이라고 요란하게 부
서진 유리창과 바닥에 흩어진 유리파편밖에 없었다. 그 아무도 없는 고요 속에서 세라자드
는 칼과 칼이 마주치고 피가 튀는 비명소리가 아련하게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왕이 되었다. 옥좌와 권력을 위해 자신의 아이조차 죽일 수 있는 왕이 되었다.
세라자드는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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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마이너해지는 것도 알짤없는 팔자라는 생각이 드는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