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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으로 쿠즈네츠크와 우랄을 잇는 철도 계획이 장렬하게 패망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오히려 우랄 제철업에는 좋은 신호긴 했죠. 무기를 만들어야하니 제철소들의 발주량이 폭주!
에서 끝나면 좋겠습니다만 1차세계대전이 러시아의 해체를 가져온 것을 보면 당연히 여기도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는 걸추측할 수 있죠. 노동력 징발 및 징집, 상품 징발, 대금 체납, 교통망 마비 등이 전쟁 내내 우랄의 산업 단지들을 괴롭혔습니다. 특히 심한 건 노동력 부족이었죠. 우랄 제철소의 노동자들은 상당수 농촌에서 온 계절성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도 다 농촌으로 돌아가버리게 되었고, 그마저 있던 노동력들도 정부가 군대로 끌고가서 노동력 수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철 광석 생산량은 200만 톤에서 168만 톤으로 줄어들고, 선철 생산량은 100만에서 약 83만 톤으로 줄어들게 되죠.
혁명 후 체제가 개박살 나는 1917년에 이러한 붕괴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이 시기 러시아의 가장 큰 재앙이었던 도시 및 공업단지의 곡물 수급 문제가 가히 화룡점정이었죠. 기근이 일어났고 그나마 남아 있던 노동자들도 농촌으로 도망칩니다. 1917년 1월 우랄은 매달 8만 1천 톤의 선철을 뽑았으나 1918년에 3만 4천 톤으로 완전히 추락해버리지요.
러시아 혁명은 이를 더욱 악화시켰죠.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라지만 사실 어중이 떠중이들이 다 들어온 조직이라... 지역 수준의 볼셰비키들은 경제를 굴리는 전략이나 노하우가 전혀 없었습니다. 일단 레닌의 명령 하에 모든 제철소는 국유화 되었으나 이제 노동자들에게 돈을 지급해줄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우랄-시베리아 프로젝트는 고사하고 철을 만들 수도 없는 상황... 임시변통으로 우랄 지역 내에서만 통하는 독자 화폐를 만드는 상황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래도 어쨌던 노동자의 이름으로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가 언제까지 이곳을 방치플레이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죠. 공업지역에 대한 확장과 발전이 슬슬 논의되기 시작합니다. 우랄은 오랜만에 혜택을 입게 되는데, 러시아 내전의 가장 격렬한 전선이 바로 우랄을 구렁텅이로 빠트린 그 우크라이나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죠. 우크라이나는 1920년에 볼셰비키가 접수하기까지 중앙으로 철을 하나도 보내올 수 없었죠. 설상가상으로 폴란드와 핀란드라는 이름도 비슷한 두 철강 공업지역이 러시아에서 이탈하면서 사실상 그 막장인 우랄만이 유일한 공급선으로 기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랄도 차파예프 같은 사람이 열심히 싸우기도 했던 전선지대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우크라이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죠.
내전이 대충 끝나갈 기미가 보이자 소련 정부는 야심찬 계획들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가장 지역의 당원들을 설레게 했던 건 고엘로 계획이었습니다. 고엘로는 Gosudarstvennaya Komissiya po ELektrifikatsii ROssii, 즉 러시아 전력화 국가위원회의 약자인데 러시아를 전기불이 반짝반짝 빛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레닌의 꿈이 담긴 계획이었죠. 그리고 우랄의 경우 전력화 자체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그보다 전력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철생산의 확장을 받아내는 것을 지역의 제1목표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고엘로 계획은 우랄에 많은 것을 약속해줍니다. 경제가 개판이라서 하나도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지만요.
그러나 우랄의 관료들은 절박했습니다. 그들은 이 때야말로 우크라이나와 붙어볼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했던 것이죠. 국민경제최고회의(VSNKh, Vysshiy Sovet Narodnogo Khozyaystva, 베센하)에서는 진지하게 우랄에 새로운 산업단지를 지을지 아니면 우크라이나를 다시금 회복시킬지에 대해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계산기만 두드린댔지 돈을 준다고는 안 했습니다. 1923-24년의 산업투자는 11억 6천만 루블 정도의 굉장히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전시공산주의 하에서 진행된 통제로 완전히 수축된 경제를 풀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이 실행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이는 러시아 경제의 회복에 중점을 두는 것이었는데, 러시아 경제 = 농업인지라 당연히 농업 회복에 투자가 갈 수밖에 없었죠.
이는 단순히 산업 투자의 위축만 유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부는 농민들로부터 식량을 반강탈해오는 쁘로드라즈뵤르스뜨까(원어로는 Prodovol'stvennaya razvyorstka의 줄임말)를 폐지하고 현물납세로 방향 선회를 하게 됩니다. 이는 철강 기업들도 농민들에게 상품을 팔아야지만 곡물을 얻어올 수 있다는 말이 되었습니다. 우랄 당국자들은 이를 1차세계대전 이전에 오제로프가 제출한 보고서, 즉 자신들이 동부의 농민들에게 소비재나 팔아먹으며 연명해야한다는 그 보고서의 부활로 인식합니다. 당연히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지요.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도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했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네프는 그런 걸 약속해줄 수 없었죠. 그들은 아직 실현될 기미도 안 보이지만 170억 루블의 규모로 전국에 뿌려질 고엘로 계획을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중공업은 네프 시기에 굉장히 곶통을 받았습니다. 1920년 중공업 생산량은 1912년의 6%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1922년엔 7%(...)로 올랐죠. 농민들이 사주는 것 빼고는 마땅한 재원이 없게 된 상황이었는데 러시아 농민들의 구매력이란 한숨만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이고, 아직 그쪽도 중공업 산물에 수요가 생기기에는 폐허를 일으키는 것부터 신경 써야 했습니다. 1922년,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Gosudarstvenniy Komitet po Planirovaniyu, 고스플란) 경제학자인 그로만에 따르면 농업부문에 쓰인 돈이 3억 7천 400만 루블이었던 반면 중공업은 1,500만 루블 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우랄에게 다행인 것이라면 우크라이나의 중공업이 거의 말라죽을 정도로 고통 받고 있었던 반면에 우랄은 어느 정도 숨통은 트였던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서쪽과의 경제교류가 모조리 작살나버린 소련이었지만 동쪽에서는 소련과 놀아주는 친구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1922년 우랄은 몽골에 3,600 톤의 철을 보내고 고기를 받아왔고, 5,400 톤의 철을 중국 군벌에게 팔았습니다. 대금은 금으로 받았고요. 동쪽의 타격 덜 입은 농민들이 그럭저럭 괜찮은 회복속도를 보여주자 우랄의 선철 판매고도 조금씩 올라갔습니다. 1923년 여름, 우랄은 남부 철강 기업들 선철 생산량의 거의 두 배, 소련 생산량의 반이라는 경이적인 생산고를 올리면서 다시금 치고 나갑니다.
우랄 관료들은 이 때의 포지션을 다시금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중공업 생산을 멋대로 늘리는 걸 통제하고 있었지만 마땅한 통제수단이 없었기에 우랄에서 독단적으로 생산량을 정부 계획보다 늘려버리는 걸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내수시장을 독점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임금체불 하는 것까지 불사하며 과감한 생산 확대를 실시합니다. 이에 영향 받아 다른 지역에서도 갑자기 의욕적인 생산열풍이 불어오고, 농업과 공업의 밸런스를 맞추며 가려고 했던 정부는 난색을 표하게 됩니다.
그래도 우랄 관료들은 샴페인을 터트릴 시기가 아니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중공업의 발전 자체가 난항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죠. 정부는 돈이 없었습니다. 화폐 가치도 개판이었고, 농민들은 정부 화폐를 신용 안 하고 상품을 출하하기를 거부했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했죠. 몇가지 옵션이 제시되었는데 하나는 트로츠키의 농민들에게 세금을 잔뜩 걷어 공업에 투자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부하린의 옵션이었습니다. NEP를 강화하여 농민들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키우자는 것이 골자였죠. 그리고 천천히 공업에 투자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어느 쪽도 승리를 거두진 못했습니다. 우선 트로츠키의 안은 노동자-농민의 연합을 깰 수 있다는 위험과 경제에 무리가 간다는 것을 이유로 부결되었고 부하린의 안은 NEP 자체도 여러모로 삐걱대고 있었기 때문에 위태위태했던 것이죠. 협상가격 위기가 도래했을 때 결국 그 취약성이 증명됩니다. 1923년, 농산물 가격이 급락하고 공산품 가격이 급등하자 농민들은 그들의 곡물을 시장에 파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수 없어! 하는 분위기가 당내에 돌게 되고, 1924년 13차 당 대회에서 지노비예프가 중공업을 건설해 힘을 키우자는 주장을 하며 본격적으로 논쟁의 포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지역에서는 이러한 움직임들에 반응하여 야심찬 산업 확장 계획들을 상상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우랄은 협상가격 위기가 절정에 달하기 2달 전, 그리고 지노비예프가 13차 당대회가 열리기 10달 전 우랄에서는 고스플란에 야심찬 보고서들을 제출합니다. 첫째는 석탄으로 돌아가는 세 개의 거대한 제철소를 건설하여 320만에서 680만 톤의 철을 매년 뽑아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320만 톤이라는 최저치는 전쟁 전 생산량의 3배가 넘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 전 제국의 철 생산량은 총 420만 톤이었습니다. 계획의 최대치는 이마저도 가뿐히 상회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스플란은 여기에 애매모호하게 반응을 보내지만 연애에 서투른 복학생 같은 우랄 당관료들은 이런 반응 하나하나를 긍정적으로 확대해석하였고 13차 당대회를 보면서 요시! 그란도 시즌!을 외쳐버립니다.
그러나 1924년의 자료들을 보더니 이들의 얼굴은 다시 굳어버렸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랄이 1년 동안 생산량을 72% 늘린 데 반해 우크라이나는 464%를 늘려버리면서 그 엄청난 위용을 다시금 러시아에 보여줍니다. 우랄은 빨리 석탄을 찾아야 했습니다. 석탄을 받아서 석탄 고로로 생산을 돌리면 우크라이나에 지지 않을 거야! 라는 어느 정도 타당한 믿음을 품고 빨리 쿠즈네츠크에 철도를 이어달라고 중앙에 징징대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쿠즈네츠크 석탄이 어느 정도 유입되기 시작하나 고로 자체가 목재를 쓰던 고로가 많아 크게 신통한 결과가 나오지는 못했습니다. 우랄 당관료들은 우크라이나에 지지 않기 위해서는 단순히 석탄을 받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칩니다. 국가의 대규모 투자를 받아 새로운 공업단지로 아예 지역을 갈아엎어야 우크라이나를 이길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죠.
한편 중앙은 1924년~25년을 거치면서 꽤 놀랍니다. 우크라이나의 회복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높았기 때문이었죠. 여전히 재무인민위원회(NarKomFin, Narodnyi komissariat Finansov, 나르콤핀)는 많은 예산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우크라이나의 성공은 중앙위원회의 공업화 대변자들에게는 좋은 논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1925년 중앙위에서는 노동국방회의(STO, Soviet Truda i Oborony, 에스테오)에 생산목표를 늘리라고 지시합니다. 14차 당대회에서는 이를 더욱 확장하였고 새로운 제철소 건설을 예비승인합니다. 우랄에도 몇가지 자잘한 신규 투자비가 지급됩니다. 그리고 지역당에서는 이번에도 설레면서 대규모 투자를 향한 전조라고 해석하며 흥분합니다.
우랄주공산당계획위원회에서는 이전의 제철소 프로젝트에 이어서 새로운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는데 바로 기계공장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소비재와 농기계뿐만이 아니라 중공업 생산장비나 석탄 및 철광석 채굴장비를 자급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 것이죠. 스베르들롭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에 우랄마쉬라는 중기계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제출합니다. 정말 대책 없이 막 밀어넣는 이 상황... 그리고 놀랍게도 철강부에서는 이를 승인해줍니다.
이는 모스크바 중앙의 정치적 상황이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배경은 다음 편에 설명하기로...
하여튼 간에 모든 지역들이 새로이 정부가 만들어낼 계획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조만간 대규모 경제개발 계획이 시작될 것이라는 걸 이들은 직감했습니다. 아니, 경제개발 계획을 안 하면 하게끔 만들어야 했죠. 중앙에서는 합리적 행정과 경제통제를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지방에서 보는 방향은 중앙의 사람들과 사뭇 달랐습니다. 특히 수백년 간의 전통은 중앙의 투자가 없으면 산업이 말라죽는다는 것을 지역 사람들의 머리 속에 뿌리 깊게 박아놓았습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소련 제철업계를 뒤흔든 대논쟁이 시작됩니다. 과연 우랄이 적합하냐 남부, 우크라이나가 적합하냐? 엄청난 보고서와 키보드배틀이 뒤따랐고 상대방에 대한 폄하와 자신들 지역에 대한 근거 없는 과평가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랄이 우크라이나보다 심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후발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절박했습니다. 1880년 이래로 몰락해온 자신들을 선진경제로 도약시킬 마지막 발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절박함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그들은 누울 자리를 보지 않고 발을 뻗어버립니다. 발을 뻗고 누워보니 그 자리에는 스탈린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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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다 죽습니다
@첝 스포는 스폰데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스포군요 ㅋㅋ
@첝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 ㅋㅋㅋ 무슨 파이널데스티네이션도 아니고 다 죽어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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빟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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Магнитогорск Металлрург
엄훠...서탈린동지라뉫...그래도 잘잡은거 아임메??지방소비에뜨동지들이야 죽겠지만....ㅡㅡ;;;;;
안 잡았으면 전쟁에서 졌겠죠
@첝 그렇기는합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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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해리스가 참 글을 잘 쓰는 것 같습니다 ㅋㅋ
철을 꼬기랑 바꾸다닝 ㅋㅋ
고기 고기 소화 잘 되는 고기
@첝 철이니까 쇠고기 ㅇㅅㅇ
@Charment ㄷ
뭔가 쏘련판 핌피현상같기도 ..
그런 셈이죠
이제 곧
http://durl.me/84pgc7
PLAY
목 날아가려면 아직 많이 남긴 했지만..
몽골 친구들 장사 수완이 쩌네요ㅋㅋㅋㅋㅋㅋㅋ 고기를 얼마나 팔았길래 3,600톤이나 철을 뜯어오다니ㅋㅋ
고기! 소화 잘 되는 고기!
고스플란은 여기에 애매모호하게 반응을 보내지만 연애에 서투른 복학생 같은 우랄 당관료들은 이런 반응 하나하나를 긍정적으로 확대해석하였고 13차 당대회를 보면서 요시! 그란도 시즌!을 외쳐버립니다.
오늘의 최고 대사군요 ㅋㅋ~ 연애에 서툴러본 사람들이 별로 없는지 의외로 반응은 없지만 ㅋ~
요시! 그란도 시즌!
@첝 요시! 그란도 시즌! 이야 스탈린 동지만큼 위대한 대사지만, 사실 여기서는 연애에 서투른 복학생 드립에 훨씬 공감이 간지라... 뭐든 자기 좋을대로만 해석하다가 대망해버린 일이, 그나마 없는 연애(시도)경험의 전부를 차지하는 입장에서는... 큿쏘!
@앙겔루스 노부스 ㅠㅠㅠㅠㅠ
바이노프에서도 이어지는 부분이지만, 따바리쉬가 소개하는 글들은 행정, 정치의 실제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며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지를 실감나게 보여주네요. 정치나 행정에 대해 논할때 사람들이 한번씩 읽어보고 이야기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글 들입니다.
군부 대숙청을 보아도 그렇더라구요
저 우크라이나가 그 말많던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 지방인가요? 저정도의 모습을 보여주다니 ㄷㄷㄷ
스탈린 공업화 조사할때 마그니토고르스크라든지 워낙 유명한 공업도시가 많아 그냥 그런갑다 했는데, 읽을수록 점점 비참한 우랄의 모습이 ㅜㅜ
넵. 돈바스의 하리코프(하르키우)와 루간스크(루한스크), 그리고 크리보이 로크(크리비리흐) 지역입니다.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는 솔직히 안건드렸어도 날아갔을것 같은 느낌
사실, 극적인 표현을 위해 저렇게 표현하긴 했지만 숙청의 과정은 훨씬 복잡했고 우연으로 촉발된 부분도 많았습니다. 번역 연재가 끝까지 갈 수 있다면 다 보여드릴 수 있겠죠잉
숙-청
요시
아, 너무 재밌습니다.
그란도 시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