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비붐 세대의 활발한 귀농귀촌 움직임이 한창 진행형이다. 여기에 도시 속의 바쁜 채바퀴 속에서 삶의 참의미와 질을 생각하는 삼사십 대의 귀촌 움직임이 가세하는 까닭에 전원으로의 귀촌과 귀농의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되고 또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꾸준히 오래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대도시출신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실향민으로서 ‘자식에게 그리워할 고향을 만들어주자’는 뜻에서 일찍이 사십대 초반부터 ‘고향 만들기’라는 이름의 파일을 만들어, 관련 신문기사를 스크랩을 하는 등 귀촌귀농 정보를 모으며 경기도와 강원도 일원을 주말마다 20여 년간을 헤매고 다니던 내가 소백산의 한 산골마을로 내려가 둥지를 튼 것은 지금부터 십 여 년 전의 일이다.
내가 자리 잡은 소백산 죽령 이남지역은 역사의 굴곡이 많은 지역이다. 1400미터에 이르는 준령이 부드럽게 물결치는 병풍 같은 소백산 줄기 아래 준 고원 지역에 자립 잡은 도농복합도시 지역으로 삼국시대 초기에는 신라의 영토였다가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80여년의 재배를 받다가 다시 진흥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된 복잡한 역사가 있는 곳이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가장 왜진 지역에 자리 잡은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왔으나 나당연합군설 이외에는 시원한 답이 없었는데, 굳이 역사학자가 아니라도 이곳 소백산의 준령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진흥왕은 백두대간의 남쪽의 서남쪽 줄기인 소백산의 죽령을 장악함으로써 전쟁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마음껏 제공권을 휘둘렀을 것이라는 사실이 어렵지 않게 추측이 된다. 내가 사는 도시에는 「장수면(長壽面)」이라는 지명이 고구려장수왕의 전승비처럼 남아있고, 또 외세까지 끌어들이는 국제적인 군사전략을 통해 물리적으로 삼국통일에 성공했던 신라의 문무왕이, ‘악의(惡意)에 찬 복종’보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삼국국민들의 정신적 통일을 염원하여 삼국의 군사전략적 요지에 부석사라는 사찰을 세워 화엄종의 정신에 의해 국민들의 마음을 아우르려고 했던 짙은 고민이 깔려있는 곳도 바로 이 지역 영주시(榮州市)이다.
내가 소백산의 첫 골짜기 쯤 되는 깊은 산속의 산골마을에 와 거의 폐가에 가까운 집을 구해 겨우 한 일주일 남짓 지난 어느 날이었다. 담장을 사이에 한 이웃 노인분이 나에게 물었다.
"새 댁 언제 와요? "
깜짝 놀란 나는 순간 생각했다. '결혼한 지 30여년이 되어 집에는 헌 댁밖에 없는데 새 댁이란 누굴 말하는고?'
한 두어 달 지나자 그 노인이 또 물었다.
"주말에 할마이 와요?"
머리 나쁜 나는 또 생각했다. '집에는 아주머니는 하나 있지만 '할머니'는 없는데 누굴 말하는고? '
나의 귀촌은 이렇게 약간의 어지럼증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강산이 한번은 변할 수 있는 시간이 흘러 현재의 나는 아직도 도시로 유턴하지 않고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성공적인 귀촌의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흔히 남자들의 귀촌귀농에 있어서 성공은 아내와 함께 한다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의 귀촌의 스타트는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일 년 간 아내가 매주 금요일오후에 내려와 일요일 오후까지 함께 생활해 주었기 때문이다. 요즈음도 간혹 주변의 남편만의 외톨이 귀촌의 경우를 보면서 두 집 살림에서 오는 저 ‘금속피로’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걱정하게 된다. 일본에서는 귀농을「귀업(歸業)」이라고 한다는데,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에게는 ’귀농‘이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룰 수 없는 목표일 것이다. 왜냐하면 농업만으로 내가 생계를 유지하기는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도시 편의점에도 멧돼지가 출몰하는 시절이라 신기할 것도 없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은 고라니가 흔히 출몰하고 멧돼지가 농작물을 먹으러 내려오는 산골의 첫 번째 마을이다. 한 때 칠팔십 가구가 있었으나, 이제는 주로 칠팔십 대가 주축을 이루는 오십 가구 남짓으로 인구나 규모면에서 다른 마을과 다름없이 사양화되어가고 있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전국 어느 곳이나 그렇듯이 이곳도 인심이 좋았던 시절은 가고 모두 ‘돈, 돈’하는 그런 이코노미스트들의 시대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인상도 받게 되어 동화 속처럼 마냥 낭만적이지만도 않은 것이 오늘의 농촌이다. 육십 대 후반에서 칠십 대 중반의 여성노인들은 돈 벌어 병원에 다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연골주사와 진통제를 사용해가며 하루 몇 만원 남짓 하는 하루품삯을 위해 무리를 하고 있다. 품앗이 보다는 인삼 등 대규모의 농사를 하는 사람들의 일당 작업자로 일하고 있고, 지역마다 일손을 모으는 인력관리자들이 고개를 높이 세우는 그런 시절이 되었다. 70대의 연로하신 어르신들에게 “그렇게 고생하시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하는 질문을 던져 돌아오는 답을 들어보면 결코 돈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이가 들어도 아직 능력이 있다’는, 말하자면 자신에 대한 존재감 확인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인구적인 면에서 앞으로의 농촌을 바라볼 때, 10년 내지 20년 앞의 일만 생각해도 아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아이를 낳지 않는 우리나라의 소자화현상이 앞으로 인구의 십분의 일은 외국계 및 다문화가정출신의 인구가 차지하게 될지 모른다는 예상이 이미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본다. 이 지역에서는 꽤 크다고 소문이 난 근처의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100명이내로 10명도 못 미치는 신입생은 태반이 다문화가족의 어린이이다. 수년간의 일본생활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외래인에게 냉소적인 일본에 비해 어쩌면 우리나라가 언젠가「USK(United States of Korea)」로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내가 귀촌을 위해 연습을 시작한 것은 약 삼십년 가까이 전으로 서울인근에 자그마한 텃밭을 마련해놓고 20년 가까이 주말마다 열심히 쫓아다녔었다. 그러나 서울주변의 전원생활은 과거의 경력, 경제력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연장전 같은 요소가 내재하고 있어 기대했던 것만큼 마음 편한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법정(法頂)스님의 ‘무소유’나 아메리카인디언과 같은 차원 높은 철학은 기대하지 않더라도 무언가 도시적인 가치관을 내려놓은 힐링의 삶을 기대했지만 그런 것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 경기권에서 좀 더 떨어진 먼 지역인 경북 북부지역인 이곳에서의 본격적인 시골살이도 처음에는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시골에 가면 마을 한가운데에서 약간은 벗어난 거리에 주거지를 두라는 선각자들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물리적인 거리가 완충역할을 하여 서서히 현지에 적응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
귀촌을 한다는 사실은 사실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모두 그렇듯이 사람이 사는 일이며 그래서 그 형태도 각양각색이다. 시골살이를 시작하는 데는 참으로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오래전 내가 어릴 적 유행하던 '가련다 떠나련다...어린 아들 손을 잡고...' 라는 가요의 가사에서 보듯 「유정천리형(有情千里型)」의 '눈물의 낙향'이 있는가 하면, 유복한 사람이 시골에 와서 큰 집 지어놓고 담쌓고 고고하게 지내다가 1년쯤 지나면 외로워서 집 팔고 떠나는 「자진위리안치형(自進圍籬安置型)」의 경우도 있고, 무턱대고 과수원 몇 천 평을 사서 고생하다가 수 천 만원을 한 두 해에 손해보고 살던 도시로 돌아가는「무대책형(無大策型)」인 이들도 있다. 시골에 오면 어떻게든지 살 수 있겠지 하고 막연하게 내려왔다가 도시로 유턴하는 젊은 세대의 케이스도 있다. 세상살이는 시골이나 도시나 사람 사는 곳으로 어디든지 엄숙하여 만만한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귀촌자들의 경험담들을 접하다보면 어느 지역의 사람이 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어떤 이는 이 지방에 온 지 3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벽을 느낀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는 새로운 곳에 정착하여 교사생활을 하면서 수 십 년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르치는 10대의 학생들에게조차 지역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에 좌절감을 느낀다는 하소연을 하는 학교교사의 케이스도 있다. 물론 이와는 전혀 반대인 경우도 있다. 한 지인은 시골에 내려간 지 1년 만에 현지의 부녀회장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남부지방의 어느 시골에는 한국남성과 결혼한 일본여성이 현지 이장(里長)을 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으니 이도 대단한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도 왜 이곳에 정착(?)했는가 하며 연고의 유무를 물어오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이곳에 친척도 지인도 아무런 연고도 없습니다. 물 설고 말 설은 외국에 가서도 사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우리말 통하는 이곳에 사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렵습니까? 저의 고향은 ‘한국’입니다!”
내가 이젠 돌아갈 곳을 생각하며 언덕 위의 무덤을 바라본다.
최근에 국내의 한 지역에서 미국서부개척시대에나 있을 법한 귀농인에 의한 총기살상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면 의지하던 메니저격이고 대변인격인 사람의 존재가 없어지자 갈등의 해결이 어려워진 것이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현실의 사건에 대하여 경솔하게 언급할 수 없기에 깊은 이야기는 피해야겠으나 시골살이라는 강을 건네주던 사공이 어느 날 없어지고 나서 생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큰 방파제가 무너지고 나니 감당할 수 없는 물결이 암담한 심정의 당사자에게 밀어닥쳤을 것이다. 어쨌든 인생이란 누구에게 위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수공권이란 말이 있지만 결국 삶이란 중국의 삼국지의 조자룡((趙子龍)이 아두(阿斗)를 구하기 위하여 장판교(長坂橋)를 넘어 수십만 대군의 적진에 뛰어 들어가는 것과 같이 내가 직접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 귀촌하여보면 여러 가지 쉽지 않은 일이 있다. 그것은 개인의 성품이나 스타일과도 깊은 관련이 있겠으나, 현지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일단은 비굴하지는 않지만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중심을 잘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귀촌을 위한 마음자세를 다듬고 예비지식을 가진다는 것이다. 위에서 나는 귀촌에 성공했다고 자랑스레 언급한 바 있으나 그것은 결코 여기서 돈을 많이 벌었다거나 농사에 성공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기껏 유턴하지 않고 아직도 이 산골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나는 과거 타지나 외국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곳에서 접했던 현지인이 아무리 어린 사람이라도 그 지역이나 그 나라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또 나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선생이라는 마음으로 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마치 당당한 학생처럼 현지에 사는 모든 이들의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적어도 하는 시늉이라도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처음에는 나이 드신 이들을 마을 가운데서 만나면 운전하는 중이라도 차에서 내려서라도 인사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마음을 열었을 때, 이 낯선 외지인에 대한 경계를 풀고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서 몇 사람과 친해지고 나면 그 분들은 내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험담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경악스러운 일은 시골마을에서는 돌아서서 험담하는 사람들끼리도 알고 보면 사돈 간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어떤 형태로든지의 인척관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듣기만 해야 하는 것이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격언을 새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절대 동조해서는 아니 되며, 듣기만 하여 스스로 빠지기 쉬운 함정을 피해가야 한다고 절절이 자신에게 되뇌었던 귀촌초기의 기억이 새롭다.
귀촌에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이 좋아할 만한 오랫동안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지역을 선정하는 것일 것이고, 다음은 주거공간을 잘 마련하는 일일 것이다. 인프라가 좋은 대도시의 직장에 근무하면서 흙을 밟지 않고 집으로 출퇴근하다가 전원으로 가게 되면 우선은 더 위와 추위, 비 등 날씨에 따라 많은 불편을 겪게 된다.
처음에는 거의 폐가에 가까운 농가에서 1년간을 생활하면서 자신이 산골생활을 할 수 있나 시험기간을 가졌다고 했는데, 그 때 느낀 것은 밤에 그윽하게 들여오는 새소리, 마당에 있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창호지문을 나서면 별이 쏟아지는 환상적인 밤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편 비가 오면 부엌이나 화장실 갈 때도 우산을 쓰고 가야하고 부엌에는 쥐가 들락거리거나 공기구멍에 새가 집을 지어서 울어대고 방 한쪽 구석에는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많은 다양한 불편함이 있다는 것이었다. 도시에는 자신의 집 말고도 공원, 도서관, 영화 관, 백화점, 은행, 카페, 노래방 등 많은 유 무료의 시설이 있고 교통기관 등도 쾌적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인 인프라에 취약한 시골에서는 넓은 면적을 가진 땅에 집을 지어도 여러 가지 농기구나 많은 물건들, 농작물로 매우 산만한 풍경이 있음을 보게 된다. 아무리 멋지게 집을 지어도 현관에는 흙 묻은 장화가 널 부러져 있고 집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흩어져있게 되는데 이는 일상에서 순식간에 일어나는 모습이기도 하며, 어떤 점에서는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시골에서 쾌적하게 살기위해서는 우선은 주거공간과 작업공간을 각각 유지하기 위한 공간의 구분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준 있는 관광호텔의 경우는 종업원들이 서비스하는 프론트사이드(front side)와 이용객에게는 보이지 않는 관리부문인 비하인드 사이드(behind side)가 있는데 전원생활에서는 이러한 공간개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와는 좀 더 다른 개념이긴 하지만 전원에서의 생활은 우선 비가 온다든가 하면 건조한 공간이 절대적으로 줄어드는가 하는 점에 착안할 필요가 있다. 펜션 등에서나 보는 멋진 공간배치보다는 실용적인 공간 기능을 생각하는 것이 매우 절실함을 시간이 갈수록 느끼고 된다. 사소한 것이기는 하지만, 전원생활은 텃밭농사나 스스로 해야 할 작업이 많다.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상시 출입구와 작업 시 출입구를 구분하여 용도에 걸 맞는 옷걸이, 신발장 등을 배치함이 좋을 것이다.
귀촌은 삶의 터전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점이 의외로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러기에 시간을 들여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준비 없이 환갑이 넘어 갑자기 전원으로 달려가는 것은 삶에 대한 유연성의 상실, 체력의 저하, 시골살이의 노하우 부족으로 큰 고생을 하게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시골에 연고가 있음에도 오히려 연고 없는 곳으로 가는 경우도 있는데, 얽매임을 피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전원에서 산다고 무조건 농사를 지으라는 법은 없다는 사실이다. 전원에도 역시 많은 기회가 있다. 특히 요즘은 지방도시는 도농복합형 도시가 많고 과거와는 달리 인프라도 좋아졌다. 한국사람 길 만들기 좋아한다는 말처럼 어디가든 사통팔달이다. 차 없이는 살 수도 없는 것이 시골이다. 미국 시카고에 사는 재미교포 한 지인의 집을 방문했던 사람이 그 집 냉장고에 많은 포스트 잇 메모지에 쇼핑품목이 적혀있었던 것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한국의 전원도 마찬가지다. 이곳에 제법 행세를 하는 이웃분이 하는 말이 재미있다.
“요새는 골짜기마다 도시 사람 한 사람씩 그리고 스님 한 사람씩 있어. 다 골짜기의 독립국이지! ”
귀촌에는 많은 준비와 함께, 무소유의 삶이나 아메리카인디언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철학도 뒷받침되어야 하지 않을까. (끝)
영주시/幽居堂 李東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