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에게 신문을 가져다 달라고 한다. 비행기를 자주 타는 사람인가 보다. 휴대폰 충전기가 있느냐며 불쑥 셀폰을 내민다. 온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사니 그럴 만도 하다. 물러주지도 않는 야박한 놈이라며 구시렁대는가 싶다가는 이내 실성한 사람마냥 깔깔대며 통쾌해한다. 그가 끼고 사는 노트북의 모니터에는 늘 바둑판이 떠있다. 회진 때마다 퇴원하게 해달라고 성화다. 하루 장사를 못하면 손해가 막심하단다. 한 번 빠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인지, 아예 침상 옆에 빙 둘러앉아 동창 모임을 갖는 이도 있다. 아무튼 바쁘다. 대한민국 사람들. 환자가 되어서도. 로맹가리라는 작가가 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단편으로 친숙한 작가이지 싶다. 그의 또 다른 작품 <그로칼랭>이란느 소설을 읽다보면 흥미로운 대목과 마주치게 되는데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주인공 남자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드레퓌스라는 흑인 여성을 사랑하며 결혼까지 꿈꾼다. 하지만 둘 사이에 대화나 사랑고백 같은 건 없고 주인공 혼자 일방적으로 그려내는 공상이다. 주인공은 회사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좀처럼 그런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고 둘은 엇갈리기만 한다. 어쩌다 그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더라도 주인공 남자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기 일쑤다. 하지만 그의 공상만큼은 시들 줄 모르고 이곳저곳으로 가지를 쳐나간다. 마침내 그는 엘리베이터가 멈춰서는 각 층마다 이름을 붙여준다. 방콕, 스리랑카, 싱가포르, 홍콩, 만달레이 같은, 그리고는 그녀와 함께 유람선 여행을 하는 거라 상상한다. 물론 그가 꾸는 꿈의 정점은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연인과 달랑 둘이 오붓하게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가끔은 신앙고백을 하듯 자신이 밟아온 삶을 의사에게 조곤조곤 털어놓는 환자들이 있다. 병으로 누워있어 보니 새삼 삶은 이게 아니구나 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하는 이도 있다. 질병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서야 가족이나 친구, 이웃의 소중함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 이도 있다. 평온한 얼굴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들과 마주하고 있으면 성직자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자아성찰이니 교화니 하는 지고한 행위가 비단 사찰이나 교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이들이야말로 <그로칼렝>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이 그리던 꿈의 정점에 서있는 행복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지 않았을 땐 좀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만날 수 없었다. 만나더라도 스쳐지나가기에 바빴다. 하지만 운 좋게도 엘리베이터는 잠시 고장 났고, 멈춰 섰다. 이젠 오매불망 그리던 연인과 얼굴을 가까이하고 사랑의 언어를 주고받을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을 차근차근 바라보며 달콤한 연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한데 안타깝게도 엘리베이터는 멈춰 섰건만 연인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연인의 달콤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우왕좌왕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가끔은 나도 고장을 꿈꾼다. 정신없이 이리뛰고 저리 뛰는 것만이 삶은 아니질 않은가. 부산하기만 한 일상을 뒤로 하고 차분히 앉아 연인과 얼굴을 마주하고 그녀의 달콤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연인과 눈을 맞추고 싶다. 의사와 환자는 다르지 않느냐고 경솔히 말하지 마라. 괴변은 집어치우라고 핏대를 세우며 눈을 부라리지도 마라. 나 역시 의사이기 전에 환자였고 아픔이라면 겪을 만큼 겪었다.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며 죽을 고비를 넘겼고, 함께 동승하고 있다 참변을 당한 어린 딸아이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는 잔인한 애비가 되고 말았다. 오랜 동안 의사 가운이 아닌 환자복을 입고 병실에 누워있어야 했다. 가끔은 고장을 꿈꾼다는 나의 말을 알량한 충고나 번지르르한 말장난이라 여기지 마라. 아파봤기 때문에, 고장 나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글을 끼적거릴 수 있는 거다. 로맹가리 역시 죽다 산 경험이 있거나 누구보다도 아팠던 경험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선 그런 소설을 쓸 수 없고 그런 꿈 또한 꿀 수 없는 거다. 엘리베이터가 잠시 고장 났을 때, 연인 드레퓌스의 얼굴과 목소리를 가장 잘 볼 수 있고 또렷이 들을 수도 있다. 그리고 드레퓌스는 로맹가리가 아닌 우리 모두의 연인이다. 고장이 나고서야 비로소 가장 사랑하는 존재, 가장 귀중한 그 무엇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며 우쭐대는 인간만이 가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