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두(話頭)
- 송해월 -
살면서 화두(話頭)를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길을 잃는다는 것이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곧 나를 잃는 것이다
화두(話頭)를 잃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나는 이정표도 없는 어디쯤서
언제쯤 길을 잃은 것일까
화두(話頭)를 잃은 자에겐
삶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의미가 되지 못하고
엄습해 오는 위기감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지탱할 것인가
이렇게 오래도록 서성이다 보면
목적도 방향도 잊은 채
자아정체감의 미궁(迷宮)에 빠져
영영 갇혀 버릴지도 모를 일
나는 지금 내 안에서
길.을.잃.었.다.
난 정말
화두(話頭)에서 특별한 것을 찾았을까?
수행이란 것이 일상과는 다른 무엇이라고 여겼을까?
어릴 적에는 그렇기도 했다고 끄덕끄덕해지는데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지금 돌아보며 다시 들여다보면
평범함이 싫지는 않았지.
특별함만 탐하지도 않았어.
다만 평범함을 특별하게 담아내고는 싶었던거지.
화두(話頭)는 그런 나의 일상에 무게와 중심의 추로서
의미를 새겨넣는 조각도 같기도 했어.
다만, 그 판화가 파다말고 내던져진 고무판처럼 이리저리 치이며 방안을 굴러다녔다는 것이지.
화. 두.(話. 頭.)
내 마음에 가둔 것 있나?
가둔 것은 없는 것 같다
다만, 때때로 고독에 갇혀있는 듯
무엇을 가두지 않았으나 갇혀있는 나
고독이 사랑인 양
사랑이 너인 양
너를 가두지 않았으나 그리움에 잡히기도 하는 나
그리움이 기다림인 양
기다림이 너인 양
처음 나를 기르고 나를 채웠다가 어느새는 가슴창살
휑덩그렁 나를 가두고
나를짓는 너의 환상아.....
너, 나, 우리.
너, 나.
하나의 울타리에 둘러싸여 그 안에 같이 놓여져있다고
절로 우리가 되어지는 건 아니었다.
너와 나,
그 사이에 길이 닦여지고 오고가는 발걸음이 지속되어질 때
굳이 한 우리가 아닐지라도 너와 나는 자연한 우리였었다.
道는 길
길은 소통이고, 소통은 우리가 되는 法!
한 솔방울이 만 솔숲을 이루고 萬이 하나되는 대사(代謝 metabolism)와 호흡이다.
이를 "연기"라 하셨으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生)하므로 저것이 생(生)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또한,
이것이 나투므로 저것이 사라지고, 이것이 생(生)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생(生)한다.
하나 하나 인듯 둘이 아니다.
일(一)과 일(一)이 이(二)가 되지않게 불이(不二)다
일(一)과 일(一) 사이 1로 세워 化의 因함이 공[工]
서로기대 緣한다는 본연의 도리가 부[夫]
공부다.
공空이라는 글자를 들여다보며 문득 드는 생각
혈穴앞에 세워진 공工을 촉觸이라 하면, 그 촉[工]으로부터 무릇[夫] 만상이어니...
우리의 존재와 인식은
색수상행식 촉을 경계로 내외감수 학습받아 너와 나만큼 별리되었다.
존재와 인식 그 사이에서 무릇 '나'는
몸에 나투어, 거듭 집적된 몸에 얽힌 그물[羅]로, 몸에 밀착되고도 유리되어진
반사 굴절 회절. 그 입자와 파장 만큼의 프리즘아니던가?
화두(話頭)는
몸과 맘, 존재와 인식, 그 얼키설키의 그물[羅]를
一以貫之(일이관지)! 하나로 관통하는 길을 이름부름이요. 大路를 열어냄이다.
이름부름이란 그 본연을 불러 가슴을 온 몸을 울림일 것인데...
아아,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나의 지금까지 화두(話頭)는
올곧게 관통하는 한 길, 지금을 허투루라도 하나 잃지않고 감아엮어 이르는 선택과 의지, 一路行
그 뿌리를 내리는 因이었다기보다도
사람사람 얽혀설켜 흘러가고흘러오는 환경과 상황
그 떠밀려 아름아름 세워지고, 안아내어 받아들였다면서도 자꾸 흔들리며 부표하는 緣
그 관계 속 입지에 연연하여 당면의 절박한 앓이만으로 뭔가 가슴 절절 비밀의 열쇠를 쥐고있는 양
스스로의 겉멋이 겉멋인 줄도 모르고 그 겉멋으로 자존망대하진않았을까?
그런 나의 화두는 흘러오고 흘러가는 가운데 다망무제(多望無題)였어라
잡았다 놓았다 지니다 잃다 이랬다 저랬다
하나가 흘러가면 하나가 흘러오고
잡았다가도 잡은 줄 모르고, 놓쳤다가도 놓친줄 모르니
아아, 나에게 올곧한 화두공안은 멀고 멀기만 하여라
자탄하고 자괴하기도 하였지...
그후 나이테가 늘며
불성보다 연기를 더욱 품게 되면서 위빠사나와 묵조선의 호흡을 좋아하게 되면서
하나의 의심은 커져갔었네
화두가 걸려야 수행이고 걸리지않으면 수행 못하나? 꼭 하나여야는가?
매 의심하고 갈등하며 매 선택과 결단의 기로에서 한 순간도 떨어져있지않은
"우리네 삶 아니던가!" 말이지.
살아왔건 살아갔건 산다는 것, 살고있다는 것, 살아낸다는 것.
그 자체를 인식하건 못하건
늘 감사하고 치열하게 사랑해내는 것
이만큼의 큰 화두걸이는 어떤가고...
이도 그저 따먹지 못하고 가면서 저건 신포도인거야 했던 여우처럼 딴지의 유희로 스스로를 자위함인가?
어쨌튼 삶은 혼돈이고
늘 흔들리고 일고지는 구름과 꿈, 그 자체를 자비롭게 관해가는 것!
道는 길이요,
길은 그저 이름 뿐만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行이요, 처음도 끝도 없는 걸음이니
行이란 인과연의 끊임없는 과정이로소 처음도 끝도 없는 언제나 도중이고,
행行에서는 길과 길아님이 따로 없었고, 올곧한 시선만이 언제 어디서든 굳건한 길을 내일지어~
삶이란 생과사 사이에서 끝없이 경주되는 도중이고
길이 끊어졌다고 귀가 먹먹하고 눈앞이 캄캄하다고
스스로를 멸하지는 말자.
본디 길이란 오다가다 행하고 행함으로 닦여져 길 아닌가?
더이상 언어와 개념들의 사슬을 한줄로 꿰어엮거나 한마디로 압축하지 않아도
무거우면 무겁게 가벼우면 가볍게
걸렸다 넘어졌다 잡혔다 놓쳤다 믿다 의심하다
삶이란 그런게지... 살아가자 살아내자
화두란?
바로 한목소리로 내면화된 절박함 절실함이 부르짓고 열어내는 그 홀연하고도 황홀한 몸짓이지만
살아냄!!! 이보다 지금을 절박하게 절실하게 이끄는 함축이 또 있는가?
그 내면의 치열한 절박함 위에서 오도가도 못할때라도 나는
절망스럽다하여도 굳이 희망을 부여할 바 없이
그 다시오지않을 절망까지 숨막히도록 누려보겠노라며
오! 늘
내 단 한번뿐인 하루살이의 길을 자비하며 내어간다.
그렇게 견디고 견뎌내노라면
절망스런 고통은 있을지언정 진정 절망은 없었다!!! 감히 말한다.
살아냄!!!
인식하든 인식하지못하든 그렇게 우린 누구나
화두라는 것을 굳이 들려하지않아도 안으려하지않아도 온몸으로 부르짓으며 인생의 한 지금을 겪고도 있다.
지금 나에게
화두란 현실을 인식함이고, 화두가 걸림은 현실을 직시함이고, 화두를 안음은 견딤(살아냄).
화두타파는 현실을 자각함으로 행과 지혜가 열림이리라.
아아, 無我는 我와 非我 잡을수없고 잡혀지지도않는 지금이노니
나에 갇혀선 현실이 보이지않고, 나를 떠나서는 현실이 열리지않더라......
_()_
첫댓글화두는 들고 명상은 본다...화두와 명상의 차이는 무엇일까...산울림님 말씀대로 화두는 삶 자체 살아냄인지도 모르지요...그안에서 자신을 관조하면서 삶을 정화하고 정리해가면서 사는것은 명상인지도 모르겠네요...^^그저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자신의 삶을 화두로...자신의 삶을 명상해보며 살아가는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드네요...자신을 제대로만 볼줄 알아도 많은 문제들은 풀리는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호심처(마음을 지키는 자리), 호심경(마음을 지키는 거울)을 모르면 그 공부는 한계가 있다. 마음을 비우는 자리를 알아야 성품의 공함을 인식할 수 있다. 그 자리는 중심자리이다. 화두, 염불, 주력 이 모두가 중심을 세우기 위함이다. 화두도 중심을 세우기 위한 화두는 살아있는 화두고, 염불도 중심을 세우기 위한 염불은 살아있는 염불이지만 아무리 화두를 들고 염불을 해도 중심을 찾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 죽은 화두요, 죽은 염불이다. 그저 아무것이 없어도, 화두니 염불이니 이런게 없어도 자기중심자리를 들여다 볼 수 있으면 그게 깨닫는 법이다. (구선스님 법문을 옮김)
중심이라는 것은 "나"이고, "나"라는 것은 없으니... "마음"이라는 허깨비를 어데서 찾아야할까... 그래서 저에게 화두는 동어반복의 끝없는 이름짓기 같기도 하여요. 그 화두를 깊이 궁구해보거나 공부했다 할만한 적이 없으매도 그 인상을 감히 적어놓아보았습니다. _()_
공의 개념은 비었다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있으나 드러나지 않은 자리입니다. 허공은 분명 있지만 그 실체를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인해 드러납니다. 중심은 나가 아니고 우리 몸에서 세워서 갖추는 자리입니다. 경계에 빌붙지 않고 근본과 동떨어져 있지 않은 자리를 중심이라 합니다. 단전과는 다른 곳입니다.
'一以貫之(일이관지)'! 어제 저녁 늦도록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제가 썼던 말이기도 합니다. 유려한 글솜씨에 저도 길을 잃을 뻔 하였습니다. 너무 황홀해서.... 헌데 노련한 선지식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화두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생활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이다' 제 입장에서 좀더 부연한다면 화두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지만 인식함으로써 다시 이어질 수 있겠죠 일념속에 이미 과거 현재 미래가 다 갖추어져 있으니 사실은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다시 찾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금 이 순간 화두를 두고 맴돌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일초직입한다면 바로 여래지가 아닐런지요?
첫댓글 화두는 들고 명상은 본다...화두와 명상의 차이는 무엇일까...산울림님 말씀대로 화두는 삶 자체 살아냄인지도 모르지요...그안에서 자신을 관조하면서 삶을 정화하고 정리해가면서 사는것은 명상인지도 모르겠네요...^^그저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자신의 삶을 화두로...자신의 삶을 명상해보며 살아가는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드네요...자신을 제대로만 볼줄 알아도 많은 문제들은 풀리는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화두에 관련하여 짧게 두마디로 연상되는 단어가 있는데... "절실함"과 "관조"예요.^^ 절실함에는 "나"가 있고, 관조에는 "나"가 없어요.^^ 이 두개의 창을 겹쳐서 나를 궁구해가는 길~~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호심처(마음을 지키는 자리), 호심경(마음을 지키는 거울)을 모르면 그 공부는 한계가 있다. 마음을 비우는 자리를 알아야 성품의 공함을 인식할 수 있다. 그 자리는 중심자리이다. 화두, 염불, 주력 이 모두가 중심을 세우기 위함이다. 화두도 중심을 세우기 위한 화두는 살아있는 화두고, 염불도 중심을 세우기 위한 염불은 살아있는 염불이지만 아무리 화두를 들고 염불을 해도 중심을 찾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 죽은 화두요, 죽은 염불이다. 그저 아무것이 없어도, 화두니 염불이니 이런게 없어도 자기중심자리를 들여다 볼 수 있으면 그게 깨닫는 법이다. (구선스님 법문을 옮김)
중심이라는 것은 "나"이고, "나"라는 것은 없으니... "마음"이라는 허깨비를 어데서 찾아야할까... 그래서 저에게 화두는 동어반복의 끝없는 이름짓기 같기도 하여요. 그 화두를 깊이 궁구해보거나 공부했다 할만한 적이 없으매도 그 인상을 감히 적어놓아보았습니다. _()_
공의 개념은 비었다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있으나 드러나지 않은 자리입니다. 허공은 분명 있지만 그 실체를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인해 드러납니다. 중심은 나가 아니고 우리 몸에서 세워서 갖추는 자리입니다. 경계에 빌붙지 않고 근본과 동떨어져 있지 않은 자리를 중심이라 합니다. 단전과는 다른 곳입니다.
'一以貫之(일이관지)'! 어제 저녁 늦도록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제가 썼던 말이기도 합니다. 유려한 글솜씨에 저도 길을 잃을 뻔 하였습니다. 너무 황홀해서.... 헌데 노련한 선지식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화두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생활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이다' 제 입장에서 좀더 부연한다면 화두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지만 인식함으로써 다시 이어질 수 있겠죠 일념속에 이미 과거 현재 미래가 다 갖추어져 있으니 사실은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다시 찾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금 이 순간 화두를 두고 맴돌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일초직입한다면 바로 여래지가 아닐런지요?
어쩌면 화두는 이심전심 너와 내가 不二임을 아느냐? 던지는 云인가 합니다. 서로가 상즉상입하면 염화미소가 피어날 것이요... 아니면 동문서답이 될 것이라... 감정이입이 아닌 覺의 이입에 달하는 인식할 것도 없이 그저 한 몸으로써 同化되는 일체감... _()_
이렇게 깊은 얘기가 오가다 보면 공안도 하나쯤 나올 듯 합니다. 아름다운 자리군요.
어여삐 보아주시고 한마디 어깨를 툭툭 도탑게 두드려주시는 웃음에 제 눈가에도 다북한 웃음이 피어납니다.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