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표준영정[標準影幀]
자료출처 : 문화관광부 표준영정 전시실 [원문보기]
강감찬 (姜都贊)
초명은 온천(殷川), 본관은 금천(衿川), 서울출생, 고려개국공신인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무예를 배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김장길의 양아들이 됨. 983년(성종 2) 문과(文科)에 장원, 예부시랑(禮部侍郎)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 성종(聖宗)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오자 조신(朝臣)들은 항복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왕을 피하게 한 뒤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
강수 (强首)
중원소경(中原小京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의 사량(沙梁) 출신. 육두품(六頭品)으로 보이는 내마(奈麻) 석체(昔諦)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꿈에서 머리에 뿔이 돋친 사람을 보았는데 그가 태어나자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현자(賢者)에게 가 물어보니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자라면서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게 되었고 의리를 중히 여겼다. 아버지가 그에게 '불도를 ...
계백 (階伯)
660년 신라의 김유신(金庾信)과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거느린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과 백강으로 진격해 오자, 5000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황산(黃山 : 지금 連山) 벌에 나가서 5만의 신라군을 맞아 싸줬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 전에 「한 나라의 힘으로 나, 당의 큰 군사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못하다」 라고 하고는 처...
광개토대왕 (廉開土大王)
역대 왕조 중 가장 강성하고, 대륙적 기상이 웅비했던 고구려의 왕으로서, 광개토대왕이란 칭호는 땅을 널리 개척한 임금이란 뜻으로, 생존시에는 영락대왕으로 불리었다. 어려서부터 영웅적 기상과 웅대한 포부를 가진 대왕은, 아버지 고국양왕이 죽자, 391년 18세의 나이로 왕에 즉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국력신장에 진력하고, 군사훈련 강화 및 국민들의 정신결속을 위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백제의 석현(石峴), 관미성(關彌城) 등에서 백제...
구형왕 (仇衡王)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 이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 조에 보면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를 진흥왕 2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도 가야가 반함에 왕이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야를 정벌하였으며 이...
구형왕비 (仇衡王妃)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면 「법흥왕 19년(532)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비(妃) 및 세 아들, 즉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아들 무덕(武德) 세째아들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신라왕은 이들을 예로 대하여 상등(上等)의 위(位)를 주고 본국(금관국)으로 식읍을 삼게 하였다. 그 아들 무력(武力)은 벼슬이 각간(角千)에 까지 이르렀다」라고 하고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보면 김유신의 12대...
김대건 (金大建)
교명 앙드레 (André), 1836년 (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P. Maubant)에게서 영세(領洗)를 받고 예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上京)하였다. 역관(譯官) 유진길(劉進吉)에게 중국어를 배우고, 모방 신부의 소개장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조선전교(朝鮮傳敎)의 책임을 진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神學)을 비롯한 여러가지 새로운 서양 학문과 프랑스어, 중국어, 라틴어를 배웠다...
김대성 (金大城)
이름을 대정(大正) 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재상을 지낸 문량(文亮)이다. 745년(경덕왕 4) 이찬(液)으로 중시가 되었으며 750년에 물러났다. 그 뒤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공사를 주관 하였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민족문화의 가장 창의적인 문화유산의 정수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의 건축사나 조각사 조경사(造景史)에 있어서, 그전에는 전혀 보지 못하던 새로운 계획의 구상과 시공의 창조물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의 조영에 있어서는 영감으로 ...
김부식 (金富軾)
호는 뇌천(雷川), 본관 경주. 숙종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는 등 일찍부터 요직(要職)을 역임하였다. 1122년(인종 즉위) 그가 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로 있을 때, 이자겸(李資謙)이 왕의 외척으로서 권제를 쥐고 군신의 예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므로 이를 충고하여 시정하게 하였다. 박승중(朴昇中), 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수찬하였고, 1134년(인종 12) 묘청(妙淸)이...
김수로왕 (金首露王)
일명 수릉(首陵) 이라고도 한다. 김해김씨의 시조이다.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직도 나라가 없던 시절에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3월 어느날 하늘의 명을 받아 9간(九干 : 族長) 이하 수백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들이 하늘에 제사지내고 춤추고 노래하자, 하늘로부터 붉은 보자기에 싸여진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김유신 (金庾信)
본관 김해(金海).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대손(代孫)으로, 화랑이 되어 화랑정신을 기르고, 611년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國仙)이 되었다. 644년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등 7개 성을 쳐 이기고 이듬해 1월에 개선하였다. 그런데 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매리포성(買利浦城 ; 居昌)이, 백제군의 맹공을 받고 있다는 파발에 곧장 상주(尙州) 장군이 되어 출전, 요격하여 크게 무찔렀...
김육 (金堉)
호는 회정당(晦靜堂), 본관 청풍(淸風). 1624년(민조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1638년(인조 16)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도승지로 임명되고,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갈 때 보양관(輔養官)으로 수행하고 귀국하여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취임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어 사은겸동지사(謝恩兼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였다가...
김윤후 (金允侯)
일찍이 중이 되어 백현원(白峴院)에 있다가 1232년(고종 19)에 몽고병이 침입하므로 처인성(處仁城 : 지금의 龍仁)에 피난하였는데, 이때 몽고의 원수 살리타(撒禮塔)를 활로 쏘아 죽였다. 그 공으로 상장군에 임명되었으나 굳이 사양하여 섭랑장(攝郎將)에 임명되고, 뒤에 충주산성방호별감(忠州山城防護別監)이 되었다. 그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주성(州城)을 포위한 지 70여일이 되어 식량이 떨어져 위태롭게 되었을 때, 병사들을 독려하기를 '만...
김정호 (金正浩)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본관은 청도(淸道). 황해도 출신, 어려서 서울로 이주,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학문을 열심히 닦았으며, 정밀한 지도의 작성에 뜻을 품었다. 그는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지(地志)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지지란 역대 제도와 문물, 풍습등과 지역과의 관계를 적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역사에서 지지가 만들어지고, 그 지지를 바탕으로 하여 지도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
김정희 (金正喜)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본관은 경주(慶州), 판서 노경(魯敬)의 아들로 백부 노영(魯永)에게 입양(入養)되었다. 1809년(순조 9) 생원(生員)이 되고, 181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설서(說書), 검열(檢閱)을 거쳐 1823년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가 되었다. 충청우도 암행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 검상(檢詳)을 거쳐 1836년(헌종 2)대사성(大司成)을 역임,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까지 이르...
김천일 (金千鎰)
삼장사(三壯士)의 한 사람. 자 사중(士重), 호 건재(健齋), 시호 문열(文烈). 본관 언양(彦陽). 1573년(선조 6)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되고, 1578년 임실현감(任實縣監)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나주(羅州)에 있다가 고경명(高敬命), 박광옥(朴光玉),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수백 명을 이끌고 선조가 피난가있는 평안도를 향해 가다가 왜적과 싸우면서 수원성(水原城)을 거쳐 강화도로 들...
김홍도 (金弘道)
호는 단원(檀園) 본관은 김해(金海),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솜씨가 뛰어났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제대로 그림공부를 하지 못했다. 호조참판(戶曺參判) 강세황(姜世晃) 앞에서 그림을 그려, 그 실력을 인정받아 그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이 되었다. 1771년(영조 47) 왕세손(뒷날 정조)의 얼굴을 그렸고, 1781년(정조 5) 어진화사(御眞書師)로 발탁되어 왕의 초상화를 그렀으며, 정조는 그를 평하기를 "김홍도는 그림에...
단군 (檀君)
단군왕검(檀君王儉),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로서, 서기전 2333년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단군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제왕운기>, <응제시주>,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나타나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위서에 이르기를,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이라 일컬으니, 요(...
도미부인 (都彌)
도미는 백제 개루왕때 의리(義理)가 있는 사람으로 서울인 한성 부근의 벽촌에 살고 있었다. 도미의 아내는 아름답고 절행(節行)이 있어 많은 사람들로 부터 칭송을 받았다. 개루왕이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무릇 부인의 덕은 정절이 제일이지만 만일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좋은 말로 꾀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드물것이다」 하니 도미가 대답하기를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아내 같은 사람은 죽더라도 마음을 고치지...
무왕 (武王)
이름은 장(璋) 또는 무강(武康), 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이라고도 하였다.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무왕 직전의 혜왕과 법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그 무렵 백제는 내외의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간의 내분이나 왕실권위의 약화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거듭되는 왕의 단명은 그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문제들은 무왕의 즉위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던 것 같다. 41년간에 달하는 무...
무왕비 (武王妃)
《삼국유사》에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로 절세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미모의 공주라는 소문을 들은 백제의 서동은 신라의 수도로 몰래 와서 아이들에게 마〔薯〕를 나누어주어 환심을 사는 한편, 선화공주가 자신과 더불어 은밀히 접촉하고 있다는 내용의 모략적인 동요를 지어서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결과 선화공주는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왕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공주는 귀양가는 길목에 대기하고 있던 서동을 알게 되어 그를 따라 ...
문무왕 (文武王)
이름은 법민(法敏),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맏아들. 어머니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 김씨. 비(妃)는 파진찬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법민은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며, 지략(智略)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650년(진덕여왕 4)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대부경(大府卿)의 벼슬을 받았고, 654년(무열왕 1) 파진찬으로서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65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660년(무...
서동 (薯童)
이름은 장(璋) 또는 무강(武康), 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이라고도 하였다.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무왕 직전의 혜왕과 법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그 무렵 백제는 내외의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간의 내분이나 왕실권위의 약화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거듭되는 왕의 단명은 그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문제들은 무왕의 즉위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던 것 같다. 41년간에 달하는...
선화공주 (善花公主)
《삼국유사》에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로 절세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미모의 공주라는 소문을 들은 백제의 서동은 신라의 수도로 몰래 와서 아이들에게 마〔薯〕를 나누어주어 환심을 사는 한편, 선화공주가 자신과 더불어 은밀히 접촉하고 있다는 내용의 모략적인 동요를 지어서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결과 선화공주는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왕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공주는 귀양가는 길목에 대기하고 있던 서동을 알게 되어 그를 따라 가...
설총 (薛聰)
자 총지(聰智), 호 빙월당(氷月堂).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始祖).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아들. 어머니는 요석궁 공주(瑤石宮公主).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 이름처럼 어려서 총명하였고, 경사(經史)에 두루 능통하였다 한다. 벼슬은 한림(翰林)을 지냈고 주로왕의 자문역을 맡아보았다. 유학(儒學)과 문학(文學)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서, 일찌기 국학(國學)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쳐 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가 창제한 중국 문...
성삼문 (成三問)
본관은 창녕, 도총관 승(勝)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에 생원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1447년 문과중시에 장원했다.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 뽑혀, 세종(世宗)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집현전수찬, 직집현전(直集賢殿)을 거쳐,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였다. 경연관이 되어 항상 세종을 가까이에서 모셔 총애를 받았다. 1442년 신숙주 하위지 박팽년등과 삼각산 진관사(津寬...
성왕 (聖王)
무녕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명농이다. 《양서 梁書》 백제전에는 이름을 명(明)이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지식이 영매(英邁)하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하여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찬양하고 있어서 그의 인물됨됨이가 비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성왕, 무녕왕이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
성충 (成忠)
656년 좌평(佐平)으로 있을 때 의자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승하여 자만과 주색에 빠지자 나라가 위태로워짐을 주간하다가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죽으면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臣)이 항상 시세의 흐름을 볼적에 멀지 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군대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여야 하는데 강 상류에서 적병을...
세종 (世宗)
태종의 세째 아들.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후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훌륭한 치적을 많이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황 희(黃喜), 맹사성(孟思誠)등 청백리(淸白吏)를 등용하였고,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최 항(崔 恒) 등의 학자를 등용, 학술연구를 활발히 하였다. 궁내에 정음청(正音廳)을 설치,...
신립 (申砬)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입지(立之). 아버지는 생원 화국(華國)이다. 어릴 때부터 글읽기보다 무예닦기를 좋아한 그는 23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도총관, 도사, 경력(經歷) 등의 벼슬을 거쳐서 외직인 진주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문장가로 이름난 진주목사 양응정(梁應鼎)으로부터 거친 성격을 고칠 것을 종용받기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목사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기도 하였다. 1583년(선조 16) 온성부사로 있을 때 이탕개(尼湯介)가 거...
신사임당 (申師任堂)
호는 사임당(師任堂 : 思任堂 : 師姙堂), 시임당(媤姙堂), 임사재(任師齋). 본관 평산(平山). 강원도 강릉(江陵)출신.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 사임당이 태어난 강릉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빛나는 문화와 전통이 서린곳으로, 서쪽으로는 태백산맥의 대관령이 병충처럼 둘러있고, 동쪽에는 푸르른 동해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산수와 자연이 그립같이 아름답고 인심이 순후하여, 예로부터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문향(文鄕)의 고장으로 불려오고 있다....
신채호 (申采浩)
호는 단재(丹齋), 본관은 고령(高靈). 충북 청주(淸州) 출신. 어려서부터 독서에 열중, 제가(諸家)의 책을 박람(博覽)하였으며, 20세에 성균관 박사(博士)를 지냈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 논설를 쓰고,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발표하는 한편, 영웅전을 써서 민족의식의 앙양과 독립정신의 고취에 힘썼으며, 전제주의 국가는 세계대세의 흐름을 거슬리는 나라로서 반드시 망한다고 강조하고, 우리나라는 국민의 국가로 나가야 한다고 일...
안향 (安珦)
초명(初名)은 유(裕). 호는 회헌(晦軒). 홍주(지금의 영주) 출생,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1270년 삼별초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있을 때, 백성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며, 민풍(民風)을 쇄신하려 노력하였다. 1286년(충렬왕 12) 왕과 공주를 호종,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주자학을 연구하고,...
양만춘 (楊萬春)
보장왕 때의 안시성(安市城)성주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 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으로 밝히고 있다. 어떻든 그는 지금의 만주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방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소재한 전략적 요...
영조 (英祖)
재위 1724~1776년. 숙종의 4남, 1721년(경종 1) 경종에게 후사(後嗣)가 없어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김일경(金一鏡) 등의 사주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1724년 즉위, 김일경, 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을 숙청, 한때 노론정권을 수립했으나 붕당(朋黨)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고, 1727년 노론의 강경파를 추방(丁未換局), 이후 양파를 고르게 등용함으로써 탕평책(蕩平策)을 기본정책으로 ...
왕산악 (王山岳)
우륵, 박연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악성으로 불리는 왕산악은 진(晋)나라에서 보낼 칠현금을 개량하여 새로운 현악기를 만들었는데 그 악기가 거문고(玄琴)이다. 왕산악은 당시 고구려의 제2상(相)의 자리에 있었는데 그가 만든 새 악기로 100여 곡을 지어 연주하였더니 검은 학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만든 악기를 현학금(玄鶴琴)이라고 하였다. 이를 뒤에 현금이라 하였다. 왕산악이 언제 거문고를 만들었는지는 「삼국사기」에 ...
우륵 (于勒)
박연, 왕산악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악성으로 추앙받고 있다.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의 성열현(省熱懸)사람으로 가실왕의 총애를 받았다. 가실왕의 뜻을 받들어 12현금(弦琴 : 伽倻琴)을 만들고, 이 악기의 연주곡으로 지명(地名)에서 얻은 악상(樂想)으로 12곡을 지었다. 551년(진흥왕 12) 신라에 투항(投降), 제자 이문과 함께 낭성(娘城)에 살다가 진흥왕에게 명성이 알려져, 하림궁(河臨宮)에서 이문과 함께 새 곡을 지어 연주했다. ...
원효 (元曉)
648년 황룡사(皇龍寺)에서 중이 되었으며, 각종 불전(佛典)을 공부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집을 불문에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고, 자기가 데어난 자리에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661년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려고 길을 떠났다. 밤이 늦어 남양주 부근의 한 무덤에서 하룻밤을 자게됐는데, 밤중에 갈증이나 해골에 괸 물을 모르고 마시게 되었으며, 이것을 통하여 대사는 크게 느낀바가 있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으며,...
유관순 (柳寬順)
충남 천안시(天安市) 병천면(竝川面) 출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나라사랑의 의지가 두터웠으며, 1918년 여자 전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梨花學堂)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하였다. 이듬해 3.1 운동이 발발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로 뛰쳐나가 만세시위를 벌였고, 일제 총독에 의하여 강제로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천안, 연기(燕岐), 청주(淸州), 진천(鎭川) 등지의 ...
유성룡 (柳成龍)
호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豊山), 이황(李規)의 문인. 156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69년(선조 2)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 이조좌랑(吏曹佐郎)을 역임하고, 1580년에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다 부제학이 되었다. 1582년 도승지(都承旨), 대사헌을 거쳐,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1584년 예조 판서를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유인석 (柳麟錫)
호는 의암(毅庵), 본관은 고흥(高興). 춘천출생.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을 체결할 때, 문하(門下)의 유생들을 이끌고 상소하여 이를 반대했고,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친일내각(親日內閣)이 들어서고,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忠州), 제천(堤川) 등지에서 싸워, 김규식(金奎軾), 권소(權瀟) 등 부패관리를 죽였으나 장기렴(張基廉)의 관군에 패...
윤관 (尹瓘)
자는 동현(同玄), 본관은 파평(坡平). 문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1088년(선종 5) 합문 지후(閤門祗侯)로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도(淸州道) 등지에 출추사(出推使)로 파견되었다, 1095년(숙종 즉위) 좌사낭중(左司郎中)으로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에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가 되어 조규(趙珪)와 함께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서 왕의 사위(嗣位)를 알리고, 이듬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기증받고...
윤봉길 (尹奉吉)
충남 예산(禮山) 출신. 어려서부터 사람됨이 준수하고 담력이 강했으며, 3.1 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적 분개를 느끼고,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자퇴하고, 서당에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23세에 "장부는 뜻을 이루기전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굳은 결심으로 중국 청도(靑島)로 망명하였다. 독립운동의 본거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서, 김구(金九)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였다. "조국의 독립과 ...
을지문덕 (乙支文德)
지략(智略)과 무용(武勇)에 뛰어난 장군으로서, 국, 내외에 두루 명성을 떨쳤음. 중국의 수나라는 612년(영양왕 23) 신라, 백제를 압도하고 만주와 연해주 유역에까지 뻗어있던 고구려를 탐내어, 중국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수 양제(楊帝)가 직접 출군하여 우중문(宇仲文), 우문술(宇文述) 및 113만여의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군(水陸兩軍)으로 고구려를 침범하였다. 양군이 압록강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장군은 직접 적정을 살피기 위...
의상 (義湘)
화엄종(華嚴宗)의 시조. 644년(선덕여왕 13) 황복사(皇福寺)에서 증이 되었다. 661년(문무왕 1) 원효와 같이 입당구법의 길을 떠났다. 당주까지 갔다가 원효는 느낀바가 있어 가지않고, 혼자 서사불퇴(誓死不退)의 결심을 갖고 해로(海路)로 당나라에 가서 지엄(至嚴)의 문하에서 화엄종(華嚴宗)을 연구하고, 당이 신라를 치려하자 이를 알리고자 671년 귀국하였다. 676년(문무왕 16) 왕명에 따라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화엄종을 강론하...
의천 (義天)
의천은 자(字), 문종의 네째 아들, 1065년(문종 19) 왕사(王師) 난원(爛圓)에게서 중이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통사(靈通寺)에 있으면서, 난원으로부터 화엄(華嚴)의 교관(敎觀)을 배웠다. 난원이 죽은 뒤에 그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하며, 당시의 계율(戒律), 열반(涅槃), 원융(圓融), 선적(禪寂) 등 각 종(宗)의 학승(學僧)을 모아, 불도(佛道)를 논하는 한편, 1084년(선종 1) 송나라에 가서, 유성법사(有誠法師)에게서...
이규보 (李奎報)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본관은 황려(黃驪 :驪興). 1189년(명종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文科)에 급제, 1202년 병마녹사검수제(兵馬錄事兼修製)를 거쳐 권보직한림(權補直輪林)으로 발탁되었다. 1219년(고종 6)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한 것으로,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에 좌천당했다. 1220년 예부 낭중, 기거주, 지제고(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에 승진, 국자좨주(國子祭酒), 한림시강학사(輸林侍講學士...
이순신 (李舜臣)
자는 여해(汝譜), 본관은 덕수(德水), 서을 출신. 1579년(선조 9)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미관말직(微官末職)만을 지내다가 1591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 좌수영(左水營 : 麗水)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초로 옥포(玉浦)에서 적수군 선견부대 30여척을 격파, 이어 사천(泗川)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13척을 분쇄하고, 당항...
이이 (李珥)
호는 율곡(栗谷). 본관 덕수(德水).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강릉(江陵) 출신.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연구하다가 다시 유학(儒學)에 전심하고 23세 때 이 황(李 滉)을 찾아가 만났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生員試),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 호조좌랑(戶曹佐郎)에 초임되고,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
이익 (李瀷)
호는 성호(星湖) 본관은 여주, 대사헌 하진(夏鎭)의 아들이다. 1705(숙종 31) 증광문과(增廣文科)를 보았으나 낙방하고 이듬해 형 잠(潛)이 당쟁으로 희생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안산(安山) 첨성촌에 머물러 일생을 학문에 전심하여 유형원(柳馨遠)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자의 중조(中祖)가 되었다. 1727년(영조 3) 학행으로 추천되어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763년(영조 39)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
이제현 (李濟賢)
호는 역옹(轢擁), 본관은 경주(慶州).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 삼사판관(三司判官) 등을 역임, 1314년(충숙왕 1)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 이 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염(姚燧閻), 조맹부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하였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사신이 왕을 포박해 가므로 글을...
이지함 (李之菡)
《토정비결 土亭祕訣》의 저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 또는 형중(馨仲), 호는 수산(水山) 또는 토정(土亭). 색(穡)의 후손으로, 현령 치(穉)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蕃)밑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후일에 그가 수리(數理), 의학, 복서(卜筮), 천문, 지리, 음양, 술서(術書) 등에 달통하게 된 것도 서경덕의 영향이라...
이차돈 (異次頓)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열심히 닦아, 장차 나라를 이끌 큰 인물이 될것이라며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법흥왕의 근신(近臣)으로서 벼슬이 내사사인(內史舍人)에 올랐다. 그가 장성하자 왕은 그를 공주와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가 다른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자 왕의 노여움을 사서 고구려로 쫓겨났다. 고구려에서 불교를 알아 승려가 되었으며, 불법의 빛을 모든 신라 백성들에게 전파하여 그들을 미망에서 벗어나게...
이황 (李滉)
호는 퇴계(退溪). 본관 진보(眞寶). 예안(禮安)출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曺佐郎)등을 거쳐 1539년(중종 34)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 1542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祿)때 이 기에 의해 삭직당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고, 1552년 대사성에 재임되었고 형조, 병조 참의에 이어...
일연 (一然)
호는 무극(無極), 목암(睦庵). 성은 김(金). 이름은 견명(見明), 일연은 자(字), 초자는 회연(晦然), 언필(彦弼)의 아들로 경상도 경산(慶山) 출신. 1214년(고종 1) 9세 때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서 학문을 닦다가, 1219년 대웅(大雄)에게서 수계(受戒)를 받고 중이 되었다.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 12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1246년 선사(禪師), 1259년 대선사(大禪師)에 올랐다. ...
장보고 (張保皐)
별성명은 궁복(弓福), 궁파(弓巴). 일찌기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에 올랐으나, 신라에서 잡혀와 노비(奴婢)가 된 사람들의 불쌍한 정경을 보고 분개, 벼슬을 사직하고 귀국하여 해적들의 인신매매 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해로(海路)의 요충지인 청해(淸海 : 莞島)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완도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 쌓고, 항만시설을 보수하여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였다....
장영실 (蔣英實)
중국계 귀화인과 기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아산(牙山)의 명신으로만 기재되어 있다. 동래현의 관노로 있을 때 그의 재주가 세종에게 인정되어 중국에 파견, 천문기기연구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귀국하자 면천되고 1423년(세종 5)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에 임명되어 궁중기술자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중국의 체재를 참고하여 청동으로 경점(更點)...
정도전 (鄭道傳)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본관은 봉화(奉化),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게한 개국공신이다. 1362년(공민왕 11)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박사가 되었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 경복흥 등의 친원배명(親元排明) 정책을 반대하다가 회진현(會津縣 :羅州)에 유배되었다. 2년후 풀려나와 후진을 양성하였고 1383년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이성계의 참모가 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
정몽주 (鄭夢周)
호는 포은(圃隱), 본관 연일(延日). 영친(永川) 출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을 역임한 후 1363년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였다. 1371년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와, 사...
정문부 (鄭文孚)
1565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문부 의병장은 11살 때부터 논어를 읽고 사서삼경에 통달했으며 천문(天文) 산수(算數)뿐 아니라 활쏘기까지 문무를 겸비한 선비로 성장했다. 21세 되던 해에 생원과 진사시험에 모두 합격했고 23세때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24세 되던 해인 1588년 문과에 급제, 이듬해 승정원 주서, 부정자, 정자(정7품), 홍문관 수찬(정6품), 사간원 정언(정6품), 사헌부 지평(정5품) 등 내직을 두루 역임했다....
정약용 (丁若鏞)
호는 다산(茶山). 본관 나주(羅州). 광주(廣州) 출신.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깊이 감동하였다. 1783년 회시(會試)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어 정조와 만나 <중용(中庸)>을 어전에서 강의하고, 1784년(정조 8)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築城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
정조 (正祖)
재위 1777~1800년.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아들, 어머니는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 아버지가 원통하게 죽은 뒤 후사(後嗣)가 되었고, 1775년 늙은 영조를 대신하여 국정(國政)을 다스렸으며, 이듬해 영조가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 이듬해 왕을 시해(弑害)하고 은전군(恩全君) 찬을 추대하려다 발각된 홍상범(洪相範) 일당을 주살하는 등, 끈질긴 벽파의 음모로 그의 지위까지도 위협당했으나, ...
조헌 (趙憲)
호는 중봉(重峯), 본관은 백천(白川). 1567년(명증 22) 병과(丙科)로 급제, 1572년(선조 5)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다 삭직(削職), 곧 저작(著作)에 등용되고, 그 후 통진 현감(通津縣監)이 되어 죄인을 엄중히 다스려,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工曺佐郎)으로 기용, 1582년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보은 현감(報恩縣...
철종 (哲宗)
재위 1849~1863,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셋째아들이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 헌종과 원범 두사람 뿐이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 순조의 비, 金祖淳의 딸)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나이 19세 였으며 강화도에 살던 농사꾼이었다. 1844년(헌종 10)...
최무선 (崔茂宣)
본관은 영주(永州-현재의 영천)이며,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무관(武官)인 그는 고려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를 격별하기 위해서는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사용하는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화약과 총을 연구하여 만들었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 화약을 이용하여 무기를 만든 최초가 된다. 당시 화약을 만드는데 세가지 재료가 필요하였는데, 초석(염초), 유황, 분탄이었다.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최영 (崔瑩)
본관은 동주(東洲)이며,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우달치(于達赤)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이커 대호군에 승진하였다. 원나라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유탁(柳擢) 등 여러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이끌고 원나라에 가서, 적을 거의 전멸시키고 중국대륙에 용명을 떨쳤다. 또한 배원정책(排元政策)으로,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서쪽의 8참(站)을 수복하였다. 1358년에는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선 ...
최익현 (崔益鉉)
호는 면암(勉庵), 본관은 경주(慶州), 포천(泡川) 출신.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조선 말기의 거유(巨儒)로서, 1855년(철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868년(고종 5) 장령(掌令)으로서, 토목공사(土木工事)로 인한 국민 부담의 가중, 당백전(堂百錢)의 발행에 따른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전입되었다가 사직되...
최치원 (崔致遠)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라고 전한다. 869년(경문왕 9) 당나라에 유학 하였으며, 874년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가 되었으며,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承務朗侍御史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또한 국외에서 문명(文名)을 떨치며 성공한 최초의 유학생이었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
태조 왕건 (太祖 王建)
본관은 개성(開城).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 출생.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 철원(鐵圓:지금의 鐵原)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궁예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군사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즉, 900년에는 광주(廣州), 충주, 청주(靑州: 지금의 淸州) 및 당성(唐城:지금의 南陽), 괴양(槐壤:지금의...
태조 이성계 (太祖 李成桂)
본관 전주(全州). 함경도 영흥(永興) 출신.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 한 뒤,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이 되었다. 1364년 원나라가 평안도에 침입하여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이들을 달천강(撻川江)에서 대파하였다. 1377년(우왕 3) 왜구(倭寇)가 개경을 위협하자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이를 격퇴하였다. 1380년 양광, 전라, 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가 되어 운봉(雲...
태종 무열왕 (太宗武烈王)
성은 김(金), 이름은 춘추(春秋). 이찬 용춘(龍春 : 龍樹)의 아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 김씨(金氏)이다. 642년(선덕여왕 11)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域主) 품석(品釋)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고자,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났으나, 국경의 영토문제로 강금당했다가 돌아왔다.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서 사신으로 일본과 당(唐)나라...
한호 (韓濩)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 본관은 삼화(三和), 개성(開城)출신.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격려로 서예(書藝)에 정진하여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筆法)을 익혀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의 각 체에 모두 뛰어났다. 그때까지 종국의 서체(書體)와 서풍(書風)을 모방하던 풍조(風潮)를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확립하여 석봉류(石峯流)의 호쾌(豪快), 강건(剛健)한 서풍을 창시했다. 1567년(명종 22) ...
허난설헌 (許蘭雪軒)
본관은 양천,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 호는 난설헌(蘭雪軒)으로 강릉출신이었다. 엽(曄)의 딸이고 봉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여러대의 문한가(文輪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때 오빠와 동생의 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고 신동이란 말을...
허준 (許浚)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구암(龜巖)이다. 1575년 24세로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이 되어, 내의원(內醫院)에 봉적하면서 내의, 태의, 어의로 명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술하여 우리나라 의학의 실력을 청나라 및 일본에까지 과시하였다. 1575년 2월에 어의(御醫)로서 명(明)나라의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임금의 병에 입진(入診)하여 효과를 보게 하였다. 1590년 12월에 왕자의 두창(疫瘡)을 잘 치료하여 당상(...
허황후 (許皇后)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모. 허황옥(許黃玉) 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 駕洛國記>에 따르면, 본래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데 부왕(父王)과 왕후가 꿈에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한다. 공주는 많은 종자(從者)들을 데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 이에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 신귀간(神鬼千)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이하며 왕후로 삼았다 한...
황희 (黃喜)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 본관은 장수(長水),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군서(君瑞)의 아들. 개경(開京 ; 開城) 출신. 1376년(우왕 2)음보(蔭補)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文科)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으나, 조선 태조의 간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 학관...
흥수 (興首)
좌평(佐平)으로 있다카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 : 현 전남 장흥)으로 귀양갔다. 660년 의자왕은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함으로 좌평 의직(義直)과,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의 신하를 모아 나당군의 침공에 대비하는 회의를 열었는데 의논이 구구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의자왕은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물었다. 흥수는 「당(唐) 병은 수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앞뒤로 서로 호
출처 역사인물 표준영정
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매일하우스
첫댓글 대한민국의 영원 불멸의 위대한 지도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정은 없나요?
첫댓글 대한민국의 영원 불멸의 위대한 지도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정은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