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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이긴 세월
-3개월 시한부 삶, 병원에서 못 고치는 병은 자신이 고쳐라-
글: 鄭 日 相
1. 생존율 3%의 위암 수술 5년 뒤의 판정
2년 전 초가을의 어느 날 이른 아침 6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부자리에서 일어날까 말까하며 망설임의 순간이었는데 전화벨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나 ㅇㅇ인데 ㅇㅇ친구가 죽었단다.’ ‘오늘 저녁 무렵 문상가기로 의견 모았다. 저녁6시. ㅇㅇ병원영안실이다.’ 작고한 사람은 대학동창으로서 나와 가까이 지냈던 사이요 대장암으로 6개월 전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이었고 항암주사를 몇 번 맞아야 한다고 전하면서 명원에서 시키는 대로 투병생활을 잘 하고 있는데 죽을 맛이라 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수술 받은 지 6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암에 걸리면 죽음이 떠오르고 처절한 아픔이 있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병원에 갔다 받쳐야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고 딴 세상으로 가야한다는 마지막의 별리(別離)만이 떠오르는 것이 암이다. 나도 위암수술을 받고 생존율 3%라는 절망상태였던 사람으로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던 경험과 어떻게 암을 극복했으며 암 수술 후 만 18년을 보낸 지금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이 기회에 소개하는 것도 암을 앓고 있는 분들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이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은 내가 절망을 이긴 세월의 기록이다.
2000년 3월 20일. 그날은 위암수술로 내 위를 완전히 제거한 후 만 5년을 지날 즈음의 종합검진 결과를 보기위해 담당 주치의를 만나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수술을 받은 후 정밀검진 결과를 판정받는 날인데, 그 판정을 받는 날 그 이전에 이미 여러 종류의 검진을 미리 받아 두었었다. 다시 정리하자면 그 종합 암 검진 항목은 혈액검사며 대·소변검사, 위 약물검사와 내시경 검사, 초음파검사, X-ray검사, 간 기능검사, 심전도검사, 방광검사와 장검사와 대장검사 등이었고 전부 나열하자면 몇 가지 더 있었다.
그날 검진창구에 앉아 있는 담당 간호사에 진찰예약 표를 내 밀었더니 5년여 동안 다녔던 곳이라 친절하게 그리고 선 듯 알아보고 내 진찰 차트와 한 묶음의 필름, 그리고 진료기록을 들고 담당 의사에게 나를 안내 해 주었다.
주치의 진찰실에 들어서면서「안녕하세요. 선생님!」 하고 내가 먼저 인사 했더니 내 진료기록을 모니터에서 뒤적이고 있던 의사가「어서 오세요. 그동안 왜 주기적으로 검진을 안 받으셨어요? 선생님! 항암 주사도 안 맞으시고.」라며 나를 처다 봤다.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면서 침묵만 지키고 의사가 진찰하는 테이블 곁 동그란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담당의사는 각종검사차트와 여러 장의 검진필름과 컴퓨터에 떠 올라와 있는 각종검진 결과를 이곳저곳을 클릭하며 검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검진결과에 대한 답이 어떤 결과일가를 조마조마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그 기다리는 시간,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긴 터널의 사진들은 온통 지난 5년간의 암 극복을 위한 영상들뿐이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그 긴 절망의 시간들만이 머리에 떠올랐을까? 인간의 뇌에 각인되는 기억소자엔 언제나 충격적이고 시련과 고뇌의 일들로 이는 평생 동안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는 연구결과를 나는 인식하기에 조용히 그 영상들을 뇌리에서 되살려 봤던 것이리라.
담당의사의 「왜 주기적으로 검진을 안 받았느냐」는 질문에 내가 답할 수 없었던 진실은, 사실은 의사 말을 듣지 않고 나만의 치료요법을 총동원 해 내 암 극복을 위한 치유법을 추진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적인 진료를 안 받았던 것이다. 항암주사를 10번 이상은 맞아야 하는데 병원에 있을 때 2번만 맞고 거절하고 말았으니 의당 의사로선 할 수 있는 질책성 물음이었다. 거기엔 그럴만한 사유가 내겐 있었기 때문이다. 한말로 요약하자면 자연치유와 자연의학을 신봉해 그 길을 암환자인 내가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선 의사의 암치료처방을 무시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병실에 있으면서 “병을 스스로 치유하는 법”이란 일어판 서적을 보고 나는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위암치료 최고 권위자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책 저자의 말을 더욱 신뢰하면서 그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 방법이란 나 스스로가 터득한 암 극복을 위한 기적의 암 치료제나 방법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자연 생태의학요법(자연의학)과 식생활습관의 고침, 즉 식이요법과 운동요법 등이며, 역으로 생각하면 암 환자로서는 의사의 말을 듣지 않은 일탈로 보통 암환자들이 꿈꾸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내가 암을 수술했던 날이 1995년 2월 15일이었으니 그날로부터 어언 만 18년이 지났다. 돌이켜보면 아마 의사지시대로만 병을 다스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내가 수술을 받고 항암주사를 2번 맞았다. 15일 간격으로 한 번씩 항암제 주사를 맞는데 그 주사를 맞고 나면 1주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이 뒤따른다. 메스껍고, 온 몸이 축 늘어지면서 열이 나고 꿍꿍 앓아 혼수상태에 빠진다. 음식도 못 먹고 하늘이 노랗다 못해 눈에 별이 번쩍거린다. 너무 고통스러워 그만 나는 엉엉 울기도하고 나죽는다고 몸부림치기도하면서 이 때 나는 결심하기를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어차피 인생은 한번 죽을 몸인데 나는 그런 고통을 받아가면서 죽고 싶지 않고 편안히 살다 죽고 싶다’고 말하면서 항암제 주사주입을 두 번 맞고는 거절하고 말았다. 항암제 주사를 맞지 않으려고 결정함에 따른 내 스스로의 갈등과 많은 주위의 따가운 충고와 의사의 질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실랑이들이 일기도 했고 다행히 간병사만 항시 내주위에 맴돌았었기에 가족에겐 비밀로 할 수 있었다. 독자 여러분! 항암제를 맞아 본 분들로부터 이야기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그러면서 병원 도서실에서 암에 관련된 서적을 닥치는 대로 빌려와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 때 읽은 암과 병 치유에 관련된 책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자연치유요법과 자연의학계통의 서적을 비롯하여 암정복비결 등 서적들이 많았다. 책이름을 들자면 ‘난치병치료이야기’ ‘병자, 음식 먹는 법’ ‘생약과 건강’ ‘위험한 의학, 현명한 치료’ ‘생식관련 서적 류 들’ 그 외 암 관련 외국잡지 등등 이외도 많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중에서도 ‘병을 스스로 치유하는 법’이란 일본서적이 제일 마음에 와 닿아 이를 두 번 탐독했다. 그리고 관련서적을 시중에서 친구를 시켜 사오게 했다.
이 5년 주기의 생존율 검사결과를 말하기 전에 내 가족 사항을 소개코자 한다. 내 가족 구성원은 모두 넷이었는데, 내 아내는 "파킨슨 씨란 병"으로 15년 이란 세월동안 시달리다 말년 2~3년 동안은 나다니지 못하고 누워 남의 손을 빌어 병간호를 받으며 누워있어 내 병간호를 못할 처지였었고, 아들은 대학에 재학 중이었으며, 딸은 시집가서 남의 집 식구가 되어있어 부득이 간병인을 고용해야 했다. 나와 같은 위암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대부분 10여일, 길어야 15일을 넘겨 입원하는 환자가 없었으나 나는 중태여서 42일 동안이나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 말해서 수술한날로부터 37일 째 되던 날 딸이 토요일 오후 병실로 찾아왔다. 간병인은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은 집에 가버리기 때문에 내 간호를 위해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간호실에 다녀오더니「아빠! 뭐 급히 집에 처리해야 할 일이나, 정리할 것이 없으세요?」라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무심코 「아니, 내가 집에 돌아가서 정리하면 되지 뭐, 걱정하지 말라, 넌」라고 퉁명스럽게 내가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난 이후 나는 마음에 그 말의 저의(底意)와 이상하다는 느낌에 걷잡을 수 없는 갈등을 갖기 시작했다. ‘왜? 딸이 그런 말을 갑자기 할까?’ 의심이 들어 그 이튿날 인턴의사를 찾아가 성난 어조로 「당신들 내게 뭐 숨기는 것 있지요? 왜 솔직하지 못해 이사람 들아!」「환자들에게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준비를 위해서라도 당신들이 말하는 생존율의 예상수치나 병세 등, 병의 경중여부를 말해 줬어야 하지 않으냐? 이 사람들 참!」나는 화가 났다. 그랬더니 「가족들이 말해 주지 않던가요? 선생님」하고 인턴의 퉁명스런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말을!」한참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인턴의 말이 「선생님! 놀라지 마세요. 생존율이 거의 제로에요.....」「정확히 말해봐, 이 사람아!」나는 격해 있었고 계속 다그치니 「생존율 3%정도에요 선생님!」이렇게 말하고는 급히 어디론가 가버린다. 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암치료차 병원에 입원한지가 벌써 40일 정도 되었으니 이미 나는 저승사자의 인솔을 받아 염라대왕앞으로 끌려가는 죽음의 문턱까지 와 있었다. 참으로 암담하고 절망상태였다.
“생존율 3%에, 암 진행상태가 3기 말에다 길어야 3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시한부 사형선고(통고)”를 이미 가족에 알렸다는 사실을 그때에서야 알게 된 나 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난 이후의 내 생존기간이란 길어야 두 달 남직한 날짜뿐이었으니 내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그런 내 생존율 상황에서 생각해 보면 나 말고 의사와 가족과 간호사 등 모두가 다 알고 있으면서 내게만 비밀로 했던 것이다. 환자인 내겐 비밀로 하고 의사가 우리가족에게 알리라고 내 딸에게 이미 오래전에 이야기 했었다는 그런 비밀유지가 내 암의 치유에 도움이 되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몹시 당황해 했고 나는 그날부터 “그래 생존율 3%라? 그래? 내 병은 너희들 의사들은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내 병은 내가 고치 마”하고 마음먹고 월요일 날 아침 의사가 진료순방 차 내 침대 곁에 찾아 와「좀 기운이 나십니까?」 라 물어왔다. 그 말에 나는 대뜸 「나, 내일 퇴원할 수 있게 수속해 주세요. 선생님」라고 요청했더니 「아직 퇴원해서는 안 됩니다. 뭐가 불편하신가요? 좀 더 호전되면 퇴원시켜드리지요. 뭐 불편한 게 있으시면 말해주세요」라고 말한 후 옆 환자에게로 가버린다. 주치의는 내 그 심정과 생존율을 환자가 알게 된 연유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하여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시간 이후로 내가 계속 퇴원요청을 했고, 그 내 생존율을 알고 난후부터 꼭 5일 후 집에 가서 요양하겠다면서 퇴원하고 말았다. 퇴원 할 당시 배안에서 진물이 나와서 두 개의 호수를 배꼽 밑에 끼워 찬 채 친구를 불러 차로 집에 되려다 달라고 요청한 뒤 집에 돌아와 방에 들어가니 내 처가 반기면서「당신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묻기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아내의 손을 꼭 잡아 주며 「나 찾았어?」하고 말하니 「응」 하고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곧 혼미한 상태로 눈을 감으며 말을 잊지 못하였다. 나도 눈물을 흘렸다. 몹시 안타깝고 애간장이 녹는 것 같은 순간들이었다. 그 당시 나도 그랬지만 내 아내마저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우리 집 정경이 참으로 암담한 분위기의 집합 그 자체였다. 말하자면 초상집분위기 이었다. 계속 내 눈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을 흘렸고 내 심연의 못에서 눈물을 퍼내 하염없이 슬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날 수술 만 5년째 되던 날의 판정결과는 어떠했을까?
내 여러 검진결과를 한참 검토한 후 내게 설명을 자세히 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숨을 죽이고 의사의 설명을 귀담아듣기 시작했다.
「새로 조금 자라난 위도 깨끗하고 간 기능도 좋고요. 걱정되는 암 수치도 정산인과 거의 같고, 다만 방광에 물혹이 둘 있는데 이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생님과 같은 나이가 되면 거의 다 생기게 되어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 면역기능을 높이기 위해 운동도 하시고, 신선한 야채와 과일 등 꾸준히 드세요.」「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기적 같은 놀라운 결과입니다. 거의 정상인에 가깝습니다. 이겨 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주치의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그리고 빈혈기가 좀 있는데 이에 관련한 약을 좀 드시지요. 처방해 드릴 테니.」「아! 그리고 종합비타민은 드시고 계시지요?」「네! 매일 한 알씩 먹고 있습니다.」「앞으로는 6개월에 한번 씩 들려주시고 더 좋아지면 1년에 한두 번 들리시면 됩니다.」「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덤으로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됐습니다.」
흔히 말하는 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의 진료결과를 주치의로부터 듣고는 날아갈 듯 기뻤다. 기분이 너무 상쾌하고 날아 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내가 이 죽음의 암으로부터의 긴 절망의 터널을 뚫고 이긴 세월로부터 마치 밝은 햇빛을 보는 듯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 아니더냐.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은 암이란 병에 걸려 5년여의 긴 세월 동안 그 암을 했던 시간들과 병마와 처절하게 자신을 싸워 보지 못한 사람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야릇한 감정에 내 스스로 잠시 사로 잡혀 멍하니 서 있었다. 암에 걸려 반듯이 통과해야 할 그 절망의 긴 터널 속에서 주저 앉아버리든지 아니면 무사히 통과할지의 무덤 같은 터널을 무사히 지나온 희열의 느낌은 이루 말할 나이 없이 무한하였다.
한편으로는 5년여 동안 내 가슴을 앓게 하고 걱정해왔던 암을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내 의지와의 싸움에서 다소 해방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몸 상태가 정상인에 가깝다”는 이야기는 내 스스로 터득하고 실천해온 암 극복을 위한 자연의학 쪽을 신봉하고 따른 내 판단이 옳았다고 느끼는 이 순간이야말로 지옥의 나락에서 이카로스의 날개를 다시 펴고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2. 암과의 전쟁, 그리고 내 의지
그러니까 1995년 2월 15일. 수술 후 42일 만에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고집과 뜻대로 퇴원 하게 되던 날 의사의 면담이 이뤄졌고 그날 내게 의사의 통상적 주문 형 병 관리 수칙을 일러주었다.
적어도 처음퇴원해서는 매 2주마다 진찰을 받고, 항암주사를 주기적으로 빠짐이 없이 맞으라는 것과 약을 충실히 들라는 당부였다. 그러면서 처방을 해 주었다. 그리고 특별히「아! 저~가능하면 항상 된장과 우유와 홍삼을 매일 드시도록 노력하십시오.」경과가 좋으면 다음에는 매월, 또 1년 쯤 지나서는 매 3개월 마다, 그리고 3년째에는 6개월마다, 그리고 매년 일정한 수술 주기 년 마다 암 종합검진을 받으라는 의사의 지시와 간호사로부터 미리 준비해 둔 이와 같은 상세한 진찰일정을 건네받고 아찔한 현기증이 잃었다. 병원에 매달려 살지 않으면 이런 진료일정을 소화하기 힘든 스케줄이었다.
그리고, 간호사로부터 퇴원 시 자가 요양수칙을 주면서 철저히 따를 것을 주문해 왔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가. 적어도 밥은 80번 이상 씹어 먹으라.(죽이던, 밥이던 간에)
나. 소식을 하되 하루 6~8번 식사를 하라.
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먹을 것.
라. 맵고 짠 음식을 피하라.
마. 적절한 운동을 하라.
바. 의사의 지시에 따른 섭생을 할 것.
사. 국수류는 먹지 말 것.
아. 병원검진은 차질이 없게 잘 지킬 것.
그날 이후 지금까지 만 18년 여 동안 의사의 지시에 따르고 지켜온 것은 음식으로서 된장과 우유와 홍삼을 먹는 것뿐이다.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때엔 철저하게 80번 이상을 씹어 먹는 습관이 요즘까지 길들여져 혼자 집에서 밥을 먹을 때엔 4~50분 쯤 시간을 소비하게 되는데 밥 먹을 땐 언제나 독서를 함께 즐긴다. 여기서 음식 한 숟갈을 입에 넣고 80번을 씹으면 곱게 씹힌 음식은 목을 타고 넘어가고 마지막엔 입안에 거의 남는 것이 없다. 따라서 입안은 침만 남는 꼴이 된다. 이 80번 이상 씹으라는 의사의 지시 때문에 나는 병원에서 독일병정이란 별명이 하나 붙었다. 그 별명은 내가 수술을 마치고 첫 음식으로 미음이 한 사발 나왔는데 식판에 음식 먹는 주의사항이 놓여 있었다. 간호사가 첫 미음을 먹으려 할 때 다가오더니 내게 말하기를 “이 쪽지에 적힌 것처럼 미음도 80번 씹어 드셔야 합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아니, 이 불같은 미음을 80번이나 씹어 먹으라고..?” 의아해 하면서 알았다고 답하고는 이 미음을 80번 씹으니 그야말로 침밖에 남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살길은 이 음식 먹는 방법부터 의사지시를 철저히 실천하고 야채 나물을 미음과 함께 80번을 씹으니 밥 먹는 시간이 엄청 걸렸다. 그래서 다른 환자들은 모두 식후 쉬고 있는 시간인데도 나는 미음 한 대접을 앞에 놓고 80번을 씹어 삼키니 무려 한 시간씩이나 밥 먹는 시간으로 허비하니 간병인이 질리다 못해 내게 ‘독일 병정’이란 별호를 붙여 간호사들과 통(通)하여 그렇게 나를 불렀다. 아이러니하고 웃을 일이 아닌가. 나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입에 넣은 음식을 침으로 곤죽이 되도록 씹어 먹는데 이 광경이 간병인에겐 지겨워 보여 그런 별명을 붙였나보다. 침을 무한히 위속과 창자 속으로 입에서 생산해 넘기었으니 이것도 암을 이기는데 큰 약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아무튼 독일병정이란 그 변명을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듣기 싫지는 않았다.
이상 밥 먹는 습관과 된장과 우유와 홍삼을 먹는 것 이외 다른 것은 거의 제대로 지킨 것이 없다. 다만 이 세 가지 음식은 지금도 매일 먹고 있다. 이 세 가지 음식을 검토해 보니 된장과 홍삼은 항암제 역할을 하고, 우유는 영양보충을 쉽게 하도록 하는 처방이었음을 알게 되었기에 철저히 실천해 오고 있다. 우유는 영양보충용으로, 된장국은 우리나라 가정의 밥상을 지키는 고정메뉴 같아 쉽게 취할 수 있으나 홍삼은 먹는 방법이 힘들어 여러 재료(아가리쿠스, 하수오, 백도라지, 천마, 기타 한약재 등)를 넣어 홍삼을 함께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호도와 기타 견과류 몇 기지를 넣어 아침마다 물과 꿀에 타서 마시거나 환으로 만들어 먹고 있다.
누구나 암 하면 제일 먼저 죽음을 떠올리는데 그 죽음의 특징은 삼무(三無)라 한다. 즉 조건이 없고, 순서가 없고, 무소유라는 세 가지라는 것이다. 3개월 시한부 삶이란 걸 안 날부터 나는 마음이 편안해 지는 자기 최면을 스스로에게 걸었다. 내가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나는 이 세상에 살며 내 남은 사명이 뭣인지는 모르나 내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신념의 최면까지. 먼저 나는 죽는다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둔 적이 전혀 없었다. 인명은 재천이란 말이 있듯이 하늘의 허락이 없는 한 나는 죽지 않을 것이란 신념과 하나밖에 없는 존귀한 삶을 최선을 다해 생명을 지속할 것이란 것과 마음을 편히 가졌다. 젊고 튼튼한 사람은 남의 말로 들리겠지만 감 떨어지는 것도 순서가 없듯이 젊다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니요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가 없기에 삶의 시간표는 하늘의 몫인 것이라고 언제나 마음속에 담아 두고 살았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만나면 누구든 헤어지기 마련이므로 쓸데없는 미련, 집착을 버리기로 했다. 때가 되면 꼭 돌아가게 되며 흙으로 왔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건 내 운명이라며 마음을 비웠다. 또한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고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지 않는가. 백조는 마지막에 가장 아름다운 울음을 터트린다고 하듯이 내가 삶을 마감할 때까지 해야 할 일과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내 생의 마지막 빛을 발해 보자고 마음에 다짐해 두었다. 내 사명을 다할 때까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선 내가 즐기는 글쓰기의 목표를 세웠다. 먼저 내 선조의 문집(생애와 사상 등 일대기)출판과 시와 수필 등 글쓰기에 내 집념을 불사를 것과, 그런 일에 내 새로운 목표를 세워 마음의 개척에 나섰다. 그리고 작게는 대학에 다니는 아들을 결혼시켜 독립시키고 그 아들을 통해 손자를 꼭 보고 그 애들이 결혼 할 때까지는 살아남아 그 장엄한 인생 삶의 희열을 느끼자고 마음에 굳게 심어 두었다.
그리고 내 암을 정복하고 살아남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조건을 바로 세워 온전한 생체적 리듬과 몸을 예전처럼 되돌리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암을 수술하기 전까지는 너무 건강하고 병원엘 거의 간일이 없어 나 같은 사람들만 있으면 아마도 이 지구상의 병원이나 약국이 모두 문을 닫을 것이라고 자만과 오만에 빠져 있을 정도로 건강에 자신 만만했었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런 내가 암으로 쓰러져 몸이 망가지고 시한부 인생이 되어 신음한다는 건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내 다시금 옛날의 내 몸으로 되돌리리라고 작심하고 철저히 내 방식대로 투병에 들어갔다.
수술을 받은 후부터는 만 2년 반 동안 야채 죽을 끓여 먹었다. 야채 죽의 소재는 다양한 야채와 쇠고기를 갈아서 쪼끔 넣고 검은깨를 넣었으며, 그 죽도 한 번에 한 컵 정도의 양인데 하루에 여덟 번 먹었다. 죽을 한 숱 갈 입에 넣고 80번 이상 씹으면 물밖에 입에 남는 것이 없다. 그리고 반찬은 채소류로 하고. 먹는 시간으로 하루일과를 채우는 격인데 나는 음식 먹는 시간에 꼭 독서를 했다. 책 종류는 다양한 편이었지만 주로 철학책과 암 관련 서적과 그리고 앞에서 지적한 생태의학서적, 자연치유와 관련된 책, 그리고 채식관련 책을 주로 탐독했다.
특히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두 컵씩의 야채생즙을 마시는 것이었다. 큰 유리컵의 신선한 녹즙으로 아침에는 공복에, 저녁에는 잠자기 전에 마셨다. 야채 한 소쿠리 준비해서 씻어 물을 털고 집을 내면 겨우 큰 컵 한 컵밖에 짜내지 못한다. 야채의 종류는 다양할수록 좋고 항암과 노화예방에 좋다는 온갖 종류를 망라했고, 이 생즙을 만 3년 여 동안 마셨다. 요즘은 생즙을 짜서 배달시켜 먹을 수도 있는 시대로 변했지만 그 당시엔 그런 장사꾼도 없었고 이 생즙을 준비하는데 엄청 힘이 들었음을 고백하면서 내 이 딱한 사정, 즉 생즙을 마셔야 암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과 내 집안의 사정을 안 교회의 여 집사 몇 분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도와 줘 생즙을 짜 마시는 꾸준한 실천이 3년여 지속될 수 있었으며 이란을 빌어 감사의 뜻을 다시 전하고자 한다. 아마도 이 식이요법의 하나인 생즙은 내 암을 이겨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 생체의 면역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고, 지금도 고기류보다는 생식이나 채식을 더 좋아하게 된 식성으로 바뀌어 버린 데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확신한다. 그리고 제철에 생산되는 과일과 다섯 가지 이상의 여러 과일을 항시 준비해두고 매끼마다 골고루 먹는다. 모든 과일은 껍질 채 씨까지 씹어 먹는다.
그런 식으로 과일을 먹게 된 동기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암 연구소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소개하자면 내가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면서도 의학서적을 뒤져보니 세계에서 암 관련 연구와 가장 권위 있는 최고의 병원이 미국의 텍사스 주 오스틴에 있는 “MD Anderson Cancer centre”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병원과 연구소의 주소를 찾아 병원침대에 누워 지내면서 볼펜으로 서툰 영어로 편지를 쓰기를 『To whom it may concern:(누구든지 관계관 받아보시오)라 쓰고, 중략.... 나는 한국원자력병원에서 위암 3기말의 수술을 받은 자로서 내 생명은 시한부인생이니 당신네들이 나를 ’몰 모토’로 삼아 연구를 하든, 병을 낫게 해 보던지 기꺼이 당신들의 요구에 응할 것이오니 연락해 주세요.』라는 요지 이었다. 내 편지는 그 연구소의 연구소장실에서 받아보고 연구소장 ”Dr. Slaga“ 라는 분이 이메일주소와 함께 답을 보내왔다. 나는 생각하기를 설마 답이 올까하고 반신반의했었는데 이런 답신을 받고 보니 역시 미국이란 나라는 선진국이구나 하고 여기면서 편지내용을 읽어보니『중략...당신이 올수 있으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병원차트와 자료를 가지고 찾아오시오.』 라는 요지였다. 그 편지를 받은 후, 그리고 수술한 후 퇴원한지 2개월 만에 미국 그 병원엘 찾아 갔다. 그러니까 수술 후 4개월 후 쯤 인 것 같다.
그 “MD Anderson Cancer centre”에서 많은 것을 체크한 후 내가 암 치료하는 모든 생활양식과 취하는 식료품과 기타 마음가짐을 이야기해 달라기에 자세히 말 해 줬다. 제일 강조해서 말한 내용은 “항암제 맞는 것을 중단했고, 자연섭생과 생식중심으로 생태의학 적 접근방법을 택하고 있다.” 고 했다. 그리고 난 후 삼 일만에 내게 내린 처방은 너무나 평범했고 “당신이 살아남으려면 자기들 처방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었으며, 그 처방내용은 극히 간단했을 뿐만이 아니라 놀랄 정도였다.
첫째, 모든 과일은 껍질과 씨까지 먹어야 한다. 그 이유는 껍질과 씨 부분에 항암제와 각종 몸에 좋고 띄어난 신비스런 효소가 전부 몰려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이 암연구소를 찾아 연구소장실에 들렸더니 그가 냉장고에서 사과 두 개를 끄집어내어 바지에 썩썩 문지르더니 그대로 입에 넣고 씹어 먹으면서 내게 사과 한 개를 주기에 나는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끄집어내어 닦아 먹었는데, 그날 이후론 모든 과일을 깨끗이 씻어서 껍질과 씨까지 모두 먹는 습관으로 바뀌었다.
둘째, 인삼, 된장, 그리고 미강(현미껍질)을 매일 먹으라는 것이다. 인삼은 항암제라 했고, 된장도 콩으로 만든 항암제 역할을 하며, 미강은 많은 현미밥을 먹을 수 없으니 고농축 영양밥으로 생각하고 미강(米糠)을 먹으라고 권유 받았다.
미강이란 벼를 도정하는 과정에서 까칠한 벼 껍질을 깐 후 다음으로 나오는 누런 현미껍질과 쌀눈이 섞인 그런 껍질로서 이 도정과정을 거쳐 9분도 쌀이니 7~8분도 쌀을 찌어내는데 이 과정에서 나오는 현미껍질을 말한다. 우리말로 ‘미강’이다. 이 미강엔 엄청 많은 효소가 들어 있어 꼭 매끼마다 먹으라는 것이었다.
그 권유에 따라 그날 이후 인삼과 된장과 미강을 항상 준비해 둬서 먹는다. 된장은 우리나라 밥상의 지킴이기에 특별한 경우 외엔 언제나 된장을 풀어 국이나 된장국을 끓여 먹는다. 미강은 집에서 밥 먹을 때 국이나 된장 등에 한 숟갈씩 퍼 넣어 먹으니 현미밥을 먹는 격이 되어 필요한 탄수화물과 영양 섭취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셋째, 잡곡밥을 먹되 소식을 하라는 것과 오래도록 씹어 먹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화가 잘 안될 때는 죽을 쑤어 먹으라고 했다.
그 지시에 따라 나는 현재 약 7가지의 잡곡을 넣어 밥을 지어 먹고 있다. 그 잡곡 중엔 콩과 팥은 언제나 단골 잡곡이다. 사실은 수술 후 소화를 돕기 위해 아침에는 거의 야채 죽을 3년 동안 먹기도 했다. 좀 지겨웠지만 내 생존법의 일환이었으니 이겨 내었다.
넷째, 그리고 종합비타민류를 매일 먹으라는 권유였다. 암 환자에겐 특정 영양소가 필요한데, 예를 들어 식물성 RNA,불포화지방산, 아르기닌, 티로신, 페닐알라닌 등으로, 이런 각종 비타민들은 면역력증강, 고장 난 유전자 수리, 암세포경계강화 등에 필수적인 역할들을 수행하는 것이니 식이요법만으로는 보충이 불가능하니 그런 비타민을 사서 먹되 정상인의 요구량(RDA)보다 무려 50~100배 이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곁들여 말해 주었다. 따라서 정량보다 더 먹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요청에 언제나 먹고 있는데 어떤 때는 아침 밥 먹은 후에 한 알, 저녁에 자기 전에 한 알 먹는다. 아무튼 이 종합미타민류를 다량 먹어도 좋다는 근거는 자칫 부족하기 쉬운 영양소를 강제적으로 보충해 주기 위한 처방이라고 설명을 덧붙여 설명해 줘서 나는 몸에 힘이 빠지거나 몸의 컨디션이 나빠지면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종합비타민을 먹기도 한다. 그리고 필요치 않은 비타민의 효소는 몸이 자동으로 배출시킨다기에 부작용은 없다는 설명도 들은 바 있다.
다섯째, 이와 같은 방법은 암 환자가 일반식생활을 통해서는 암 환자의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특정 영양소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므로 반드시 추가 공급을 해 당신의 생명연장(survival times)뿐만 아니라 삶의 질(Life Quality)증가와 체중감소(Tumor cohesive)억제를 막아주며 합병증 감소 등에 매우 큰 개선효과가 있으니, 이런 것들을 잘 모를 테니 영양 학자를 찾아 상담하라는 권유까지 받았다.
이 제안에 따라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영양 학자를 만나고, 큰 식당의 영양사를 만나서 자문을 구했으며, 따라서 내가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게 되고 알맞는 식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암환자에겐 면역결핍과 영양결핍이 일어나는데 이는 거의 55%이상이라고 하는 연구결과인 점을 고려한다면 암에 걸려 극도로 약해진 체력으로 감기·몸살 같은 가벼운 질환도 극복 못하고 영양결핍으로 쓰러지고 생명을 잃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따라서 암환자가 영양이 부족하면 체중이 감소하고 결국 면역기능저하로 이어져 암과 싸워나갈 자체 힘이 상실되어 암으로부터 무릎을 꿇게 된다고 한다. 나도 내 체중이 78Kg정도였는데 암을 수술하고 나선 65Kg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체중이 줄어서 걱정했더니 의사나 자연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가 내 체격에 알 맞는 체중이고 현재 체적이니 살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내 키가 177cm인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운동은 면역체계의 개선과 몸의 활력유지와 생체리듬을 북돋우어 줌으로 암 극복에 큰 도움을 주는 수단으로 꾸준하게 적절한 운동을 반듯이 하고 신선한 공기를 많이 마시라 했다.
나는 운동을 통해 혈(血)을 활발히 통하게 하고, 면역체계의 증진을 위해 운동요법으로는 가끔 높은 산에 오른다. 산엘 오르면 심호흡을 무한히 해 댄다. 그리고 매일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건강한 체질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3.병원에서 못 고치는 병은 자신이 고쳐라
아니 이런 세계적인 최고권위의 암연구소를 가진 병원에서 이런 식의 간단한 처방을 내게 내리다니 처음엔 이해가 잘 가질 않았다. 그 모두의 처방이 내가 혼자 터득한 스스로의 자가 치유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극히 평범하고 자연치유에 포커스가 맞춰져있었다. 그 연구소에서 내 암 치료에 대한 처방을 내리면서 연구소 소장이 불숙 하는 말이 “미스터 정, 암엔 특별한 약이 없어요. 사실은” 라고 했다. 이 말이 언제나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내 경우의 경험상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의사들과는 너무나 다른, 자연치유에 근거한 처방이 아니더냐. 혼자 유추해 봤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내 암치유의 선택적 행동과 실천에 더욱 자심감이 솟구치고 기존의 내 암 극복을 위한 스스로의 처방과 생태의학과 자연의학에 의존해 왔던 내가 옳은 길이었고 그 효능을 인정하고 느끼게 되면서 인류가 생존해 오면서 전수되고 체득한 원시적인 뿌리에서부터의 인간의 순수한 자연에의 의존성과 합일에서 만이 영원히 인류란 존재는 발전될 것이고 존속해 가는 원동력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에 이루기까지 되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자 한다.
여기 그 병원의 개략을 소개하자면 “MD Anderson Cancer centre”는 주립대학의 종합병원과 암연구소이었고 운영비는 “MD Anderson”이란분의 출연기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그 규모는 우리네 어느 종합병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미국 텍사스 주의 오스틴 시에 자리 잡고 있는 암연구소로서 텍사스 주립대학의 소속으로서 연구인력 수를 물었더니 박사급이 300여명이고, 석사 급의 연구의사가 900여명인데다 학사출신이 1.300여명이 종사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일반종사자가 수백 명이라 했다. 놀라웠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는 1995년도 이었으니 지금은 훨씬 더 규모가 커졌을 것으로 짐작이 가고 그 때만 해도 연구소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었다. 내 짐작으로 지금의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의 3배는 됨직해 보였다. 다른 여러 곳을 안내해 줘서 둘러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때서야 이런 세계적인 권위의 암 연구 센터에서 이런 처방을 내게 내린 데는 상당한 이유와 연구경험의 결과라 여기고 내게 내린 그 처방실천을 철저히 지키려 노력했고 지금도 누순 해지기는 했지만 내 생활 삶의 모습과 생활패턴은 거의 그 지침에 따르고 있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
위에서와 같은 처방의 실천과 권유에 따른 식이요법 등은 그날 이후 조금도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이 가르침을 18여년 넘게 지키고 있다. 이 처방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 모두는 생태의학과 자연의학에 근거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데는 영양과 면역력의 뒷받침 없이는 암 치료효과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결론으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총체적인 면역기능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암 수술을 받은 지 만 18여년이 지났다. 그리고 내 나이는 산수(傘壽)를 꼭 2년 전에 넘긴 나이인데도 4~50대 젊은이들과 한 달에 세 번 정도 높은 산엘 오르고, 헬스클럽에 들려 운동도 하고 독서를 하면서 글쓰기의 집념도 불태우며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지금 내가 먹는 약이라곤 종합비타민과 빈혈치료 약인 ‘훼로바-유’를 먹을 뿐이다. 위를 수술한 사람은 철분흡수가 잘 안되어 빈혈이 생긴다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서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여 소개하자면 “Dr. Slaga”라는 그 연구소장을 감사함으로 우리나라 제약회사에 소개해 주고 초청해서 우리나라에서 암 관련 연구협력과 강연을 한 적이 있고 지금도 그와의 끈을 이어오고 있다. 내 삶을 지금까지 이어준 은인으로서의 인연 때문이라 여기면서.
돌이켜 보면 내게 쌓인 스트레스성 원인도 위암을 생성시키는데 한 목 단단히 기여 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위암 수술 후 왜 위암이 발생했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내 주치의에게 물으니 스트레스성이 원인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 스스로는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암이 발생했다고 수긍하면서 여러분들도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날려버리라고 권하고 싶다. 인간의 인체의 각 기관이 가장 겁내는 것 중의 하나가 스트레스라 한다. 스트레스가 생기면 인체의 각 기관에 붙은 암 균류와 기타 병원 군과 합작해서 암을 유발시킨다고 하니 이 스트레스를 의식에서 훨훨 날려버리고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라고 권유하고 싶다. 반대로 스트레스를 유익의 편으로, 스트레스를 자극제로 여기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스트레스도 무척 즐거운 자극제가 될 것이고, 동시에 삶의 의욕을 북돋우는 동기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더욱 덧붙이고 싶은 말은, 사람은 누구나가 마시는 공기, 먹는 음식, 물 등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재료임으로 되도록 이면 기본을 지킬 필요가 있고 시기나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는 식이요법을 해야 한다고 여기면서 금식과 단식도 때로는 권하고 싶다. 나는 그동안 1주일씩 4~5년에 걸쳐 매년 정초에 지도를 받아가면서 금식수련을 한 바도 있다. 이번 여름 즉 8월 12일부터 1주일 동안 금식수련을 할 예정이다. 내 몸은 내가 잘 아는데 금식을 지도하는 강사가 “물만 마시니 특별한 영양을 공급받지 않은 백혈구와 적혈구가 자기 몸에 남아있는 온갖 잡균과 암균은 물론 다 잡아먹는다”라고 했다. 얼마나 놀라운 현상이냐? 건강을 지키는데 상당히 큰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
또한 언제나 영양결핍이 없게 불균형을 조심해야하고, 자연을 통해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며 친해지라고 권하고 싶다. 자연은 늘 만나고 볼 때마다 싱그럽고 푸근하며 흙을 밟아 친해져보라고 말이다. 따라서 나는 자주 산행에 나선다. 싱그런 자연을 맛보기 위해서다. 내게 암 치료를 위한 병원을 맡겨준다면 웃음치료부터 추진하고 싶을 정도로 웃음은 만병통치의 지름길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나는 혼자서 뭣을 생각하다가도 혼자 웃어대기도 한다. 그런 연유에서 일까. 나는 만담 책을 보기도 하고, 위트, 풍자를 섞은 말을 잘 사용한다. 내 스스로를 사랑하며 감사로 하루를 마감하면서 잠에 드는데 잔다하고 마음먹으면 1~2분 내에 잠에 곯아떨어진다. 모든 것을 머리에서 비우는 훈련을 암수술을 받고나면서부터 내 스스로 최면을 걸어 실천해 오는 덕목중의 하나라 하겠다. 그래서 일까 여러 생체리듬 중에서 살펴보면 수 삼년 동안 감기에 걸린 기억이 별로 없다. 감기란 놈은 만병의 근원이라기에 감히 범접을 못하나보다 하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위에소 설명한 모든 내 생활의 습관들이 내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기여한 결과가 아닐까하고 간주해 본다.
마지막으로 내 몸의 생체나이는 지난봄에 60대중반에 이른 정도라는 보건의의 진단에 의한 판정을 받은 상태로 몸이 가뿐하고, 마음의 나이는 항시 2~30대이며, 이성적(지적)인 나이는 50대이고, 사회생활의 나이는 60대에 머물게 해 활발히 움직이며, 실생활에서 헤아리는 나이는 82세이다. 그래서 누가 내 나이를 물어오면 언제나 22살이라고 말한다. 겨우 이제 한 갑자를 넘긴 청년이라고 말하면서. 이 같은 복합 연령대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지적욕구를 채우기 위해 오랜 내 습관대로 매주 책 한권씩을 사본다. 그러면서 칼럼도 쓰고, 수필(수상)도 쓰고 시(詩)도 써서 발표하기도 하고, 또 문학회모임 등 그런 류의 모임에도 참여하며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장루의 지식을 토해내 활자화 시키며 많은 독자들과 만나며 대화한다. 요즘은 많은 스트레스가 주위에서 맴돌고 있기는 하지만 이 스트레스를 내 자극제로 여기니 오히려 즐거울 뿐이고 언제나 쾌청한 마음을 유지하려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나는 요즘 장수시대에 걸맞은 120세 까지의 생존프로젝트 세우기에 꿈을 꾸며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 사명을 다할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라고 확신한다. 내 사명이 어떤 류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암 환자분들이여! 암 증상의 경중을 따지지 말고 암울하게 생각을 갖지 말 것이며 심지어 암 3~4기 말기란 숫자는 나는 통계에 지나지 않고 이 숫자에 연연하지 말아달라고 당부 드리고 싶다. 병원자료만 보고 공포, 불안, 우울, 절망에 빠지는 것은 매우 백해무익하다는 것이라 여긴다. ‘병원치료가 이 정도구나?’라 여기면 병원치료 일랑 참고로 하고 다른 도움의 길을 모색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이 기록은 내가 절망의 세월을 이겨낸 체험서임으로 참고하시고 “병원에서 못 고치는 병은 자신이 고치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 길이 바로 생존율 3%라는 암을 이겨 낸 내 길이었기에.
2013.7 청암우거에서 쓰다
첫댓글 지난 3월 25일 만취동산에서의 모임 때 내 암 극복에 관한 간단한 이야기를 소개 했었지요.
그 때 내 이야기를 들은 회원들이 그 암 극복 수기를 덕화만발에 올렸으면 좋겠다는 요청들이 있어
내 암 극복기를 올려듭니다. 암을 앓는 사람들에 도웅이 될 것으로 여기면서 올립니다.
좀 길어서 나눠 올릴 까 하다가 읽는 분들의 편리를 위해 한꺼번에 올렸습니다.
이 글은 원자력병원과 의사협회, 한국암센터등에서의 요청으로 썼으며
암 환자의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함니다
강력한 투병의지를 높이 삽니다. 독일병정(?)의 기개가 대단하십니다. 늘 건안하시길---
좋은 글, 좋은 말씀, 좋은 귀감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하하! 청암님은 정녕 초인이십니다.
그 용기와 투쟁! 길행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아직도 다리가 불편하여 고통스럽습니다.
한 달 더 약을 먹어보고 아마 재시술을 받을지 모르겠네요! 하하하하하하하!
고마우신 글 - 퍼 갑니다.
양해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암을 극복함에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잘 하셨습니다.
청암선생님의 120세 도전에 열열히 성원 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