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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동쪽으로 갔을까?
세상의 동쪽 끝에 상상의 신성한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 나무는 부상(扶桑)이라는 이름의 하늘 높이 뻗은 거대한 뽕나무였는데, 그 가지들이 밤새 태양을 붙잡고 있다가 새벽이면 놓아주어 하루를 운행 시켰다는 전설의 나무였다. 부상이란 명칭은 또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 그 뽕나무가 있는 곳으로 일컬어졌으며, 세상의 동쪽 끝을 의미하였다.
이 전설은 중국 신화 산해경 해외동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한나라 역사서에 의하면 진나라 때 진시황이 동해로 동남동녀를 보내 불로초를 찾으라고 보낸 곳이 부상이라는 지역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오늘의 한반도, 일본 열도, 쿠릴 열도, 류큐 제도, 아메리카 대륙이라고 추측되는 것으로 보아 절대적인 세상의 동쪽 끝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의 정토, 곧 극락세계를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한다. 이는 아미타부처님이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는 곳을 뜻하는데, 극락이란, ‘서쪽 아득히 멀리 떨어진, 십만억토(十萬億土)를 지난 곳에 있는 정토로, 그 어떤 미혹이나 괴로움이 없는 원만한 세계다’라고 불교사전에서 설명한다. 그런데 인도 사람들은 동쪽으로 서서 앞쪽을 과거, 뒤쪽을 미래라 한다. 따라서 극락은 내세에 왕생할 세계가 되므로, 자연스레 그것은 상대적으로 서방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음양오행에 방위개념을 연결 지었다. 즉 동남서북(東南西北)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을 나타내고, 색깔은 청주백현(靑朱白玄)을 의미하여, 고구려 강서대묘(江西大墓)벽화인 사신도(四神圖)에 시신을 안치한 동서남북 사방 벽에 청룡, 주작, 백호, 현무를 그려 넣었고, 조선왕조 경복궁에도 동쪽은 봄을 알리는 건춘문(建春門), 서쪽에는 가을을 맞이하는 영추문(迎秋門)을 세웠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방위를 중시하여, ‘동과 서는 해와 달의 문이고(東西日月門), 남과 북은 기러기의 길이로구나‘ (南北鴻雁路)라는 한시도 남겼다.
이제 창세기에서 방위를 살펴보자. 먼저 에덴동산의 위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창 2:8)는 것으로 보아, 동방의 에덴이란 지역은 창세기의 저자로 알려진 모세가 팔레스타인지역인 현재의 이스라엘 땅을 기준으로 본 관점일 것이다. 히브리어 에덴은 ’행복의 땅/축복의 땅‘이란 뜻으로 풀이되지만, ’물 댄 동산‘이기도 하여 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생각된다. 그곳에서 발원한 네 개의 강으로부터 물이 그 지역으로 공급되었는데, 그중 두 강이 티그리스(힛데겔)와 유프라테스강이었음을 창세기가 기록하므로, 에덴의 위치는 두 강이 시작되는 북부 메소포타미아지역일 것으로 일부 성경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동방‘이란 해가 뜨는 곳이기 때문에 생명과 빛의 근원지로 보았다.
이같이 동쪽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고대 근동 종교에서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고대에는 동쪽을 향해 방향을 잡아, 앞쪽은 동, 뒤쪽은 서, 오른쪽은 남, 왼쪽은 북으로 표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동쪽의 상징은 다소 모호한 편이다. 성경 사전을 보면, 동방은 의와 승리(사 41:2) 그리고 구원(겔 43:2)과 관련이 있으며, 또한, 미신이 행해지던 곳이라고(사 2:6) 일컬어져 왔다.
더욱이 동쪽은 범죄 후 유배의 방향, 하나님과의 소외됨의 조건을 나타내어 황야를 상징하기도 했다. 창세기에서 동쪽으로 간 사건은 몇 차례 등장한다. 첫째로, 아담의 선악과 사건 이후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어 땅을 갈게 하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에덴의 입구는 동편이고, 아담과 하와는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갔을 것이다. (창 2:23-24) 둘째, 카인의 범죄 후 그는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게 된다. (창 4:16) 셋째, 대홍수 후, 노아의 자손들은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에 거류하며 성읍과 바벨탑을 건설하여 그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함을 보시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 셨다. (창 11:2-4, 7-9) 넷째,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서로 헤어질 때 롯은 물이 넉넉한 요르단 온 지역을 택하여 동으로 옮긴다. 그러나 그 지역은 훗날 소돔의 죄악으로 심판받아 멸망하게 된다. (창 13:11) 다섯째,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다. (창 25:5-6)
이처럼 창세기에서 동방의 상징은 모호하다. 연구 자료에 의하면, 동방의 에덴동산은 안전하고 안락함을 상징하는 지대였으나, 인간의 범죄 이후 동쪽은 하나님을 떠난 유형지로 인식되었고, 다시스의 배를 깨는 동풍으로서 (시 48:7, 겔 27:26) 파괴적인 모습으로도 묘사되었다. 그런가 하면, 선지자에게는 동쪽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유수(幽囚)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기도 했다. (겔 10:18-19, 11:22-23) 그리고 계시록에서는 동방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개입한 곳으로 (계 16:12) 묘사되었다.
한편, 서쪽도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면 모두를 상징하였다. 지리상으로 팔레스타인지역의 서쪽은 바다로 악과 죽음으로 표현되었다. (단 7:2-3) 또한 서쪽은 해가 지는 곳이어서 흑암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시 104:19-20) 긍정적인 면은 성막(聖幕)에서 볼 수 있는데, 성막이 비록 동쪽을 향하더라도 서쪽을 향해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쪽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즉, 에덴으로의 귀환을 의미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으로 향해 나아가 예배를 드릴 때, 그들은 떠오르는 해를 등진 채 서쪽을 향해 온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쪽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동방을 떠난 아브라함의 모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창 11:31) 또한,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서쪽 이스라엘로 돌아온 길도 그러하여, 이 귀환의 길에서 하나님은 그들과 동행하셨다. (겔 43: 2-5) 따라서 서쪽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구약에서 북쪽은 북극성이 항상 보이는 곳으로 영원을 상징한다. 이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사 14:13), 그의 영광이(욥 37:32) 축복이나 심판(겔 1:4)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북쪽은 또한, 재앙의 상징으로도 나타났다. 하나님 백성의 적들이 북쪽에서 파괴를 몰고 왔다. (렘 1:14, 겔 38:6) 이때의 적인 북방 왕은 하나님의 역할을 빼앗으려는 가짜 왕이었고, 결국 하나님에 의해 파멸되었다. (습 2:12, 단 11:21-45)
마지막으로 남쪽은 주로 부정적인 상징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의 남쪽은 광야이어서 생명이 번성할 수 없는 곳이었다. (사 30:6) 그리고 남쪽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의 백성을 압제하는 이집트가 있다. 반면에 그곳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 그와 같이 이집트로 가서 출애굽을 행하시고 시내 산에서 그들을 만나신 곳이기도 하다. (신 33:2)
이같이 성서에서 기록된 상반되는 네 방위의 상징은 악이 어느 곳에서나 존재할 수 있으며, 이와 동시에 이러한 악의 세력으로부터 하나님 백성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도 세상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성서연구자들은 해석한다. (시 139:7-12)
이러한 고대 근동의 방위개념은 상대적인 설정이었다. 이 땅에서의 고정불변하는 방위는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기준점이다. 어디를 기준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동서남북이 결정된다.
오늘날 근동, 중동, 극동이라는 경도의 표시는 1851년 영국 천문학자들이 런던교외 그리니치천문대의 본초자오선을 기준으로 설정하여 1884년 국제회의를 통해 통과된 것이다. 따라서 구약에서의 동방과 서쪽이란 팔레스타인지역의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지칭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왜 동쪽으로 갔는지, 그리고 아브라함이 어찌하여 자기 서자들에게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으로 가게 했는지의 이유를 지리적 요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돌아와 롯과 함께 네게브를 거쳐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고 거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 땅은 두 집단이 동거하기에는 너무 협소하여, 서로 헤어지게 된다. 첫 번째 결정권을 가진 롯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던 요단 지역을 택해 소돔에 이르게 된다. 반면 아브라함은 산지인 헤브론으로 옮겨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게 된다. 결국, 롯은 목축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찾아 매우 현실적인 선택을 통해 요단 동쪽으로 자발적인 이동을 하게 된다.
이와는 달리, 아브라함이, 죽기 전에 이삭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기의 땅을 소유케 했고, 서자들에게는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한 것은 아브라함의 일방적 결정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일찍이 그의 어미 하갈과 함께 보내어 큰 민족을 이루게 한 것과 같이, 후처 그두라에서 난 6명의 아들을 떠나보낸 것에는,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려는 등의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 하필 동쪽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 그 이유는 그들이 목축에 종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형상 서쪽 해안평야지대는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지대이나, 농사를 짓지 않은 그들에게는 생소한 지역일 것이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해안선은 갈멜산의 돌출을 제외하고는 완만하여 레바논과 페니키아의 북쪽과는 달리 항구가 들어설 장소가 거의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한 번도 해양으로 진출을 시도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이제 아담과 하와, 카인과 노아의 자손들이 왜 동방으로 갔는지의 이유를 생각해볼 차례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창세기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하셨고, 온 인류가 한곳에 모여 사는 것보다 온 세상에 흩어져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인간들이 각자 원하는 곳에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먼저 아담과 카인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들은 목축보다는 농사를 지은 농부였을 것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은 그에게 ’너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신 것과 카인의 범죄 이후에도 하나님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그러하다. 농경을 위해서는 풍부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강 유역으로 가야 한다. 인류의 4대 문명이 모두 거대한 강을 끼고 발전한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아마 카인은 동쪽으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이 발원하는 곳으로 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에서 정착하여 성을 쌓고 에녹을 낳아 성 이름을 에녹이라고 불렀다. 에녹은 ’시작하다‘라는 히브리 동사의 파생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는 자기 방식대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자손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여 가축을 치는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음악의 조상이 되었으며.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와 수공업의 선조가 되었다. 범죄 이후에도 카인과 그의 자손들은 도시를 만들어 하나의 문명을 이룩한 것이다.
한편 홍수 이후 노아의 자손들은 ’흩어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이를 면하기 위해 동쪽으로 이주하다가 시날 땅에 거주하여 벽돌로 성읍과 탑을 쌓아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였다. 시날은 인류 최초 문명발상지인 수메르를 일컫는다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그곳은 학자들에 따라 바빌론, 에렉(아카드), 악갓, 갈레 등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전역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바빌론과 수메르지역으로 제한시켜 말하기도 하는데, ’양쪽 강 사이’라는 뜻인 메소포타미아문명을 발상시킨 곳이다. 그들은 결국 고대 근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쪽 끝에 자리를 잡아, 관개시설이 잘된 농경문화를 이룩한 것이다. 창세기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을 뜻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를 농경문화 사회의 특성으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농경문화는 자연 의존적이며 다산문화이다. 농사는 비, 기후, 바람과 같은 자연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우주 만물의 현상세계가 객관적인 3인칭인 ‘그것’(It)이 아니라, 2인칭인 ‘당신’(You)으로 생각하여, 이를 인격화한 물활론(物活論, animism)을 믿었는데, 특히 농사를 짓는 농경문화 사회에서는 태양, 달 등 자연을 숭배하는 다신론(多神論)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것이고, 이는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더욱이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자는 인간을 신들의 심부름꾼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신들은 해마다 새해 첫날 모여 인간의 운명을 정하였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자유와 항구적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하나님은 비옥한 땅의 문화에 젖은 아브라함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 서쪽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 의존의 지형이다. 이른 비 늦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불모의 땅인 사막이 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출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이집트의 나일강이나 메소포타미아유역과 같이 수확이 넘쳐흐르는 곳이 아닌 상대적으로 척박한 험지였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경험한 사막은 그들의 생활에 형이상학적인 큰 의미를 가지며, 그들의 모든 가치평가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제 이런 환경의 문제를 우리 공동체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가 있는 곳은 저들이 누리는 풍요한 농경문화의 안락한 공간이 아니다. 우리는 유목민에 속한다. 언제 장막을 걷고 새로운 땅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목민은, 정착 농민이 그들이 속한 권위와 시스템에 속박되고 강제화되는 노예 상태를 참지 못하는, 자유인이다. 자유란 비싼 대가가 따른다.
아브라함과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의로운 사람이 아니었듯이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순종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갈데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40년의 광야 생활을 거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러 이스라엘왕국을 건설하기까지에는 구약성경 지면의 1/4이 가량이 할애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목표와 전선이 명확하였다. 농업사회의 복잡성과 상호의존성을 거부하고 자유를 얻게 되었지만, 이제 유목민의 정체성으로 어떻게 ‘회복하고 갱신할지’에 대한 방법론을 하나씩 만들어 가야 하는 일은 이전보다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 모두가 자기를 돌아보고 기도하며 지혜를 모으면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인도해주실 것으로 믿는다. 이를 위한 우리의 순례길에 한 번쯤 생각해보고 싶은 말은 이러하다.
급하게 서둘지 말고, 그러나 멈추어 서지는 말자 (勿急而不站)
가다가, 가다 보면, 가는 중에 알게 될 것이고 (之之之中知)
행하다가, 행하고 보면, 행하는 중에 이루리라 (行行行中成)
비고 : 성경의 방위(方位) 내용은 전혀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