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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시와글 스크랩 김달진문학관/ 시야, 놀자! 11 - 책자원고
시와사랑 추천 0 조회 18 09.03.25 07: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Name   김달진문학관
Subject   시야, 놀자! 11 - 책자원고
2008년 찾아가는 시인, 찾아오는 독자 프로그램
▷ 주최 : 진해시김달진문학관
▷ 주관 : (사)시사랑문화인협의회 경남지회
▷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인과 독자와의 만남·11
시야, 놀자!

초대시인 : 문인수 / 성선경
기획·사회 : 이서린(시인)

일시 : 2008년 12월 20일(토), 오후 3시
장소 : 진해시김달진문학관 세미나실

진해시김달진문학관

문 인 수
 
문인수(文仁洙)

1945. 6. 2 경북 성주 출생
1985. 1. 1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2006~2008 제 8대 대구시인협회장 역임
1996. 12. 30 제14회 대구문학상 수상
2000. 6. 6 제11회 김달진 문학상 수상
2003. 12. 20 제3회 노작문학상 수상
2006. 11. 16 금복문화예술상 수상
2006. 12. 제11회 시와시학상 수상
2007. 5. 2 제17회 편운문학상 수상
2007. 6. 7 제10회 한국가톨릭 문학상 수상
2007. 10. 26 제7회 미당문학상 수상
< 시집 >
뿔 (1992, 민음사)
홰치는 산 (1999, 만인사/2004, ‘천년의 시작’에서 재발간)
동강의 높은 새 (2000, 세계사)
쉬! (2006, 문학동네)
배꼽 (2008, 창작과 비평사)

 

파냄새

노점 아주머니가 지금 부지런히 대파를 다듬고 있다.
아주머니한테 아직 묻어있는 色이 잠시 입을 가리며
킬킬킬 웃으며 오늘도 펑퍼짐한 몸 한 무더기를 털썩
낳아 놓았다. 어둑살 아래, 좌판 위에 쑥 쑥 뽑아놓는 대파,
파는 벗겨져 하얗게 가지런히 깔리고
건반 같다. 그 옛날 어느 시골 초등학교 교실의 풍금소리가 날 것 같다는
내 생각 따위의 파껍질들은 아무렇게나 희끗희끗
언 길바닥에 나부끼고 들러붙고 밟히고 깨끗한,
毒한 파냄새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저 아주머니 속에는
더 많은 입김이, 긴 화차 같은 인생이 꽉 꽉 채워져
악물려 있을 것이다. 또한
아주머니의 오십대 중반을 시꺼먼 방한복에다 뚤뚤 뭉쳐
눌러 앉혀 놓았으니 낮은, 최종학력의 저 바닥은 사실
혹한이 돌보는 셈이다. 얼거나 썩지는 않겠다.

 

벽화

벽에, 시멘트 반죽을 바르는 조용한 사내가 있다.
벽이 꽤 넓어서 종일 걸리겠다. 사내의 전신이,
전심전력이 지금 오른 손에 몰려있다. 입 꽉 다문 사내의 깊은 속엔
저런 노하우가 두루마리처럼 길게 감겨있는 것이겠다.
흙손을 움직일 때마다 굵직한 선이
쟁깃날을 물고 깨어나는 싱싱한 밭고랑처럼
제 길 따라 시퍼렇게 풀려 나온다. 뭘 그리는 것인지,
일생을 기울여온 사내의 집중이 확산일로에 있다. 막막한
여백이 조금씩 움찔, 움찔, 물러난다.
작업복 등짝을 적시는 땀처럼
벽에 번지는, 벽을 먹어 들어가는 사내가 있다.

벽을 지우는, 혁신하는 사내가 있다.

벽에, 벽을 그리는 사내가 있다.

벽에, 다시 꽉 찬 벽에
飛階를 내려오는 사내의 고단한 그림자가 길게 그려졌다, 천천히
미끄러진다. 벽에 떠밀리는 사내가 있다. (창에,
석양의 길 건너편 장면이 그대로 액자 속에 담긴다.)
벽에, 마감재 같은 사내의 어둠이 서서히 발리고 있다.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 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 매려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폐가의 배꼽

이 외곽지 야산의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출퇴근하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끌고 온 탯줄 같은 거, 전에 없던 길 한 가닥이 삐뚤삐뚤 나고 있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마당의 소줏병들처럼 나뒹굴며 폭우 아래 지나갔다.
그 위를 뒤덮으며 풀들이 화염처럼 지나갔다.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여서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는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의 조롱박들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자꾸 힘껏 빠져 나온다.

 

꼭지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 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처럼 떨어져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앉아보소

--거, 앉아보소
늙은 여자가 강물 물 가까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망가진 채 엉거주춤 돌아온 사내더러 한 번 말했다. 꺼질 듯 낮게 말했다. 키가 껑충한, 그래서 그런 건지 낯짝 안 보이는, 아직도 허공에 매달려 떠돌고 있는 건지 낯짝 없는, 낯짝 없는 사내 더러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오랜 세월, 장터거리에서 혼자 국밥집을 해왔다.
저녁노을 그 아래 시뻘겋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러나 쿨럭쿨럭 뒤엉키는 물,

지금은 다만 긴 강.


홰치는 산

방올음산은 북벽으로 서 있다.
그 등덜미 시퍼렇게 얼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내 묵묵히 버티고 선

아버지, 엄동의 산협에 들어 갔다.
쩌렁쩌렁 참나무 장작 찍어 낸 아버지,
흰내 그 긴 물머리 몰고 온 것일까
첫 새벽 홰치는 소리 들었다.
집 뒤 동구 둑길 위에 아버지 우뚝 서 있고
여명 속에서 그렇게 방올음산 꼭대기 솟아올라
아, 붉새 아래로 천천히 어둠 가라앉을 때
그러니까, 이제 막 커다랗게 날개 접어 내리며
수탉, 마당으로 내려 서고
봄, 연두들녘 물안개 벗으며 눕다.


얼룩말 가죽

법원 앞 횡단보도 도색은 늘
새것처럼 엄연하다. 흑, 백, 흑, 백의 무늬가 얼룩말가죽, 호피 같다. 법이 실감난다. 이걸 깔고 앉으면 치외법권,
산적두목 같을까, 내 마음의 바닥도 때로 느닷없는 뿔처럼
험악한 수괴가 되고 싶다. 나는, 이 거대한 늑골 같은 데를 지날 때 마다 법에
덜커덕, 덜커덕 걸리는 느낌이다.
인간이 참 제풀에 얼룩덜룩한 것 같다.

저 할머니는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 신호등 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
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 들어선다.
강 건너듯 골똘하게 6차선 도로를 횡단해 간다. 흑, 백, 흑, 백,
생사의 숱한 기로가 이제
침침하게 미끄럽게 거의 다 지워져
정지선 앞에 선 사람들도 어떤 운전자도 그만
씨익 웃는다. 어려 보이는 한 교통경찰이 냉큼 쫓아가
할머니를 부축해 정성껏 마저 건너간다. 빨래판처럼 덜컹거리는 법감정이, 시꺼먼 길바닥이 문득 흰 젖 먹은 듯 고요히
풍금처럼 흐르는 저, 母法이 있다.

 

간통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그 여자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또 이녁은 샐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 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그 여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 왔다. 해 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 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다시 정선, 어떤 마을 앞에 서 있었네

비 뿌리네 어떤 마을 앞에 서 있네 이 깊은 골짜기 거대한 귓속 같네 큰길에서 가지치고 가지친 샛길, 길 끝엔 한 채씩 집 매달렸네 찌든 허파꽈리 같네 발등에다가 이 마을을 얹고 있는 뒤엣산 몹시 험하네 비안개에 가려 다 보이지는 않지만 높겠네 더러는 팔 뻗어 밀쳤음직도 한 앞엣산, 그러나 끄덕않았을 앞엣산, 그래서 또 호미 걸고 기어오른 비알밭 감자꽃 핀 앞엣산, 앞엣산 더 험하네 더 높겠네 다만 물소리 물소리 빠져나가네 저 물소리 다 닳아 빠지겠네 닳지 않겠네


동강에서 울다

동강은 대뜸 말문을 막는다.
어이없다, 참 여러 굽이 말문을 막는다.
가슴 한복판을 뻐개며 비스듬히 빠져나가는
저기 내려 꽃피고 싶은 기슭이 너무 많다.
몸이 먼 곳,
인생이 저렇듯 아름다울 수 있었겠으나
어떤 죄가 모르고 자꾸 버렸으리라
늙은 사내는 엎드려 산 첩첩울고
물길은 산에 막히지 않고 간다.


먹구름 본다
- 인도소풍

새벽 차가운 거리에
人道 여기 저기에 웬 누더기 이불들이 시꺼멓게,
뭉게뭉게 널려 있습니다.

저 한 군데
이불자락이 자꾸 꼼지락거리더니 아,
젖먹이 아기 하나가 앙금앙금 기어 나오는군요.
노란 물똥을 조금 쨀겨 놓고
제 자리로 얼른 기어듭니다.

너무도 참 자발적 동작이어서
‘서식’이란 말이 뇌리에
거미처럼 달라붙었다 퍼뜩 떨어집니다.

아기가 단숨에 기어든 이 바닥은 사실
이역만리 보다 멀어서
그 어떤 여행으로도 나는 가 닿을 수 없고요,
멀어서인지 잠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굴곡을 안에서 묶는 오랜 이불속 사정이
그나마 한 자루 그득하게 꿈틀거리며
먹구름, 먹구름 흘러갑니다.


빨래궁전
-인도소풍

야므나강변 작은 촌락 한 움막집에, 그 집 빨랫줄 위로 옛날 옛적 사랑 많이 받은 왕비의 화려한 무덤, 타즈마할 궁전이 원경으로 보입니다. 궁의 둥근 지붕이 거대한 비누방울처럼, 분홍 엷은 나비처럼 아련하게 사뿐 얹혀 있고요 빨래가, 원색의 낡고 초라한 옷가지들이 젖어 축 처진 채 널려 있습니다.

족보에도 없는, 이 무슨 경계일까요. 오색 대리석으로 지어 졌으나 죽음은 그 어떤 역사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이 가볍고 가벼워서 짐이 없는데요, 삶이란 또 몇 벌의 누더기에도 당장 저토록 고단하고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때,

어린 새댁이 하얗게 웃으며 얼른 움막 속으로 숨어 버렸는데요, 개똥밭에 굴러도 역시 이승에 땡깁니다. 오래 내 마음을 끄는 그녀의 남루한 빨래궁전 쪽, 저 검고 깊은 눈이 전적으로 아름답습니다.

 

 

김달진 문학관시야 놀자/성 선 경

 

 



성선경 /
1960년 경남 창녕 출생
1988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바둑론’ 당선, 등단
1991년 <문청>동인 결성
1993년 시집『널뛰는 직녀에게』출판
2001년 시집『옛사랑을 읽다』출판
2003년 시집『서른 살의 박봉씨』출판
-한국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선정
2005년 마산시 문화상 수상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2006년 시집『몽유도원을 사다』출판
-한국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선정
2008년 시집『모란으로 가는 길』출판
2008년 김달진문학제 월하지역문학상 수상
2008년 경남문학상 수상
현재 반년간 시전문지『서정과 현실』편집 주간
현재 마산무학여자고등학교 교사

 



어머니
나는 죽어서 소가 되고 싶습니다
푸우푸우 거친 숨을 내뿜으며
이 나라의 크나큰 어머니의 들녘을
젖가슴같이 부드럽게 갈아 일구어
푸르디푸른 보리밭을 가꾸는
튼튼한 농우소가 되고 싶습니다
은혜로운 이 땅의 일꾼이 되어서
푸른 싹을 위하여 쟁기날을 끌다가
저 한 몸으로 이 땅을 다 일구지 못하면
죽어서 북이라도 되어
잠 깨어라 잠 깨어라
삼천리 둥둥 가슴을 울리는
소가 되고 싶습니다 어머니.


바둑론

우리가 스스름없이 우리라고 부를 때
바둑을 두자, 아우여 돌싸움을 하자
생나무 자라는 소리 쩡쩡한
남녘의 아랫도리 그 어디쯤에서
청동(靑銅)빛 말씀이 내리던
백두(白頭)의 천지(天池) 그곳까지
날줄과 씨줄의 모눈을 메우며
우리들의 날들이 오로지 나아가야 할
길닦음을 해 보자.
때로는 우리가 지켜야 할 약속과
산수문제처럼 부대껴야 할
어려운 숙제를 풀어가면서
내가 온 봄날의 잡꽃을 피우며
단발령, 추자령 숨가쁘게 치올라갈 때
너는 또 대둔산, 멸악(滅惡)을 넘어
잘 익은 가을의 단풍잎 물들이기로
그렇게 내려오라.
큰 강물이 양수리에서 만나듯
휘휘 휘둘러 강강수월래같은
돌싸움을 붙여 보자, 고싸움을 해 보자.
세상의 비어 있는 자리를 서로 메우며
한 상 가득 고봉밥을 마주할 수 있다면
꼬이고 꼬여서 만두속 같은 세상도
또 한 판 훌륭한 그림그리기 아니냐.
흑이다 백이다 온 들에 모눈을 메우며
삼천리 화려강산 모자이크를 그려도
우리가 풀어야 할 숙취(宿醉) 같은 것
시원히 아침의 해장을 하지 않으면
언제 저 넉넉한 태평양 대서양
우리의 집 한 번 만들어 보겠느냐.
우리가 우리라고 스스럼없이 부를 때
스스로 셈하여 볼 내일도 있는 것
큰 강물이 양수리에서 만나듯
휘휘 휘둘러 강강수월래같은
돌싸움을 붙여 보자, 고싸움을 해 보자.


개구리를 보았나

내쳐라
비 오는 날 우산도 없는데
연닢에 싼 밥 한 덩이 없는데
어쩌지 혹시 무논에 돌멩이 던져 넣듯
우박이라도 내리면
움쳐 뛰지도 못하고
얘야 감기 들겠다 어쩌지

개구리 밥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기침하듯 가을이면 좋겠는데
올챙이는 다 개구리가 된다면
진땀 흘리듯 단풍이 들어도 좋은데
아주 생이빨 앓듯 노을이 져도 괜찮은데
잘도 피하다 뒷굼치를 물린듯
폴짝 폴짝 아주 낙엽이 되면 어때
전율하듯 압핀에 꽃혀
알코올에 젖으면 또 어때
개구리가 개구리로서 개구리가 된다면

나는
냄비안에서 고요히 끓고 있었습니다.
온도에 몸 맡기며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개뿔은 없다.

소만도 못하다고
개만도 못하다고
쥐나
저 달팽이만도 못하다고
개뿔도 없다고

원래 없는 것들도 없어서는 안된다고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보이지않는 마음에도 못을 박네

나는 왜 뿔이 없는가.멍멍 짖지도 못하는 뿔이 없었으므로 소같이 들이받는 말들에 늘 상처를 입으며 오뉴월 게장같이 소금에 절어 나는 왜 뿔이 없는가.집게같은 가위손같은 엄발같은 뿔이 나는 왜 없는가.못된 송아지 같이.

뿔은 늘 보이지않는 곳에서 나를 쥐어박고
뿔은 늘 길을 앞질러 와서 나를 가로막고
뿔은 늘 내 반대 편에 서서 나를 비웃으며

이제 원래 없는 것들조차 없어서는 안된다고 내게는 아주 금지된 것들도 엄발같이 슬금슬금 다가와

정수리에서
등 뒤에서
엉덩짝에서
혀 끝에서 빛나는
뿔.

 

서른 살의 박봉씨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괴롭다-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괴롭다
봉급날이 가까운 하오
-오랫만이군 친구-
가볍게 어깨를 짚으며 걸려오는
전화는 두렵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_
짤랑짤랑 토큰 소리를 내며
-아하! 만나야지 그럼-
가볍게 약속은 하여도
짧은 소매의 가을빛에 내보이는
-그럼, 거기서 만나세 허허!-
빈약한 웃음은 괴롭다
찻값을 내어야할 적당한 시간이 오면
종종 구두끈이 풀리고
술집을 나설 때쯤이면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이런 날의 만남은 두렵다
-저런, 계산은 내가 할텐데-
벌써 친구는 저만큼 앞서 가고
-다음에는 내가 냄세-
정말,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괴롭다.

 

찬 밥

아이를 가지고 입맛이 없다는
아내를 위하여 찬밥 한 그릇을 말아
멸치 몇 마리와 함께 들여온 나는
온갖 너스레를 다 뜬다
내 유년의 고향 얘기며
풋고추며 양파며 된장이며
마늘종다리 장아찌까지 들먹이며
이 여름 쉬말은 찬밥 한 덩이가 얼마나 맛나는 별미인지를

그러나 아내여
눈웃음 치며 게눈 감추듯
찬밥 한 그릇을 먹어치우며 생각해보면
찬밥이 어찌 밥이 차다는 뜻 뿐이랴
내가 세상에 나와 오로지 굽실거리며
아양떨며 내 받아온 눈치며 수모
그 모두 찬밥인 것을

아내는 아직도 입맛을 다시며
재미있다고 깔깔거리고 박수를 치고
제가 배웠던 고등학교 교과서 그 낭만적인
김소운과 가난한 날의 행복 한 구절을 떠올리며
정말, 우리는 늙어서 할 얘기꺼리가 많겠다고
스스로 결론까지 짓는 아내 앞에서 더욱
너스레를 떨며 아양을 떠는 나는 누구냐.

가랑비 촉촉히 속으로 젖어드는
찬밥 한 그릇.


몽유도원을 사다

백화점에 들렀다 복숭아통조림 한 박스를 샀다.
이 복숭아 철에 웬 통조림이냐는 아내의 핀잔을 들으며
내 마음의 무릉도원 한 세트를 들고 신이 났다.

아홉 살이던가 열 살.
나는 홍역을 앓아 펄펄 열이 끓고
사흘 동안 미음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어머니는 설탕물을 끓여 숟가락으로 떠먹이고
먹는 쪽쪽 나는 게워내고

할머니 이러다 우리 장손 큰일 나겠다고
쌀됫박을 퍼다 주고 사 오신 복숭아통조림
나는 꿈결인가 잠결인가 언뜻언뜻 도원(桃園)을 거닐며
따먹은 기억이 생생한 부귀복록의 천도(天桃) 복숭아

아내는 한참동안 제 철 과일이야기로 바가지를 긁고
나는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 생각에 미리 즐겁고

나는 몽유도원 한 세트를 샀다.


장진주사(將進酒辭)

살구꽃 피면 한 잔하고 복숭아꽃 피면 한 잔하고 애잔하기가 첫사랑 옷자락 같은 진달래 피면 한 잔하고 명자꽃 피면 이사 간 옆집 명자 생각난다고 한 잔하고 세모시 적삼에 연적 같은 저 젖 봐라 목련이 핀다고 한 잔하고 진다고 한 잔하고 삼백예순날의 기다림 끝에 영랑의 모란이 진다고 한 잔하고 남도(南道)의 뱃사공 입맛에 도다리 맛 들면 한 잔하고 봄 다 갔다고 한 잔하고 여름 온다 한 잔하고 초복 다름 한다고 한 잔하고 삼복 지난다고 한 잔하고 국화꽃 피면 한 잔하고 기울고 스러짐이 제 마음 같다고 한가위 달 보고 한 잔하고 단풍 보러 간다고 한 잔하고 개천(開天)은 개벽(開闢)이라 하늘 열린다고 한잔하고 입동(立冬) 소설(小雪)에 첫눈 온다고 한 잔하고 아직도 나는 젊다고 한 잔하고 아랫목에 뒹굴다 옛시(詩)를 읽으며 한 잔하고 신명(神明) 대접한다고 한 잔하고 나이 한살 더 먹었다고 한 잔하고 또 한 잔하고 그런데

그런데
우리 이렇게 상갓집에서나 만나야 쓰겠냐고
선배님께 꾸중 들으며 한 잔하고

아직도 꽃 보면 반갑고
잔 잡으니 웃음 난다고
반 너머 기울어진 절름발이 하현달.


여기 모란

웬만하면 한 번 돌아보지 그래, 웬만하면 한 걸음 멈추고 뒤돌아보지 그래, 가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 저 폭포도 단오하게 휙 떨어져 내리기 전 한 번쯤 멈칫하듯이 웬만하면 한 번 되돌아보지 그래, 잠시 할 말을 잊었을 때 머리칼을 쓸어 올리듯이, 봄이 이미 왔더라도 이 추위 잊지 말라고 꽃샘의 바람이 불듯이.

웬만하면 한 번 웃어주지 그래, 저 악보가 오선지를 떠나 음악이 될 때 소리통을 한 번 쿵 울리고 떠나는 것처럼 웬만하면 한 번 웃어주지 그래, 이미 꽃이 진 자리에도 슬쩍 배추흰나비가 잠시 쉬었다 가듯이 웬만하면 웃어주지 그래, 잠시 구두끈을 고쳐 매듯이.

영영 고개를 돌린 이여
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대여
웬만하면
참 웬만하면.


모란으로 가는 길

모란에 들기 전에는 안개같이 모란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없다 모란은 안개처럼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리움 순식간에 모여 든다 개미들이 줄을 지어 법칙처럼 길을 만들 듯 단내 나는 여름 연닢의 소나기같이 갑자기 모란에 이르기도 하지만 모란에 들기 전에는 모란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욱고 굽어서 아주 신기루같이 결코 모란에 이르지 못하리라 멀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 가까이에서 큰 산봉우리로 큰 바다로 피어있다 개벽(開闢)같이 눈 깜짝 할 사이 닿기도 한다 모란에서는 아무도 비밀(秘密)처럼 모란을 말하지 않지만 모란을 모르는 눈과 귀는 어디에도 없다 때로는 숨소리처럼 내 안에 들었다 때로는 기침처럼 나를 튕겨내는 저 모란에 이르는 길.

나 지금 어디까지 왔나 물으면
눈꺼풀 앞의 산 하나가 또 산 하나를 데리고 와
당당 멀었다 당당 멀었다고
산이 무너지는 소리
강이 넘치는 소리
내 안의 두문동(杜門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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