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충무공 이순신께서 학익진을 창안해 왜적을 박살냈다!! 라고 알고 있고.. 이순신께서 매번 학익진을 썼고.. 그 전엔 학익진이란게 없었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과거 저도 그런걸 교육이랍시고 듣고 자랐죠.)
그런데.. 사실은 좀 틀리죠.
충무공 이순신께서 학익진을 사용한건.. 한산도 해전에서 와키자키 야스하루의 함대 80여척을 상대하면서 였습니다.
그것도.. 좁은 해역에서가 아닌.. 한산도 앞바다라는 상당히 넓은 곳에서 였죠.
그런데.. 학익진의 경우. .아주 역사가 오래 된 진형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학익진이란 건..
군의 전력을 삼등분 하여..
좌군과 우군으로 적을 압박하고 예비대를 중군으로 둔 후에..
적을 포위/섬멸하는 모든 진형을 말하는 겁니다.(일종의 삼재진이라 해야 하나? )
삼국지에서 쓰인 예를 들지 안더라도... 그 이전 저쪽.. 유럽쪽에서도 쓰인적이 있었죠(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사용한 초승달형 진형도.. 넓게 보면 학익진과 거의 유사한 전술이니까요)
충무공께선 이 학익진을 이용해... 일본군을 포위 섬멸한 전투가... 임진왜란중의 조기 휴전을 이끌어 내게 되었기에... 3대 해전으로 이름이 남게 된거죠.
(그 이후로.. 일본애들중에 조선수군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벌이려 드는 미친 인간들은 나타나질 안았고.. 도요토미 역시.. "조선수군 보면 그냥 도망쳐라." 라고 공식적으로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사실 나같았어도.. 그렇게 당하고 나면 싸울 맘이 사라지겠죠..)
그리고.. 충무공께서 가장 많이 사용한 전술은...
좁은 해역에 함대를 일자로 편성해..
적 함대를 향해 일제 발사를 통한 선두 그룹함대의 전멸...
그리고 그 이후에 돌격하는 전투함들에 대한 제차 사격을 통한 섬멸이 주종이었습니다.
좁은 해역을 벗어나 외해로 돌아서 가면 된다.. 라 주장하는 골빈 작자들도 많았지만..
그 당시 일본이나. 우리나.. 중국이나.. 제대로된 외해에서의 항해술을 보유하지 못했기에..
불가능 했습니다.(만일 일본이 제대로된 외해 항해술을 지니고 있었다면..충무공의 함대가 아무리 판옥선을 이용한 거함거포 전략을 사용한다 해도.
그 당시 조선이란 국가를 일본의 침략에서 막아낼 방법따윈.. 없었을 껍니다.
하지만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 한가지.. 조선의 배나.. 일본의 배나.. 모두 대양 작전력은 없었어도.. 외해에서의 항해능력은 충분했었다는 점이죠. 다만.. 두 국가 모두 부족했던 건 외해에서의 항해술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당시 왜군의 가장큰 주적은.. 조선군이나 조선수군.. 그리고 명군이 아니라.. 보급품의 부족이었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군은 육군에 대해 육로 수송이 아닌 해상 수송을 통해 보급을 시도하고.. 또한 서울에 대한 함대 전력을 동원한 상륙전을 결심했었지만... 그 시도를 정면에서 막아낸 정도가 아니라 오는 족족 다 때려 부순 인물이 바로 충무공의 조선 수군이었죠.
그 결과 일본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보급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고..나중엔 싸우다 죽는 병력보다 굶어 죽고 얼어 죽는 병력이 더 많아져.. 가토 요시카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제발좀 싸우다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결국.. 조선이란 국가를 지킨건.. 충무공의 조선 수군이었던 겁니다.
이 결과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그 당시 평판은.. 너무나 높아 지게 되죠.
그 결과 선조가 위기를 느껴...
충무공을 제거하려 했었던 거구요.
실제 정유년 1597년 2월말.. 이순신께서 통제사에서 물러나고 압송되자.. 한산도의 모든 군민들이 울었다 하고.. 옥고를 치루며 다 죽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산도 뿐 아니라 전라도와 충청도의 많은 사람들이 실의에 빠져 쌀로 술을 빛고 농사 지을 소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전쟁중에 무슨 술이며 잔치냐..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정유년이전.. 2년 간 풍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한 상황은.. 절대 아니었던 겁니다.
군 병력중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던건.. 그 식량을 수송할 방법이 마땅치 안았기 때문이었죠. (대충.. 생산지와 소비지의 불균형.. 때문이라 해두죠)
이에 왕이 명령을 내려 백성들의 사치 풍조를 없애라? 하는 명령을 직접 내리지만.. 국민들은 듣지를 안았다 합니다.
그들에게 조선수군은 바로 충무공과 동일했고..
그가 사라진 이상 미래란 없다.. 라고 생각 했다 하네요(조명환의 난중잡록에서 발췌, 조명환이란 분은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정유년에 활동했던 분중 한명입니다.)
첫댓글 하지만 전력에서 동등하거나 약간우세에있지않은체 학익전을 펼침 그전에 도쿠가와이예야스가 다케다신켄과의 학인진서처럼 개박살날수도잇어요...
잘 읽었습니다.
러일전쟁때 일본군이 학인진과 비스무레한 전술을 써 이겼다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