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인>, 2024년 가을겨울호.
회색인
맹문재
1
만 원짜리 한 장이 떡처럼 들어왔다
그냥 두면 바람에 날려 길가 풀숲에서 썩고 말 것이라고
집어 들었다
경찰서에 신고하는 것을 미루고
주머니에 넣었다
나도 길에 떨어진 돈을 주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2
어느 강연에서 우리 사회에 떠도는 빨갱이라는 말은
바이러스 같다고 했다가
당신이 빨갱이라는 조롱을 청중으로부터 들었다
목소리를 높여 그를 휴지로 만들고
강연장을 박차고 나와야 했는데
나는 노을빛으로 웃었다
3
나는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울타리를 무너뜨린 나무들의 침묵을 듣고
출발하려는 차들의 길을 연다
새벽을 마시고 남은 물을 부어
국을 끓이고
화초를 보살핀다
아끼는 화분을 누가 가져가면 원망하다가
인연이라고 허락한다
그런 날은 구름 위에 꽃들의 얼굴을 얹고
새소리를 양식처럼 듣고
사과를 쪼개 새들에게 건넨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도 한참 바라본다
4
서명해서 보낸 나의 책이 헌책방에서 뒹구는 것을 보았다
나를 찌르는 악의에 서명한 시인을 만났다
나는 동지라고 믿었지만
그들은 나를 믿지 않았다
그들의 기준에 나의 힘은 부족했다
선택되지 못한 나의 힘은 내가 믿은 데서 나오지 않았다
시대도 세력이 되지 못했다
새로운 선택이 어쩔 수 없는 역사다
회색인의 웃음은 지혜가 아니다
실용이 아니다
도피가 아니다
전향이 아니다
나는 주머니에 넣은 돈을 꺼내지 않을 것이다
약력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사북 골목에서』『기룬 어린 양들』『사과를 내밀다』『책이 무거운 이유』 등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