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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2004년 1월 4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1-9
13: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13: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13:4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13: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나는 내가 지킨다"라는 방식은 오기에 불과합니다. 어느 인간치고 오기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심지어 노숙자들에게 오기로 똘똘 뭉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일을 이런 오기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실시 하십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인간들의 생각하는 바가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각자 마음 속에 새로운 각오와 오기로 말씀을 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 말씀만 하옵소서. 제가 그 말씀대로 잘 지켜서 반드시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는 결심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엄청 오해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그 뒤에 긴긴 말씀의 내력과 배경이 깔려 있는 상태에서 하십니다.
즉 마태복음 13장에 이를 때까지 그 전에 예레미야가 있었고, 이사야도 있었고. 다윗과 모세 시절도 있었고 그리고 창세기 시절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지금 이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때부터 줄기차게 내려오는 그 일관성에 준해서 비유의 말씀을 하시기에, 이런 예수님 앞에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반드시 내가 지켜내어서 구원에 이르게 해야지"라고 마음 먹는 것은 너무나도 예수님의 마음과 다른 태도입니다.
마태복음 13:11에 보면,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오기와 각오를 충족시키는 말씀이라면 결코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정답은 이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과 오기를 부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전혀 그 장단에 맞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하실까요? 여러분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빛과 빗물이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내리십니다. 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관계없이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은혜성이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와의 맺은 약속으로 인해서 주어집니다. 바로 이 일방적 은혜성과 동일하게 마지막 최후의 심판을 통과하는 것도 오직 은혜를 입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오기와 신념으로 뭉쳐져서 산다고해서 심판에서 통과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예수님은 이런 은혜성 노선 밖으로 이탈하여 일하시지 않습니다. 즉 누구나 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를 준 자에게만 은혜를 알게 하시는 방식으로만 인간들을 구원하십니다.
물론 이러한 취지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리둥절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기본 선입견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자기 잘못을 분명히 알았습니까 아니면 몰랐습니까? 분명히 아담과 하와는 자기 잘못을 시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안쫓겨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추방되었습니다. 우리네 상식같으면, 하나님은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뭐든지 원상회복시켜 주는 자비로운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가차없이 아담과 하와를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위주로 움직이지 결코 인간 위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 위주로, 인간을 절대시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의의와 가치를 절대시하기 위한 조치로서 인간들 만드신 겁니다.
에덴동산은 결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혼수품이 아니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취지를 위하여 만든 동산이었기에 그 안에 죽음의 선악과도 함께 있었고 아예 동산 한가운데를 자리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란 은혜없이는 존재할 가치가 아예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앞으로 천국에 들어가야 될 자에게도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순수하게 은혜로만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라는 의식은 도저히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책임감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인간이란 애초부터 '자기 것'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분이 저에게 이런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개척교회하는데 힘드시지요?"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소리를 듣고 너무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란,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그것으로 전부를 다 얻은 것이고 그 즐거움과 행복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개척교회 때문에 힘든다고 느끼는 것은 곧, '자기 것'이 따로 있다는 말이 되고 이것은, '내 것의 인생은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하지 않느냐"라는 식의 사고방식에 불과합니다.
이런 자는 구원되지 못할 자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만 구원시키십니다. 마치 비와 햇빛이 우리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쏟아지듯이 말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예상치도 않는 사고와 병으로 고생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병실에서 저쪽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있노라면 은근히 화가 치밀게 마련입니다. 자기보다 더 나쁘고 악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은 저토록 건강하며 활기차게 살아가는데,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보려고 애쓰는 자기 자신은 왜 이처럼 악한 상황 속에서 헤매는지를 생각해 볼 때 부화가 치밀어오를 것입니다.
구약 욥기에 보면 욥이 이런 경우를 당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줄기차게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 광야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요. 텃밭도 없는 곳입니다. 짐승도 없는 곳입니다. 우리 인간들 눈으로 볼 때에 하나님은 정말 쓸데없는 곳에 비를 내리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허비하는 듯한 은혜, 즉 광야같이 아무 짝도 소용없는 우리 자신들에게 비내리는 심정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은혜를 입은 자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광야보다 더 무가치한 것이 우리 자신인 것을 아는 자만이 천국 백성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직 천국을 허락 받은 은혜받은 자를 골라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귀있는 자 들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러분 만약 들을 귀없다고 여겨봅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일반적인 농사짓는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비유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나는 경우를 하나 그냥 채택한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다시 보게 되면,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입니다.
자... 여러분들은 어떤 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까? 네 가지의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 농사에 대해서 상식선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하게 됩니다. 우선 우리들이나 그 당시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농사철에 어떤 결과들이 여러 가지로 나올 것인가에 대해서 먼저 예수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예수님, 어떻게 하면 농사 잘지을 수 있어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느냐 말입니다. 분명코 없습니다. 이처럼 아무도 예수님에 대해서 농사에 관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불쑥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언급을 하셨다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반응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란 말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이미 인간들이 천국에 대해서 먼저 물어볼 그 어떤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45:15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구원자'라고 하나님을 소개하면서도 그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숨어시는 형태로 구원을 하신다는 겁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뿐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구원에 환장해서 구원자나 하나님을 찾아다닌다 할지라고 구원은 어림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들을 귀도 없는데 무슨 수로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따라서 비유 자체를 분해하면서 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결실이 맺혀야 될 자에게만 이해가 되는 식으로 예수님의 비유는 전개되는 겁니다.
어떠한 인간의 노력도 가미되지 않는 겁니다. 단순히 이미 옥토로 지정받았기에 그냥 예수님에 은혜에 의해서 열매가 맺힐 뿐인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쉽고 편하게 들리는 사람은 자기 오기를 포기한 사람이요 곧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은혜받은 자격이 애초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이런 본인에게 광야에 비내려주듯이 영생을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비유에 대한 해석
2004년 1월 11일
마태복음 13:11-17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으심부터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뭐가 나올까요? 옛말에, '한국사람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할 때, 사람들은 잔뜩 기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서 나올 게 뭔가는 아예 따져 보지도 않고 무조건 얻을 것은 일단 챙겨보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원래 구경꾼들이 모여들 때는 이유없이 그냥 모여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한 소문이 들면, 그분이 직접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감안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라면 일단 갖고 보자는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빼앗으려 오신 분입니다. 소위 믿음이라는 것을 빼앗으려 오신 분입니다. 천국에 대한 믿음을 점검하려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믿음이 있는 자는 더욱 더 많이 받게 되고 천국에 대한 바른 믿음도 아니면서 믿음이 있다고 우기는 자는 그 엉터리 믿음까지 도로 폐기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빼앗길 수 밖에 없는 신앙을 소유한 자들입니까? 현대인들은 스스로 서려는 자들입니다. 교회와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배워서는 그 배운 지식으로 이제는 자기 손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지탱하려는 방도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저도 이제 복음에 대해서, 천국이 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습니다. 정말 이제부터는 제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신앙관과 천국관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바입니다.
지옥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그 누구도 지옥에 들어갈 수 없듯이 천국도 같은 원리입니다. 마치 엄마의 손에 이끌리어 횡단보도를 건너는 어린 아이의 경우와 같습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 한테 장담합니다. "엄마, 나 저 신호등의 신호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제 알아. 빨간불은 건너가지 말라는 것이고 파란 불은 건너가라는 신호래. 엄마 이제 나는 엄마 손목에 안잡혀도 나 힘으로 건너갈 것 같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갈 때까지 그 아이는 엄마에게 단단히 손목이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틈만 나면 자립하려고 하고 독립하고 독자적으로 자기 인생을 본인이 책임지려고 합니다.
인간이 독자적으로 봐서 얼마나 선한가 악한가를 가지고 그 인간의 가치가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선함은 독자적인 자질이 아니라 누가 그 인간의 손목을 꽉 잡고 있는가 여부와 그분과의 관계성 문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 붙잡힌 바가 되지 않는 천국과 신앙은 하늘에서 원하시는 그 천국과 신앙이 전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천국의 비밀'입니다. 보통 천국이라고 우리가 연상하기에는 그냥 하늘에 존재해 있는 그 '무엇'으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제게 어릴 때 별명이 있습니다. '건들바위'입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건들건들 거린다고 해서 집안 어른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집안 어른들 입장에서 저를 보기에 피곤했겠지요. 가만히 존재해 있어야지만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어 저를 관찰할 수 있는데, 자꾸 건들거리니까 정확하게 저를 관찰할 수가 없는거지요.
즉 변화나 운동이 없이 그냥 마냥 동일한 상태도 정지되어 있다면 정확히 그 내막과 실체를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참 변화도중에 있는 사물은 뭐가 뭔지 정확하게 포착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천국이 하늘에 그냥 고정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마치 마당에서 옥상에 있는 물탱크를 쳐다보듯이 쳐다 봄의 대상으로 고정되어 있기를 바라는 거지요. 그런데 만약 그 물탱크가 미쳐 환장을 해서 옥상에 가만히 있지않고 갑가지 마당으로 내려와서 개집에도 들어갔다가, 헛간에서 굴려다니면서 온갖 것에 다 받혀서 유리창도 깨고, 정원의 꽃나무 가지도 부러지게 만들고, 안방을 진흙 진창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혼잡을 한껏 떨고 난 뒤 물탱크가 옥상 위에 도로 올라가면서 말하기를 "네들이 물탱크를 알아?"라고 한다면 아마 기가 찰 것입니다. 고정된 물탱크가 아니라 움직이는 물탱크를 사람들이 감히 상상치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가운데 물탱크가 사납게 부산을 떨고 돌아다녔으니 사람들의 뇌리 속에 물탱크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이 천국이라는 것이 평소에 사람들이 생각한 그 '좋은 나라 이미지'로서의 천국이 아니라 한참 활동 중인 천국이라는 겁니다. 어떤 활동을 펼치는데요? 바로 사람들의 천국관을 헤집고 다니시면서 모조리 다 부숴놓는 그런 천국으로서의 활동을 뿜어내는 천국입니다.
즉 천국은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의 완전품으로 다 만들어놓고서는 사람들 앞에서 세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 그 자체를 천국의 실상으로 받아줄 수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0-21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은 현재 인간들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상치도 못하는 참으로 약하고 쓸모없고 불편하고 귀찮기만 한 천국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왜 그 귀한 씨가 허비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알려줍니다.
즉 씨를 인간 세상의 죄악으로 인해 허비되고 손해보는 것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점을 보여주면서 등장하는 천국의 비밀에 대해 소개하시는 겁니다. 천국이 마치 이 땅에서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모습으로 등장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들이 적극적으로 천국을 탈환하기 위하여 악마로부터 사주를 받고 있다는 그 현실성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은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소개하는 천국 활동을 저지하고 있는 세력에 의해서 장악당하고 있는 형편인데 예수님의 비유는 이 세상 형편을 정죄하는 양상으로 우리 인간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에게 있어 최종 목표는 엄청난 수확입니다. 그런데 그 수확에 있어 땅의 그 어떠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달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관에 대해서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대처하려고 합니까?
인간들은 스스로의 귀와 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즉 악마의 시험과 유혹을 스스로 감시해 대처하고 천국의 씨앗을 안 빼앗기려고 하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도 스스로의 인내성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또한 세상의 그 많은 유혹도 스스로의 절제력으로 뿌리 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천국의 비밀에 의해서 제거당하고 빼앗기게 될 수 밖에 없는 엉터리 믿음입니다. 천국의 활약상은 곧 예수님 혼자만의 활약상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 엉터리 천국과 구원노력에 열중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들의 헛된 노고에 대해서 사정없이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 이사야 예언의 성취는 예수님 손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정죄할 수 있는 근거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비유를 들고 나왔고, 그것이 시발이 되어 결국에는 예수님의 자신의 목숨이 십자가에서 없어지는 경우로서 이 세상의 부질없음을 고발하려 합니다.
바로 이러한 활동 전체가 곧 천국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 16-17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 눈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무엇을 보고자했으며 무엇을 듣고자 했습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하나님의 참된 천국 활동을 보고자 했고 듣고자 했습니다. 인간들의 그동안 모든 수고를 무용지물을 만들어 버리는 그런 관점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아무런 희생도 없이 순전히 천국 자체의 활동으로 인해 천국이 드러나고 나타내는 그 현장을 보고자 했으며 듣고자 한 것입니다. 이 이사야 예언의 말씀은, '어떤 인간이 구원받느냐'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구원하느냐?'에 초점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러 이러한 인간들이 구원된다'는 식으로 나오면, 너도 나도 그 인간 흉내내기에 분주할 것입니다. 구원이란 우리 쪽에서 출발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순전히 예수님의 허락만이 가능한 사항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허락'이 유효하려면 인간들 쪽에서 시도하는 모든 노력과 노고를 하나님께서 나서서 무(無로) 돌리고 차단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우리 인간이 죽든지 살든지 상관두지 않고 그저 옥토에 뿌리진 씨앗처럼 거대한 결실을 맺는 그러한 옥토의 위력을 볼 날을 선지자는 애타게 고대했습니다. 누가 옥토인지 아닌지를 천국의 씨가 떨어져 봐야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누가 옥토가 아닌지도 씨를 던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넘어질 자는 넘어지고 반항하고 대들자는 대들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 자체가 곧 천국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을 언제나 느낄 수 있음을 절실하게 고맙고 감사하게 여기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네 종류의 밭
2004년 1월 18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18-23
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합격이란 참 좋은 경우를 말합니다. 대학 입시에 합격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합격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대한 합격입니다. 천국의 합격자는 어떻게해서 배출될까요?
우선 천국이 어떠하길래 모든 인간이 다 천국에 합격자가 될 수 없는가 하는 점부터 알아두셔야 합니다. 천국은 유대 나라가 먼저 학수고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옛날 다윗의 영화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같은 위대한 왕을 보내셔서 이 세상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리라는 희망과 소망을 그들은 한시도 포기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분명히 모르기에 그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선지자들을 보내주시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웬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선지자의 외치는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3: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심인지 아니면 기대감인지 모르지만 세례 요한의 말에 일단 동의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를 대비해서 미리 죄까지 씻는 의식인 물세례를 선지자 세례 요한의 손에 맡겨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오신다는 메시야의 몰골은 그들을 실망시키기에 넉넉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줄 선물 보따리도 없었습니다.
그저 "나만 믿으라, 나만 따라오너라"라는 투였습니다. 물론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소문의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그러나 그런 스캔들을 이르킨 자가 한 둘이 아니기에 과연 참된 선지나냐 메시야냐 하는 바는 율법에 정통한 성직자들의 유권해석에 달린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의 권위는 역시 여전히 유대 성직자 그룹에다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린 평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유대 성직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배겨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그 당시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여지간 하면 예수라는 작자도 고집 그만 부리고 성직자들과 타협의 손을 잡아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그런 의사가 있었을까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로 나섭니다. '당신네들은 마귀 자손이요"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그 이상의 내용을 본 비유는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 약속되어진 구원될 자는 오직 '남은 자'에 국한된다는 이 원리를 예수님을 유감없이 그 시대에 적용시키고자 하시는 겁니다.
'남은 자'란 이사야에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대부분이 구원의 자리에 탈락되어지는 현상을 두고 말합니다. 즉 천국문에서 서성이며 천국문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려진 천국문에 도리어 깔려서 멸망당하는 경우을 전제로 할 때만 비로소 '남은 자'라는 그룹이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은 자'란 심판이 맹렬하게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집단입니다. 세례요한 천국을 운운할 때도 필히 심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성직자들을 보고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천국 가느니 차라리 길에 돌멩이가 천국간다"는 폭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길에 아무렇게나 무심하게 존재하는 돌멩이를 통해서 현재 성직자들의 구원탈락을 설명했는데 이것은 다소나마 성직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미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한 발언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경우, 네 종류의 밭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시므로서, 애초에 구원될 그 어떤 기미조차 허락된 적이 없음을 강하게 시시하시는 겁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는, 그 씨를 받는 4 종류의 밭은 참으로 무심하게 그냥 존재해 있을 뿐입니다. 적극적 나설 하등의 여지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밭은, 자신이 어떤 밭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본인에게도 은폐되어 있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천국의 씨앗이 떨어져봐야 자신이 어떤 종류의 속성이 지녔는지가 밝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밭의 특징입니다.
밭은 떨어진 씨에 의해서 그 결과를 그냥 보여주고 증거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밭의 성질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소개에 보면, 분명 밭은 나름대로 몸부림치고 애쓰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역한 인간의 본능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뭔가 이들은 누구로부터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첫째 밭은, 악한 자가 방문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악한 자가 왜 이들을 찾아옵니까?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뿌려진 것의 가치를 악한 자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들에게 뿌려진 것이 악한 자의 운명을 절단낼 힘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방문한 유형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비록 악한 자의 방문을 그들이 짐작들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밭'입니다. 밭은 타인에 의해서 유린 당하면 당하는대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무능력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둘째의 유형도 마찬가지입니다. 돌밭에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는 잠시 즐거웠으나 난데없이 그에게 환란과 핍박이 덮쳐지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고, 그 환란을 이겨낼 만한 자력이 발동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그런 유형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왜 미리 환란이 쳐들어 온다든지 아니면, 아예 충분하게 즐거움의 시간을 가져서 그 즐거움을 나름대로 축적하려는 노력이 감행하려는 그런 시간적 여유도 없이 환란이 오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기어이 그 자를 탈락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굽힐 수 없는 애씀이 있었기에 생겨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잠시라도 말씀으로 인한 즐거움을 주지를 말든지 해야지만 왜 맛만 잠시 보이시고 잘라내기는 단호하게 잘라내시는 겁니까? 그것은 천국의 씨란 인간들의 관리 수완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변에 참으로 이런 분들 많이 생겨납니다. 복음에 대해 반응이 갖게 되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지요, "됐구나 천국 고기 한 마리 낚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난데없이 본인이 감당 못할 환란과 핍박의 태풍과 지진이 덮쳐버리면, 언제 말씀이 남아 있었던가 하는 양으로 바짝 말라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분들을 주위에 보시거든 주께서 천국에 안넣어 주시려고 일부로 그런 일들을 실시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유형은,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버려서 결실치 못하는 유형이라고 예수님은 평가내리십니다. 환란과 핍박과는 반대성향을 지닌 방해물이지요. 일단 기분좋은 방해물입니다.
말씀을 듣고 갖는 것보다 더 기분좋은 내용물이기에 '유혹'이라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 유혹은 스스로 자신을 살려내어 보려는 것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를 유혹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당연한 태도처럼 인식들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십니다. 그런데 왜 살아야 합니까? 왜 꼭 살아남아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유도 없이, 목적도 없이 왜 살아남아야 합니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우선입니다.
존재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무엇이며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은 거친 인생살이를 하면서 그저 일순간 스쳐지나가는 기분 전환용에 불과합니다. 한 예를 들면, 살기에 바쁜 일과 속에서 야외로 드리이브하는 와중에 순간 청초롭게 피어있는 들국화를 보았다고 칩시다.
참 아름답지요. 그 청순한 아름다움에 흠뻑취하고 싶지요. 새로운 신선한 세계에 몰입하고 싶은 유혹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바이어로부터 물건 주문 전화를 받는다면 황급히 차를 다시 도시쪽으로 몰게 됩니다. 아름답다고 여기고 꺾어놓은 들국화도 2Km도 못가서 창문 내리고 갈가에 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사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다급하고 심각스러운 문제가 또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좋고, 교회도 좋고 아름답지만 그런 것들은 인생이 한가로울 때나 찾는 멋진 장식거리에 불과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살아있다는 이것이요, 살아있기에 또 살아야 한다는 절갑함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이기고 천국에 합격한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는 말입니다.
특히 젊은 분들에게 있어 인생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직 인생의 맛도 못하고 꽃봉오리도 채 피지 못했는데 죽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런 말씀 마세요"라고 나옵니다. 물론 연세많은 신 노인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이제 죽을 마당에 도달해서, 산다는 거 자체가 귀찮고 번거럽고, 시시하고, 부담이 되기에, 임종시에 자녀를 앉혀놓고 쉽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애들아. 너희들이 신앙생활 잘해라"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젊은 자식들은 은근히 불쾌하지요. "당신께서는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보았지만 아직 저희들은 제대로 맛도 못보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어쨌든 생활에 대한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으로 인해 정작 결실을 맺어야 될 씨는 그 밭에서는 죽어가게 됩니다. 외부에서 결실을 못맺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본인의 독한 생존 의지가 주어진 천국의 씨도 없어버리고 그 길도 지워버리고 뭉개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악마를 이기고, 환란과 핍박을 이기고, 재물의 유혹도 마다하고 생존에 개의치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자가 누가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 '남은 자'의 비밀이 나타나는 겁니다.
'남은 자'란 심판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현장에서만 나타나는 겁니다. 악마로 하여금 말씀을 빼앗게 하고, 환란이 들이닥치게 하고, 생활고로 인한 걱정과 돈의 유혹으로 심판을 감행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이런 것을 이길 위인이 없음을 확실히 해두는 겁니다.
남은 자란, '자기 행함'으로 구원되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바로 은혜로 구원받을 자들입니다. 밭은 그 특성상 자력으로 자신의 성질과 속성을 수정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씨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를 보고 "자신이 옥토이구나" 라고 파악할 뿐입니다.
이 말은 곧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남게 되는 '남은 자' 가 따로 있다는 것이 이 비유를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로마서 11:5-7에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말씀으로 심판 작업에 나서십니다. 이것이 곧 움직이는 천국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이 심판의 원리가 곧 우리들을 은혜로 구원하시는 원리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가라지 비유
2004년 1월 25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24-30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13: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우리는 우리 개인적인 일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면 그런데로 괜찮은 인간이라고 자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체를 다 내다 보십니다. 우주의 온 구석 구석을 다 보십니다.
그렇게 보면서, '천국' 이야기를 하십니다. 우리 개인들 입장에서 천국을 보면, 내가 그냥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성공이다고 보겠지만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천국의 완성을 방해하고 공격하는 세력까지로도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8절에 보면, '원수'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천국의 원수'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 있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자칫하면 개인적인 천국이 될 공산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서 어떤 여자가 울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동정을 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처지는 아직 괜찮은데 거기에 비해 예수님의 처지는 형편없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그 여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네 자식을 위하여 울어라"고 말입니다. 즉 지금 우리는 우리 처지를 제대로 모르는채 천국을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천국을 제대로 알려면 왜 예수님께서 가라지 이야기를 꼭 하셔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천국은 고정적이지 않고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생리란, 좋은 것은 고정시켜서 그냥 따먹는 식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마치 감나무에서 다 익은 감을 따기만 하듯이 말입니다. 천국도 그런 식으로 고정화시켜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천국의 원수가 갖고 있는 천국관입니다. 천국은 어디 있습니까? 천국은 성령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디있습니까? 성령은 바람같아서 어디 지정한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타났다가도 없어지고, 없어졌다가도 다시 나타나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없는 것입니까? 없는 것이 아니라 있기는 있는데 우발적으로 나타날 때만 등장되는 겁니다. 그 예가 베드로전서 4:12-14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성령이 계시기는 계시지요? 그런데 그 성령께서 등장할 때 어떤 현상을 동반하고 나타난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받고 욕 얻어 먹는 형식으로 등장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가 성립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이름으로 욕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마태복음 5:10-12에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진정한 '의(義)'는 오직 예수님과 동일한데 그 예수님의 의 때문에 수모를 당하면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입니다. 같은 천국 백성인 선지자들도 동일한 경우를 당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가라지가 어떤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짐작하게 될 것 입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변화하는 바람같은 성령 안에서만 천국이 들어있고, 그 천국이 이 현상 세계에 비칠 때는, 예수님의 의만을 믿기에 고난이 되는 형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가라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고정적인 것을 추구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천국을 마치 교회처럼 고정적인 것으로 오인하게 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꼴이 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이 두 사람은 부부로서, 헌금의 반을 속이고 교회에 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은 사이좋게(?) 한 날에 죽고 말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성령이라는 어른신네가 그곳에 계신다는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천국이란 성령 안에 있다고 했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눈에는 그저 고정적인 교회 조직책만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속일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만약 교회를 세우면 가라지 같은 교회를 세우게 되고, 곧 천국의 정신과 정반대되는 천국관을 소개할 사람입니다. 만약 오늘 본문을 교회 중심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교회는 곧 천국이기에 만약 교회 운명과 그 방침에 대드는 자가 있으면 곧 가라지이다"고 말입니다.
교회의 순수와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권위있게 치리를 하게 되는데, 이 치리하는 작업을 개시하면 반드시 권력의 중심축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생각하는 이런 '가라지' 개념은 성령 안에 있는 천국과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예수님의 의만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이 사람은 그 교회에서 권위에 도전하는 가라지로 판정을 받게 되어 버립니다. 즉 "우리 당회에서 결정한대로 입 다물라. 네가 그렇게 주장하면 같은 교회 내에서 말씀에 권위를 가진 자가 둘이 생겨버린다. 따라서 그렇게 되면 교회 질서가 문란해지고 사람들의 심령을 당회에서 싸잡을 수 없어 운영하기 곤란하다."고 나옵니다.
교회 내의 권위와 권력을 목사 중심으로 하기 위해 치리라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과연 이런 곳이 천국일까요? 누가 가라지냐 하는 기준은 에베소서 4:5-6절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즉 이미 진정한 교회는 하나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누구 중심으로 하나인가가 하는 점입니다.
고린도전서 1:12-13절에 보면,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그 어떤 사도나 전도자에게 세례를 받았든지 간에 십자가 지신 분은 오직 한 분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라는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부부는 한 몸이다'라는 말은 다 압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계속해서 한 몸되기 위해 애쓰지 아니하면 한 몸이 깨어진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닙니다.
부부가 한 몸이라는 것은 실천에 관한 문제나 행함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믿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즉 아내가 남편보고 하는 말이 "여보, 우리가 한 몸되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애를 써왔는데 그래 당신은 날 실망시키냐? 우리 헤어져!"라고 나오는 식의 한 몸은 아닙니다.
'한 몸'되기 애쓴 것과 '한 몸'이다고 믿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른 내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15년째 한 몸으로 잘 살아왔다가 자부하더라도 내일 또 무슨 한 몸이 깨어지는 사태가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때 가서 갈라서 버리면 지금까지 15년째 한 몸으로 살아온 것은 사실은 한 몸이 아니라 그저 한 몸처럼 유지되어 왔던 거지요. 한 몸됨이 깨어지는 요인이 발생되기 전까지에 유효한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한 몸'이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사에서 그 어떤 일이 발생되고, 우리 자신들에게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상관없이 십자가 지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 뿐이기에 그 분으로 인해 이미 우리 '한 몸'인 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성령 안에 있는데, 그 성령 안에 있는 천국은, 오직 한 분 중심으로 이미 확정된 천국이요 알곡들입니다.
따라서 가라지란 딴 게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 쳐다보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천국과 예수님을 빙자해서 특정 조직체나 단체를 하나로 만들고 그것을 정화하고, 질서잡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즉 믿음의 단체가 아니라 행함의 단체가 가라지입니다.
만약 천국갈 때에, 하나님께서 물으시기를, "너 누구 때문에 천국에 왔느냐?" 할 때, "좋은 목사님 만나서 천국왔다"고 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옆에 온 사람이 우기기를 "네만 좋은 목사 만나느냐? 우리 목사님도 얼마나 좋은데"라고 나올 것이 뻔합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가라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때문에 한 형제임을 인식하는 올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고정적인 천국으로 교회를 싸고 돌 것이 아니라 늘 움직이는 주님과 함께 움직이는 남은 여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겨자씨 비유
2004년 2월 1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31-32
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어떤 사람이 현실관을 알려면, 그 사람이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즐거워하며, 또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슬퍼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신의 존재까지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하나님관은 자신의 현실관을 충족시키는 그런 하나님관이 되기 마련입니다.
즉 "하나님, ......"라고 부를 때는, 반드시 뒤에 요구하는 바가 따라 붙게 마련입니다. 그 요구사항은 곧 자신이 생각해 놓은 현실관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우리 눈 앞에 있는 겁니까?
성경 안에는 천국에 대해서 제대로 아시는 분의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그분이 제시하는 이 세상에 대한 현실관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인간들의 현실관의 상호 충돌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개개인의 잘못된 현실관에 대해서 그 개인의 자질이나 인품가지고 지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니, 인간들이라는 자들은 태어 날 때부터 잘못된 현실관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라면 당연히 엉터리 현실관을 소지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현실관을 버리고 예수님을 현실관을 참 현실을 받아드릴 능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인류에게 위기의 종말입니다. 그것도 전혀 해결책이 없는 종말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이란 끝장나 버린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의 인간 세계에 천국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할 만한 모습으로 등장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시리즈에서 이번에는 씨로 나갑니다. 처음에는 씨 뿌리는 농부에 비유하더니만, 그 다음에는 밭의 상태를 가지고 천국에 비유하셨고, 이제는 씨에 대해서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세 가지 경우 모두다 그 자체로서 순결 한 것이 아니라 항상 뭔가 악한 것이 섞여 들어와 있는 상태에서 천국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 섞임으로 인해 천국을 만드시는 주인공에 대한 오해와 곡해가 이 세상에 퍼지게 됩니다. 즉 쉽게 결판내지 않느냐 하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 요한도 이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오실 메시야가 과연 당신 맞습니까?"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들도 마음속으로 늘 하게 됩니다. 즉 "과연 예수 믿는다고해서 하늘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기는 받을까? 혹시 아무 것도 아닌데 혼자서 엉뚱한 착각 속에 빠져 있는게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일반 교인들이 제일 빠지기 쉬운 혼란이 이런 것들입니다.
왜 예수 안믿는 자들이 세상 일이 술술 잘 풀리는가 하는 겁니다. 시편 73:1-11에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1절과 1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도다"입니다. 분명히 신자는 하나님께서 선을 베푸신다는 점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선이라는 것이 2절부터 10절까지의 요소는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전에는 선이라는 것이 2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11절을 보고서 참된 선이란 11절과 같은 불신의 고백이 나오지 않는 바로 그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의 섬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세상이 타락하고 난 뒤에는 도리어 이런 당연함이 비난받을 짓이 되고 만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태에 이르면서도 인간들은 세상에 대해서 여전히 불만이 많아서 얼른 멋진 새 세상에 펼쳐지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참된 천국의 주인공 되시는 분은 이 땅에서 이 거짓된 천국관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겁니다. 한쪽으로는 왜 당장 하늘에서 불심판이 내려떨어지지 않느냐고 다구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들의 행함으로 천국을 달성할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누가복음 9:53-55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불의 심판주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실 능력도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천국은 그렇게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천국이 바로 불의 심판으로 시작해서 끝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천국에 대해서 잘못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불심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세상을 심판하는 과정을 통해서 천국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불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왜 사람들은 불심판을 받아 마땅한가를 뚜렷이 하시는 작업부터 시작을 하시는 겁니다. 사람이란 남이 하는 것은 조그만한 실수도 참지 못하면서도 자신에 대해서 잘도 용납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하다가 그 죄에 대한 벌이라고 여기면 갑자기 대단히 억울하다는 핑계를 댑니다. 강도가 강도짓해도 수십가지의 구실과 변명을 당장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못배워서 뭐가 죄인줄 몰랐다든지 혹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살 도리가 없었다든지, 주위 사람들이 자신이 무시해서 사회에 대한 복수심으로 무작위적으로 행동했다든지 하면서 온갖 변명을 늘어놓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늘에서 불 심판이 떨어질 때에 이 핑계, 저 핑계 다 소용없이 마땅히 불심판 받아도 싸다는 근거를 마련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그냥 평범하면서도 열심히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남에게 나쁜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에게 하늘에서 불심판 떨어졌을 때, 그 사람은 혹시 하나님께 항의하거나 핑계를 늘어놓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이럴 경우에 아예 핑계치도 못할 방법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11:5-6입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즉 예수님께서는 무상으로 은혜를 주시는 분인 것을 믿는 자에게만 기사회생하듯이 천국에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즉 소경되었다가 눈 뜬 사람에게 다음과 물어보세요. 뭐라도 답변할까요? "당신은 어떻게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예수님께서 찾아와서 해 놓은 작업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듣는 사람은 불심판 이상으로 큰 낙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서 나올 대책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이것은 개별적인 자질 문제가 아니라 아담 노선 안에 들어있기에 당연히 나올 수 밖에 없는 속성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과연 누구이며 왜 그런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인간은 거기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죄인임을 안다고해서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인간쪽에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쪽에서 다가옵니다. 천국에 흡수, 통합되는 양식으로 구원이 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가오시는 천국의 모습이 인간들의 눈에서 참으로 무시할만하고 시시하게 보이는 양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마치 겨자씨가 떨어진 사건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겨자씨 안에 온 우주를 덮을 만큼 커대란 천국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1:18-20절에 보면,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지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는 온 우주보다 더 큰 '지극히 크신 천국'이 들어 있는 현실로서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도 그러합니까?
이사야 50:5-6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국이란 누군가의 의로운 행위나 행함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신 행동자'로서 등장하신 분의 수난으로 인해 천국이 완성이 되었기에 이 천국에 포함된 오늘날 성도들도 이와같은 수모를 같이 당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천국은 여전히 겨자씨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수모는, 인간의 그 어떤 행함의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데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장차 천국의 영광된 상태에 다가오고 이 세상이 불로 파멸되고 나면, 천국이 바로 온 우주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을 더 원하겠습니까? 비록 겨자씨만해도 그것이 귀한 생명덩어리 인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누룩 비유
2004년 2월 8일
마태복음 13:33-35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13: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천국은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뭘해도 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되는 인간이 구상하는 천국은 처음부터 천국이 아니라 가짜입니다. 가짜 천국이 늘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 쪽에서부터 천국을 출발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은 '감추인 대상'이 아니라 '공개-공개'로 계속 이어질 나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5절에 보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천국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흔히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런데 인간들은 누구나 '예수님'에 대한 나름대로 선입견을 갖고 이 선입견을 가지고 자기만큼은 '들을 귀'를 가졌노라고 누구나 자신만만해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셔도 그 내용은 자기에게 정확하게 이해된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마련입니다. 즉 본래의 예수님의 뜻은 사라지고 자신이 납득하는 식으로 이해 해 놓고서는, "나는 들을 귀가 있으니 이렇게 예수님 말씀이 잘도 들리는구나"라고 오해할 소지가 넉넉히 있다는 말입니다.
과연 이 주장이 옳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순전히 예수님만이 수행해야 될 업무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예수님의 '드러내심'으로 인해, 소위 인간들이 '드러냄'의 능력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으로 확실해져 버립니다.
인간들도 조금만 꼬투리만 있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드러냄의 흔적'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근거로하여 천국에까지 이르고자 합니다. 바로 이러한 선입견이 뭐가 문제가 되는 겁니까? 제가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만남의 경우의 예를 들겠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그 전에 여러번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던지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말씀에 의지해서 던지는 겁니다. 그랬더니만 배가 잠길 만큼 많은 양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런 상황을 접하고 난 뒤에 베드로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여, 저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 어떻게 베드로는 한 무더기 쌓여있는 고기 더미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인됨에 관심이 생길 수가 있었던 말입니까?
고기하고 죄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고기 잡힘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죄인됨까지 연장되어 꽂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자가 밀가루 반죽에다 이스트를 집어 넣었구나'를 먼저 생각하지 누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마음이 들겠냐 말입니다. 베드로의 경우, 고기와 자기 죄인됨이 무관한 것처럼 보이듯이, 오늘 본문을 대하는 우리도 이 본문과 우리의 죄인됨이 무관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 고 있는 천국은 엉터리이고, 참된 천국은 감추어진 형태로 활동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사도행전 9장에도 니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이라면 예수님도 인정해 주었듯이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종교 행위를 보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최고라고 하니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종교 순수성은 어떤 잘못도 없다고 장담할 만 합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다메섹을 내려가면서 하늘에 계시는 그 누군가를 만나는 되는데 그 만나는 그 순간 그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참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 참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는데 그것이 너무나 경악스럽게도, 자신이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님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잘못되게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자신과 참 하나님과의 만남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못되게 아는 자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경우 즉사한다는 것은, 레위기 10장에도 나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일반 백성들보기에 참으로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사명자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쓰레기 같은 자신들은 죽여도 설마 저토록 숭고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은 아까워서도 함부로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들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향로를 바치다가 그 향로불에서 폭발한 진노의 불에 의해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했느냐는 겁니다. 민수기 16장에 봐도, 레위지파에 속하는 고라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항하기를, 왜 거룩한 제사장 직무를 너희들이 독점하고 있느냐 하고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향로불에서 쏟아진 진노의 불에 의해서 250명이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죽이시는 그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즉 "천국이란 어떤 여자가 밀가룩 반죽에 섞어넣은 누룩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마땅합니다. "주여, 저를 죽이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느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아, 천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구나 이 참에 잘 들어 놓았다가 나도 천국에 가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죄악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베드로의 고기 잡음이나 사도 바울의 다메섹 만남이나 고라자손들의 횡사나, 나답과 아비후 제사장의 즉사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사람의 죽음을 유발시키면서 진행됨을 보이는 증거들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마땅히 죽을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왜 천국은 감추진 모습으로 등장됩니까? 그것은 죄악된 인간들이 하나님의 공개성을 빌미로 해서 가짜 천국과 가짜 하나님을 제조해 내는 범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6:25-26에 보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그 바탕에서, 자신의 죽음경험이 깔려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으로서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천국에 대한 달성은 자신 소관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 소관이라는 겁니다.
즉 사도 바울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은,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그 위에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하고 펼쳐 나가려고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곧 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의 만남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았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예수님은 사도 바울에게 , "왜 너는 마땅히 죽어야 되는가?"를 최초로 알려주신 분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천국 비유를 통해서 이런 취지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살기 위해서, 혹은 천국가기 위하여 말씀을 대하는 그 자체가 죄이기에 시도를 피해서 숨어있는 모습으로 천국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란, 반드시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는 양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을 긍정하는 식으로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그 작업은 순전히 예수님 혼자서 담당하시는 유일한 담당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가고 싶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감춰진 것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소원 안에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나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특정인들이 반드시 구원되어야 될 요건이 들어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천국은 우리 소원이라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신의 소원이요,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3: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즉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위해 예수님은 일 하십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이미 죽은자로 계속 들추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룩과 부풀어오르는 밀가죽 반죽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밀가룩 반죽이 따로 손 쓸 빌미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밀가루 반죽은 계속 부풀어집니다.
결코 밀가루 반죽의 공로가 아닙니다. 단지 밀가루 반죽은 누룩의 능력을 외부로 발산시킬 뿐이지요. 이런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려고 하는 자신의 욕망이 곧 죄인 것을 알게 해주옵시고, 이런 죄인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계속적인 일이 앞으로도 계속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가라지 비유의 해석
2004년 2월 15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36-43
13: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13: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것 같이 세상끝에도 그러하리라
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창세기 1장에 보면, 천지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있습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계속해 뭔가 있게 하셨습니다. 이 능력은 도무지 인간들이 행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들이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습니까?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감탄과 공경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자연을 꾸며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합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우리 인간에게 이러쿵 저러쿵 간섭하지 마시오. 우리는 당신의 로봇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자존심이 있다구요"라는 투로 나옵니다.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 태어날부터 그런 심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 대해서 고마움과 사랑은 이해한다고 하면서, 단지 부모라는 이유 때문에 자식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을 자식된 자가 용납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왜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존재의 자기는 어쨌든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무엘하 22:2-3절을 봅시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여기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다윗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의 자리는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자기 존재의 자리를 박탈 당한 것입니다.
다윗이 일부로 스스로 자신을 갱신하기 위하여 노력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본의 아니게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일들을 계속 부여받게 됩니다. 마치 자기에게로 쏟아지는 화살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은 자기 딴에 분주하고 그 모든 하나님의 숙제들을 처리한다고 했지만 항상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불실함과 죄악들입니다. 즉 자신의 본질이었습니다. 그 본질은 다윗에게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즉 아무리해도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 다소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애초부터 하나님에게 죄인이기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다윗이 알았던 것은,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의 반석이고 요새시오, 구원자이심으로 이미 등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는 구원된다는 사실을 그는 고백합니다. 제사나 번제나 화목제 드림으로 구원되는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못난 다윗을 구원하시는 이 능력은 어디서 온 능력입니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창조할 그 당시에만 적용되고 지금은 중단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의 능력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능력은 지금도 여전하십니다. 이 능력 말고 구원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천국의 아들'은 마땅히 자신이며, 자기처럼 믿지 않는다든지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모두 가라지인 것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딱 자신을 지칭해서 쓰여진 말씀으로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차원에서도, 교단이나 종교 차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교인들은 전부다 '천국의 아들'들이요, 불교 신자들은 가라지라고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나오는 사람은 천국의 아들들이요,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은 모두 악마가 뿌려놓은 가라지로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해석 자체가 아직도 여전히 '자기 존재 바탕'을 계속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즉 여호와가 자신의 반석이 아니라 자신이 자기의 반석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입니다. 이 예수님에 의해서 자기 존재의 자리를 압수당한 자만이 천국의 아들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자리가 사라질까봐 안절부절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찾아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온갖 신학적 지식과, 성경 지식으로 자기 머리 위에 뒤집어 씌우면서 해결하려고 하고 자기 운명을 결정지우려고 합니다. 인간이 뭔가 미래에 대해서 기대를 하게 되면 그 때까지 아직 기간이 남아 있는 지금부터 초조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내일 일을 기약하면 오늘부터 걱정이 늘어지게 됩니다. '내일 그 일이 안 이루어질까봐'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리모콘에 의해 순간적으로 눈 앞에서 사라지는 T.V 드라마로 간주합니다. 드라마에 심취해 있을 때는 마치 현실처럼 배우들과 같이 울기도하고 같이 웃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이 와서 막상 그 리모콘에 손가락을 눌리는 순간 그 허구적 상황은 어디론가 없어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허구였던 것입니다. 실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도 모두들 자기 존재 바탕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드라마를 연출하고 제작하고 있습니다. 자기 본위로 자기 위주로 만드는 그 드라마 안에서 같이 울고 같이 웃기도 하지만 어느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리모콘을 눌려는 순간, 그 모든 허구는 허구로서 막을 닫고 남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성이라는 실제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나오는 천국의 아들이라든지, 가라지라는 대상은 순전히 예수님의 손에 달린 것이지 일방적으로 '우리 자신이라고' 우길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달성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대단히 간단합니다. 즉 예수님 본인이 뿌려놓은 '의(義)의 씨앗'을 스스로 되찾아가는 식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의 씨앗을 세상을 뿌려놓으니 옆에 있는 악한 천사도 자신의 씨앗을 세상에 뿌려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의의 씨앗이고 악의 씨앗인지는 지상의 인간들은 알 길이 없는 거지요.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의 활동 여부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오로지 창조 능력에 준해서 이루어집니다. 없는데서 있게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능력으로만 구원하십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의 행함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전혀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숙제를 자신이 행하시는 것 뿐입니다. 그 숙제가 무엇일까요? 고린도후서 5: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 이 말씀을 누가 손수 이루어내시는 겁니까?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 이 말씀을 실천에 옮겨야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됨!'이라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모든 가라지와 악마의 유혹을 뚫은 가운데 나온 고백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 존재의 반석이요 요새이며 구원자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을 뒤엎고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실천력 행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작업이 세상에 드러날 때는 반드시 '잃었다가 다시 얻은' 형식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세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는 양 100 마리가 있었는데 목자는 그 중에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비유입니다.
그 다음 비유는, 어떤 처녀가 동전을 잃어버렸는데, 단지 잃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밤 새도록 찾으려고 했고 과연 찾아서 다음 날 친구들과 잔치를 벌렸다는 비유입니다.
마지막 비유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의 관심사는, 늘 아버지 곁에 있어 아에 '잃어버렸음'이 성립할 수도 없는 아드렝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잃어버렸던 그 탕자가 되돌아 오기만을 고대하는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가 의미하는 것은, 스스로 천국의 아들이 되고 싶다고해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호응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존재만 최종 고수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은 당연히 지옥가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받은 업무를 수행하는 결과로서 천지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여서 구원된 자만이 천국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이미 믿고 난 뒤에서 영원토록 지속될 능력입니다. 일단 구원받았다고 그 다음 부터는 그 사람 행위의 소관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도 창조능력이요 끝도 창조능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만이 반석이요, 요새시요, 구원자이심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보물 비유
2004년 2월 22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44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과학이란 그 출발점에 대해서 만큼은 인간들 사이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능력껏 솜씨를 부리기 따라서 본인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만약 출발점부터 차별을 두게되면 많은 사람들은 불공평함을 보고 그런 세계를 거부할 것이 뻔합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세계란 능력에 의해 자기 장래를 결정되는 세계입니다. 만약 이런 사고방식을 그대로 지닌 채 성경을 보게 되면 구원받는 문제나 천국 가는 것도 자신의 능력 발휘에 달렸다고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라는 열쇠 없이는 전혀 그 비밀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성경을 보게 되면 여기서 인간적인 생각, 제멋대로 해석해 버리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을 보고서도, 자신을 보물 찾아낸 농부로 착각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 남들이 못 찾아내는 보물을 저는 찾아내었습니다. 제가 바로 천국이라는 보물로 찾아낸 당사자입니다.'라는 의식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제각기 갖고 있는 보물이라는 것은 자신의 최후 행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무수한 사람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제공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큰 횡재라도 한 듯이 예수님을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누구라도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여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동일한 출발선상에서 출발해 능력 있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천국 가기'는 기껏 하늘에 향한 침 뱉기에 해당하는 바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하늘을 향해 남들보다 높이 침을 뱉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떨어지는 속도를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결국 떨어지는 장소는 침을 뱉은 자기 얼굴입니다. 딴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자체 내에 차별에 대해서 미리 언급하십니다. "아버지가 내게 넘겨준 자가 아니면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림이 없이 끝까지 책임지고 마지막까지 살려내시는 그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생각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천국 비유에도 충분히 반영되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나름대로 보물 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물관 속에 자신의 전부를 담아 넣게 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아무리 사이가 나빴던 관계라도 너무나도 섭섭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사라지신 아버지에게는, 자식의 과거 추억과 기억과 정성이 다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죽으심은 곧 자신의 과거의 사라짐이요 곧 자신의 죽음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내세우는 보물이란 곧 자기 자신의 전부가 들어있기에 사람들마다 보물이 다 다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 보물을 가지고 뭘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행복'입니다. 최종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보물입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기, 예수 믿기, 하나님 믿기... 뭘 해도 그 안에는 자신의 행복추구가 목적으로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않는 자들의 세계에서도 행복에 대한 나름대로의 교훈이나 비법 같은 것을 많이들 연구해 두고 있습니다.
즉 사물 자체에 행복이 없다는 겁니다. 문제는 마음가짐에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느 큰 상인의 부인이 허영심이 많았습니다. 남편은 먼 나라로 무역하면서 수출입 과정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챙겼습니다.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온갖 희귀한 외국 보물들을 수집해 왔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뭐든지 오래 보면 식상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가까이 있으면 시들하기 마련입니다. 좋고 나쁨이 그 사물에서 나온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의해서 좋다, 나쁘다가 형성되는 겁니다.
먼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파랑새가 고아 보여도 막상 손아귀 안에 잡아놓고 보면 독한 냄새나 풍기는 그런 일상적인 새 한 마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누가 말하기를 행복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피부가 고운 미녀도 손바닥을 펴놓고 현미경 들이대고 보면, 땀샘과 털이 숭숭 있는 것이 확대되어 보일 것입니다. 본래의 가치가 사물 그 자체에게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큰 상인의 부인은 또 먼 나라로 장사를 떠나는 남편을 향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과연 그 남편은 배 가득 귀한 보물을 싣고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밀이었습니다. 더 희귀한 보석이라고 사올 줄 기대했던 아내는 화가 나서 그 밀을 넓은 갯벌에 다 내다 버리기를 하인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난 어느 날 남편은 먼바다에 나가 풍랑을 만나 배도 파산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의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했던 투자자들이 그 남편의 모든 재산을 다 가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내의 보석까지도 채권자 손으로 다 넘어갔습니다. 남은 것은 거지꼴이 된 육신뿐이었습니다.
배가 곯아서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그 여자는 갯벌에 나가 헤매다가 눈에 뭔가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밀이었습니다. 비로소 그 여인은 밀이 왜 보물인지를 알았습니다. 똑같은 밀이지만, 그것을 소유의 입장에서 보물이냐 아니냐를 결정 지울 것이 아니라 과연 우리 몸에 필수적인가 아닌가를 두고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의 마음이 행복해졌습니까? 이제 마음이 낮아졌으니 그만큼 정말로 무엇이 귀한 보물인지 눈에 들어왔습니까? 하지만 이런 식의 마음 훈련이나 정신 차리기로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이 소개하는 보물의 진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보물의 진수는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3:9-11절을 보겠습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단어를 서로 이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비밀'이라는 단어요, 다른 하나는 '예정'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보물은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에게도 들통난 적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감추어진 것입니다. 마치 밭 속에 들어 있는 보물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보물이란 바로, '예정해 놓으심' 그 자체입니다. 우리들은 피조물이기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무엇을 계획했으며 무엇을 예정하신 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보물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자기 행복과 연관된 것으로 간주하지 달리 생각할 줄 모르는 그런 한계에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예수님의 뜻을 전혀 알 길이 없을 정도로 우리들은 무지합니다. 이점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되기 전까지는,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 즉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가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감추인 채로 제시하신 보물이란, 곧 '인간의 그 어떤 행위와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뜻에 의해 구원됨', 바로 이 자체입니다. 즉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심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진리는 모든 인간들을 넘어뜨리게 만드는 걸림돌 역할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자기의 행동에 토대를 두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성설교 중 하나인 마태복음 7:6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여기서 보물이란 거룩과 통합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 행복보다 거룩을 우선시 하는 사람이 누구 있겠습니까? 인간들의 이런 결정적 무지성이 드러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돌' 취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버려진 돌'을 가지고 비로소 천국을 개시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버려진 돌 앞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공로를 거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철저하게 예정된 뜻에 따라서만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신 일의 과정에서 주어지는 열매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있어 보물을 보고 좋아하시는 농부는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는 평생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 앞장세우고 자랑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볍게 대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본분과 관련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진주 장사 비유
2004년 2월 29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45-46
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있어 '내가 죽는다'는 그 사실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죽을 즈음에 그 이후의 세계를 염두에 두고서 나름대로 마음을 정돈한다고 해서 천국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방식은 천국에서 제시된 바에 준해서 결정됩니다.
그 원칙은 구약에서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 그러합니다. 인간적인 편리라는 면에서 볼 때 사실 광야 생활이란 쓸데없는 중간 지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애굽이라는 나라와 젖과 꿀이 흐른다는 약속의 땅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이 훨씬 간편한 구원 구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구원 욕심의 발로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구원의 경과는 광야 생활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시간적인 경과를 통해 자동적으로 골인 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그 전에 변화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는 마음의 변화, 곧 신앙심이 생겨야 한다는 겁니다. 마음의 변화에 대해서 하나님은 광야 생활 안에서 진행시키십니다. 즉 애굽에 살면서 간직했던 기존 마음가짐이란 이런 겁니다. "죽은 다음에는 좋은 세계에서 살아야지"입니다.
사실 이 마음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도무지 예외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죽어서 자진해서 최악의 세월을 보내겠다고 솔직하게 마음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장래의 좋은 복을 추구하는 본능, 그 자체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여겨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가짐을 유지한 채 험난한 광야 지역을 통과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불평을 하나님에게 퍼붓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좋은 세상에 가서 한 번 살아보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십니까? 좋은 세상 구경도 못해보게 합니까?"라는 식의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마음가짐에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천국에 살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미리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천국에서 가지고 살아야 될 마음가짐이라면 이 광야 속에서도 동일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천국에서 통하는 마음가짐이란, 자신의 생존 위주의 가짐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으로 한결같은 마음가짐입니다. 이 마음가짐이 아직 죽지 않고 이 시점에서도 동일하게 갖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만 구원될 수 있는 겁니다.
젊을 때 온갖 세상 즐거움을 추구하다가 연세가 많아져서 어슬렁어슬렁 교회에 발길을 옮겨놓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가짐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최종적 욕망이란 천국에로의 염원과 그곳에 골인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이 욕망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보석 장사치의 이야기를 놓고서 인간이 보통 해석하는 것과 예수님이 해석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다른 예수님의 말씀도 그러하지만 특히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는 확연하게 인간들이 엉뚱하게 해석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천국의 내막을 감추는 방식으로 비유를 들어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제가 인간의 마지막 욕망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데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광야 지역이 왜 있는지는 안중에는 없고 바로 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에 곧바로 연결 지으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서 오늘 본문을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됩니다. '어떤 보석장사치가 있었는데, 마침 우연히 천하 제일의 보석을 발견하고서는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이득이 줄 것인가를 짐작하기 때문에 그 장사치는 과감하게 자기 전 재산을 다 팔아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될 사람은 천국이 얼마나 좋고 크고 이 세상보다 월등하게 좋은 세계인지를 충분히 알아서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교회에 다 바쳐서 비록 남들에게는 손해보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천하 만국보다 더 확실한 것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 똑똑하고 지혜로운 참된 성도이다'라고 해석할 것입니다.
바로 이 해석이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예수님 빼놓고 예수님이 소개하는 천국을 최고의 보석으로 알아보는 인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야심이란 진정 좋은 것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그것을 구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여전히 자신의 죽음을 자기 손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의욕이 들끓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을 미끼로 한 환상에 불과합니다. 어떤 바닷가에 사는 노 어부 부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이상한 고기를 낚아 올렸습니다. 물고기가 하는 말이 나를 살려두면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집에 물이 새는 물동이를 갖고 있었던 노부부는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고 깨끗한 물동이만 요구했습니다. 물고기는 흔쾌히 그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노부부의 욕망은 한도 끝도 없이 상승되기 시작했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계속 물고기를 불러내어서 소원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물고기는 마지막을 입을 닫아버리고 노부부가 집에 와보니 그동안의 부귀영화는 다 없어지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참 모습은 그냥 죽는 겁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불길이 맹렬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코스뿐입니다.
이것에서 더 지나치게 욕심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래 우리는 이렇게 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죽음이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강력하기에 우리들은 잠시 천국에 대한 꿈을 꾸는 겁니다.
인생이란, 죽음이 부풀어 오른 것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에는 고무풍선에 바람 빠지는 날에는 원래대로 죽음에 합류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달성은 누구 소관입니까? 순전히 예수님 소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손에서 천국을 만들어 내십니다. 어떻게 만드십니까? 이 점에 대해서 구약 사무엘하 6장을 통해 알아봅시다. 거기에 보면 4명의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웃사요 다른 한 사람은 오벧에돔이요, 다른 한 사람은 다윗이요, 다른 한 사람은 다윗의 처인 왕비 미갈입니다.
웃사라는 사람은 손에다 언약궤를 실어가면서 자기 딴에 하나님께 잘해 보겠다는 뜻에서 언약궤가 떨어지는 것을 방비하고자 손을 대었다고, 감히 하나님의 언약궤를 만졌다는 죄명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에벧오돔이라는 사람은, 감히 그 무시무시한 언약궤를 집에 모셨더니 그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떨어졌습니다. 이 얼마나 신기하기 이상한 일입니다. 만지면 저주받고 모시면 복받는 언약궤의 조화가 말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언약궤 소유용으로 삼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이 살기 위해 용도로 하나님의 자비나 사랑을 소유할 수는 없는 겁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바를 은혜로 덧입을 뿐임을 아는 자에게는 복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다윗은 언약궤가 시온성에 들어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어가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의 처인 미갈은 그 모습을 대단히 못마땅해했습니다. 왕의 체면과 체통을 망치는 짓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잔소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이보다 더한 천한 짓을 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궤의 취지를 다 보여줄 수 없을 정도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왕의 가족이라는 직위를 수호하는데 관심이 있는 왕비는 평생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저주받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즉 성도에게 주실 은혜의 원천은 인간 쪽에 준비하거나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하나님이 거저 주시면 거저 누릴 수밖에 없는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태양을 만들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보석 장사치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참으로 아무 것도 볼품 없고 무가치한 자를 예수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자신의 모든 것, 즉 귀한 목숨을 대속물로 내놓아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시선에서 이 본문을 보셔야 합니다. 인간의 구원 야심으로 긍정하는 쪽에서 이 본문을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죽음의 또 다른 힘일 뿐입니다. 언약궤의 취지를 달성하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내리시듯이 오늘은 우리에게 천국 영생의
복음 십자가로부터 주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죽어 없어져도 할 말이 없는 저희들입니다. 하지만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은혜만 고마워하는 그런 마음씨로 바뀌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그물 비유
2004년 3월 7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13:47-50
마 13: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마 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마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마 13: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누구로부터 심판을 받고 검사를 받는 것은 대단히 기분 상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에게 아예 자신을 점검할 그 어떤 장치가 없다면 우리의 가치성에 대해서 외부 용역에 맡길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게 아니라 우리 속에 양심이라는 것이 살아 작동하고 있고, 옳고 그름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상적인 판단력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판에 또 외부에서 심판을 감행하겠다고 나선다면 인간의 고유 가치성과 자립성이 침해받기 때문에 상당히 성질 건드리는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꼭 창조주께서 꼭 심판을 감행하겠다고 나선다면 그 심판 기준이라도 미리 알아내어서 그것을 준수함으로서 스스로 알아 자기 행동을 조절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을 면제시켜 주는 방도를 고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세월에 떠내려가는 인간입니다. 자기 딴에 잘했다고 장담해도 돌아보면, 그것은 그 당시 그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남기 위한 수작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즉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노고에 불과합니다.
자기 의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굽힐 줄을 모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인간은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가 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입니다.
즉 "과연 너희들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 던질 자격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보시기에 형편없는 인간인 줄을 알고있냐?"라고 묻으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르쳐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남을 정죄할 고유의 행함이 자기가 만들어낼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즉 자신에게는 남을 정죄 할 자기만의 의가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열심히 자기 의를 내세웠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시시각각으로 자기 의를 방어하기 위한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노라고 자부하고 나섭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전부 자기 의를 위한 시도들입니다. 군대 조직에서 하급자를 괴롭히는 사고방식이나 생활 공동체에서 기존 주민들이 새로 이사온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모두 자기 의를 따로 장만해 보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특히 교회에는 이 점이 더욱 노골적입니다. 교인들은 자기 의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기가 행한 사항을 목사가 일일이 지시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 목사의 말을 듣는 것은 목사나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신의 대리자라는 목사의 말에 최선을 다해 순종함으로서 자신의 의를 따로 간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목사 말을 잘 들었으니 그 순종에서 의가 나올 것이고 그 의에 대해서 하늘의 축복을 쏟아 부어달라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겁니다.
목사는 목사대로 교인들에 지시를 하고 명령을 함으로써 명령하는 당사자의 의로움을 과시하고 그 반대급부로 그 교회에서 봉급받는 생활자로서 나름대로 정당함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살아남기 위한 적응'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런 조직체일수록 회칙과 규칙은 강화되어서 만약에 그 규칙에 어긋나는 자는 그 집단 안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있어 천국의 주인공은 그렇게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일단 모든 인간들을 한 그물 안에 모아들이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해서 절에 다니든 알라신을 믿든 예수님을 믿지 않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예수님의 손안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것부터 인간들은 아예 처음부터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모든 움직임 하나 하나가 전체 심판을 위한 환경이라는 점입니다. 무심코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도 전부 전체 심판으로 향하는 과정으로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킨 일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자기가 자신를 심판하는 구실마저 박탈당하는 셈이 됩니다.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심판을 겨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마치 자기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될 환경인양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제대로 지켜보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힘에 붙이네요"라고 변명을 널어놓게 됩니다. 사실은 이렇게 고백해서는 안될 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런 환경 속에도 주님의 심판성을 잊지 않게 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모든 역사가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구실이 된다는 점을 아시고 요한복음 3:16을 봐야합니다.
거기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세상'이란 인간들이 임의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다. 요한복음 3:18절에 보니 당연히 심판받아야 될 세상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독생자를 믿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봐서 이미 이 세상은 벌써 저주 안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세상 관을 오늘날 인간들이 지니고 있을까요? 아까도 언급했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자기의 가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의를 만들어나는 방식을 가동하기 일 수입니다.
이렇게 성실하게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기에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후한 점수를 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선택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보이시는데 주안점을 둔 심판을 하시게 됩니다.
즉 은혜로 선택된 자만 필히 구원되고 나머지는 구원이 되지 못함을 보이시는 그런 심판을 감행할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으로 잘 살겠다는 자는 지옥을 가게 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됨을 믿는 자만 구원되는 결론으로 심판이 감행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과연 누가 심판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즉 모든 사람을 한 그물 안에 거두시는 분께서 심판하실 때,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심판의 기준은 오직 예수님이 자신이 원하는 자만 건진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그 어떤 위인도 하나님에게 만족할 만한 의를 생산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심판 안 받을 자격도 없을 뿐더러 심판 주이신 예수님의 의향에 구원해 달라고 압력을 가할 권리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에게 이런 절대적인 권한이 전부 일임되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분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25-26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즉 의롭다, 의롭지 않다 의 결정은 인간이 자기 행위를 내세워서 검사 받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결정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기준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갖고 있는 기준으로 인해 예수님의 기준과 대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의의 기준을 따로 갖고자 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정받고자 벌리는 생존 경쟁 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쟁에 의해서 누가 희생을 당했느냐 하면 심판 주되시는 예수님마저 희생되어야만 했습니다. 그 정도로 이 세상은 살벌하고 모든 것이 자기 위주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은혜로 분에 차지 않아서 거기에다 또 자신의 선행을 추구해 보려고 합니다.
믿음으로는 구원은 되겠지만 이 세상에서 복 받는 것은 자신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심판 주되시는 예수님을 몇 번이고 죽일 위인들입니다. 그런 위인들이 모여 교회를 만들고, 교단을 세우고 궁극적으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진정 심판을 제대로 안다면, 이런 심성으로 십자가만 바라 봐야 합니다. 자기 기준에 의해서 자신을 정죄하지 말고, 타인의 기준에 준해서 남에게 정죄 당하지도 말고 목사로부터도 정죄 당하지도 말고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거기서 제시한 기준과 은혜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이 오직 주님이 벌리시는 심판만을 겨냥해 간다는 점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새 것과 옛 것
2004년 3월 14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51-52
13: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13:5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제일 우선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은, 참된 신을 분간해서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되었든 다른 신이 되었든 아예 신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소의 귀에 경 읽기' 같은 소리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있어 참된 신과 가짜 신의 구분조차 하지 않고, 신 전체와 자기 자신을 놓고서 대결구조로 고정시켜 말았습니다. 신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저항하겠다는 겁니다. 웃통 벗고 본격적으로 신과 시합에 나서겠다는 겁니다.
신이 대단한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대단한지를 견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이러한 속성은 본인조차도 어쩔 수 없이 감당할 수 없는 본성입니다. 이 본성은 인류의 조상 대대로 물러 받은 겁니다.
한 쉬운 예로 제가 이 물 컵 하나만 가지고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차례 차례로 전달을 시켰다고 칩시다. 도중에 제가 막 컵을 전달받은 사람에게 가서 그 컵을 확 빼앗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컵은 나의 것이 그 컵에 담긴 내용물도 원래 내 것이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다 여러분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전달받은 속성이요 본성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선에 감당할 수 있고 조절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넘어서 버립니다.
즉 아무리해도 우리 자신들의 노력으로 우리 자신의 본성을 억제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원래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부터 물러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물러 받은 본성이 우리로 하여금 전력을 다 기울여서 하나님에게 대들게 합니다.
"하나님도 소용없고, 예수도 소용없다. 신을 믿지 말라, 예수도 믿지 말라. 믿을 것은 우리들 자신뿐이다!"라고 과감하고 이 강단에서 외치고 싶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애를 쓴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성질조차 우리가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예수님 십자가 현장에서 넉넉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끔찍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시점에, 십자가 밑에서는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차지하기 위해서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즉 "십자가 지는 위인아, 너는 너고, 나는 나다"는 겁니다. 십자가 진 당신과 옷을 갖고 싶어하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거지요. 오늘날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노골적으로 십자가를 땅에 팽개치고 지근지근 밟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십자가 져라. 나는 돈이나 벌어 보련다"라고 나서는 그 행세가 곧 로마군병들과 같은 의식입니다.
옛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이 땅에 오실 때는 초라하고 비천하고 비참한 몰골로 나타나셨습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예상한 호화 찬란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왜 예수님은 이처럼 비참하게 나타나셨는가요? 그것은 그 어느 인간도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저로서는 저의 성격이나 본성조차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감당 못하겠습니다."라고 자포자기 할 때, 저 만치서 마중 나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 나무 위에서 줄줄 피를 흘리는 모습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대신 의미를 아느냐?" 하시면서 말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바로 구약에서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아니 된다'고 당부하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51절에 보면,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라고 물으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치 마태복음 13장을 다 읽어 가는 우리보고 시험을 치시는 취지로 물으시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정리했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서 무엇을 느꼈습니까?
마태복음 13:41-42에 보면, "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이 있다는 점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이 심판을 누가 주도하느냐를 생각해 봐야합니다. 그 분은 바로 '인자'라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옛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부하신 바를 생각해야 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이 모든 일에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죽도록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여호와의 자리에서 일하시는 분은 바로 '인자'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죽도록 그 분을 사랑하면서 자진해서 그 분과 한편 되기를 즐거워 할 때, 비로소 이런 사람에 한해서 '깨달았음'이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세상을 주도하는 인간은 다른 인간이나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점을 도리어 즐거워하고 반기는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을 '깨달았음'이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마음가짐의 깨달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어떤 결과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새것'과 '옛것'을 구분하는 눈이 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옛것은 무엇이며 새것은 무엇입니까? 새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들의 생리입니다. 새것도 없이 흥미 거리가 없으면 못 견디어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요? 아닙니다. 사무엘하 13:14-15에 보면,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니라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암논은 다말을 너무너무 사모해서 저 연인을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막상 일이 저지르고 난 뒤에는 오히려 전에 사랑했던 정도보다 더 강하게 사랑했던 여자를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왜 갑자가 극도의 사랑이 극도의 미움으로 변했을까요?
그것은 사랑이 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 뒤에는 새로운 것이 사라지면 곧장 허탈감에 사로잡혀 사랑의 진면목이 유감 없이 드러나는 겁니다. 즉 "사랑한다"는 말 뒤쪽에는 조건 맞지 아니하면 "나는 너를 극도로 미워 할 꺼야"를 깔고 함께 제시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새롭지 않으면 살아 갈 맛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인생을 충분히 살았고, 그리고 인간 세계의 지혜에 대해서 통달한 솔로몬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전도서 1:8-11에 보면,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 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즉 '만물의 피곤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통째로 '옛 것'에 속한 것이라는 규정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옛날 아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자체로 거부당한 자입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야만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로 인해 그 후손인 우리들 모두가 에덴동산과 상관없는 채 이 세상을 떠돌면서 살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가 가야 할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체가 새로움이 아니기에 역시 우리 안에서 나올 것도 새로울 것이라고는 없는 겁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새로움'으로 등장하신 겁니다.
인간들이 행하는 모든 옳고, 그름도 취사 선택 자체를 하나님은 거부합니다. 그 대신 금붕어처럼 날마다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사랑을 먹고 또 먹고살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모든 행위의 배후에는 인간의 의(義)가 쟁반처럼 동반해서 등장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義)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새로운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의 백성은 옛것과 새것을 확실히 구분해 내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크게 바라보게 해 주옵소서. 날마다 예수님의 용서만 한 모금 두 모금 먹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