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 부음에 담긴 뜻
삼상24:1-7
(삼상 24:1, 개정)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삼상 24:2, 개정)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삼상 24:3, 개정)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삼상 24:4, 개정)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삼상 24:5, 개정)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삼상 24:6, 개정)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삼상 24:7, 개정)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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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관계에는
두가지 노선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관계요
다른 하나는 정치적 관계, 즉 정치놀음입니다.
정치적 관계란
곧 힘과 힘으로 밀고 당기는 관계입니다.
가깝게는 마주하고 있는 곳에
서민아파트와 고급아파트가 마주보고 있다면
이를 영적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정치적으로 볼 것인가를 두고
다툼니다.
정치적으로, 곧 육적인 관계를 보게 되면,
그 집안의 식구들이
권력이 있다거나, 소득이 많다든지
아니면 슬하에 자식이 많은 것이
능력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끼리도
아파트의 위치와 평수로
빈부의 격차를 논하기도 하고
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과연 저 가정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게 있을까?”라는
차원에서 보게 됩니다.
성경이란 하늘의 구조를
이 땅에 내려놓은 겁니다.
일종의 그물입니다.
그물은 낚여져야 합니다.
낚여짐 그 자체로
벌써 완전한 관계 안에
놓여져 버린 것이 됩니다.
이러한 그물 구조 중의 하나가
바로 ‘기름부음’입니다.
기름부음이란
원래 출애굽에서는
사람에게 부어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기름을 부음받게 되면
그 존재는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쓰시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기름부음’이라는 존재가
점차 예수님이 나타날 시기와 가까워질수록
육을가진 존재가 아니라
과정과 사건으로 풀어지게 됩니다.
실묶음 풀리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하는자가
천국에 들어가는것이 아니라
주를 믿는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로서 기름부음의 내막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나라 날씨는
같은 위도상에 있는 중국 청도 날씨와
흡사합니다.
지구 자전 방향 때문에
대기도 함께
끌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
먼저 사울왕에게 기름부음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주어진
기름부음의 내막은
사울에게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서
밝혀지는 겁니다.
즉 사울이라는 왕에게 먼저 주어졌던
저 기름부음을 받은 상황이
사울왕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작용하는지를
다윗을 통해 보게 되는 겁니다.
다윗이 자기 손으로 사울을 제거하면
기름부음을 주신 하나님의 계획이
사라지게 되며,
하나님되심의 취지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남겨진
‘하나님의 주신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로서 다윗과 사울은
각자가 개별존재가 아니라
‘기름부음’으로 묶어져있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를 가지고
기름부음을 입은 자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2:27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가르친다는 것은
한쪽은 가르칠 능력이 있다는 말이고
다른 한쪽은 능력이 배제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못박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의 주관적 견해를 갖고 있으며,
그 주관이라는 것도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타인의 것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전통고수의 차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사람의 가르침 내부에는
진정한 ‘기름부음의 가르침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반영될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가르치게 되면,
그 가르침에 위배되는 결과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가르침은
얼마든지 왜곡될수있고,
거역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르치는 자의 ‘개인적 의견’에
불과합니다.
성령받은 자는
모든 것을 통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외부인이 간섭하거나
손 댈 필요없을 정도로
자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사람을 다루신다는 말입니다.
목사의 설교란
그 사람을 새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과연 복음적인가를 확인하는 상황 속에
같이 놓이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을 바로 이해하려면
성령님의 개입없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법과 교훈과 전통의 권위에 호소할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되풀이해서
십자가에 매다는 결과만 낳을 뿐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자’의 의견을
듣게 됩니다.
‘다윗의 사람들’의 의견입니다.
죽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마련해준 기회
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이
얼마나 비복음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범위까지는
하나님의 일이 개입하지 않고
단지 인간의 자력으로 마무리하라고
남겨둔다는 주장을 늘어놓게 됩니다.
이 엉터리 괴변을
오늘날 한국교회가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어찌보면 스스로 개혁주의라 말하는
교회조직이 앞장서있다고해도 무관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은
그 뜻의 한 올까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인간들이 관여하는 것을 못하게 하십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자른 것에 대해서
후회합니다.
다윗이 옷자락 일부만 자른 것은,
인간적인 양심에 호소해서
상황을 호전시켜 보겠다는 인간적 의도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전부 하나님의 일이라고 보지를 못했고
그나마 일부라도 인간 대 인간으로 통할 수 있는 약간의 ‘기름부음’의 영역이
있지 않겠느냐고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기름부음의 의미를
전부 알지 못해서 나온
다윗의 실수였습니다.
사울왕이 설치는 것은
순전히 사울에게 입혀진
‘기름부음’의 정신을 부각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따라서 사울과 같이
기름부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안목을 가지고
사울왕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했습니다.
사울은 제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름부음의 의미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다른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다는 사실이
기이합니다.
이는 기름부음의 유일성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반대하는 정신이
어떤 정신머리인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메시아 비밀은
일반인들이 분간하기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같은 메시아 권한을 놓고
서로 다투는 것으로만 비췰 뿐입니다.
정치적인 세력 다툼으로
비칠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멋대로 판단합니다.
“왕이여, 하나님께서 죽일 기회 주셨을 때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고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릅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린 문제요,
그 사울이 죽기 전에
자기에게 부여된
진정한 기름부음의 의미를 아는 것이
다윗 자신의 사명이요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것이
다윗이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될
천국의 구조입니다.
외부적으로 더 이상 의존할 필요없이
내부적으로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자들이
곧 성령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교회란 이처럼 하나님께 받은
그 완전한 것을 꺼내놓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