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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500(9)라후라존자~만다라~면목
106. 라후라존자 (羅喉羅尊者) : 밀행제일
라후라 존자는 부처님의 유일한 아들이면서도 그 인욕을 따를 자 없었고, 한편으로 크게 계율을 존중하고 엄수하여 교단의 귀감이 되었던 분입니다. 은밀히 지킬 바 행을 실천하여 밀행제일(密行第一)로 숭앙받았던 라후라.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아버지를 더욱 빛나게 한 참된 아들이었습니다.
팔리어로 전해진 경전인 <나다나 카타>에 의하면 싯달타 태자의 사문유관(四門遊觀)과 라후라의 출생,
태자의 출가는 모두가 한 날에 생긴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노병사의 인생고를 보고 출가를
결심하며 돌아오던 태자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라후라(장애)가 생겼구나!’하고 외쳤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유년시절의 라후라는 그 어떤 경전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성도 후 6년만에 고향으로 귀환한
부처님을 뵙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다시 등장합니다. 야쇼다라는 부처님 있는 곳으로 아들을 보내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아, 보아라, 저 많은 비구들에게 둘러싸여 황금의 빛을 발하시는 분이 너의 아버지시다.
너는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저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저는 장차 왕이 되려 합니다. 저에게 물려줄
재산을 주십시오’하고 말하여야 한다.”
부처님의 곁으로 간 그는 저절로 부자간의 애정이 느껴져 “당신의 그림자는 즐겁습니다.”라고 말하였고, 부처님께서 공양을 마치고 일어서자 ‘물려줄 재산을.. 물려줄 재산을....’하면서 그 뒤를 따랐습니다.
손가락 하나를 내밀어 라후라에게 잡게 한 부처님은 천천히 걸어서 니그로다 숲으로 들어가며
생각했습니다.
‘아들은 내게 재산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됨이 없고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이다. 나는 차라라
보리도량(菩提道場)의 거룩한 보물을 주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재산의 상속자가 되게 하리라.’
부처님은 곧 사리불을 불러 라후라의 출가 의식을 지시했고, 라후라는 열 두 살의 어린 나이로
사리불을 스승으로 삼아 불교 교단 최초의 사미가 된 것입니다.
라후라의 밀행은 이미 사미 시절에 그 뿌리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이야기 한 편을 새겨봅시다.
☀ 라후라는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나 장난기가 심하여 때때로 부처님이 있는 곳을 달리 알러주는 등, 작은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고는 즐거워하였습니다.
라후라의 나이 17세가 되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사실을 전해 듣고 라후라가 있는 곳으로 가서
물을 떠오게 하여 당신의 발을 씻긴 다음 물었습니다.
“너는 이 물을 마실 수 있느냐?” “없습니다.” “왜?”
“발을 씻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너도 이 물과 같다. 수도에 힘을 쓰지 않고 마음을 청정하게 갖지 않고 계행을 지키지도 않는다.
삼독(三毒)의 때를 가슴에 가득히 안고 있어 마치 이 물과 같이 더렵혀져 있다.”
부처님은 그릇의 물을 버리게 한 후, 다시 물었습니다.
“너는 이 그릇에 음식을 담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손발을 씻은 물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너도 이 그릇과 같다. 사문이면서 거짓말을 하고 마음속에 도를 닦을 뜻이 없으므로 더러운 물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마음의 양식이 될 것을 담을 수는 없느니라.”
말이 끝나자 부처님은 곧바로 물그릇을 걷어찼습니다. 그릇은 저 만큼 굴러갔습니다.
부처님은 라후라가 일찍이 보지 못했던 준엄한 얼굴로 꾸짖었습니다.
“너는 사문이면서 행동을 조심하지 않았고 거짓말을 하여 사람을 괴롭혔다. 너는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다. 지혜로운 자로부터 아낌을 받지 못한 채 목숨이 다하도록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미혹 속에 헤매기를 이 물그릇과 같이 할 것이다. 뜻을 가다듬어라.”
준엄한 부처님의 꾸중을 새겨듣고 결심을 새로이 가진 라후라는 계율을 지키고 정진에 힘을
다하였으나 쉽게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20세가 되던 어느 날 라후라는 부처님을 따라
탁발을 나갔다가 설법을 들었습니다.
“모든 삼라만상과 몸과 마음과 생각이 모두 무상하다고 생각하여라. 그러면 모든 집착이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법문을 듣는 순간 라후라는 문득 마음이 우주를 향하여 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홀로 기원정사로
돌아와 좌선을 하였고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때 부처님도 한 없이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월간 법공양:조계종 원로위원 석주스님 글>
107. 마두관음 (馬頭觀音)
마두대사(馬頭大士), 마두명왕(馬頭明王)이라 불려지며 무량수(無量壽)의 분노신(忿怒神)으로
여러 가지 마장을 부수고 일륜(日輪)이 되어 중생들의 무명의 어둠을 밝히고 고뇌를 단념시켜준다.
마두관음은 말을 신격화시킨 마신(馬神)신앙이 강하였던 인도 고대 종교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얼굴은 분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머리위에는 말의 머리가 안치되어 있다.
자비를 본원으로 삼고 있는 관세음보살의 성격과는 정반대로 얼굴에 분노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은
마장(魔障)을 분쇄하고 악(惡)을 극복케 하고자 함이요, 마두를 안치한 것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준마가 천하를 달리듯이 신속하게 악한 마음을 깨뜨리고 대자비를 실천한다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오래된 마두관음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팔은 여섯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른쪽 세손에는 검(劍), 화살, 뱀을 쥐고 있고
왼쪽 세손에는 금강저, 활, 여의를 쥐고 있다. 흔히들 축생을 관장하고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이라
칭하고 있으며, 특히 말의 병과 안전을 빈다고 한다.
108. 마전 (磨甎) : 남악마전,南嶽磨傳
사문(沙門) 도일(馬祖道一)이 전법원(傳法院)에서 날마다 좌선(坐禪)하고 있을 때 였다.
남악 회향이 그가 법기(法器)인 줄 알고 하루는 가서 물었다.
“대덕이시여, 좌선해서 무엇 하려 하는가?” 도일이 대답했다.
“부처 되려 합니다.”
남악이 벽돌 한 개를 가지고 그의 암자 앞에 가서 돌에다 갈고 있었다. 도일이 물었다.
“스님, 무엇하려 하십니까?” 남악이 대답하여 말했다.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도일이 또다시 물었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남악이 도일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벽돌을 갈아서 거울은 만들 수 없다면, 좌선하여서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도일이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남악이 대답하기를, “사람이 수레를 모는 것과 같아서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하겠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이 말에 도일은 대답이 없었다. 남악이 다시 말하기를,
“그대는 앉아서 선을 배운다면 선은 앉고 누움에 있는 것이 아니요, 만일 앉아서 부처를 배운다면
부처는 일정한 모양이 없으니, 그대가 만일 앉아서 부처를 이룬다면 이는 부처를 죽이는 것이며,
앉은 모양에 집착하면 이치를 깨우치지 못하리라.”
도일은 우유를 정제하여 먹는 제호같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남악회양(南嶽懷讓)선사가 열심히 죽어라하고 좌선하고 있는 제자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암자(전법원) 앞에 가서 벽돌을 갈았다고 하는 ‘남악마전(南嶽磨塼) 공안’이다.
당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年間, 713-741), 마조도일은 전법원(傳法院)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날이면 날마다 부처가 되고자 좌선(坐禪)을 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스승 남악회양이 인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마조도일에게 가서 물었다.
“대덕이여!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大德坐禪圖什)?” 마조가 대답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圖作佛).”
남악이 벽돌 한 개를 가지고 그의 암자 앞에 가서 돌에다 갈았다. 그러자 마조가 와서
“스님, 벽돌을 갈아서 무엇에 쓰려고 하십니까?” 남악이 말했다.
“이걸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그러네(磨作鏡).”
마조가 말했다. “스님,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磨塼豈得成鏡耶.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노장이 망령이 들었나)”
이에 남악이 말하기를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을 해서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坐禪豈得成佛耶)?”
마조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세를 바로 하고 정중한 말투로 여쭈었다.
“스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남악이 말했다. “사람이 수레를 모는 것과 같아서,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하겠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마조도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30방을 맞은 것이다.
남악이 계속 말했다.
“그대는 앉아서 선(禪)을 배우는 것인가, 앉아서 부처를 배우는 것인가? 만일 앉아서 선을 배운다면
선은 앉고 누움에 있는 것이 아니요, 만일 앉아서 부처를 배운다면 부처는 일정한 모양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무주(無住)의 법에는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다. 그대가 만일 앉아서 부처를 이룬다고
한다면 이는 부처를 죽이는 것이며, 만일 앉는 모양에 집착해 있다면 그 이치를 달성치 못하리라”
<출처 : 현대불교신문>
109. 만공월면선사 (滿空月面禪師)
만공 월면(滿空月面. 1871~1946)선사는 고종 2년 1871년 음력 3월 7일 전북 태안에서 출생했다.
속명은 도암(道岩)이었고, 휘(諱)는 월면(月面)이며 법호(法號)는 만공(滿空)이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 때 신룡(神龍)이 구슬을 토하는 꿈을 꾸고 낳았다 하고, 두 살이 되던 해
그 아버지의 꿈에 한 노승이 찾아와 ‘이 애를 데려다 큰 중을 만들겠다.’하여 보통 인물이 아님을
일찌감치 알려놓았다.
1883년 김제 금산사(金山寺)에서 불상(佛像)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고 계룡산 동학사로 출가하여 진암(眞巖)의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스님 나이 14세 되던 갑신년(1884)이었다.
그 해 시월 초순 어느 날 스님은 자신의 사상과 생애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한국 선풍의 중흥조이신
경허선사를 만나게 된다.
동학사에서 경허스님을 만난 만공은 그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선사를 계사(戒師)로 삼아 사미십계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 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參禪)에 열중하였다.
1895년 온양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에 범종을 치면서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게송을 읊다가 홀연히 깨달았다.
다음은 오도송(悟道頌)이다.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공산이기고금외 백운청풍자거래)
何事達磨越西天 鷄鳴丑時寅時出 (하사달마월서천 계명축시인시출)
빈산의 이치와 기운은 예와 지금의 밖에 있는데
흰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고 가누나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 왔는가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엔 해가 뜨네.
그 뒤 스님은 공주 마곡사 토굴에서 보경(寶鏡)과 함께 계속 수도하다가 경허선사로부터
‘아직 진면목(眞面目)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조주의 무자화두(無字話頭)로
다시 참선(參禪)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정진(精進)하였다. 그 뒤 경허선사를 모시고
서산 부석사(浮石寺)와 부산 범어사의 계명암(鷄鳴庵) 등지에서 수도하였다.
1901년 경허선사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白雲庵)에 들러 며칠 머무르는 동안
새벽에 범종을 치는 소리에 문득 재차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곧 천장사로 돌아와 법열을 즐기는
도중 1904년 함북 갑산으로 가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선사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고
‘만공’이란 법호와 함께 다음의 전법게를 받았다.
雲月溪山處處同 (운월계산처처동): 구름, 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臾山禪子大家風 (수산선자대가풍): 수산 선자의 대 가풍이여
慇懃分付無文印 (은근불부무문인): 은근히 무문인을 분부하노니
一段機權活眼中 (일단기권활안중): 한 조각 권세 기틀 안중에 살았구나.
甲辰(1904) 二月 十一日
만공 스님은 1905년 이후 주로 예산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보림을 하는 동안 납자들을
제접하였다. 1931년 유점사 금강선원 조실을 맡았으며 1933년을 전후하여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다. 이 시기를 제외하고 스님은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만공스님은 1937년 3월 스님이 마곡사 주지로 있을 때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31본산 주지와
13도지사가 함께 모여 미나미(南次郞)의 주재하에 불교진흥책을 논의하였다.
이 때 미나미가 전 총독 데라우치(寺內正穀)의 조선불교에 끼친 공이 크다고 하자 만공이 단에 나아가,
“데라우치는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일본승려를 본받아 파계하도록 하였으니 큰 죄인이다.
마땅히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한 뒤 정교분리론을 주장하였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110. 만다라 (曼茶羅)
만다라는 원래 ‘원(圓)’을 뜻한다.
실제로는 밀교에서 사용하는 각종 도형을 가리킨다. 정방형 속에 포함된 원형을 기본형으로 하며
중앙으로부터 상하 좌우가 대칭이 되도록 여러 부처와 존자를 정연하게 배치한 도형으로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내면세계 혹은 부처의 법신(法身)인 진실의 세계를 상징주의적(象徵主義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만다라는 바퀴처럼 둥글게 두루 갖춤을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된다.
사상적으로는 어떤 것이 그것을 형성하는 데에 필요한 요소나 부분이 단 하나라도 빠짐없이
완전하게 구비된 상태를 나타낸다
☀ 다음은 불교사전의 만다라(曼茶羅)의 뜻.
만다라는 기본적으로 우주를 상징한다. 즉 신들이 거할 수 있는 신성한 장소이며,
우주의 힘이 응집되는 장소이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만다라에 ‘들어가' 그 중심을 향하여
'전진'하며 유추에 의해 흩어지고 다시 결합하는 우주 과정으로 인도된다.
만다라는 기본적으로 2종류가 있어 우주의 2가지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에서 여럿을 향해 움직이는 '태장계'와 여럿에서 한 곳을 향해 움직이는 '금강계'가 그것이다.
만다라는 종이나 천에 색칠하여 그리거나, 정성스럽게 준비된 땅에 흰색 실이나 채색된 실 또는
쌀가루로 그리거나(탄트라 불교의 입문식에서 사용), 청동으로 형상을 만들거나,
혹은 자바 중부지방의 보로부두르에서와 같이 돌로 만들기도 한다. 그곳에서 행하는 탑돌이도
중심에 접근하는 의식에 해당된다.
티베트의 '탕카’에 나타난 만다라는 탄트라 불교의 전형적인 만다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1개 혹은 여러 개의 동심원을 둘러싸고 있는 바깥원이 있으며, 안쪽의 원들은 중앙에서 네 귀퉁이까지
선들이 교차해 있는 4각형을 둘러싸고 있다. 중심과 각 3각형의 가운데에는 5개의 원이 있는데
이 원에는 신의 상징이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주로 5명의 '구원불'이 그려진다.
만다라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원 중 첫번째는 불의 고리이다. 이것은 입문하지 않는 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무지를 불태운다. 두번째 원은 다이아몬드 띠로 밝게 비춘다는 의미이다. 그다음 8개의
묘지로 이루어진 원은 인식을 개체화하는 8가지 양상을 상징한 것이고, 연잎사귀로 된 띠는
영적인 재생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중심에 있는 만다라에는 상들이 놓여 있다.
한국에서는 금강계와 태장계의 만다라는 유포되지 않았고, 석가모니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성도상을 묘사한 화엄변상도와 석가모니가 영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가 널리
제작되었는데, 이러한 만다라들은 한국 특유의 것으로서 화엄의 원리에 의한 통일의 의미를 담고 있다.
만다라와 유사한 의례용 도안은 힌두교와 불교 이외의 문화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모래그림에서도 이와 같은 것이 나타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카를 융은 그의 환자들이 그린 만다라와 비슷한 그림을 연구하여 발표했다.
융은 만다라를 자발적으로 만드는 것은 개체화 과정의 한 단계라고 했다.
이것이 융의 심리학 이론에서 중심적인 개념의 하나로 취해졌는데 이 단계는 의식적인 자아가
지금까지의 무의식적인 요소들을 결합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고 한다.
111. 만암선사 (曼庵禪師)
1876년 전북 고창에서 탄생한 선사의 속성은 송(宋)씨이며 법명은 종헌, 만암은 선사의 법호이다.
일찍이 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8세 되던 해에 서당에 들어가 글을 배우다가 선사의 나이 10세에
전남 장성의 명찰 백양사에 입산하였다.
16세에 구암사 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박한영 강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다시 운문암 강원에 들어가
수학하는 동안에 내전(內典)의 일대시교를 다 마쳤다. 23세에 운문암의 환응선사(幻應禪師)에게서
전강을 받아 개강하는 중 한,일 관계의 복잡한 정세 변화에 충격을 받아 백련사 천진암, 해인사 등
여러 사찰을 전전하며 제자를 가르쳤다.
그 후 1910년 한일합방으로 정세가 일변하자 선사는 최초에 입산하였던 백양사로 돌아가 부근의
여러 사찰을 규합하여 여기에 다시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관을 설치하였다.
이는 곧 재래식 강원을 혁신하여 새 시대에 부합하는 교육기관으로 내외전(內外典)을 아울러
겸수케 하는 교육기관이였다.
이 교육기관에서 일제에 의해서 출판금지 되었던 한국의 역사와 지리 등을 교수하였으나 이는 선사의
투철한 애국혼의 일면이라 하겠다. 부처님의 제자이기에 앞서 이 나라의 백성임을 일깨워주기
위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당시 백양사에는 항일 민족지사들의 출입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니 백양사는 당대에 유수한
민족정신 함양의 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겠고 이는 바로 선사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선사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자급자족의 정신은 너무도 유명하다.
백양사 주위에 지천으로 많은 꿀벌을 보고 양봉기술을 익히게 하였는가 하면 각자 지닌 기술을 익혀 각
종 필수품을 제조, 판매하여 생활을 돕게 하였으며 사찰 소유 토지의 사경을 실시해서 문자 그대로
반선반농(半禪半農)제도를 실시하여 무위도식하며 밥을 축내는 스님이 없도록 제도를 개혁하였다.
이렇게 해서 축적된 수입은 스님들이 사사로이 쓸 수 없도록 철저히 관리하여 종전에 사전(寺田)에서
40여 석 정도의 추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무려 8백 석까지 끌어올린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선사는 1928년부터 3년 동안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6.25 후인
1952년 종정으로 추대되어 만 5년 동안 이 나라의 불교계를 이끌었다.
1959년 홀연히 열반하였는데 세수 81세, 법랍 71세였다.
112. 만자 (卍字)
「만(卍)자」가 불교의 상징(象徵)이라면 「십자가(+)」는 기독교(基督敎)의 상징이다.
범어 Srivatsalksana(수리밧살크사나), 스바스티카(Svastika) 또는 슈리바차(Srivatsa)라고 하며
만자(万字, 萬字, 卍字) 라고도 한다.
길상해운(吉祥海雲), 길상희선(吉祥喜旋)이라고도 쓴다. 길상(吉祥)과 행운(幸運)의 표시이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가슴과 발바닥에 나타나는 만자(卍字)를 상서로운 상(相)으로 여겨
만덕(萬德)을 나타내는 길상(吉祥)의 상징(象徵)으로 삼고 있다.
삼십이상(三十二相)의 하나로 불타(佛陀)의 가르침에 덕상(德相)이 있고 불타의 수족,
모발(手足,頭髮)과 허리에도 있다고 한다.
슈리바차(Srivatsa)는 모발이 말리어 겹치고 합해져 해운(海運)같은 모양 이란 뜻으로
길상만덕(吉祥萬德)이 모이는 곳을 뜻한다.
그 기원은 인도(印度)의 신(神) 비슈누의 가슴에 있는 선모(旋毛)에서 비롯되었는데,
상서로운 조짐이나 길상을 나타내는 덕의 모임을 뜻한다.
석가모니의 깊은 내면을 구상화(構想化)하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만다라(曼茶羅/曼陀羅)로 볼 수 있다
원래 만자(卍字)는 동서남북(東西南北)을 상징하는 열십자(十)에 오른쪽으로 회전하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은 오른쪽으로 회전하고 있는 우주와 태양계의 회전운동(回轉運動)에
동조(同調)하는 것으로 우주운행질서(宇宙運行秩序)에 순응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탑돌이를 할 때 탑의 오른 쪽으로 도는 것이다.
또한 만자(卍字)는 십자와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기원(紀元)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불교나 절을 나타내는 기호(記號)나
표시(表示)로 쓰이고 있다.
규모(模樣)는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우만자(右卍字)와 왼쪽으로 도는 좌만자(左卍字)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 卍자를 입체적(立體的)으로 형상화(形象化)시켜서 세워 놓고 볼 때 앞에서 보면
좌만자(左卍字) 모양이 되지만 뒤쪽에서 보면 우만자(右卍字) 모양으로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우만자(卍字)가 기본이었으나 서기 693년 당나라 측천무후가 불교의 길상상(吉祥相)을 표현하기
위해 좌만자(卍字)를 만들었다.
이후 우만자(卍字)와 좌만자(卍字)가 오랫동안 같이 사용하다가 근래에는 좌만자(卍字)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인도의 옛 조각에는 右卍(우만)자가 많으나 중국, 한국, 일본(中國,韓國 日本)에서는
굳이 구별(區別)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스바스티카(Svastika)와 만자(卍字)이라는 두 가지 상징은 서로 거울에 비추어진 모습으로
형태상으로 아주 유사한 이미지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o. 스바스티카(Swastika)는 :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독일 나치와 히틀러에 의해 하켄
크로이츠라(Hakenkreuz)는 이름으로 사용되어져서 한때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었던 상징이며,
o. 만자(卍字)는 : 한, 중, 일 삼국 등 동아시아에서는 행복과 부귀가 한도 없이 모인다는
행운의 상징으로 쓰이는 것이다.
한편 서양에서는 만자를 스바스티카(Svastika)와 구별하기 위해 사우바스티카(sauvastika)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스바스티카(Swastika)는 각 문화권별(文化圈別)로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미 보았다시피 독일지역에서는 하켄 크로이크(Hakenkreuz), 영국에서는 필펏(fylfot),
라틴어로는 크룩스 감마타(cruxgammata), 그리스어로는 테트라스켈리온(tetraskelion),
감마디온(gammadion)등으로 불리운다.
특히 영국에서는 채색창의 밑(foot)부분을 채워 넣기(fill) 위해 그려지던 그림이라 해서
‘필펏(fylfot)’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113. 만파식적 (萬波息笛)
만파식적이란 ‘모든 파도를 고요하게 잠재우는 피리’ 라는 뜻인데, 이 피리에 얽힌 설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를 지었다.
신문왕 2년에 해관(海官)이 동해안에 작은 산이 감은사로 향해 온다고 하여 일간으로 하여금
점을 쳐 보니.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수성(守城)의 보배를 주려고 하니
나가서 받으라 하였다.
이견대(利見臺)에 가서 보니, 떠 있는 산은 거북 머리 같았고 그 위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풍우가 일어난 지 9일이 지나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여, 그것을 가지고 나와 피리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마다 이 피리를 불면 평온해졌으므로 만파식적이라 불렀다.
<『삼국유사』권2 紀異 만파식적 조.>
114. 만해선사 (卍海禪師)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으로 유명한 만해선사는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탄생하였다.
선승이자 시인이며 우국지사인 선사는 그의 부친과 형이 동학군을 일으켰을 정도로
우국충정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때에 불교계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기미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해서 축사를 했을 정도로 웅변가이기도 했다.
당시 견딜 수 없는 탄압으로 대부분의 민족대표와 지식인이 변절했어도 만해선사만은
끝내 지조를 지킬 정도로 신념이 확고했다.
선사를 회유하기 위해 돈 뭉치를 들고 찾아온 일제의 앞잡이에게 주먹다짐을 했는가 하면,
술좌석에서 조선 사람으로 일본말을 지껄이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면상을 후려쳤다.
학병 출전을 독려하는 글을 써달라고 찾아온 신문기자의 멱살을 잡아 호통을 치기도 했다.
동지들의 후원을 받아 성북동에 위치한 심우장을 지을 때 ‘돌집(총독부)이 보기 싫다고
일부러 집의 방위를 북향으로 앉힌 것이라든지, 뒤늦게 간호사와 결혼하여 외딸인 영숙을
왜놈의 교육을 시킬 수 없다고 하여 학교에 보내지 않은 일 등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만해선사가 우연히 종로를 거닐다가 길거리에서 육당 최남선 선생을 만났는데
최남선 선생이 악수를 하려고 하자 선사는,
‘아이고, 아이고’ 하고 곡을 하며 지나쳤다는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초기에는 대단한 민족주의자였는데 도중에 친일을 했기 때문에 변절한 육당을 ‘죽었다’는 뜻에서 곡을 했다는 것이다.
1938년 독립운동가 김동삼(金東三)선생이 감옥에서 죽어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
시신을 자택으로 운반하여 장사 지내주었을 정도로
뜨거운 눈물도 많았던 선사였지만 지나치게 강직한 성품과 타협할 줄 모르는 결벽성(潔癖性) 때문에
외로운 삶을 살았다. 선사는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5월 9일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
만해선사 저서로는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등이 있다.
115. 말세 (末世) : ☀불교에서 나온 말
본래 불교용어인 말세는 불교의 ‘삼시(三時)’에서 나온 말이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뒤에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서 가르침이 여법하게 실행되지 않는다는
역사관에 입각해서 정법시대(正法時代)ㆍ상법시대(像法時代)ㆍ말법시대(末法時代)로 나누고 있다.
대개 부처님 입멸 후 천년 혹은 오백년을 정법의 시기, 그 다음 천년을 상법의 시기,
그 다음 만년을 말법의 시기라 이름 한다.
116. 망상 (妄想) : ☀불교에서 나온 말
정신분석학적으로 본다면 정신 이상에서 오는 망령된 생각으로
잘못된 생각을 옳다고 주장하는 증세라고 한다.
이치에 맞지 않는 그릇된 생각,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잘못된 견해, 그것이 바로 망상이다.
117. 맹귀파별 (盲龜破鼈)
옛날 바다 속에 거북이와 자라가 이웃사촌으로 오순도순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바다 속에 있는 옥초산(沃草山)이 무너져 내렸다.
그 바람에 그 산 밑에 살던 물고기들이 다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그 속에 거북이와 자라도
크게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거북이는 눈을 다쳐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이웃에 있던 자라도 다리를 다쳐
헤엄을 칠 수가 없었다. 거북이와 자라는 다친 상처를 움켜지고 울 수밖에 없었다.
거북이가 한참 울다가 가만히 소리를 들어 보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자라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거북이는 보이지 않는 눈을 움켜쥐고 자라 곁으로 가서 물었다.
‘자라야 너는 왜 우느냐?’ 그러자 자라가 거북이를 보고 하소연을 하듯 말했다.
‘나는 먹을 것을 보고도 걸을 수가 없어 이렇게 울고 있다.’ 그러자 거북이가 말했다.
‘나는 다리는 멀쩡한데 눈을 다쳐 앞을 보지 못하는 고로 먹을 것을 찾을 수가 없어 운다.’ 라고 대답했다. 거북이와 자라는 서로 얘기를 나누고 보니 서로 처지는 다르지만 사정이 같은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라가 거북이에게 말했다.
‘우리 둘은 사정이 서로 같으니 도우며 함께 살자.’ ‘좋다’
그렇게 하여 다리 없는 자라가 눈 없는 거북이 등에 업혀 먹을 것을 찾아내 나누어 먹으면서 살았다.
거북이와 자라는 바다 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찾아 배부르게 먹으면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거북이 등에 업힌 자라가 맛있는 과일을 따서 자기만 혼자서 먹다보니 맛에 취해
거북이에게 주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다.
‘어찌하여 맛있는 과일을 너만 먹고 나는 안 주느냐?’
이렇게 하여 자라와 거북이 사이에 틈이 생겼다. 마침내 둘은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눈을 잃은 거북이와 다리를 잃은 자라가 서로 떨어져 생활을 하다 보니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둘은 며칠을 굶고 배가 고파오자 서로 도우면서 배불리 먹던 때가 그리워졌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자 둘은 배고파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거북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자라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을 때 눈을 잃은 거북이가 다리를 잃은 자라 곁으로 갔다.
자라역시 거북이가 보고 싶었다.
둘은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와락 껴안았다.
이렇게 하여 둘은 하나가 되어 다시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았다.
118. 면목(面目) : ☀불교에서 나온 말
불교에서 참모습을 일컫는 말
흔히 체면이라는 개념으로, 얼굴의 생김새, 즉 용모를 일컫는 말로 쓰이나 본래는 불교에서 나온 용어이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나타나는 마음의 본성, 즉 참모습을 뜻한다.
자주 “본래 면목을 잃어가고 있다”는 표현처럼 앞에 ‘본래’를 붙여서 흔히 사용하고 있다.
본래 면목은 본체(本體) 그대로의 상태, 참모습을 일컫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면목(眞面目) 즉
불성이라 하겠다. 본래 면목을 찾는 일이 우리의 과제 중에 하나일 것이다.
어떤 잘못을 했는데 미안함이나 사과의 표현으로“면목 없습니다”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자주 거론되는 면목이란 용어는 “볼 낯이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와
곁들여 사용한다. 단순하게 ‘외형적’인 체면이란 뜻을 강하게 품고 있는 것이 이 단어의 쓰임새이다.
그러나 면목의 원 뜻은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으로 일상에서 사용되는 예와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품고 있는 불성(佛性)의 다른 표현이 면목인 것이다.
때문에 진면목(眞面目)이란 단어도 사용되고 있다. 불교집안에선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중생)들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부모로부터 몸을 받기 전의 본래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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