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조사들의 게송을 접한다는 게 그리 녹록치는 않지만, 불자라면 육조혜능의 이 한수는 한번쯤 접해 보았을 것이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보리나무는 본래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돈황본’에 나오는 게송과 비교해 살펴야 그 뜻이 더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덕이본’에서 보이는 이 게송만으로도 뭇 사람들을 선미의 세계로 끌어당기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인월암 원순 스님이 2005년 펴낸 『육조단경』(도서출판 법공양)에는 이 게송이 이렇게 번역돼 있다.
깨달음은 잡혀지는 존재가 없고
밝은 마음 이름뿐 실체가 없네.
본래가 한 물건도 있지 않거늘
어느 곳에 일어날 번뇌 있을까.
신선한 충격이다! ‘보리’를 ‘깨달음’이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선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리본무수’를 ‘깨달음이라 말할 수 있는 것도 본래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두 시의 번역이 보여주는 차이는 천양지차다. 일반적으로 해석돼 있는 번역에 비해 원순 스님의 번역은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임에도 다른 사량분별을 요하지 않는 매력이 있다.
10여년 선 수행 매진 후, 禪어록-논서 역경 집필,
선교회통 선지 활용 한 역해 저서 신선한 충격
원순 스님은 2008년 『선가귀감』을 강설한 『선 수행의 길잡이』(도서출판 법공양)를 펴냈다. 이 책에도 혜능의 게송이 실려 있는데 『육조단경』의 번역과는 약간 다르다. 그러나 앞 선 번역보다 좀 더 명확한 느낌을 준다.
깨달음은 잡히는 존재 아니고
밝은 마음 이름 뿐 실물 아니네.
본래가 한 물건도 있지 않거늘
일어 날 번뇌가 어디 있을까.
조사들의 게송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건 선가의 불문율에 가깝다. 고구정녕한 게송이 왜곡돼 전해지면 사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게송을 이렇듯 명쾌하게 번역한 이가 원순 스님이다. 스님은 1982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해인사, 송광사 등의 제방선원서 정진함은 물론 조계종 교재편찬위원까지 역임했다.
뿐만 아니라 대승기신론을 역해한 『큰 믿음을 일으키는 글』을 비롯해 『선요』, 『선가귀감』, 『원각경』 등을 스님만의 선지로 역해함으로써 2003년에는 행원문화상(역경)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실 현재 교계에서 내로라하는 스님도 번역이 막힐 때는 원순 스님을 찾을 정도다. 누구나 알고 있는 시를 이토록 고집스럽게 달리 해석하는 연유가 어디에 있는 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원순 스님을 찾는 또다른 개인적 이유가 있다면 『신심명』에 나오는 한 구절 때문이다. 송광사 경내서 그리 멀지 않은 산자락에 위치한 인월암으로 오르면서도 『신심명』의 한 구절을 되뇌었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이니(二由一有)
그 하나마저 막아라(一亦莫守).
한 마음도 생기지 않으면(一心不生)
만법은 어떤 허물도 없다(萬法無咎).
『신심명』의 요의는 첫 구절에 모두 함축돼 있다 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심은 어쩔 수 없다. 혹여 ‘이유’와 ‘일유’의 차이와 ‘일심’을 꿰뚫으면 그나마 낫지 않을까 하는 요량으로 발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리에 앉자 스님이 암자까지 찾은 연유를 물었다. 당장 번역에 몰두하고 있는 연유를 묻고 싶었지만 일단 『신심명』에서 보이는 한 구절에 대한 궁금증으로 산을 오르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자 스님이 재차 물었다.
“두 권의 신심명을 읽었다면 어느 정도 이해하겠군요. 신심명의 요체는 뭐라 보십니까?” 솔직히, 이런저런 말을 하기는 했는데 일언으로 답하지는 못 했다. 혹, 답이 미진하면 그 자리에서 그냥 일어서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거사님의 근기에 맞게 말하려 하는 것이니 너무 유념해 두지 마세요.” 갑자기 마음이 환해졌다. 마음껏 여쭈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원순 스님의 첫 일성은 이러했다. “어록을 볼 때 항상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중생의 영역에서 말한 것인지, 부처님의 영역에서 말한 것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마침 자신의 저서인 『육조단경』과 『선가귀감』을 내 보이며 두 곳에서 보이는 ‘일물’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파해 갔다. 『선가귀감』의 첫 머리에 나오는 일언을 음미해 보자.
여기에 그 무엇이 있는데 (有一物於此)
본디 밝고 밝아 신령스러워서(從本以來 昭昭靈靈)
일찍이 생겨난 적도 없고 없어진 적도 없었으니(不曾生 不曾滅)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名不得 狀不得).
그러고 보니 ‘일물’이 ‘한 물건’이 아닌 ‘그 무엇’으로 번역돼 있다. 사실 선시나 선어록에 나오는 ‘일물’은 모두 ‘한 물건’으로 번역돼 있는데 굳이 ‘그 무엇’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가귀감에 나오는 일물은 부처님의 영역이지만, 육조단경에 나오는 일물은 중생의 영역에서 말하는 겁니다.”
『선가귀감』에서 말하는 ‘일물(一物)’은 직역하면 ‘한 물건’이라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실물을 연상하기 쉬우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선가귀감』의 ‘일물’은 본디 밝고 밝아서 신령스러운 것, 즉 소소영령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이는 혜능 게송의 깨달음과 비교할 때 깨달음의 뜻인 보리와 밝은 마음의 뜻인 명경에 해당된다.
이는 부처님의 영역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일물’은 ‘한 물건’이 아닌 ‘그 무엇’으로 해야 한다는 견해를 스님은 보이고 있다.
반면, 혜능 게송의 ‘일물’은 ‘한 물건’으로 직역해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
혜능 스님 역시 ‘일물’은 이름 붙일 수도,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중생을 위해 부득이하게 보리수와 명경대라는 상징물을 들어 보이며 그 경지를 일렀고 갈무리를 위해 ‘일물’을 썼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눈에 보이는 실물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 보인 것이라 할까? 그러고 보면 원순 스님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 실물이 아닌 ‘일물’과 실물인 ‘일물’, 깨달음의 세계를 직접 말한 것과 상징물을 통해 우회적으로 말한 것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목적지는 같지만, 들어가는 길은 다름을 알 수 있다. 원순 스님이 이토록 집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세심하면서도 구체적으로 파고들며 역해에 애쓰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원순 스님은 평생 선방에서 공부만 하려 했지 번역(역해)일은 생각도 안 했다 한다. 1995년께 해인사에서 『종경록』의 요점을 추린 『명추회요(冥樞會要)』를 번역하는데 상중하 세 권 중 하권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서부터 번역일이 시작됐다.
이후부터 선과 관련된 고서를 보게 되었는데 오역된 부분이 상당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역경에도 나서게 된 것이다.
원순 스님이 역경에 힘쓰는 연유는 이외에도 하나 더 있다. 『선가귀감』을 처음 내놓기 전 물을 것이 있어 이에 정통한 스님을 찾아간 적이 있다. 천안에 머물고 있던 그 스님은 대뜸 ‘그 책은 내놓을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다.
『선가귀감』에 정통한 스님이 이렇게 말하니 그 연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스님의 답변이 일품이다. “선가귀감에는 선만 있지 부처님 말씀이 없다.” 의미심장한 일언이 아닐 수 없다,
『선가귀감』 자체를 탓하는 게 아니라 선의 이름으로 교를 폄하 하거나 소홀히 하는 작금의 교계에 일침을 가하는 뼈있는 말이다. 이를 모를 리 없었지만 원순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그래서 한 번 해보려 합니다.”
“논서나 어록을 볼 때 이런 뜻인지, 저런 뜻인지 애매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 역시 이런 부분 때문에 애를 먹었는데 세간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가능하면 좀 더 명쾌한 역서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부처님 말씀이 좀 더 숭고하게 널리 퍼져 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일까? 원순 스님은 기존의 현토도 잘못 된 게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며 한 문장 한 문장을 서술해 간다. 문장으로 말하면 조사나, 접속사는 물론 반어법 사용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언어와 인식의 관계를 명확히 알고 있는 스님이다. 여기에 자신이 체득한 선지까지 활용하며 번역하니 역대 조사와 부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선교회통의 혜안에 따라 써 내려간 스님의 저서를 한 번쯤 꼭 펼쳐봄직 하다. 선 숲을 거닐며 맑은 선기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회광반조-방하착 하면 ‘무심’ 알아 ‘무아’ 체득
부처-중생도 대전제일 뿐 분별 떠난 자리가 佛世界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궁금해 했던 『신심명』 일구를 여쭈어 보았다. 스님은 이렇게 해석했다.
둘의 존재 하나로써 말미암이니
하나라는 고정관념 집착 말아라.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면
온갖 법에 아무 허물 없을 것이네.
여기서 말하는 이(二)는 무엇이고 일(一)은 무엇이기에 그 하나마저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일까! “‘이’는 시비분별을, ‘일’은 진리를 상징한 겁니다.” 그렇다면 진리마저 집착일 뿐이니 버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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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순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인월암 전경. |
“중생세계, 부처님세계도 방편삼아 전제한 것처럼, 번뇌다 진리다 하는 것도 방편으로 전제한 겁니다. 중생 떠난 부처 없고 번뇌 떠난 진리도 없습니다. 분별도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 진리마저 집착하지 말라는 대 역설입니다.
다만 시비분별을 떨치느냐 마느냐 하는 게 문제입니다. 시비분별을 떨친다면 망상 무명도 사라지니, 무명으로 시작된 나도 사라지게 됩니다. 무아에 이르면 무심에도 이릅니다. 그 상태에서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 어떤 허물도 붙을 수 없습니다. 그 자리가 부처님 자리요 부처님 세상입니다. 회광반조하며 ‘방하착’하라는 뜻이라 생각하면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심명』의 첫 구절이 좀 더 확연하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至道無難(지도무난)
唯嫌揀擇(유혐간택)
但莫憎愛(단막증애)
洞然明白(통연명백)
지극한 도 그대로가 어렵지 않아
오직 하나 간택만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없으면
막힘없이 확 트여서 명백하리라.
원순 스님 뒤편 창에 비춰진 산자락이 보인다. 스님도 내 뒤에 펼쳐져 있는 산자락을 보고 있다. 거울에 비친 산자락을 보고 있는 사람이 좀 더 증득해 가면 스님이 보고 있는 산자락과 같을 것이리라. spenshoot@beopbo.com
원순 스님은
1982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해인사, 송광사 등의 제방선원을 정진 한 후 현재 송광사 인월암에 주석하고 있다. 조계종 교재편찬위원도 역임한 스님은 현재 조계종 기본선원 교선사(敎禪師)로서 어록을 강의하고 있다. 1994년 운성 스님으로부터 강맥을, 2005년 조계총림 방장 보성 스님으로부터 전등율맥을 이어받았다.
‘종경록’의 핵심을 담은『명추회요』,‘대승기신론소 별기’를 역해한 『큰 믿음을 일으키는 글』를 비롯해『원각경』,『선가귀감』,『선요』,『육조단경』,『치문』등을 선보였다. 2003년 행원문화상 역경 부문을 수상했다.
1003호 [2009년 06월 22일 15:55]
첫댓글 인식을 넘어, 관념을 넘어, 언설을 넘어있는 그 자리... 그래서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땟목이라 설하셨던가요? 오로지 체험하고 체득함에 보여지는 그 자리... 오로지 갈뿐입니다. ^^** 내생명부처님무량공덕생명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인터넷 불서 검색을 하면서 많이 뵈었던 "원순스님", 어떤 분이시길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난해하기만 한 불서를 현대인들에게 쉽게 와 닿게 번역하는 일도 중생구제의 한 방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난해한 원문의 세계는 시절 인연을 기다려 봅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 ^^ 마하반야바라밀_()()()_
선을 공부하신 스님이 교학까지....역시 세간과 출세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세계...오직 모를뿐입니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