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조(落照) / 임우희
지난주 다녀온 사문진을 다시 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낙조를 보고 싶었다. 사문진의 낙조는 강변에서 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사방이 탁 트인 강가에서 떨어지는 해를 출렁이는 물과 함께 통째로 느낄 수가 있다.
아직 5월이라 나루터는 연두에서 녹색으로 변신 중이다. 나는 특히 이 밝음의 절정에 가슴이 설렌다. 걸어서 한 바퀴 돌았을 때와 전동차를 타고 돌 때는 풍광이 또 다르다. 작은 동물원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이번에 와 보니 언덕에 그대로 있었다.
아카시아 꽃잎도 향기를 가득 품고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향기가 실려 온다. 갖가지 꽃들이 서로 다투어 향기와 아름다움으로 교태를 부린다. 꽃 중에 으뜸인 작약이 눈에 훅 들어온다. 작약의 향기는 내 어린 시절 우리 집의 향이다. 우리 고장에는 작약과 목단을 심어서 뿌리를 말려 약재로 파는 집들이 많았다. 작약과 목단 향은 은근해서 멀리서도 저절로 발길을 옮기게 만든다. 고급스러운 색깔도 융단 같은 감촉도 기억 속에 부드럽게 닫는다.
사문진은 피아노가 처음 들어온 곳이라 조형물이 대부분 피아노를 상징하고 있다. 계단을 오르는 곳에는 밟으면 피아노 소리가 난다. 어린 시절 피아노 치는 친구가 너무 부러워 언젠가 배우리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직장에 들어가 자립하고부터 처음 시작한 취미가 피아노 레슨이었다. 퇴근길에 교육을 받았지만 겨우 체르니 30번을 마치고 지속하지 못한 채 결혼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사문진에 오니 아쉬웠던 기억이 머리를 스친다.
오늘은 온전히 하루를 사문진에서 어슬렁거리기로 한다. 데코를 따라 생태박물관까지 갔다. 날씨가 흐리니 하늘에 구름이 시시때때로 변한다. 낙조를 볼 수 있으려나? 가끔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살아나 낙조를 기대해 본다. 유람선을 타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유채꽃과 바위, 흙들이 시간에 버텨낸 퇴적층에 켜켜이 쌓여 마치 아름다운 조각품들처럼 보인다. 틈새마다 야생화들이 앙증맞게 피어 바람과 더불어 춤을 춘다. 낙동강 물은 푸르게 유유히 바람과 가끔 나온 햇빛으로 은빛 보석들이 하늘에서 줄줄이 흘러내리는 듯하다. 강 옆에 서걱대는 갈대밭도, 강기슭의 바위와 야생화도 아름답다.
겹진 산 풍경 사이로 불이 난 것 같은 해넘이가 시작된다. 어린 시절 내 아버지가 보인다. 건설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현장에서 인사 사고가 났다. 보험이 부실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일등 호 답을 거의 팔아서 사고를 해결했다. 키우던 돼지까지 팔아서 아버지가 동생처럼 아끼던 기술자 가족에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사업은 부도를 맞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저녁때가 늦었는데도 돌아오시지 않았다. 나는 엄마와 마을 뒤편 우리 과수원 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삼한시대 부족국가였던 조문국 시대의 경덕왕릉과 이름 모를 왕릉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곳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큰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환한 얼굴로 나를 안았다. 등 뒤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무거운 어깨를 느꼈다. 기울어진 가세를 짊어지고 온 힘을 다해 일어서려고 하는 가장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졸업 후 가계를 돕겠다고 했다. 용기와 담력이 있는 아버지는 내가 졸업할 무렵에는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지만 나는 대학진학을 미루고 졸업 후 바로 취직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늘 짠하게 생각했다.
나는 객지에서 생활하는 동안 낙조를 볼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했다. 해를 등지고 두 팔을 벌리며 환하게 웃던 아버지. 모습은 나를 끝없이 응원하고 격려했다
.
오늘 사문진은 날씨가 흐리다. 산 너머로 불덩어리 같은 해넘이가 보이는 듯 하더니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아쉽지만 이 또한 낙조의 다른 모습이리라. 해를 등지고 두 팔을 벌리고 선 내 아버지처럼. 나는 선 채로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낙조를 바라보면서 아버지가 떠올랐군요.
구름 속으로 사라진 아버지. 부모님의 자리는 늘 아쉽기만 하지요. ^*^
아버지를 불러봅니다. 아버지~~~
아가다씨,
아픔중에도 댓글까지
늘 감사로 살아가는
모습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
작년이었는가, 시문진의 낙조가 생각나 달려갔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의 생각과 너무 닮은 글에 공감하면서, 그 곳에서 얻은 그림을 드립니다.
조명래 선생님,
우선 🎨 귀한 그림을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늘 여유롭고 편안한
그림으로 고요하고
행복한 삶이 그려집니다..
늘 건강하세요..^^
좋은 아버지께서 좋은 딸을 기르셨네요
아버지와 낙조가 아름답게 어우러집니다
이미영 선생님,
밝고 맑은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말씀도 늘 곱게 하셔셔
더 친하고 능력이 돋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