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걸어가기: 예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사43, 18-25; 마르2,1-2)
얼마 전,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한 학생 집에 다녀왔습니다.
학교에서 부모님을 한번 뵌 적이 있었는데,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고 언제 한번 오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고 해서, 그냥 모른 척하고 정말로 집에 가보았습니다.
이제 이 학생의 가족과 집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우리 학생들, 특히 대학을 마치고 사회로 나가는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개인의 가족 이야기라 그 학생에게 미리 물어보았고, 고맙게도 선뜻 양해를 해 주었습니다.
이 학생의 집에는 학생의 부모님, 아버지의 누나인 막내 고모, 동생인 삼촌 두 분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삼촌 모두 중학교 무렵부터 일종의 근육 퇴화증 같은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전신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고, 앉아서 생활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학생의 아버지는 이런 장애를 갖게 된 두 동생과 함께 한 집에서 살아왔고, 이 학생도 대학에 오기 전까지는 이 삼촌들과 함께 한 집에서 살아온 셈입니다.
그런데, 제게 깊은 감명을 준 것은 형이 동생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집이 3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3층에는 학생의 부모님께서 사시고, 2층에 삼촌과 고모가 삽니다. 그리고 1층에는 복권판매소가 있는데, 두 삼촌은 여기서 복권을 판매합니다. 두 삼촌이 판매소 주인입니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낸 셈입니다. 자신들의 삶을 최대한 직접 꾸려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학생 아버지는 맥가이버라고 불릴 정도로 눈썰미와 손재주가 뛰어납니다. 그래서 복권판매소에 있는 것들은 난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리모콘으로 작동이 가능하도록 해놓았습니다. 몸이 불편한 삼촌들이 가능한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집에 있는 엘리베이터입니다. 정말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2층에서 사는 동생들이 지상에 있는 일터에 남들 도움 없이 내려갈 수 있도록 형이 직접 재료를 사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도 한번 타보았습니다.
정말 세상의 어떤 엘리베이터보다도 멋진, 유쾌한, 감동적인 엘리베이터였습니다.
저는 이 학생의 집에서 이런 상황일 경우 가정이든 직장이든, 우리들이 보통 취하는 방식과는 아주 대조적인 태도를 보았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들은 대체로 배려라는 이름으로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배제합니다. 그래서 가정이든 직장이든 이런 사람들은 보통 전면에 나서지 못합니다.
버림이나 방치라는 최악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대개는 일방적 돌봄에 그치고 맙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우리의 태도나 분위기는 환자나 장애인들에게만 국한되어 적용되지 않습니다. 가정이든 사회든 약한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능력이 좀 떨어지는 사람들, 나이든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이 당연시됩니다.
하지만 제가 이 학생의 집에서 본 것은 이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그 불편과 장애를 전제로 하고, 자기 일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가정과 지역에 적극적으로 현존하고 있었습니다.
삼촌들은 성당에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미사에 가지는 못하고 쉬는 시간에는 주로 기도를 합니다. 삼촌 한 분은 매일 3시간씩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날은 아주 오랜만에 함께 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소박한 마루에 둘러 앉아 봉헌한 미사는, 참으로 아름다웠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예수 주위에는 누가 있었나? 예수에게는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이 몰려 왔습니다. 마침 그날 복음도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해주시는 이야기였습니다.
마루에는 몸이 정상인 학생의 부모님, 몸이 불편한 두 삼촌, 두 삼촌 사이에 앉아 아주 정답게 손을 잡고 있는 그 학생, 그리고 주위에 사시는 몇 분의 친척들이 모였습니다.
그 모습을 이렇게 둘러보고 있으니, 정말 예수께서 현존하시는 듯 했습니다. 아니 현존하고 계시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뛰어난 능력을 지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요즘의 대학의 분위기 속에서 지낸 제게 그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 아름다운 충격이었습니다.
이 체험은 제가 오늘 복음을 정말 생생하게 알아 듣도록 해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인물은 예수, 예수를 꽉 둘러싼 군중들,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입니다.
그 학생의 가족과 만남을 놓고 보니,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지없이 중풍병자의 친구들이고, 다음으로는 중풍병자입니다.
예수에게 다가간 군중은 그래도 상대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께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선택은 몸이 불편한 친구는 뒤에 남겨 두고, 자기들이라도 예수를 보러 가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 갈 수 없을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다른 선택도 가능합니다. 자기들까지 예수를 볼 수 없을 지 모르지만, 친구를 뒤에 놔두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께 가는 여정에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친구를 배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간다.”
이들은 두 번째 선택을 했습니다.
제가 들렸던 그 학생의 집에서 일어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들것을 달아 내려 보내서라도 예수께 보내 친구의 병을 고쳐야겠다는 친구들의 마음, 동생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일할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내려가도록 해준 형의 마음!
복음은 예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제게는 한 단어가 더 들어왔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과 우정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참된 우정은, 참된 관심은 사람을 어떤 명목으로든 배제시키지 않습니다. 언제나 함께 하도록 끌어들입니다.
저는 그 학생의 가족과 집을 직접 보고 나서, 그 학생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말로 정확하게 표현하긴 힘들지만, 가끔씩 그 학생을 보면, “어떻게 저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를 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저도 그 학생에게서 그런 관심과 배려를 받은 적이 몇 차례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는 때, 그 학생이 목도리를 사왔습니다. 그런데 목도리가 2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뭔 학생이 선물을 사오느냐, 왜 2장이나 샀느냐 그런 말을 인사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신부님께 드리는 선물이지만, 여기에는 반전이 있어요.” 의아해하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이거 신부님 목도리 아니에요.” 어리둥절해진 제게 하는 말! “신부님 부모님께 갖다 드리세요.” ....
올해 80세가 되신 어머니, 90세를 바라보시는 아버지, 그 연배의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야말로 뒷전에 물러나 계신 분들이지요.
별로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제 부모님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얼마 전에 신부님이 곧 부모님 찾아간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 마음이 정말 따뜻했습니다. 근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 학생이 자라난 가족과 집을 직접 가서 보니,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이 많이 풀렸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떤가 하고 반성해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특히 뒷전에 머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 능력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누구는 잘났고, 누구는 조금 못나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전제한다면, 이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더 아름다운 삶,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특히,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어떤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살맛 나는 세상이될까?
학교를 떠나는 우리 졸업생들은 학교를 마치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이 때에, 재학생들은 새로운 학기를 준비하는 이 때에, 각자 이 질문을 깊이 생각해 보고 고민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이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새 일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새 길을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
함께 걸어가는 길은 더딜지 모르지만, 분명 아름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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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얼마전 범천동을 방문해 주셨던 조현철신부님의 서강대 졸업생들을 위한 미사 강론입니다.
"더디지만 함께 가는 세상"...... 우리가 선택해야 될 길이 아닐까요...
이찬수 목사님 말씀에 의하자면 식별과 용기. 의지를 가지고..........
배려하는 마음 안에 움트고 싹트는 예수님식 사랑살이 그것을 살아가기는 어렵지만
우리의 스승이신 주님의 길이 그 길임을 압니다.
제자인 우리들 또한 저버리지 못하고 가야할 숙명의 길
그 길을 배우고 체험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한 수 배우고 느끼며 참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요즘 예수회 신부님들과 거리 미사를 드리며 나름 예수회와의 깊은 인연이 있는데
퍼가도 되겠지요? 감동에 눈물이 나네요. 너와 내가 다른 것이 아니지요. 함께 가야겠지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