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뮤지컬을 산업으로 육성시킬 정책 연구에 착수하고 뮤지컬 시상 제도 ‘더 뮤지컬 어워즈’가 탄생한다. 100억원 규모의 공연예술투자조합도 생겼다. 이런 씩씩한 행보들이 열매를 맺어 한국 뮤지컬이 하루빨리 세계 뮤지컬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멋진 불혹으로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
흔히 마흔 살을 불혹(不惑)의 나이라 한다. 한국 뮤지컬이 그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정체성을 명확히 할 때’라는 의미일 것이다.
|
|
|
1995년 연출가 윤호진씨가 제작한 <명성황후>. 한국 창작뮤지컬 최초로 미국 본바닥 공연을 실현한 기록을 남겼다. |
|
|
뮤지컬은 문화산업 중에서도 독특한 장르다. 영화ㆍ게임 등 다른 장르가 현대적인 메커니즘에 힘입은 신종 산업인 데 비해 뮤지컬은 오페라라는 고급예술을 원류로 하면서 그것에 반동한 대중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현장예술이기에 그 시장도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 영국 런던의 웨스트엔드로 집중된다. 캐나다와 유럽, 일본의 몇 개 도시가 산발적으로 뮤지컬에 강세를 보이는 게 고작이다. 이런 전례를 깨고 최근 그 희소가치가 빛나는 세계 뮤지컬 시장에 맹렬하게 출사표를 던진 것이 한국 뮤지컬이다. 1966년 예그린악단의 ‘살짜기옵소예’를 시작으로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한국 뮤지컬이 시작된 지 40년 만이다. 이제 한국 뮤지컬은 세계 뮤지컬의 심장부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한국 뮤지컬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일은 중요하다.
‘어둠의 자식’ 한국 뮤지컬
한국 뮤지컬은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사람으로 빗대자면 뛰어난 잠재력을 지녔으나 서자 출신이란 이유로 핍박당하다가 선천적인 혁명의지로 세상을 바꾸고 그 존재를 증명한 홍길동 같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꽤 오랫동안 한국 뮤지컬은 연극의 하위 파생장르로 치부되어 상업연극으로 구박받아왔기 때문이다. 뮤지컬이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문화산업으로 꼽히는 지금도 한국 뮤지컬의 정체성은 여전히 표류 중이다.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정부 기관은 기초예술 분야로 여겨 도외시하고, 문화계에서는 상업적인 공연이라 기초예술이 받는 지원에는 자격이 없다고 밀어낸다. 지난 40년간 한국 뮤지컬은 이렇게 ‘어둠의 자식’이었다.
재미난 것은 1960년대 예그린악단 활동 시절만 해도 뮤지컬은 연극의 서자가 아니었다. 제3공화국이 북한의 피바다가극단을 이기려고 만든 예그린악단은 당시 최고의 음악인ㆍ연극인과 300여 명 규모의 합창단, 관현악단, 무용단을 거느린 대규모 종합예술단체였다. 김종필ㆍ이병철ㆍ정주영 등 정ㆍ재계 거물들이 후원한 최초의 기업형 예술단체란 역사성도 있다. 오아시스레코드사와 제휴해 ‘살짜기옵소예’의 오리지널 캐스팅 음반을 공연 전에 발매하고 방송을 통해 히트시킨 점, 즐길 거리가 많지 않던 당시에 예그린악단의 뮤지컬 레퍼토리들이 주말연속극처럼 TV에서 방영되었던 점 등을 볼 때 한국 최초의 뮤지컬은 대중성과 상업성을 고려한 독자적인 장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외국 유명 뮤지컬의 한국화
그러나 1973년 국립극장 개관과 함께 예그린악단이 국립가무단으로 바뀌면서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 뮤지컬은 자폐아로서 성장기를 맞게 된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해외 유학파 연극인들이 외국의 유명 뮤지컬을 한국에 소개했는데 70년대 말 현대극장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사운드 오브 뮤직’ ‘에비타’, 1983년에 초연된 ‘아가씨와 건달들’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특히 당시 최고의 극단이었던 ‘민중’ ‘대중’ ‘광장’의 합동 공연이었던 ‘아가씨와 건달들’의 놀라운 흥행은 예그린악단 이후 뮤지컬을 떠났던 대중들과 뮤지컬이 해후한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윤복희ㆍ이경애ㆍ추송웅ㆍ김성원 등 한국 최초의 뮤지컬 스타가 탄생한 것도 그때 일이다. 80년대 말까지 이어지던 이런 해외 뮤지컬 도입은 한국 연극에 음악과 춤과 무대기술을 덧입히는 연극제작 방식으로 전 세계적으로도 특이한 형태였다.
그 80년대의 독창적인 움직임을 꼽자면 서울예술대학 동랑레퍼토리극단의 창작 청소년 뮤지컬 ‘방황하는 별들’(1985) 시리즈의 대히트였다. 한국의 정서로 한국 청소년 문제를 다룬 이 공연은 전국을 순회하며 오빠부대까지 낳았고 수많은 뮤지컬 마니아를 길러냈다. 미래의 뮤지컬 관객을 개발한 이 공연은 걸출한 배우들인 최민수ㆍ허준호ㆍ남경주ㆍ주원성의 데뷔무대이기도 했다.
1989년 최초의 뮤지컬 전용극장 ‘롯데예술극장’의 건립은 한국 뮤지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혁신적인 사건이다. 개관 기념 공연인 ‘신비의 거울 속으로’는 배우의 철저한 오디션 기용, 미국에서 초빙된 전문 트레이너에 의한 배우 지도, 연출(Baayork Lee)을 비롯한 미국ㆍ일본인으로 구성된 다국적 스태프들의 협업 등 경이로운 선례를 남겼다.
1993년에 영화관으로 용도 변경될 때까지 지금 한국 뮤지컬을 이끄는 대표적인 배우(남경읍ㆍ남경주ㆍ최정원ㆍ주원성ㆍ전수경 등)와 기획프로듀서(김용현)를 배출했다.
기업의 자본이 뮤지컬 시장에 발전적으로 투입된 이 사례는 삼성영상사업단으로 이어졌다.
한국 뮤지컬을 브로드웨이 수준으로 만든다는 옹골찬 취지로 출발했던 삼성영상사업단은 미국과 합작으로 스태프 노하우와 기술력을 통째로 한국으로 옮겨온 ‘브로드웨이 42번가’(1996), 18억원 규모의 초대형 프로덕션으로 브로드웨이의 전문적인 제작 방식을 취했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1997), 한국적 창작 뮤지컬을 모색하며 용어부터 ‘창작대중가극’이란 새로운 시도를 한 ‘눈물의 여왕’(1997) 등을 통해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뮤지컬 제작 경험을 쌓았다. 하나 아쉽게도 97년 IMF 외환위기 한파에 휩쓸려 한국 뮤지컬 분야에 전문 스태프, 전문 배우, 전문 프로듀서 개념을 심어주고 문을 닫았다.
기업 자본을 끌어들인 홍길동 형제
사실 삼성영상사업단을 뮤지컬 시장으로 끌어들인 원동력은 어둠의 자식이면서도 타고난 천성으로 끊임없이 한국 뮤지컬 풍토를 창조했던 몇몇의 홍길동 형제들이었다. 90년대 초반에 이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라는 초대형 창작뮤지컬을 올렸던 송승환, 95년에 국민뮤지컬 ‘명성황후’를 탄생시키고 뗏목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배짱으로 한국 뮤지컬 최초의 미국 공연을 실현한 윤호진, 해외 뮤지컬을 공짜로 가져와 연극처럼 만들던 당시에 정식으로 저작권 사용을 계약하고 해외 뮤지컬 제작 방식의 라이선스 공연을 공동으로 실현한 설도윤과 김용현이 그들이다.
90년대 말 한국 뮤지컬은 ‘난타’의 본격 해외 진출, 최초의 예술가 단체장으로 부임한 신선희 이사장의 과단성으로 정부 지원 예술단체의 체질 개선을 실현한 서울예술단, 조용하게 뮤지컬 시장 전체에 영향력을 미친 김민기의 ‘지하철 1호선’, 장수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박명성의 저돌적인 해외 뮤지컬 한국 소개 등으로 서서히 어두운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2년 LG아트센터 7개월 사용, 100여억원 투자에 180여억원 매출 등 당시로서는 기적을 일으킨 설도윤프로듀서의 ‘오페라의 유령’은 한 방에 한국 뮤지컬을 밝은 햇살 아래에 당당히 세웠다. 연 50억원 규모이던 한국 뮤지컬 시장을 단숨에 200억원대 시장으로 만든 ‘오페라의 유령’ 효과는 뮤지컬 전문 프로덕션, 해외 대형 히트 뮤지컬의 한국 장기공연 성공, 제작사와 극장과 투자사의 컨소시엄 제작 풍토 등 한국 뮤지컬을 산업화시키는 다양한 사례를 낳았다.
|
|
|
100억원 투자, 7개월 장기공연 등으로 한국 뮤지컬 역사를 새로 쓴 설도윤 프로듀서의 2002년 작 <오페라의 유령>. |
|
또 2003년 창작뮤지컬 ‘페퍼민트’의 쇼케이스 공연 시도 후 음악을 중심으로 한 장기적인 텍스트 개발, 다양한 사전 제작 점검 등 창작 뮤지컬 제작 풍토도 달라졌다. 2004년 이후 소극장 창작 뮤지컬이 활성화되었다. 연평균 20%의 높은 경제성장률에 뮤지컬 전문가를 배출하는 뮤지컬과가 전국적으로 15곳을 넘어섰다. 전석 매진을 기록한 배우 ‘조승우 신드롬’ 이후 뮤지컬 스타의 행렬이 이어진다. 그에 못지않은 신춘수ㆍ김종헌 등의 차세대 프로듀서들의 의욕적인 활약 또한 눈부시다. 창작 뮤지컬이 일본으로 수출되고 월평균 창작 뮤지컬 제작 편수가 세 편에 달한다. CJ엔터테인먼트는 ‘맘마미아’로 중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그야말로 급성장이다.
올해부터 정부가 뮤지컬을 산업으로 육성시킬 정책 연구에 착수했다는 희소식이 들린다. 대구는 시 자체가 뮤지컬 진흥에 나섰다. 뮤지컬 종사자를 고무하고 관객 개발에 기여할 중앙미디어네트워크와 한국뮤지컬협회 공동 주최의 뮤지컬 시상 제도 ‘더 뮤지컬 어워즈’가 생긴다. 100억원 규모의 공연예술투자조합도 생겼다. 이런 씩씩한 행보들이 열매를 맺어 한국 뮤지컬이 하루빨리 세계 뮤지컬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멋진 불혹으로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
글 이유리(청강문화산업대학 뮤지컬과 교수)
※ 이유리씨는 동숭아트센터 기획부장, 서울예술단 기획위원을 지내고 청강문화산업대학 뮤지컬과 교수이며 뮤지컬과 열애에 빠진 뮤지컬 프로듀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