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산성(교룡산성)...소순희(소리님)
조총의 탄환과
새벽부터 나선 길 이제 피곤이 엄습한다. 아무리 제좋아서 하는 답사지만 세월앞에는 장사 없는가 보다. 교룡산성 홍예문은 근자에 임권택 감독의 춘향전 촬영무대이기도 했지만 우리 역사의 서글프고 처참했던 장면을 오롯히 기억하고 있다.
문 안쪽으로 보이는 비석군은 산성을 지켰던 역대 무관별장들의 비석이며 이곳 교룡산성에는 동학군의 지도자였던 김개남이 주둔했었다고 한다.김개남은 동학혁명 때 남원성을 접수한 후 이곳에서 진영을 정비하고 활동을 했지만 끝내 여원치 고개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비석군 맞은편에는 '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라는 비석이 있다고 했지만 준비 안 된 덜떨어진 나에게는 신기루에 불과 했다.
산성은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와 신라군의 교전지였고,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맞아 싸웠고, 임진왜란때는 왜군과 승병간의 치열한 접전지였다고 한다.
산성은 해발 518m인 교룡산(蛟龍山)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축조된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둘레가 3,120m이다. 동쪽으로 계곡이 있어 가장 중요한 통로였고 현재 동문의 홍예(虹예)와 옹성(甕城) 그리고 산중턱의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이 산성을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축성의 택지(擇地)나 형식으로 보아 삼국시대(三國時代) 백제(百濟)의 축성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성안에는 우물이 99개나 있었고, 계곡도 있어서 주변의 주민들이 유사시에 입보(入堡)하여 농성(籠城)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조선(朝鮮) 초기(初期)에도 군창(軍倉)이 있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1592)때에는 의승장(義僧將) 처영(處英)이 성을 수축하고 지켰다. 선조(宣祖) 30년(1597)에는 남원부사 최염(崔혐)이 주변 일곱고을의 군사를 징발하여 수축하였고, 그후 숙종(肅宗)때에도 수축공사가 있었다.
북쪽으로는 밀덕봉(密德峰)·복덕봉(福德峰)의 험준함이 있고 서쪽도 험준하여 남북이 서로 바라다보이지 않는다. 성(城)을 지키는 책임은 남원부사(南原府使)와 별장(別將)이었고, 성안에 용천사(龍泉寺)가 있었다. 동문터와 수구문(水口門)을 비롯하여 성벽구조가 우리나라 성곽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출처/문화재청
차에서 내려 봄노래 한가락 흥얼거리며 올랐더니 만개한 벚꽃이 일주문처럼 반겨준다. 교룡산성에 위치한 선국사는 산성절로 불리기도 한다. 창건은 685년(신문왕 5) 삼국통일 직후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할 때 남원 소경(小京)이 설치되면서 함께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에 용천(龍泉)이라는 맑은 샘물이 있어 절 이름을 용천사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지금의 선국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밖의 연혁은 전하는 것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창건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교룡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200년 풍상을 간직한 배롱나무와 석탑. 근대와 과거, 역사와 설화, 할아버지와 손자 묘하게 매치가 된다. 한권의 책보다 백마디 말보다 더 많은 함축성을 내포한 장면 아닌가?
어느 시인은 '같이 웃으면서 사랑했던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만, 함께 울었던 사랑의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고 노래했다. 그러기에 저 배롱나무는 더욱더 근세의 서글픈 민중의 울음, 애닲은 역사와 오버랩되어 내마음 깊히 오래오래 기억될 듯 하다.
한국전통사찰정보에 의하면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779년(정조 3)에 처음 건립한 후 1826년(순조 26)에 중수한 것이다. 사찰에 전하는 '숭정삼회기해선국사법당신건시주질' 현판을 보면 '1779년에 법당을 새로 짓고 1808년(순조 8)에 약사전 중창, 1826년에 다시 법당을 중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현재 선국사를 설명하는 모든 자료에서는 대웅전 창건을 1803년(순조 3)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간지(干支) 기해(己亥)를 계해(癸亥)로 잘못 읽은 데서 오는 오류라 여겨진다. 근래까지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삼세후불탱의 조성연대가 1781년(정조 5)인 것은 건물의 건립연대가 1779년이었음을 증명하는 예라 할 것이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비교적 낮게 쌓았고, 자연석 주초에 위아래 굵기의 변화가 없는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귀솟음 기법을 사용하여 추녀 끝의 곡선이 가볍게 느껴지도록 했으며, 추녀마루는 활주로 받치고 있다. 정면의 가운데 칸에는 삼분합(三分閤)의 빗살문을, 좌우 협칸에는 역시 빗살문의 이분합문을 달았고 처마 밑 벽체에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 넣어 화려함을 느끼게 한다.
최근에 보물로 지정된 건칠 아미타삼존불이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아미미타불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유행한 건칠기법으로 조성되었으며, 체구가 장대하고 각 부의 비례가 균형감 있는 불상으로 착의형식이나 가사의 금구장식, 내의를 묶은 매듭의 표현 등 양식적으로 1346년 제작된 장곡사 금동 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과 같은 고려후기 14세기 전반 불상들과 공통된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선국사 대북. 대북은 소나무 통목에 소가죽을 이용하여 만든 북으로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전통적인 북제작에는 음양조화를 고려 북의 좌우에는 암.숫소 가죽을 두르는데 선국사 대북도 그런 전통기법을 따랐다고 할 것이다. 법음을 널리 펼치려는 종교적 목적 외에 승병들에게 적의 공격과 아군의 방어 전략 등 군사적 작전에도 유용하게 활용되었을 것이다.
일벌의 고통만 없다면 언제나 달콤했으면 좋으련만...... 일벌의 즐거움인가?
2008.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