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조 학사집 제7권 / 묘갈명(墓碣銘)
잠곡처사 김공 묘갈명병서(潛谷處士金公墓碣銘幷序)
숭정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에 잠곡처사(潛谷處士) 광산(光山) 김공(金公) 석중(錫重) 여임(汝任)이 졸하였다. 태어난 해인 만력 을미년(乙未年, 1595, 선조 28)과는 겨우 42년이다.
이때 나라 안이 다시 병란에 휩싸였기에 봉화현(奉化縣: 경상북도 봉화군의 옛지명) 북쪽 섬계산(纖溪山)에 임시로 묻었다가 15년 뒤에 공의 부인인 유인(孺人) 문소 김씨(聞韶金氏)가 졸하자 그의 아들 유(愈)가 다시 봉화현 동쪽 이산(尼山) 술좌(戌坐)의 언덕에 터를 잡아 공의 무덤을 옮겨 합장하였다. 일을 마치고 나서 돌을 깎아 비갈을 세워 영원히 썩지 않게 하려고 하니 훌륭한 자식이라 이를 만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신라 말에 왕자 휘(諱) 흥광(興光)이 광주(光州) 평장동(平章洞)에 은거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마침내 크게 되어 고려조에 벼슬하여 경상이 되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현달하게 벼슬한 것이 무릇 21대였다. 증조 휘(諱) 언구(彦球: 쌍벽당)는 생원이고, 조부 휘(諱) 득려(得礪)도 생원이다.
부친 휘(諱) 중웅(仲熊)은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정랑(正郞) 박운(朴澐)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는데 서열상 둘째이다. 백부(伯父) 휘(諱) 백웅(伯熊)은 먼저 현감(縣監) 김응복(金應復)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나중에 진사(進士) 홍사려(洪思礪)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어 공을 후사로 삼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민(穎敏)하여 일찍이 역봉(櫟峯) 이개립(李介立) 선생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하루에 한 편을 다 읽었다. 선생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는 진실로 속세에서 이른바 삿갓을 쓴 정자(正字)이다.”라고 하였다. 조금 성장해서는 단중한 풍모가 있어 멋대로 교유하지 않았다.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와 수암(修巖) 유진(柳袗)이 가장 존모하고 기뻐하였다.
혼조(昏朝: 광해군 때를 말함)의 당로자(當路者: 권세를 갖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았는데 위협적인 말로 두렵게 윽박질렀으나 끝내 동요되지 않았다. 이윽고 여러 차례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탄식하기를, “내가 이미 세상에 어려움을 겪었으니 서실을 지어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에 만족한다.” 하고는 집 뒤 골짝을 가리켜 지낼 곳으로 삼았으나, 일찍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공이 평소 행한 바를 살펴보면, 재물을 나눔에 양보하여 형제들에게 나눠주었고, 홀로된 조카를 돌보아 그에게 자립하도록 하였다. 죽은 스승에게 엉금엉금 기어갈 때에는 천연두가 극성을 부려도 피하지 않았고, 이웃 사람이 경계를 나누자 와서 알린 자제들에게 성을 내며 매질하였다. 이는 또 아름다운 자질과 높은 몸가짐이 남들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이 수명을 빌려주지 않아 공이 재주를 팔지 못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니 애통하다.
죽음에 임해 부인 김씨가 공의 손을 잡고 후사(後事)를 물으니 공이 갑자기 손을 뿌리쳤다. 그 평소 정력(定力)이 또한 징험할 수 있을 뿐이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유(愈)ㆍ헌(憲)ㆍ경(憼)ㆍ원(愿)ㆍ무(懋)이고, 딸들은 김종부(金宗溥)ㆍ성득하(成得夏)ㆍ금이해(琴以諧)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유(愈)는 세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한규(漢奎)ㆍ한벽(漢璧)ㆍ한기(漢箕)이고, 딸 하나는 어리다. 헌(憲)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한두(漢斗)이고 딸 하나는 어리다. 경(憼)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한익(漢翼)ㆍ한장(漢張)이고, 딸 하나는 어리다. 원(愿)은 딸 하나만 낳았다. 무(懋)는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았다.
아, 공은 이미 부모에게 효도하였고 벗들에게 신의가 있었으며 처자식에게 엄정하였다. 김씨도 그 뜻을 잘 따라 효도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다하였다. 김씨는 곧 학봉 선생 휘(諱) 성일(誠一)의 손녀이고, 세마(洗馬) 집(潗)의 딸이다. 그 아름다운 범절과 맑은 행실은 가법을 얻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공의 재주는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고/ 公之才足以觀國
공의 덕은 큰 복록을 누릴 수 있었건만 / 公之德足以膺多福
공의 수명은 어찌 이리 짧고도 촉박했나 / 公之壽一何短而促
공은오래 살지 못했으나/ 由其不贏其躬
많은 자손들은천년만년 복이 넉넉하리라 / 以裕其千百代之瓜瓞
[脚註]
[주01] 벼슬길에 …… 있고:
원문의 관국(觀國)은 벼슬하며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주역》〈관괘(觀卦) 육사(六四)〉의 “나라의 휘황한 빛을 봄
이니, 왕에게 나아가 손님 노릇을 하며 벼슬하는 것이 이롭다.[觀國之光, 利用賓于王.]”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02] 오래 살지 못했으나:
원문의 불영기궁(不贏其躬)은 한유(韓愈)의〈전중시어사이군묘지명(殿中侍御史李君墓誌銘)〉에 “그 몸은 오래 살지 못했으나
그 후손에게 더해준다.[不贏其躬, 以尙其後人.]”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東雅堂昌黎集註 卷28》
[주03] 많은 자손들은:
원문의 과질(瓜瓞)은 면면과질(綿綿瓜瓞)의 준말로, 오이 덩굴이 끝없이 뻗어나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처럼 자손이 번창하여 국운이
융성해지는 것을 뜻한다.《시경》〈면(綿)〉에 이르기를 “면면히 이어진 오이 덩굴이여! 주나라에 사람들이 처음으로 산 것은, 저수
와 칠수에 터전을 잡으면서부터이다.[綿綿瓜瓞! 民之初生, 自土沮漆.]”라고 하였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황만기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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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潛谷處士金公墓碣銘 幷序。
崇禎丙子年。潛谷處士光山金公錫重汝任卒。距其生年萬曆乙未。纔四十有二。于時國內新刳於兵。卽權厝于奉化縣北纖溪山。後十五年。公之配孺人聞韶金氏沒。其孤愈改卜縣東魯尼山戌坐之原。遷公墓合窆之。旣卒事。伐石將立碣。以圖不朽。可謂能子也。謹按。新羅末有王子諱興光。隱居光州平章洞。其後遂大。仕高麗爲卿相。入我朝。躋顯仕者凡二十一世。曾祖諱彥球。生員。祖諱得礪。生員。考諱仲態。隱德不仕。娶正郞朴澐女。生公於序爲第二。伯父諱伯態。先娶縣監金應復女。後娶進士洪思礪女。無子。以公爲後。公幼穎敏。嘗受學於櫟峯李先生介立。一日盡一編。先生奇之曰。此兒眞俗所謂着笠正字。稍長。端重有儀度。不妄交遊。金忘庵榮祖,柳修巖袗。最所慕悅。爲昏朝當路者所惡。以危言怵迫之。終不動。旣而。屢擧不中。歎曰。吾旣抹摋於世。築書室訓子弟足矣。指屋後洞爲棲息之地。而早卒不果就。惜哉。迹公平日所爲。分財資讓與同氣。撫孤姪使之成立。匍匐亡師。則不避痘疫之熾染。隣人割界。則怒撻來告之子弟。此又其資稟之美。制行之高。有大過人者。天不假之年。使公才不售而志不遂。痛哉。臨絶。金氏執公手問後事。公輒揮郤之。其平日定力。又可驗已。有五男。曰愈,憲,憼,愿,懋。女適金宗溥,成得夏,琴以諧。愈生三男。漢奎,漢璧,漢箕。一女幼。憲生一男漢斗。一女幼。憼生二男。漢翼,漢張。一女幼。愿生一女。懋未授室。嗚呼。公旣孝於親。信於友。刑于妻帑。而金氏又能遵其志。盡孝敬之道。金氏卽鶴峯先生諱誠一之孫。洗馬潗之女。其懿範淑行。得之家法者然也。銘曰。
公之才足以觀國。公之德足以膺多福。公之壽一何短而促。由其不贏其躬。以裕其千百代之瓜瓞。<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