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성선생 초상화
[세계도] 경주이씨 익재공후→21世 소경공→28世 논복공(論福公)→32世 무실(茂實)공의 7대손임./독립운동가 이상정,권기옥 부부/민족시인 이상화선생의 형과 형수)도 같은 무실(茂實)공의 7대손임.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이갑성(李甲成,1889~1981/족보명 相泉) 선생은 본관이 경주(慶州)로 익재공후(益齋公後) 21世 태상소경(太常少卿) 이지회(李之會,1407~1452)의 후손으로 호는 연당(硏堂). 대구에서 태어나 . 1915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대구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도시로,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해왔다.
그중에서도 이갑성은 3.1운동 당시 독립운동에 힘썼던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다.
1889년 10월 23일 대구에서 태어난 이갑성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사회운동가이다.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으로 헌신하였고, 해방 후에는 국회의원, 제5대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1962.10.24~1963.1.19), 광복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갑성은 처음부터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는 1989년 대구 상민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배움에 뜻을 두고
서울로 상경해 약학을 배운 후 세브란스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했다. 고로 약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1915년 세브란스의전 부속병원사무원이 되었던 그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격하였고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만세 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갑성은 1919년 최연소자 청년층을 대표하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독립운동 계획이 진행되자 서울 학생들이 시국의 추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학교에 영향력 있는 학생들과
자주 만나 손병희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계획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3월 1일 태화관을 중심으로 한 민족 대표의 서명운동과 전단 살포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신간회 사건으로 상해로 명망 했다가 귀국 후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가였던 그는 해방 후 독립 촉성국민회 회장을 지냈으며 1947년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 1952년 국민회의 최고 위원으로 추대되었다.
해방 후에도 여러 정당 단체의 고문으로 열심히 활동하였으며, 특히 1965년 광복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진력하였다. 80세 이후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해마다 거행되는 3.1운동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독립선언문을 읽었으며
1981년 여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국가보훈처의 공식적인 통계 자료에 의하면 대구 지역은 총 11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이다.
특히 이갑성은 1962년 정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아 유일하게 건국훈장 2등급인 대통령장에 추서된 인물이다.
많은 대구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이갑성!,
이갑성의 삶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전해줄 값진 인물 기록이다.
후손으로 아들 이용희는 초대 통일원장관을 역임하였고 손자 이재명(李在明,1948~)은 제14대. 15대 국회의원
청년층을 대표하여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던 이갑성!
우린 늘 그를 기억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
독립을 위해 9년여간 감옥에서 보낸 '33인의 민족대표' 연당 이갑성(硏堂 李甲成 ,1886~1981)' 지사는 '광복회(光復會)' 초대 회장과 2대 회장을 역임한 분으로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지게 한 분이 바로 이갑성 선생이시다.
그리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로 일컬어지는 이갑성 선생이 돌아가신 후 한때 난데없는 '친일 밀정설'에 휩싸여 신문에 허위광고를 낸 자가 명예훼손죄로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고 마무리된 적이 있다.
그리고 광복이후 "이갑성 선생은 1919년 2월 경성의 학생대표를 모으고, 또한 종교 지도자들과 연계하여 마침내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3.1독립선언서>를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경성뿐만 아니라 함남 함흥, 경북 대구, 경남 김해·마산, 전북 군산 등지에도 학생을 보내 <선언서>를 배부하여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뒤 붙잡혀 1922년 5월까지 3년여 옥고를 겪게 됩니다. 그 뒤 1924년 민립대학 설립을 위해 전국 각지로 다니면서 강연하다가 또 붙잡혀 2년(1928-1930), 이어 신간회 간사로 활동하다 1931년 6개월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제중약방(濟衆藥房)'을 경영하였으나 또다시 일제 관헌에 붙잡혀 1년(1937-1938), 1940년 흥업구락부 활동으로 7개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한 여러 혐의로 1941년 11개월, 1942년 8개월, 1943년 4개월, 1945년 3개월 등 모두 9년여 동안 경찰서와 감옥(형무소 전신)에서 고초를 겪은 독립투사십니다.
아무쪼록 2026년 3.1절을 보내며 선열들이 피 흘여 쟁취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오늘날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소리가 높습니다. 일제침략기에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저항하며 생애 9년여를 감옥에서 보낸 연당 이갑성 선생의 삶을 차분하게 되돌아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독립선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