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5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 추수감사주일
요한복음 2:1-11
그 일꾼의 기억
2020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사실 교회력의 추수감사주일은 우리의 현실과는 맞지 않습니다. 11월 3째 주일이면 모든 가을걷이가 대부분 끝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들은 추수감사주일을 미리 당겨서 지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교회력의 추수감사주일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건너와 처음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예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02명이 신대륙으로 건너왔는데, 추위와 굶주림으로 절반이 죽고, 인디언으로부터 배운 농사법을 사용해 먹을거리를 추수하고 너무 기뻐하며 드렸던 감사예배가 추수감사였습니다. 무엇이 많이 생겨서 고마운 것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할 희망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감사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추수감사주일도 가을걷이가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기준이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해야합니다. “2020년 한 해 동안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어떤 결실을 거두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개인에게도, 회사에게도, 그리고 교회에게도, 더 나아가 우리의 사회와 온 세상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만일 이 질문이 “한 해 경제적 소득”을 묻는 것이라면, 국세청이 다 알아서 계산해줄 것입니다.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대해 묻는 것이라면, 큰 업적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마음이 다를 것입니다. 집안에 일어났던 경조사가 기준이라면, 그것도 일반적인 경험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매년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 인생에 마지막 1주일 시간이 남았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다음 주일이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달력은 12월 31일이 마지막 날이고 1월 1일이 새해의 시작이지만, 교회의 달력은 성탄절 앞 4주전에 대림절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11월 29일 주일이 대림절 첫 주일이니, 이때부터 우리 크리스천의 새로운 한 해는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하려면, 한해 나의 결실에 대한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하지요. 그 시간이 오늘 감사주일부터 다음주일까지 꼭 1주일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2020년 한 해 동안 우리 인생 속에서 어떤 결실을 맺었습니까?” 이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올해 한 해를 상징하는 단어는 단연코 <코로나 19>입니다. 이에 관련된 서적들도 엄청나게 출판되었습니다. 신학계에서도 “코로나19시대의 신학과 교회”라든지, “코로나 이후의 교회는 어떻게 될까?”, “온라인 시대의 기독교” 등등 거의 모든 연구서적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초점 맞추어졌습니다.
그리고 비대면 예배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회재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프라인 헌금방식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덩달아 예배당에 안 나오는 것이 몸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교회재정을 걱정하였습니다. 광주광역시에서 교회에 재난지원금을 준다고 해서 우리교회도 신청해서 받았습니다. 종교단체가 이런 지원금을 받는 것이 신학적으로 옳은 일인지 아닌지 고민 중이었는데, 얼마 안 되는 지원이지만 받았습니다.
재정이 어렵다보니 지금 대부분의 교회가 교회 사역자의 수를 줄이는 방법으로 적자를 해소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지금 많이 나돌고 있고, 부교역자들, 전도사들이 사역할 교회를 찾느라고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연말결산을 위하여 수입과 지출 결산서를 만들면서 여기저기서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분명히 헌금수입은 감소했는데, 결산을 해보니 적자가 아니라 흑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비대면 원칙아래에서는 행사모임을 할 수 없어서 거의 모든 행사비용이 절감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각종 수련회도 못했고, 부흥회도 열지 못했고, 식사모임도 못하다 보니 돈을 쓸 일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 상황을 환언하면, 행사를 안 해도 교회는 돌아간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교회 다니는 재미는 반감이 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교인은 바쁘게 일하는 대신에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될까요? 마르다로 살다가 마리아가 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러니 교회의 재정을 “수입예산”에 맞추려고 긴장하고 고민하지 말고, “수입결산”이 되는 만큼만 교회의 행사를 맞추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저는 코로나19로 인한 이 문제에서 그런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가나의 혼인잔치>라고 부르는 요한복음 2장의 기적이야기입니다. 혼인잔치에 손님을 초대하고 대접을 하는데 그만 포도주가 동이 났습니다. 예상과 다른 일이 갑자기 벌어진 것입니다. 잔치준비담당자가 계산을 잘못했거나, 아니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하객이 들이닥친 것일까요? 얼핏 생각해보니, 코로나로 재정감소를 걱정하던 사람들에게, 행사취소로 흑자경영이 된 것처럼, 넘쳐나는 하객 때문에 부족한 포도주를 <예수>라는 그 한 분 때문에 손쉽게 해결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걱정거리들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해결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올 한 해 우리의 결실을 질문한 의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계산서에 정확하게 명시된 결실을 따져보자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결실들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느냐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결실이 아닌 것 같은 결실”이라고 표현하면 될까요? 조금 더 구체화하면 이런 결실입니다. 나의 말 한 마디와 행동으로 인해서 어떤 사람이 조금이라도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것은 정말 큰 결실 아니겠습니까? 절망감에 의기소침해서 웃지 못하는 사람에게 잠시라도 웃음을 줄 수 있었다면 그것도 결실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요한복음의 이 본문을 해설해 놓은 것을 읽었습니다. 이분의 관점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시점”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에 매우 신선하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변한 때가 언제인지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라고 말입니다.
이분은 본문을 면밀하게 분석하면서 결론을 <물을 떠서 잔칫상으로 가져다줄 때>라고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제 마음을 콕 짚은 것이, “물을 떠서 잔칫상으로 가져다주던 일꾼들은 그게 포도주로 변한 줄을 알았을 것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만 생각하던 우리에게, 이 해설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본 “일꾼”에게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9절에 “물을 떠온 일꾼들은 알았다.”는 말이 그 핵심입니다.
이 기적이야기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개의 기적 중 하나이고, 예수의 능력, 즉 메시아 되심을 증명하려는 의도를 가진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도는 요한의 근본의도 속에 가려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의미를 찾아내 보는 것입니다.
이 일꾼들은 그 집안의 하인들입니다. 그래서 아주 오랜 번역은 하인 또는 종이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을 보면 <디아콘>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일곱 집사라고 부르던 사람들의 직책이 바로 디아콘입니다. 요한복음이 초대교회의 양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일꾼(디아콘)이 등장하는 것은 분명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여 잔치자리를 다시 살려주는 일에 <일꾼>들이 주인공 역할을 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기쁨을 주는 주님의 사역은 우리 그리스도인 일꾼들의 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주님은 명령을 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떠서 가져다주어라”라는 명령을 이행한 것은 바로 그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가지에 퍼 담은 물이 만일 그대로 맹물이었다면, 감히 잔칫상 앞으로 가져다 줄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물을 뜨는 순간 변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 항아리에 담겼던 물을 뜨는 순간 그 일꾼들은 무척 놀라면서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이게 되는구나?” 하고 놀라면서 말입니다.
혼인잔치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가모스(γαμος)라고 합니다. 결혼을 의미하는 영어의 접미어 –gamy라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는 손을 씻는 정결예식 때문에 항상 물을 담아두는 항아리를 집에 비치하는데, 이번에는 혼인잔치라서 항아리가 6개나 있었습니다. 하필 여섯 개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연구해 낸 것이, 히브리인들의 완전수가 7이기 때문에, 아직 완전하지 못하던 것을 주님의 기적으로 완전하게 만들었다는 상징이라는 해석입니다.
물 두세 동이가 들어가는 돌 항아리 6개인데, 한 동이의 단위가 약 9 갤런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항아리에는 약 23 갤론 정도의 물이 들어갑니다. 리터로 환산하면 항아리에는 약 85리터 정도의 물이 들어가지요. 2리터 생수병 40여개입니다. 6을 곱하면 생수병 250개쯤 되겠습니다. 실감나게 표현하면 포도주 600병이나 되는 엄청난 분량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정화수를 담아 두고 율법에 따라 손을 씻는 항아리에서 잔칫상의 포도주가 나왔다는 것은, 정결법으로 억눌린 유대인들에게 먹고 힘을 내게 하는 음료로 바꾸어주었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의 구원자 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주시려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은 바로 이런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초자연적으로 해결하셨다는 기적적인 것만 보지 말고, 율법에 억눌린 백성들을 해방하여, 신앙의 자유와 기쁨을 맛보게 만드시는 예수의 사역에 감사드릴 수 있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평화목 교우 여러분,
2020년 한 해의 결실을 살펴보자는 저의 질문은 이런 의미였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는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그 일꾼의 기억을 묻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까지 일주일이 남았습니다. 혹시 내게 서운한 마음을 준 일과 사람에게 더 마음 쓰지 말고, 용서하거나 화해하거나 멀리 날려버리십시오. 혹시 내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생각나거든 그에게 용서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말과 행동 하나로 상대방에게 위로와 기쁨을 준 일이 있다면,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기회를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상대방에게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준 것과 마찬가지의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감사의 계절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얼마나 위로와 기쁨을 나누면서 살았는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결산을 해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올 한 해도 이렇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힘들어도 절망을 바라보지마시고,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 속에서 희망을 다시 세우는 2020 추수감사절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