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3년 독일 지멘스사(社)를 방문한 뒤 수행 중이던 법인장에게 “삼성의 가장 큰 강점이 뭔지 아나”고 물었다. “기술이나 관리 능력”이라고 답하자 고개를 저었다. “지멘스 회장의 소원이 모든 임원이 한자리에 다 모여보는 거라더군. 삼성은 한 시간 안에 임원진을 불러 모아 즉시 결론을 낼 수 있지 않은가”. 지멘스가 갖지 못한 결집력과 속도를 꿰뚫은 통찰이었다.
▶두뇌의 공간적 집약(集約)이 혁신을 가져온다는 원리는 AI 시대를 맞아 도시의 개념까지 바꾸고 있다. 베이징 하이뎬구 AI 원점 마을엔 ’10분 혁신권’이 등장했다. 엘리베이터만 타면 10분 만에 투자자와 협력사를 만나 문제를 해결하는 초밀집 공간 경쟁력이다. 중국 빅테크와 지방 정부는 앞다퉈 ‘10분의 법칙’을 구현할 도시 구축에 나서고 있다. 텐센트의 ‘펭귄 아일랜드’(선전)나 화웨이의 ‘롄추후 센터’(상하이)는 반값 아파트와 학교, 자율주행 셔틀을 갖춰 연구 인력 8만여 명과 가족을 한 울타리에 품었다. 공장 클러스터와 달리 연구원이 먹고 자며 자율 주행과 로봇을 직접 써보는 실증 기지(Live Lab)이자 혁신 실험장이다.
▶울타리 안에 두뇌와 삶을 가두는 방식은 중국의 전유물은 아니다. 포스코가 포스텍과 명문 초·중·고교, 쇼핑·복지 시설까지 10분 거리 안에 통째로 조성했던 ‘지곡 단지’는 한국형 10분 혁신권의 원조였다. 인도 재벌 타타가 1970년대 구현한 잼셰드푸르처럼 도로 체증과 시간 낭비 없이 10분 안에서 오직 일과 삶이 완결되게 한다는 기업 도시의 지혜도 마찬가지다. 이들도 AI 시대에 한 단계 진화 중이다.
▶초연결 화상회의 시대에 빅테크들이 ‘물리적 거리’에 사활(死活)을 거는 이유는 뭘까. 예전엔 공장을 한 곳에 모았다면 이젠 인재를 한데 모아 즉시 소통을 해야 이긴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진짜 혁신은 화상 회의가 아니라 복도에서의 예상 못한 충돌, 카페에서 즉흥적 수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법도 깨달았다. 10분이란 숫자는 단순 이동 거리가 아닌 머릿속 영감이 곧바로 협력과 실행으로 연결되는 ‘혁신의 골든 타임’인 셈이다.
▶인재 유출을 겪는 포항, 담장에 갇힌 대덕, 물리적·정신적 교류의 밀도가 아쉬운 판교 테크노밸리 등 우리 혁신 거점(據點)이 풀어야 할 숙제도 바로 이 무형의 시너지다. 최고의 두뇌들이 화상 화면을 끄고 10분 거리 안에서 마음껏 머리를 맞댈 수 있는 AI시대 초밀집 생태계를 우리도 고민할 만하다.
지식이 팡팡
10분 혁신권: 엘리베이터 이동이나 도보 10분 이내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 모여서 서로 소통하고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초밀집 혁신 생태계를 뜻함. 화상 회의나 먼 거리 이동 대신, 가까운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아이디어를 나누는 도시 및 업무 공간 전략을 말한다.
어휘력 쏙쏙
집약(集約): 모을 집, 맺을 약
한데 모아서 요약함.
사활(死活): 죽을 사, 살 활
죽기와 살기라는 뜻으로, 어떤 중대한 문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거점(據點): 의거할 거, 점찍을 점
어떤 활동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지점.
문해력 쑥쑥
1. 1993년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독일 지멘스사를 방문한 뒤 ‘삼성의 가장 큰 강점’으로 꼽은 것은 무엇인가요?
2. 중국 빅테크와 지방 정부가 만들고 있는 ‘10분 혁신권’은 무엇인지 설명해 보세요.
3. 화상회의와 메신저가 발달한 현대 사회에 빅테크들이 10분 거리 안에 모여 있고자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