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의 두 가지 의미 / 대원 스님
언어와 문자를 떠난 마음을 가리켜서 선(禪)이라고 한다.
마음을 선이라고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설명이다.
대중이 보편적으로 이해를 하게끔 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선은 마음이다' 하는 거다.
달마 스님 당시 중국에서 부처님 교리는 보편화가 됐는데,
마음을 깨닫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어서
달마 스님이 와서 마음에 대한 걸 말씀하신 거다.
禪을 묻는 건 마음을 묻는 것인데, 어떤 것이 禪인가?
禪에 대한 의미가 두 가지가 있다.
실질적으로는 두 가지가 아닌데,
깨닫지 못한 중생계로 내려와서 말하자면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거다.
전미개오(轉迷開悟)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굴려서 깨달음을 연다는 말이다.
거기에 전미(轉迷)가 있고, 개오(開悟)라는 두 가지 의미가 붙는다.
각(覺)의 차원과 불각(不覺)의 차원이다.
깨달음의 차원의 세계는 깨닫고 못 깨닫고
이런 전제를 붙일 것도 없고 일체 그런 건 없다.
탕탕무애하게 확연해서 거기에서는 공부를 한다 안 한다,
닦는다 안 닦는다 이런 걸 붙일 수도 없고 그런 게 없다.
그런데 닦는다고 하면 이제 문제가 달라진다.
닦는다는 것이 어디서부터 붙겠는가?
어리석음을 굴려서 뒤집어엎어서 깨달음을 연다는 게
중생의 깨닫지 못한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깨달음의 밝은 지혜의 눈에서는
뭐든지 다 바로 보고 바로 척척 알아차린다.
어떤 데도 막힘이 없다.
근데, 우리 중생들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삼서근이라." 이러면 중생들은 거기 막히는 거다.
"스님의 존후가 어떠십니까?"하니까 "일면불 일면불이라"
"어떤 게 부처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라"
"조사가 온 뜻이 뭡니까?" "판때기 이빨에 털났다."
이렇게 한 마디씩 한 것이
뭘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해주는 그런 게 없다.
그냥 물으니까 대답해준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도 의심할 것이 없다.
근데, 듣는 쪽에서 마음을 깨닫지 못해가지고
마음이 어두워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이거라.
그러니, 그걸 일생 앉아가지고
"어째서 개한테 불성이 없다고 했는고~?" 하고 있는 거다.
왜 없다고 했는가?
그걸 막힘이 없이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리면 되는데,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린다는 말도 완벽한 말은 아니다.
'누구는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나,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리라는 그런 말을 왜 해?' 하면
그것도 곤란한 거다.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린다',
'어리석음을 굴려서 깨달음을 연다'
이런 말이 전부 닦는다는 걸 전제하는 중생 차원에서 하는 거다.
깨달음의 차원에서는 그런 말이 필요 없다.
선(禪)이라고 하면 그 두 가지 의미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중생들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선지식이나 부처님이 하신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그거를 알아보려고 앉아서 깊이 생각해서
미한 것을 굴려서 깨달음을 연다는 거다[전미개오].
닦는다는 건 아니지만 거기에 닦는다는 전제가 들어가는 거다.
깊이 일념으로 참구해 본다 이거다.
그러니까, 선이라고 하면 원래 뭘 닦고 안 닦고 하는
그런 건 필요 없는 건데,
그러나 중생의 차원에서 볼 때는 닦는다는 전제가 붙는다.
간화선에서는 뭘 닦는다는 건 원래 전제를 안 한다. 닦는 게 없다.
"마른 똥막대기라", "삼서근이라", "무(無)라",
"일면불 월면불이라" 이 말을 닦으라고 말해준 걸로 착각하는데
그게 아니다. 그 조사들이 중생들한테 닦으라고 화두를 던진 게 아니라,
그분들은 아무 그런 거 저런 거 없이,
속이는 것 없이 바로 대답해준 것이다.
다 그렇게 해준 건데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들이 캄캄해가지고
못 알아들으니 어떡하나? 그래서 다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일러주십시오." 하면 다시 일러줘서
그걸 깨닫는 사람도 있지만 못 깨닫는 사람도 있다.
못 깨달으면 돌아가서 가만히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한다는 거다.
빨리 알아차리면 그만큼 빨리 이익이 있고
생산적이고, 오랫동안 생각하면 그만큼 비생산적이고 손해다.
그건 이 사람이 지혜가 있나,
아니면 업장이 두터워서 마음이 캄캄한가에 달렸다.
('24. 8. 4. 학산 대원 대종사)
출처: 학림사 오등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