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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학강의 - 작가론 제6강>
구직...
1953년의 그의 사진은 2016년과 맞닿아 있다.
암울했던 시기...
사진이란 권력을 이용해 권력에 소외받는 이들을 옹호했던 사진가.
혼란과 갈등으로 점철됐던 우리 생활의 어지러운 궤적을 사실주의적, 평면적 시각으로 기록한 사진가.
그의 리얼리즘은 프레임을 넘어서 있었다.
생활주의 리얼리즘의 거장 – 임응식 (九丁 林應植 1912 ~ 2001)
일찍부터 취미로 사진을 했던 임응식<사진1>이 본격적으로 사진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부산여광사진구락부(釜山黎光寫眞俱樂部)’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일본인 회원이 중심이었던 이 단체에서 사진을 연구하던 그는 1934년 일본 월간 사진잡지인 <사진살롱>에 출품한 사진 ‘초자(硝子)의 정물’이 입선되면서 등단했다. 1935년 강릉우편국에 취직하면서 그곳에서 사진활동을 하던 임응식은 강릉의 사진가들을 규합해 ‘강릉사우회’를 결성하였다. 강릉사우회는 결성 이듬해인 1936년 ‘전조선사진연맹’에 가입해 이 단체가 주관하는 전국적인 규모의 공모전인 ‘전조선사진살롱’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1937년에 출품하여 입선한 ‘둑을 가다’와 1938년 입선작인 ‘모자(母子)’가 대표적이다. 전조선사진살롱은 당시의 사진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 공모전을 통해 사진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강릉사우회 회원이었던 이형록은 1938년 ‘전원(田園)’을 출품해 입선했고, 1937년에는 현일영의 ‘쉬는 아이들’을 비롯해 박필호의 ‘속삭임’, 최계복의 ‘기다림’ 등이 가작으로 뽑혔다.
공모전 입상작들은 당시의 일본 사진계를 풍미하던 다양한 유형의 예술사진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 있었다. 1920년대 초반부터 회화적 효과를 위해 고무인화, 브롬오일 인화, 피그먼트 인화 등을 주로 사용하던 경향은 이후 빛의 강약에 따라 변화하는 농담의 표현을 제일 원칙으로 내세웠던 새로운 예술사진의 경향과 경쟁하고 있었다. 또한 부드러운 연초점 효과를 위해 렌즈 앞에 부착된 후드를 빼고 촬영을 하는 ‘베스트 단 후드 빼기’라는 기법이 유행해 예술사진을 추구하는 사진가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광선이 만들어내는 농담 표현을 중요시하는 경향은 ‘살롱사진’이라는 용어를 통해 일반화되었고, 이러한 유형의 사진을 추구하는 작가들은 광선 효과와 균형 잡힌 구도, 감각적인 화면 배치 등을 통해 형식미의 표현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사진2>둑을 가다, 1935, 피그먼트 인화
종군사진 활동과 인간가족전 유치
해방이 되면서 고향인 부산에 정착한 임응식은 사진 현상소를 경영하는 한편 부산 지역의 사진인들을 규합해 ‘부산광화회(釜山光畵會)’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이후 ‘부산예술사진연구회’로 바뀌어 해방기에 결성된 수많은 사진단체들과 더불어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사진단체들이 보여주었던 사진의 경향은 일제시대에 융성했던 공모전 형식의 사진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순수하게 한국인 사진가들을 중심으로 사진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극심한 이념대립은 사진계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사진 경향이 등장하기도 했다. 임석제가 보여준 이러한 유형의 사진은 해방 이전의 자연관조적 사진과 구분되는 새로운 형태의 사진이었지만 극심한 이념대립 때문에 순수예술을 추구하는 사진가들에게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사진을 관념의 표현과 형식미를 추구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해 왔던 사진가들이 새로운 사진 인식을 하게 된 데에는 6.25전쟁의 영향이 컸다. 종군기자로 일선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했던 사진가들은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는 사진가로서의 임무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고, 이를 통해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인식할 수 있었다. 이는 임응식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전쟁을 계기로 그의 예술 지향적이었던 사진관(寫眞觀)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임응식은 부산 피난 시절 미문화원 원장이었던 유진 크네즈(Eugene Knerz)와의 교분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종군하게 되었다. <라이프>지의 사진기자였던 행크 워커(Hank Walker)와 함께 상륙작전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체험한 이후 임응식은 9.28 서울 수복 시 유엔군의 서울 입성 장면을 촬영한 것을 끝으로 종군사진기자로서의 임무를 마쳤다.
한 달 여의 종군을 끝낸 후 부산으로 돌아온 그는 그해 10월 인천상륙작전에서 촬영한 사진을 모아 부산 미문화원과 광복동 거리에서 ‘경인전선 보도사진전’을 개최했다. 사실 임응식은 이전부터 일본에서 시작된 리얼리즘 사진의 경향을 알고 있었고 그러한 유형의 사진작업을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공식적인 전시를 통해 사진을 발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종군하는 동안 35mm 카메라로 생생한 전투장면을 촬영하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 사진을 미국무성에 인도하는 바람에 이 전시에 포함될 수 없었다.
1951년 1.4 후퇴의 여파로 부산은 피난민으로 들끓었고 전국 각지의 사진가들도 부산에 모여들었다. 이를 계기로 1952년 12월에 결성된 단체가 ‘한국사진작가협회’로, 현일영이 회장을 맡고 임응식은 부회장직을 맡았다. 회원들은 창립전을 개최하면서 제1회 ‘도쿄 국제사진살롱’에 작품을 출품하였고, 임응식의 작품 ‘흑의 여인’과 ‘병아리’가 입상했다. 이 단체는 이후 1961년 정부의 단체해산령에 따라 와해될 때까지 국전에 사진부문을 설치하고 대학에 사진강좌를 개설하는 등 사진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일반인들에게 사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 온 또 다른 계기는 1957년 임응식의 주도로 ‘인간가족전’을 서울에 유치하게 된 일이다. 뉴욕 현대미술관 사진부장인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기획해 모두 68개국 작가 273명의 작품 503점을 모아 순회전의 형식으로 개최된 이 전시는 전 세계에서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사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지구촌의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이 전시는 6.25전쟁으로 극심한 갈등을 겪었던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경복궁 미술관에서 약 한 달간 열린 이 전시회에는 30만 명이 관람하는 기록을 세우며 일반 관객을 비롯해 문화계 인사들의 호응을 얻었다.
<사진3> 구직(求職), 서울, 1953
생활주의 리얼리즘의 태동
각종 사진단체를 결성하고 ‘인간가족전’을 유치하는 등 한국사회에서 사진의 위상 확립을 위해 노력한 임응식의 활동은 매우 의미 있었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면서 그가 한국사진에 새로운 흐름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탐미주의로 일관했던 한국사진에 일대 혁신을 몰고 온 생활주의 리얼리즘은 전쟁을 거치면서 사진가들의 현실 인식이 변화했음을 말해준다. ‘내가 걸어 온 한국사단’에서 임응식은 그 변화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살롱사진’만 알고 있던 내가 종군사진기자로 참전 후 사흘간 셔터 한 번 누를 수 없었던 것은 사실상 나의 사진이념의 혁신을 위한 진통의 순간이었다. 사진작품은 결코 아름다움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든 추한 것이든 참혹한 것이든 그 모든 것은 사진작품의 대상이다. 내가 새로이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을 ‘생활주의적 사실주의’라고 명명하고, 내가 가는 사진가의 길은 바로 이 길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의 기록성에 대한 자각이 싹트면서 시작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은 50~60년대를 풍미한 한국사진의 지배적인 사진경향으로 퍼져나갔다. 임응식은 스스로 이 새로운 이념에 근거해 작품활동을 펼치는 한편, 생활주의 이론에 입각한 비평 활동도 함께 펼쳐나갔다. ‘생활주의 사진의 승리’(경향신문, 1956.12.19~20), ‘생활주의가 주류’(세계일보, 1958.11.27) 등 각종 신문지상에 발표한 비평에서 그는 한국사진의 경향이 큰 폭으로 바뀌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과거의 사진은 (중략) 민중의 생활감정과는 하등의 관련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도 없고 신선한 감각도 없이 다만 관념적인 자연미에만 도취하여 항상 유형적인 화면 형성에만 사로잡혀 있었지만’, 젊은 사진가들은 ‘사회적 현상의 객관묘사라든가 일상생활적인 인간의 순간성을 파악하기에 경도하게 되었다’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사진경향을 보여주는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정인성, 이형록, 지부원, 이건중, 손규문, 김한용, 조규 등 그가 생활주의 사진의 경향으로 제시한 작가들 중에서 상당수는 후일 ‘신선회’의 창립회원으로 리얼리즘 사진을 계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생활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서 매우 모호했으며, 리얼리즘이라는 개념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실제로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임응식이 생활주의라는 용어와 접목시켜 사용하기 이전부터 사진가들 사이에 퍼져 있었고, 이미 6.25전쟁 이전에 일본에서 들어온 다양한 유형의 리얼리즘을 통해 일반화되어 있는 개념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생활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그가 사용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첫째는 일본에서 들어온 리얼리즘과 차이를 두면서 한국적인 형태의 리얼리즘을 제안하기 위해서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둘째는 해방정국을 둘러싸고 펼쳐진 극심한 이념대립의 와중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의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실제로 임응식이 주장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은 내용이나 형식에서 일본의 도몽 켄이 중심이 되어 펼쳐나갔던 리얼리즘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약간의 차이를 갖는다. 하지만 생활주의라는 용어는 구체적인 이론적 토대 없이 슬로건의 형태로 제시되었던 까닭에 많은 사진가들은 그것이 일반적인 리얼리즘과 어떤 차이를 갖는가를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웠다. 임응식과 같은 시기에 리얼리즘 이론을 제시했던 구왕삼과 이명동도 각기 리얼리즘 사진의 개념을 규정한 바 있으나, 방법적인 측면에서의 미세한 차이를 제외하면 사진이 인간의 생활과 현실을 꾸밈없이 표현해야 한다는 단편적인 원칙만을 제시하고 있다.
<사진4> 아침, 부산 1946
생활주의 사진의 형식적 특징
이러한 생활주의 이론은 무엇보다도 우선 현실과 무관하게 탐미주의적인 태도에만 사로잡혀 있던 살롱사진의 경향과 단절하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살롱사진의 형식에 익숙해 있던 사진가들이 과거의 전통에서 갑작스럽게 벗어나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사진언어를 취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또한 리얼리즘 사진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 때문에 사진이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진 인식에도 불구하고 사진가들은 리얼리즘 사진의 형식을 진지하게 발전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결과 1950년대의 생활주의 리얼리즘으로 분류되는 사진들 속에는 내용은 인간의 생활모습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정작 형식은 살롱사진의 경향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임응식이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의 모범적인 예로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사진들로는 한국사진작가협회의 정기전에 출품되었던 정인성, 이형록, 지부원, 이건중, 손규문, 김한용 등의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생활주의 사진을 반석의 위치에 끌어올렸다는 점으로 보아 한국 사진문화사상 특기할 만한 귀중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그가 평가한 이 사진들에서도 조형성을 중시한 살롱사진의 형식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응식의 사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요소이다. 1953년 작 ‘나목(裸木)’은 부산 국제시장 화재로 폐허가 된 장면을 촬영하면서 나무 옆에 서있는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명동이 생활주의 사진의 전형으로 꼽았으며 미국의 <U.S. 카메라 연감>에 실려 찬사를 받기도 했던 이 사진은 나무와 하늘의 선명한 명암대비를 비롯해 균형 잡힌 구도, 나뭇가지가 보여주는 조형성 등으로 시대의 생활상을 반영한다는 생활주의의 개념보다는 오히려 살롱사진에 더 가까워 보인다.
<사진5> 나목(裸木), 부산, 195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임응식이 생활주의 사진의 형식을 살롱사진의 형식에서 가져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6.25전쟁 이전부터 리얼리즘 사진 연구를 계속해 왔던 그는 살롱사진의 형식에서 벗어나 생활주의 사진의 형식을 찾기 위해 고심해 왔고, 꾸준히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까닭에 6.25전쟁을 전후로 한 그의 사진에는 살롱사진의 형식과 현대적 의미에서의 다큐멘터리 사진의 형식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회화적 효과에 의지하는 살롱사진의 형식은 사라졌지만 조형성에 민감한 새로운 유형의 사진 형식도 간간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는 작품이 1946년 작 ‘아침, 부산’이나 1947년 작 ‘삶, 해운대’, 1950년 작 ‘집 잃은 닭, 명동’ 등이다. 이 사진들에서 임응식은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준다는 의도에서 피사체에 접근하고 있지만, 역광이 만들어내는 윤곽선, 안정감 있는 구도, 주 피사체와 배경 사이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조형미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1953년 작인 ‘구직(求職)’을 비롯해 부산의 피난민촌과 전후 서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사진들에서는 살롱사진의 형식이나 조형성에 탐닉하는 태도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6> 부산, 1950
<사진7> 부산, 1950
임응식이 중심이 되어 개척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은 한국사진에 기록의 가치를 처음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진가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과 역사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토대로, 일제시대를 풍미했던 탐미주의적 경향의 살롱사진 전통과 단절하고 적극적으로 시대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던 태도 또한 소중하다. 생활주의 리얼리즘은 이후 60~70년대의 한국사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기록에 중점을 둔 현대적 의미에서의 다큐멘터리 사진이 꽃피울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순수 아마추어리즘을 고집하면서 사진단체와 공모전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친 탓에 리얼리즘 이론에 대한 진지한 연구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생활주의 사진은 발전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채 50년대를 이끌었던 사진운동으로만 남게 되었다. 리얼리즘을 표방했던 많은 선구적인 사진가들은 리얼리즘 사진에 부합하는 고유한 사진형식을 완성하지 못했고, 결국은 다시 조형성에 탐닉하는 공모전 형식의 사진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임응식의 생활주의 리얼리즘이 지녔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대의 사진가들은 생활주의에서 한국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고, 이후 자신들이 전개해 나갈 현대적 사진의 방법론을 배웠다. 그런 점에서 임응식의 그늘은 현대에까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사진8> 소년시절, 부산 1946
<사진9> 인천의 성당, 1950
<사진10> 전쟁의 고아, 1950
<사진11> 양주 1972
#강의
<예고: 작가론 제7강 '사진은 나의 숙명이다' - 최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