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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봄/ 한상록
보십시오. 내게 빈 하늘을 열어
가벼운 마음 옷차림으로 흙을 밟게 하십시오
어디선가 두엄 지피는 향내 그윽하고
새살 돋는 들풀의 움직임 간지럽지 않습니까
돌아오지 않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꿀벌의 잉잉거림 속에 묻어오고
겨우내 강을 건너지 못했던 나무들의 희미한 그림자가
아지랑이 실핏줄로 살아나지 않습니까
잃은 것이 있다면 내 뜰로 와서 찾으시지요
이제 내 뜨락에 샘을 내므로
흩어진 목숨붙이들 찾아 모으려 합니다
바람만 드나들던 수족관을 가셔내고 맑은 수면에다
튀어오르는 날빛 지느러미를 풀어놓으면
찰랑거리는 햇빛을 입고 내 생의 물보라 아름다울 겁니다
옥상에 내어걸린 빨래 나날이 눈부시어가고
누군가가 돋움발로 벗어붙힌 몸을 넘겨다 보면
산록의 묵은잠을 흔들어 놓을
아스라한 진달래향 더욱 곱지 않겠습니까
저 만치 다가오는 나무들의 길이 보이고
새순같은 배꼽을 드러낸 개구쟁이 아들놈
동화 속의 악당을 찾아 타앙 탕 말을 달리면
그 길목을 따라 몇굽이의 강이 흘러서
우리의 얼어붙은 꿈도 촉촉이 적셔지지 않겠습니까
[2016 무등문예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 지연
무덤 자리에 기둥을 세운 집이라 했다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
나는 당장 갈 곳이 없었으므로
무너진 방을 가로질러 뒤안으로 갔다
항아리 하나가 떠난 자들의 공명통이 되어 여울을 만들고 있었다
관 자리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던 일가는 어디로 갔을까?
한때 그들은 지붕을 얹어준 죽은 자를 위해
피붙이 제삿날에 밥 한 그릇 항아리 위에 올려놓았을 것도 같고
그 밥 그릇 위에 달빛 한 송이 앉았을 것도 같은데
지금은 항아리 혼자 구멍 뚫려
떨어지는 빗방울의 무게만큼
물을 조용히 흘러 보내고 있었다
산자와 죽은 자의 눈물이
하나가 되어 떠나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가든
이 세상에 무덤 아닌 곳 없고
집 아닌 곳 없을지도
항아리 눈을 쓰다듬으려는 순간
이팝꽃이 내 어깨에 한 송이 툭 떨어졌다
붉은머리오목눈이 후두둑 그 집을 뛰쳐나갔다
비가 오는 날 내 방에 누우면
집이기도 하고
무덤이기도 해서
내 마음은 빈집
항아리 위에 정한수를 올려놓는다
[2016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양을 찾아서/ 구녹원
마침내 양은 사라졌다
한 의식을 잃고서 나는 은주발에 담긴 눈*이 되고 싶었다
갈피가 다 바랜 경전 속에 없던 신이
밑창 닳아 낮아진 가죽신 아래에서 흘렀다
눈 내리는 게르 뒤란에서 그 의식은 치루어졌지
양 한 마리는 선택되었고
모든 자연의 의식 속에서 가장 무죄한 저 걸음걸이
죽음으로 걸어갈 때 누구라도 하늘을 보고 땅을 볼 것이다
단도가 양의 숨길을 통과하는 직전 그 눈은 검은 천으로 가리워지고
목자牧者 는 숨 털 한 올을 뽑아 속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한다
산 자에게 건너간 울음소리, 가슴에서 질척이고
가장 조용히 자기를 버려 안식을 얻는 양의 침묵을 본다
양떼구름이 언덕으로 무리 지어 지나갈 때
두루마리 편지처럼 자꾸 도사리는 중얼거림들
대신 초원을 한 뼘 더 자라게 하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펼친다
만나고 싶은 얼굴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침상 캐시미어에 머리를 파묻고 싶었다
천년을 흐르는 구름도 있었다
양은 어디에 있을까
*벽암록 제 13 칙 파릉(巴陵) 은완리성설(銀椀裏盛雪) 차용.
[2016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둥근 길/ 문귀숙
허풍빌라에서 내린,
수백억 상속녀가 떨어뜨리고 간
셀 수 없는 동그라미의 말들
깔깔 거리다 휘청거리며 사라졌다
꽃뱀의 뱃속 같은 골목을 후진으로
나오는 오늘 일진은 구부러진 끗발이다
금요일을 발광하는 네온사인을 비켜선
흐린 그림자 하나, 번쩍 손을 들었다
뒷자리에 앉자마자 웅얼거리는 목소리
백미러로 읽어야 하는 목적지가
번져 읽을 수 없다
붉은 신호등 하나를 넘으며 자정의 경계를 넘었다
어떤 넋두리도 용납되는 할증의 시간
갈림길마다 좌회전을 외치며 더 흐려진 그림자
젖은 넋두리에 수몰된 길을
재탐색하라고 내비*가 얼굴을 붉힌다
붉은 기운이 부족한 사납금만큼 미터를 올리고
대낮처럼 환한 불면의 광장을 지나고
늙은 벚꽃나무가 떨어뜨리는 흐린 시간을
지나 돌고 돌아도 이어지는 길
더 이상 택시로는 갈 수 없는 길
내비가 멈췄다
그림자의 손가락 끝에 만월이 걸렸다.
*내비게이션
[2016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수/ 김재필
하염없이 눈물 쏟는 애인을
또 하염없는 입맞춤으로 달래본 사람이 알 것이다
같은 이에게 다른 피가 돌 때가 있단 사실을
지뢰를 밟았을 때 떠오르는 감정은 아직 발 떼지 않았다는 것
너는 위험한 마음으로 바닥을 문지른다
너도 이제 그만 목소리를 내보려 한다
그러나 침묵하고 싶지 않을 때에야 침묵다운 무거움이 온다는 걸
우린 이제 알고 있다
이 가을에는/
그리워도
목이 말라도 견디고 살자
손 흔드는 갈대를 위해
모래야 씻겨가지 말자
강 울음 듣는 것이
어디 우리 뿐이랴
견디고 사는 것이
어디 우리 뿐이랴
강을 건너는 갈대를 위해
밤을 건너는 시인이 되자
네 혀에 도달할 문장을 기다린다
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늘어지는 고드름처럼
오랠수록 흉기가 되는
조금씩 심장 가까이
이 겨울 속으로 완전히 입수하기 전에
[2016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대봉/ 김이솝
파르티잔들이
노모의 흐린 눈에 가을을 찔러 넣는다.
턱밑에 은빛 강물을 가두고 은어 떼를 몰고 간다.
쿵! 폭발하는 나무들.
온통 달거리 중인 대봉 밭에
감잎 진다.
며느리가 먹여주고 있는 대봉을
다 핥지 못하고
뚝뚝, 생혈(生血)을 떨구는 어머니.
남편과 아들이 묻힌 지리산 골짜기
유골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삽을 놓고 우는 섬진강변.
귀를 묻고 돌아오는 저녁.
[2016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통화음이 길어질 때/ 진혜진
포도에서 만납시다
머리와 어깨를 맞댄
돌담을 돌면 포도밭이 있다
맛이고 흔적인
우리의 간격은 포도송이로 옮겨가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처럼
지지대를 타고 몸을 쌓는다
씨를 품는다
우리는 서로 기댄 채 손끝이 뜨거워지고
포도는 오래 매달릴수록 그늘의 맛이 깊어진다
입꼬리 올린 갈림길마다 가위눌린 꿈에서
쓴맛이 돈다
포도는 입맞춤으로 열리고 선택으로 흩어진다
바둑판 위에서 반집을 지키는
흑백의 돌처럼
우리는 내려올 수 없는 온도
피가 둥글어진다
언젠가 통화음이 길어졌을 때
그것이 마지막 고별이라는 걸 알았고
덩굴인 엄마가 욱신거려
그해 포도 씨는 자꾸만 씹혔다
깨물어 버릴까
한 팔이 눌리고 한 다리가 불면인 잠버릇이 생긴 곳
자유로를 지나 수목장 가는 길 포도 알맹이를 삼킨다
하나의 맛이 두 개의 흔적을 낸다
단단히 쌓은 탑을 나는 한 알 한 알 허물고 있다
탑이 물컹하다
2016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농림6호/ 김우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볍씨를 담갔다. 바람 한 잎과 구름을 벗겨낸 햇살도 꺾어 넣었다. 봄 논의 개구리 울음도 잡아다 넣었더니 비로소 항아리가 꽉 찼다.
나흘 밤의 고요가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항아리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저 경건한 나흘, 지나가는 빗소리도 발끝을 세우고 갔으며 파란색 바람이 일렁이다 갔으며 또한 파란 별들이 농부의 발목 근처에서 무수히 떴다 갔다.
항아리 속에서 적막의 힘이 차오른다. 씨앗들이 뿜어내는 발아의 열, 항아리가 드디어 익어가기 시작한다. 촉촉이 스며든 물기에 몸을 여는 씨앗들, 부드러워진 껍질을 걷어내며 깊은 잠에서 눈을 떴다. 귀가 열리고 부리가 생겼다. 몸속에 숨겨둔 하얀 발을 내밀었다. 흙이 묻지 않은 순결한 발들, 뿔을 달고 푸른 들판으로 달려가고 싶은,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도란거리는 그들 모습을 보고 나는 씨나락경전을 듣는다.
적막은 발아의 요람
작은 항아리 속에서 거대한 우주가 발아하고 있다.
*1960~1970년대 재배된 볍씨 품종.
[2016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스티커/ 이명우
대문에 붙어있던 스티커를 뜯다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또 붙는 스티커를 뜯다가
스티커 뜯기를 멈추고 산동네를 떠났다
멈추고 떠날 때는 다 지운 것이어서
지운 것은 없는 것이어서
없는 여기 산동네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 몰랐다
대문을 겹겹이 도배한 스티커 화려하기조차 했다
긁히고 찢긴 조금도 아물지 않는 가업
허파와 심장과 위장이 모두 철대문에 붙어
겨울 냉기를 고스란히 빨고 팽팽해졌다
추락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력서를 쓰고 찢고 쓰고 찢었던 것
부도난 회사의 대표였던 이력은
지급기일을 넘긴 어음처럼 휴지였던 것
부도를 막기 위해 오래전에 빌린 사채가 펄럭이며 휴지를
산동네 꼭대기까지 얼마나 난타해댔던가
골목을 돌며 전봇대 기둥과 자주 부딪친다
골목에는 늘 똑같은 소리로 이자가 와 달라붙는다
눈치 없는 거미줄에 발걸음에 와 걸린다
발이라도 와 걸어주는 이것이 거미줄의 눈치
잠만자는직장여성환영 오십세이상알바모집 선원大모집
배달부즉시출근가능 일수당일대출 신용불량자도대출可
얼어붙은 전봇대를 덮는 환영, 가능, 대박,
대문에 붙어서 스티커를 뜯어내고 있는 아들이 보인다
컴퓨터 게임 대신 싫증 모르는 스티커 뜯기 놀이
경첩이 떨어지려는 대문을 어서 받쳐보려는데
어제까지 떼어낸 적색 신불자대환영 스티커가
어린 아들의 등에 세습처럼 붙어 있다
[2016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화해花蟹/ 하송
냄비뚜껑을 열자 꽃처럼 붉은 꽃게가
철갑을 하고 있다
건들기만 하면 잘라버리겠다는 듯
엄지발을 치켜든다
뭉툭한 가위로 발을 절단하자
소리를 지르는 것은 꽃게가 아니라
가위였다
골수가 울컥 쏟아지자
바다는 잠잠했다
사는 일은 파도가 잠자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갯벌 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것
꽃게, 파도가 거칠수록
두 눈 똑바로 뜨고 등딱지에 힘을 준다
한 평생 꽃처럼 배를 보이지 않는 것이 꽃게다
섬 하나가 안테나를 세우고
육지로 나간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지
바닷바람에 허리가 꼿꼿하다
바다를 버린 꽃게, 절대 바다를 돌아보지 않는다
* 화해花蟹 : 꽃게
[2016 신춘한라문예 시 당선작]
팥죽/ 이은주
매월 달의 소유 기간은 멀면서 가깝다
쟁반에 빚어놓은 옹심이
달이 되려면 뜨거운 솥 안에서 익어야 한다
반은 떠있고 반은 잠긴 달들
팥물을 빨아들여서 잔뜩 부풀어 있다
오늘 뜬 달엔 팥죽이 묻어 있다
붉은 저녁이 걸쭉하게 담긴 그릇마다
몇 개의 잘 익은 달이 떠있다
그릇마다 달빛이 새어 나온다
그릇 하나를 밝히는 달빛,
하마터면 달빛을 엎지를 뻔 했다
예전에는 어머니의 죽 그릇에 달이 많이 떴었다
죽보다 달을 먼저 뜨셨다
만월이 씹히지도 않고 몰락한다
달이 하나 씩 줄어 들 때 마다 어두워졌지만
오늘은 어머니의 죽 그릇에 달이 그대로 떠있다
어디로 가는 길을 비추려고
죽 그릇에 달 하나를 남겨 두었을까
달 하나를 남기는 식량
누군가에게는 달이 되고 부적이 되는 애기동지
보름으로 갈수록 살이 오른다
동짓날 밤 수십 년째 비어있는 어머니의 밤을 열어 보면
그릇하나를 밝히는 얼음으로 빚은 달이 무수히 떠있다
해마다 오는 긴 밤을 비춰줄 달을 꺼내 놓으시는 걸까
그런 밤이어서 달이 익어 가는 걸까
저 달이 잘 익으면 드시기 좋겠다
청상은 불구의 밤을 부적으로 쓰는 달
저 달들을 골목마다 내걸고 싶다
[2016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위험 수목 / 노국희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에 앉아있어
긴 오후가 지나가도록
지금 나뭇잎 한 장이 세상의 전부인
왕개미 옆에서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헤프게 구걸도 해보았다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
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
알록달록 실패들을 엮어 만든 바구니를 들고
저기서 당신이 걸어온다
마른 생선 하나를 내어주고는
가던 길을 간다
비릿한 기억이 손 안에서 파닥거린다
목이 없는 생선이 마지막에 삼킨
말들이 마른 비늘로
바스러진다
낡은 허물 위로 매미소리가 내려온다
울어본 기억만 있고
소리를 잃은 말들이
그림자 속에서 가지를 뻗는다
노국희
1978년생. 전남 목포 출생
이화여대 물리학과 졸업
[2016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큐브 / 강기화
면을 돌린다
네 개의 뿔을 가진 성난 눈초리
다가갈 수 없는 모서리
익숙하지 않은 경계
면을 돌린다
반듯하게 줄을 긋는
곧은 대답
전설처럼 등지고 있는 벽
위로받을 수 없는
네모의 의혹은 커지고
수상한 귀퉁이의 각은 증명한다
면을 돌린다
중앙을 공격한다
눈을 뜬다
놀이가 된 도형
일정한 방향으로
서로 맞춘다
다시 면을 돌린다
갇혔다가 풀려나는
매혹을 느끼며
활기차게 뛰어든다
비즈니스센터의
저녁 창문은
퍼즐의 공식
밀폐된 면과 면이
독기를 띠며
부활한다
[2016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족/ 정신희
공손하게 마주 앉아
서로를 향해 규칙적으로 다가갔다
흑백으로 갈라지는 길들이 뒤섞이더니
우리 사이는 점점 간격이 사라졌다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다는 것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입 안에선 쉬지 않고
돌들이 달그락거렸다
우리는 마주 보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위험했다
돌을 던지고
끝까지 서로를 모른 체하고 싶었다
길이 팽창하고
수거함엔 깨어진 얼굴이 가득하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한번 시작한 길은 멈출 줄 몰랐다
[2016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의자가 있는 골목 - 李箱에게/ 변희수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2016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생일 축하해/ 안지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누군가가 대신 읽어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 감정을 선언하니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 때에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 챘지
문장의 바깥에 서서
당신은 긴 시간동안 사람이었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오래 마주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
[2016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타크나 흰 구름/ 이윤정
타크나 흰 구름에는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배웅이 있고 마중이 있고
웅크린 사람과 가방 든 남자의 기차역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엔 출발보다 도착이, 받침 빠진 말이
받침 없는 말에는 돌아오지 않는 얼굴이 있다가 사라진다
흰 구름에는 뿌리 내리지 못한 것들의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집/
어제 본 낙엽이 거미줄에 그대로 걸려있다
풍경이 먹이가 될 수 업는 줄 아는 거미가
낙엽의 낡은 물관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이유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았다
힘들게 엮은 줄을 당겼다 푸는 동안
비대칭의 구름을 덥석 무는가 하면
아랫목을 실없이 허공에 펴기도 했다
액자에 기러기 몇 마리
기억을 더듬어 이역의 집을 물고 외롭게 떠간다
누구나 찾아갈 집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구 밖의 어느 모퉁이에 안식할 집이 있는지
회색구름이 제 날개 하나 치대며 동행한다
액자의 집에선 미역국 한 그릇 끓이지 못하다
자정을 향해 흩어지는 구두들
구두를 따라가는 눈 속에는 방이 드러나고
방에는 따뜻한 아랫목, 아랫목에는 아이들 웃음소리
몰래 흘리는 눈물과 뜨거운 맹세가 흐른다
지금 바라보는 저 타크나 흰 구름은 출구와 입구가 함께 있다
모자 쓴 노인과 의자를 잠재우는 형광등 불빛
그 아래 휴지통에 날짜 지난 기차표가 버려져 있다
내일로 가는 우리들 그리움도 잠 못 들어
나무와 새소리, 새벽의 눈부신 햇살이 반짝이고
어제의 너와 내일의 내가 손을 잡고 있다
새로운 출발이 나의 타크나에서 돌아오고 있다
우린 흘러간 다음에 서로 흔적을 지워주는 사이라서
지우지 않아도 지워지는 얼굴로
지워져도 서로 알아보는 눈으로
뭉치고 흩어지고 떠돌다 그렇게 너의 일기에서 다시 만나리
[2016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맹목/김종화
너의 서식지는 날짜 변경선이 지나는 곳, 어제와 오늘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가방 속에 접어 넣은 지도의 모서리가 닳아서 어떤 도시는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오늘의 해가 다시 오늘의 해로 떠오를 적도 부근에 숙소를 정한다 날개를 수선할 때는 길고양이의 방문을 정중히 거절해야 한다 난 철새도 아니고 지금은 사냥철도 아니니까 너에게 이미 할퀸 부분을 다시 또 할퀴는 일 따윈 없어야 하니까
기착지를 뒤적이다 마지막 편지를 쓴다 마지막이 마지막으로 남을 때까지 쓴다 나를 전혀 마지막이라 생각하지 않는 너에게
삼일 전에 보낸 안부가 어제 도착한다 너는 나를 뜯지 않는다 흔한 통보도 없이 너는 멀어졌고 난 네가 떠난 지점으로부터 무작정 흘러왔다 너의 안부는 고체처럼 딱딱하고 나의 안부는 젤리처럼 물컹하다 몸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기미조차 미약하여 난 비행(非行)이 너무나 쉽다
싸구려 여관방에서 보이는 야경이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린다 오늘도 나의 다짐은 추락하지 않고,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나의 착란은 뼈마저 버린다 너는 결코 이방(異邦)이 아니다 태초부터 회귀점이다
[2016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가로수 마네킹/ 강서연 란제리도 망사스타킹도 액세서리도 색 바랜 바바리코트도 한데 뒤엉켜있던 가판대 가을 정기세일을 마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마네킹들이 서 있다 가로등 불빛이 훤하게 조명을 비추는 쇼윈도 은행나무의 옹이가 생식기처럼 열려 있다 저 깊은 생산의 늪에 슬그머니 발을 넣어보는 저녁 어둠이 황급히 제 몸을 재단해 커튼을 친다 첫눈이 내린다 칼바람을 따라가며 천을 박는 발자국들 재봉틀 소리에 맞춰 나무의 몸속에서도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길도 불빛도 사람들도 왕십리 돼지껍데기집 화덕 위에 불판으로 모여든다 올해의 유행은 몸에 딱 달라붙는 레깅스 패션 마지막 단추까지 꼼꼼하게 채운 새들은 어디까지 갔을까 오래 서 있어서 아픈 플라타너스 무릎에 가만히 손을 얹는 홑겹의 흰 눈발 [2016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앵두나무 상영관/ 진혜진 신호등은 봄을 켠다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그루 이 도시에 앵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은 길목마다 앵두나무를 심었다 우듬지에 앵두가 켜지는 순간, 몇 갈래의 속도가 생긴다 몇 분 간격으로 익어 터지는 앵두 비와 졸음 사이에 짓무른 앵두 붉은 앵두는 금지된 몸에서만 터져 나온다 한 쪽 눈을 질끈 감는 사이 길바닥에 누운 흰 사다리를 오른다 아이가 손을 들고 소나기 그친 사이를 뛰어간다 할머니는 한 칸 한 칸 신호음 사이를 건너고 있다 사람들이 마중과 배웅으로 사다리를 건너면 앵두의 색깔이 바뀐다 빨강을 물고 순식간에 달려가는 계절이 다른 계절의 입술에 물리듯 앵두나무 뿌리는 발설되지 않은 소문까지 뻗어있다 앵두가 지고나면 초록 이파리 여름 정원에 비비새 울음으로 남아 그 울음 끝으로 떨어질 이파리로 남아 세를 불리는 앵두나무 공중으로 발을 들어 올린다 언제라도 짧은 치마를 입듯 가벼운 신호음 떠나갈 사람과 돌아올 사람의 안부가 위태로워 처음 같은 얼굴로 막을 내리지 못하는 봄이 있다 [2016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조상호
입술을 달싹일 때 해안선이 느리게 펼쳐진다 거기 해가 있다 행려병자의 시체 같은
풀잎처럼 흔들리는 그림자, 달은 빙산이 되어 은빛을 풀어헤친다 물빛을 깨고 비치나무 냄새 번져오는
젖을 희끗희끗 빤다 안개, 서늘한 빗방울, 물방울 띄워올린다 뿌리가 부풀어오른다 물거품처럼
*
웅웅거리고 부서지고 내장처럼 고요 쏟아져 내리고 내려야 할 역을 잃고 흘러가는 페름 행 전신주 흰 눈송이들
백야의 건반을 치는 사내-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길고 가는 손가락 갈라지고 떠도는 핏방울 소용돌이
변두리로 나를 싣고, 창 밖 쁘이찌 야호 행 마주보며 또 길게 늘어나고 민무늬 토기처럼 얼굴 금이 가고 스쳐가는 가,
가문비 나무 그늘 나뭇가지 그림자 일렁이는 시간 산란하는 밤의 시작을 경계를 지나 나는 또 바라보고 있고
마젤란 펭귄들 발자국 소리 울음 아, 미역줄기처럼 늘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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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푹 파인 자국 발자국들 혀뿌리가 길게 늘어져 꿈틀거린다 하얀 모래밭, 그리고 하얀 추위 그리고 하얀 포말
기억과 마디가 끊긴 생선뼈와 조개무덤 사이를 가마우지들 총총 걸어나오고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 우수아이아 숲길 뒤틀린 비치나무 뿌리 물거품이 사그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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