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에밀리 세인트존 멘델의 「스테이션 일레븐」을 읽고
세상이 멸망하고 나면 이 땅엔 무엇이 남겨질까. 잠깐 앓고 나면 그만일 것 같았던 병 때문에 전 지구가 마비된다면 어떨까. 각 국가 간 갈등이 극대화되어 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인간들이 자멸한다면 어떻게 될까.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해 좀비가 생겨났다면 어떻게 될까.
위와 같은 꿈도 희망도 없는 질문들은 지금까지 숱하게 우려먹어진 종말물 (전문용어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에서 다뤄진 주제들이다. 주제가 자연스레 '생존'이 된 만큼, 이런 장르에서는 심심하면 피가 여기저기 튀거나 뇌수가 땅바닥을 적시거나 장기자랑이 즐겁게 행해지기 마련이다. ‘생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애서, 법과 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나 날뛰는 생존자들의 허덕임을 그려내기 위함이리라.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과정이 정말이지 미친 듯이 재미있어서, 독자들은 자연히 책 속에서 끓어오르는 무법천지를 누비는 등장인물들에 매료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테이션 일레븐」의 등장인물들은 다른 종말소설과는 다른 특별한 걸 가지고 있다. 책의 배경은 최악의 질병이 전 지구를 휩쓴 지 20년 째 되는 해.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자주 나오는 설정이긴 하다. 하지만 주인공과 그 일행의 직업은 (무려) 유랑극단이다. 이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을 돌아다니며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마을에서 셰익스피어를 공연하고, 문명이 있던 시절의 음악을 관현악으로 들려준다. 그들은 각 악기에 전 지구 최고의 (어차피 지구는 멸망했으니까) 실력을 자랑함과 동시에 유능한 사냥꾼이기도 하다. 주인공 커스틴은 여배우이면서 뛰어난 칼잡이, 유랑극단의 지휘자는 명실상부 원 샷 원 킬의 총잡이, 바이올린은 궁수... 이런 강한 개성 덕분에 등장인물들이 맥 빠지는 일이 없다. 동시에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예술을 행하고 있다는 점도 정말 특이하다.
더욱 특이한 점은, 책의 절반 이상이 세상이 멸망하기 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 책의 서두에서부터 퇴장하고 마는 명배우 아서 리앤더와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파파라치들의 플래시처럼 정신없이 터지는 가십, 스캔들과 세 번의 결혼, 할리우드에서 은퇴하고 나서도 안정되지 못한 사생활에 시달리는 아서의 이야기가 책을 전반적으로 관통한다. 자그마한 섬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무대 위에서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공연하다 심장마비로 죽기까지. 그의 이야기, 하물며 그 자신도 우리들의 주인공 커스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아서와 커스틴을 잇는 것은, 아서의 첫 번째 아내 미란다가 그린 [스테이션 일레븐]이라는 SF 만화책 뿐. 미란다가 아서와의 슬픈 결혼생활 끝에 출간한 뒤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2권이 나오기도 전에 지구가 멸망해 버려 완전히 묻혀버린 책. 하지만 아서가 [리어 왕]을 공연할 당시 단역을 맡았던 어린 커스틴에게 줬던 책이다. 미란다의 슬픔과 외로움이 가득 담긴 만화책만이 두 주인공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커스틴은 멸망 이후 가지고 있던 것이 그 책밖에는 없었다. 책장이 마르고 닳도록 읽어댄 탓에 모든 대사를 줄줄이 꿰고 있다. 하지만 너무 어렸을 때 받았던 책이라 누가 줬었는지, 누가 이 책을 썼는지는 아무것도 모른다.
여기까지 대충 알아차렸겠지만, 이건 지구의 멸망을 다룬 소설이 아니다. 작가 본인도 자신의 소설을 SF니, 종말물이니 홍보하는 건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었으니까. 이것은 소중한 것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커스틴은 문명 이전의 기억을, 아서는 평생의 사랑을, 미란다는 남편의 사랑을, 사람들은 생존권을 잃었다. 주요 캐릭터들을 잇는 것은 덜렁 남겨진 만화책 한 권 뿐. 하지만 그들의 행보 하나하나와 책의 거의 모든 키워드가 (심지어 제목까지도) 만화책과 연관되어 있었다. 커스틴은 만화책을 보며 자신의 이전의 기억을 하나씩 찾아 나가고, 아서는 책을 가지며 미란다를 기억하고, 미란다는 자신의 외로움과 사랑을 책에 담아냈다. 그렇게 잃어버린 조각을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미국의 TV드라마 [스타 트렉]에 등장하는 대사이다. 누군가가 유랑극단의 마차에 갈겨놓은 글귀이기도, 커스틴이 팔뚝에 문신으로 새긴 말이기도 하다. 인간은 피 튀기는 생존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기에, 아무도 무언가를 잃은 채 살아가고 싶지 않기에. 어쩌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글귀이기도 하다.
종말이란 별 게 아닐 것이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그 순간부터 종말은 시작된다. 숱한 종말소설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문명을 잃어버린다. 그나마 자신들을 지탱해 주었던 모든 것들을. 하지만 땅에서 빛이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은 하늘에서 별을 우러르게 된다. 그 하늘 아래서, 쏟아지는 불빛 아래서, 다시 희망을 찾는다.
2017. 10. 14.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