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허라이즌스호가 촬영한 명왕성 표면. 확대된 부분은 지표 밑 바다가 얼면서 갈라진 틈이다. /사진=위키피디아
[말랑말랑과학-87]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수리수리 마수리'처럼 위 주문(?)을 들은 뒤 무언가 머릿속을 스쳐갔다면 당신은 태양계를 떠올렸을 가능성이 크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자. 태양과 거리가 가까운 행성은 왼쪽에, 먼 행성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명왕성은 지구로부터 약 56억7000만㎞ 떨어져 있다. '화성판 삼시세끼'인 영화 마션의 주인공 마크 와트니가 감자 농사를 지었던 화성이 지구와 2억2500만㎞ 정도 떨어져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먼 거리다.
▲ 저승의 강을 건너는 뱃사공 카론. 여러 미술작품에서 카론은 수염이 긴 고집쟁이 영감으로 묘사된다. /사진=위키피디아
1930년 발견된 명왕성은 그 크기가 매우 작다. 질량은 지구의 0.24% 정도, 직경도 2370㎞에 불과하다. 달의 3분의 2 정도 크기다. 명왕성에는 작은 위성(한때 위성이라고 알려졌던)인 카론(Charon)이 있으며 명왕성과 카론은 서로를 공전하고 있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명왕성과 카론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뉴허라이즌스호 덕분이다. 지구를 출발한 뉴허라이즌스호는 지난해 7월 명왕성을 근접 통과하면서 태양계를 벗어났다. 과학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명왕성과 카론을 정밀 관측했다. 당시 탐사선과 카론의 거리는 7만8700㎞ 정도로 매우 가까웠다.
NASA 과학자들은 당시 뉴허라이즌스호가 촬영한 카론의 사진을 바탕으로 카론의 지형 등을 정밀 분석했다. 과학자들의 주목을 끈 것은 카론의 표면에 길게 늘어선 찢어진 상처 모양의 지형이었다. 과학자들은 카론의 내부에 고대 바다가 존재했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오랜 옛날 카론의 지표 아래엔 거대한 바다(subsurface ocean)가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카론이 생성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행성은 아직 따뜻했기에 지표에 얼어붙은 물이 녹아 지표 밑으로 스며들어 거대한 바다를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던 어느 날 행성이 차갑게 식으면서 지표 밑 바다는 얼어붙었다. 물이 얼음으로 바뀌면 그 부피가 늘어나는데(겨울철 수도관 동파도 이 같은 원인이다) 물이 얼어붙으면서 팽창한 카론이 어느 순간 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갈라져버린 것이다.
NASA는 "마치 (마블의 만화 캐릭터인) 브루스 배너 박사가 헐크로 변신할 때 몸이 부풀면서 그의 셔츠가 찢어지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과학자들은 이 갈라진 거대한 틈에 '세레니티 협곡'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길이가 무려 1800㎞에 달해 카론(지름 1200㎞) 둘레의 절반에 달하며 최고점과 최저점의 차이도 무려 7.5㎞에 달한다. 거대한 협곡으로 유명한 미국 그랜드캐니언이 길이 446㎞, 최고점과 최저점의 차이가 1.6㎞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랜드캐니언은 세레니티 협곡 앞에선 꼬꼬마에 불과하다.
카론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태양계 행성들의 영문명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이름을 따왔는데 목성 '주피터(Jupiter)'가 주신(主神)인 제우스, 화성 '마스(Mars)'는 전쟁의 신 아레스, 금성 '비너스(Venus)'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등이다. 명왕성도 마찬가지다. 명왕성의 영문명인 '플루토(Pluto)'는 저승의 신 하데스다. 고대 바다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카론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죽은 자를 태워 저승의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다. '뱃사공'인 카론에선 고대 바다 외에도 고체 상태의 암모니아가 발견되기도 했다. 지옥의 뱃사공에 어울리는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지옥의 여러 강을 건너 마침내 저승에 다다른다고 믿었다. 비통의 강 아케론, 시름의 강 코키토스, 불의 강 플레게톤,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 극락의 벌판 엘리시온을 지나 증오의 강 스틱스를 거치면 지하세계를 지배하는 하데스의 궁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러 미술 작품에서 '긴 수염을 늘어뜨린 고집쟁이 노인'으로 묘사되는 카론 영감은 죽은 자들을 배에 태워 날랐다. 물론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망자들은 뱃삯을 치러야 했다. 유족들은 망자가 저승까지 무사히 갈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망자의 입에 동전을 한 닢씩 넣어줬다.
▲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와 지옥문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 하데스는 카론이 제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혹한 형벌에 처하기도 했다. /사진=위키피디아
무임승차는 안 되고 죽은 자만 태운다는 원칙이 있지만 예외도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저승의 문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개인 케르베로스를 처치하러 갈 때 카론은 배에 태워줬다. 죽은 아내를 찾으러 저승에 간 산 자인 오르페우스도 하프 연주로 카론을 감동시켜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이 같은 일이 있자 하데스는 분노했고 카론에게 1년간 쇠사슬에 묶이는 형벌을 가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앞서 언급한 '수금지~'의 공식이 더는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2006년 국제천문연맹(IAU)은 공전 구역 내에서 명왕성이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를 제시한 뒤 명왕성을 왜소행성으로 강등시켰다.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신에게 평소 부당한 대우를 받은 카론 영감의 소심한(?) 복수였을까. 플루토(명왕성)가 주피터, 마스, 비너스 등 신들의 세계인 태양계에서 쫓겨난 것은 카론 때문이었다.
[이영욱 과학기술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