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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과 과거청산:
나치시대 역사가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1)
송 충 기
한 개인의 전기(傳記)는 어느 것이나 한 개인의 독특한 삶이
자신의 동시대 및 주변세계, 말하자면 전제(前提)되어 있는 거대한 구조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테오도르 쉬더(Theodor Schieder)2)
1. <나치시대 역사가> 논쟁
1998년 가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제42차 독일역사학대회를 뜨겁게 달군 ‘나치시대 역사가’에 관한 논쟁은, 피셔논쟁(Fischer-Kontroverse) 이래 최고의 논쟁이었다는 평이 나돌 정도로 격렬했고 감정적이었으며, 또 그만큼 정치적이었다. 게다가 이 논쟁은 여론의 주목, 견해의 대립, 그리고 청중의 뜨거운 반응이라는 논쟁의 삼박자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3) 나치와 관련된 격렬한 논쟁을 이미 수차례 경험했던 독일 역사학계가 이날 또 다시 이처럼 떠들썩한 논쟁에 휩싸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른 사람이 다름 아닌 베르너 콘체(Werner Conze)와 테오도르 쉬더(Theodor Schieder)였기 때문이었다. 전후 독일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이 두 역사가가 바로 나치에 ‘부역한’, 문제의 역사가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구조사(Strukturgeschichte) 및 사회사(Sozialgeschichte)라는 새로운 학풍을 선도하면서 현재 독일 역사학계의 핵심적인 인물들을 길러낸 장본인이었고, 따라서 이 논쟁은 보기에 따라서는 역사학계의 ‘아버지 살해’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들 이외에도 그동안 나치부역의 혐의로 인해 논쟁과 연루된 역사가나 학자들은 많았다. 법학자 슈미트(Carl Schmitt)와 철학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같이 널리 알려진 경우는 차치하고서라도,4)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역시 독일의 대표적인 역사가였던 오토 브룬너(Otto Brunner)나 에르트만(Karl Dietrich Erdmann)이 나치에 부역한 혐의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5) 또한 아헨(Aachen)공대의 독문학 교수이었던 쉬베르테(Schwerte)가 원래는 나치당원이자 SS에 소속된 쉬나이더(Schneider)였음이 최근 밝혀져 커다란 충격을 주기도 했다.6) 그리고 이제는 콘체와 쉬더의 스승이었던 유대인 출신의 역사가 한스 로트펠스(Hans Rothfels)가 나치시대 역사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로 논쟁이 확대되고 있다.7)
역사학계 내부의 새로운,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진정한’ 과거청산이라고 불릴 만한 이 논쟁은 일단 다음 세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이들 나치시기 역사가들이 당시 나치즘과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 과연 얼마나 나치범죄에 연루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사실, 당시 역사학은 나치 이데올로기의 선전도구로 전락한, 말하자면 ‘투쟁하는 학문’(kämpfende Wissenschaft)(Walter Frank: 나치의 대표적인 관변역사학자)의 성격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다.8) 그러나 나치에 적극적으로 동조해서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확실하게 드러내었던 이른바 나치어용 사학자들은 이미 1945년 직후 탈(脫)나치화 등을 통해 상당부분 학계에서 추방당했다. 따라서 이 논쟁에서 문제가 된 역사가들은 소위 이데올로기나 정치선전으로서가 아니라, ‘학문’을 통해 나치정책에 기여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학문’과 정치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이들이 비록 관변사학자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와서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나치 이데올로기에 ‘공헌한’ 학자들이었다면, 이들이 어떻게 1945년 이후 ‘별다른 문제’ 없이 다시 학교에 복귀하여 대학교육을 담당할 수 있었을까? 물론, 당시 탈나치화 작업의 ‘정책적’ 실패와 한계가 이들이 다시 강단에 복귀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 당시 상황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 역사학계는 그 정치적 입장의 차이(나치 저항자와 순응자 사이의 차이를 포함하여)와 독일 역사상(歷史像)에 대한 심각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탈(脫)나치화의 작업에 대해 단순한 침묵의 차원을 넘어 ‘끈끈한 유대와 공조’체제를 과시하면서 ‘동료 구하기’에 나섰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서로의 저작(著作)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이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한 것은 나치시기에 잘 다져진 강력한 ‘학문공동체’의 정치적 유산 때문이었을까?
셋째, 왜 이들의 문제가 반(半)세기도 더 지난 1990년대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제기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더욱이 다름 아닌 나치청산에 적극적이었던 독일 역사학계에서조차 이 문제가 왜 ‘뒤늦게’ 불거졌는가 하는 질문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혹이 전제되어 있다. 이날의 주인공들은 나치즘의 패망 이후 독일 역사학계를 다시 일으켜 세웠던 전후 독일 역사학의 제1세대로서, 1960년대에 번갈아 독일 역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할 정도로 역사학계 내에서 그 영향력이 막강했다. 따라서 이들의 ‘나치부역’ 문제가 이제 비로소 제기된 데에는 이들의 제자인 제2세대라는 이른바 ‘비호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의심이 그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이들의 문제가 왜 199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제기되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소위 나치 역사학의 학문적 청산을 논할 때에는, 이에 협력한 역사학자들의 정치적 성향과 동기를 밝히는 ‘외적인’ 작업과 그 기저에 숨겨진 역사학의 인식론적 궤적과 동력을 살피는 ‘내적인’ 작업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고는 위의 세 가지 질문을 각각 시대적 상황과 지식사회학적 관계라는 양 측면에서 살펴볼 것이다.
2. 나치시대의 ‘평범한’ 역사가
콘체와 쉬더, 이 두 역사가는 학문과 경력 면에서 그야말로 단짝이라고 칭할 만큼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9) 곧 이들은 나치의 정권장악에 때맞춰 박사논문을 제출했고,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무렵에는 동유럽지역을 주제로 교수자격논문을 제출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난 이후에 주로 동유럽지역의 연구에 주력했던 것이나, 1945년 나치패망 후 다시 강단에 복귀하여 역사가로 주요한 업적과 경력을 쌓았던 것도 비슷했다. 그런데 나치시기에 이들이 행한 <동유럽연구>, 소위 동유럽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일민족에 대한 연구가 나치의 전쟁목적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는 점이 주요한 논란거리이다. 소위 나치가 이 지역의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청소’하여 게르만족의 정주지역으로 만들고자 했던 절멸정책(Vernichtungspolitik)이 바로 이 학문적 이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젊은 신진 역사가였던 이들이 <동유럽연구>를 어떠한 배경에서 추진했는지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이 깊숙이 관여한 (콘체의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고) 동유럽연구는 원래 나치가 팽창정책의 일환으로 기획한 독일인들의 이주정책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이들은 ‘유대인 추방’을 공공연히 언급함으로써 나치의 기대에 부응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쉬더는 1945년 3월에도 여전히 게르만족의 “동일한 민족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주민이주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하면서, ‘나머지 폴란드 지역에서 유대인을 제거할’ 것을 주장했다.10) 또한 콘체는 1939년 9월 “나치혁명이 벨루시아 지역에서조차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총통의 명성이 외진 곳에까지 스며들었으며, 특히 유대인 문제에 관한 그의 분명한 정책은 가난한 벨루시아 농민조차도 날마다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11)라고 썼다. 이들이 작성한 문건 가운데 가장 논란거리는 바로 1939년 쉬더가 직접 서명한 것으로 보이는 <폴란드기획안>(Polendenkschrift)이다. 이것은 당시 정치가들이 동유럽의 질서를 재편하는 결정을 내려는 데 동유럽연구자들이 학문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12) 여기에서 쉬더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유대인을 폴란드 도시들에서 추방할’ 정책안을 제시했다.
이 논쟁을 주도하고 있는 언론인 출신의 역사가인 알뤼(Aly)는 이를 토대로 이들 역사가들을 나치절멸정책의 ‘기획가’(Vordenker)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3) 게다가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이들 역사가들이 나치가 정복한 지역을 여행했고 유럽 유대인들의 범죄를 최소한 인지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이들의 홀로코스트 연루설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비록 쉬더는 1945년 전쟁 직후 시행된 탈나치화 작업에서 “나치당의 전체 목적과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았다고 답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 동구권의 민족연구를 주도한 사람들은 1943년부터 직접 SS의 제국안전부 소속이 되었고, 지금까지 추정된 것과는 달리 이들은 개별적인 연구가 아니라 체계적이고 서로 직접적으로 연관된 거대한 프로젝트14)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알려지면서, 이들 역사연구의 종착점이 어디인지가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요컨대 ‘핏줄과 향토의 역사가’(Blut-und-Boden-Historiker)들이 결국 인종적 구획정리(Flurbereinigung)의 밑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으로, 이 두 사람은 이제 칼 슈미트와 같은 ‘나치협력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물론 이들의 저작이 곧바로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벨러나 몸젠(Wolfgang Mommsen)은 쉬더가 위에서 지적한 문건들에 직접적으로 간여했다기보다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서명했던 것에 불과했다며 그것을 쉬더 자신이 직접 작성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코카도 알뤼가 쉬더의 글에서 문맥을 무시한 채 이곳저곳에서 조금씩 발췌하며 짜 맞추기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15) 또 하르(Haar)는 쉬더가 연루된 문제의 기획안이 SS의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국가기관의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다.16)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두 사람을 홀로코스트의 ‘기획가’라고까지 부르기는 어려울 법하다. 특히 나치의 절멸정책이 이들이 기획하기도 전에 이미 작성되어 있었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물론 ‘기획가’까지라고 부르는 데에는 다소 논쟁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예컨대, 몸젠(Hans Mommsen)은 “이들은 나치에 가까웠던 것이 아니라 나치 그 자체였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에 따르면, 쉬더는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콘체는 인종주의적 성향까지 지녔다.17) 예컨대, 콘체가 1940년 비인대학에서 제출한 교수자격논문을 심사했던 지도교수 군터 입센(Gunther Ipsen)에 따르면, 그의 논문은 발틱지역에서 “유대인들이 불청객으로 눌러 앉게(Einnistung des Judentums)” 되었으며, 이는 “인종적인 차원에서 부조화된” 사회질서가 되었음을 밝혀주었다.18) 또 쉬더도 자신의 연구가 나치당의 정책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유럽 연구프로젝트가 어떻게 기획된 것이며, 누가 그 재정적 뒷받침을 하고 있는지 분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나치 절멸정책을 주도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렇듯 이들이 나치의 절멸정책에 이바지하는 역사연구를 감행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물론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당시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이었다.19) 하지만 이들은 1933년까지는 나치당에 입당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또 가까이 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소위 입당금지조치가 철회된 때인 1937년에 이들은 다른 동료 역사가들과 함께 나치당에 입당했다.20) 그 후 이들은 나치정책의 수혜자가 되었다. 예컨대, 콘체는 1943년 역사학 교수로서는 결격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레슬라우 대학교수로 임명되었다.21)
그러므로 커쇼(Kershaw)의 지적에 따르면, 이들의 행동은 하이데거와 슈미트 등 유명한 인물들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이상주의’가 ‘출세주의’와 결합하여 생겨난 것일 수 있다.22) 그러나 역사적 설명으로서 이것은 다소 피상적인 지적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설명은 이 당시 대학가와 지식인들이 보여준 나치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나 1945년 이후의 그 변신과 생명력을 해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23) 이에 다른 사람들은 이들의 학문경향을 시대적 맥락화로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말하자면 이들뿐만 아니라 당시 수많은 역사가들이 전반적으로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들은 민족보수주의자로서 학문을 추구했다지만, 결국은 민족사회주의자(나치)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설명이다. 쉬더와 콘체 만이 아니라 이 세대의 역사가(소위 1910년을 전후 태어난 세대)들은 전반적으로 반(反)자유주의적이고 반(反)민주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고, 바이마르 시대를 거부하고 나치를 옹호했던 우익인사들로서 자유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베르사유조약 이후 영토상실에 반감을 품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독일 영토 밖에서 살고 있었던 ‘독일동포’에 관심을 쏟았고, 이 배경에서 ‘민족사’(Volksgeschichte)가 1920년대에 등장할 수 있었다. 이는 곧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부르주아 층에서 반(反)유대주의가 확산되고 학자들이 나치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24)
그러므로 당시 민족사를 주도했던 소위 로트펠스 사단(Rothfels-Gruppe)이라 불리는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역사가 집단―콘체와 쉬더 이외에도, 베르너 마르케르트(Werner Markert), 칼 얀트케(Carl Jantke), 에리히 마쉬케(Erich Maschke), 테오도르 오벌렌더(Theodor Oberländer)25)등이 있다―은 당시 바이마르와 나치 시기 전형적인 ‘사고방식(Denkstil)’26)을 실현했던 일종의 전위(前衛), 곧 학문적 ‘사고공동체(Denkkollektiv)’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경험했던 지속적인 독일사회의 불안정에 대한 우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쾨니히스베르크의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이들은 이 불안정, 곧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동(東)프로이센의 민족 및 영토, 그리고 근대 산업사회의 이념에서 나오는 불안정을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질서와 안정을 더 추구하게 되었다.27) 이 공통된 경험에서 이들은 하나의 ‘사고공동체’를 구성했다. 문제는 이 ‘사고방식’의 존재와 역동성을 감안할 때, 이들 역사가들은 단순히 나치의 수동적인 하수인으로 복무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 정치의 동반자로서 기능했다는 점이다. 이점은 특히 자신들의 학문적 이상을 충족하기 위해 자신들과 견해가 다른 역사가들을 배제하거나 ‘도태’시켰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예컨대, 이들은 마이네케 등 자유주의적이거나 사민당 계열의 역사가들을 일부러 배제했으며, 또한 오벌랜더의 경우에는 슬라브족은 독일 국경 내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가 1938년 쾨니히스베르크 모든 직책을 상실하기도 했던 것이다.28)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은 자신들의 ‘사고공동체’와 ‘사고방식’을 지키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1945년 이후에도 그대로 드러날 것이었다.
3. 1945년 이후: 정치적 전환과 학문적 연속성
1945년 이후 진행된 역사가들에 대한 탈(脫)나치화 작업이 이러한 정치와 학문의 동반자적 관계를 무시한 채 개개인의 정치적 이력에만 주목했던 것이 ‘역사학의 과거청산’―이것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면―에 비극이라면 비극이었다. 연합국의 탈나치화 작업은 그 자체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했고, 애초부터 실패가 예견되어 있는 측면도 없지 않았지만, 소위 역사학계의 경우 주지하다시피 몇몇 관변사학자들 제외하고는 대다수 역사가들이 거의 다 강단에 복귀했다.29) 게다가 ‘동유럽연구’의 추진자들이 1945년 이후 독일 역사학의 재건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이 당시 탈나치화 작업의 원래 의미를 크게 퇴색케 하는 부분이다.30)
이처럼 1945년 이후 역사학자 가운데 학계에서 영구히 추방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던 이유는 (먼저 대학교의 탈나치화 과정이 다른 사회 분야와는 달리) 대학교 스스로가 이 탈나치화 작업을 위임받았던 데에 있었다. 대학당국이 탈나치화를 주도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숙청대상자’를 심사하는 일을 동료교수들이 맡게 되었다. 예컨대, 리터는 프라이부르크 당국이 설치한 ‘숙청위원회’(Bereinigungsausschuß: 탈나치화 위원회)에서 문제의 교수들을 찾아내야 하는 ‘달갑지 않은’ 임무를 맡았다.31) 교수들은 서로에게 나치부역의 혐의를 벗게 해주는 세척증서(洗滌證書, Persilschein)를 제공함으로써, ‘학문공동체’의 역량을 잘 발휘했다.32) 이는 단지 역사학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학계 일반, 더 나아가 전후 독일사회의 공통된 면모였다. 그렇지만 학계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학계에서 소위 쾨니히스베르크의 ‘사고공동체’가 그대로 온존함으로써 이들이 다시금 역사학계의 새 주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서 역사가들이나 학자 일반의 ‘집단적 이기주의’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당시 독일교수집단이 관료로서 지니고 있었던 ‘폐쇄성’과 ‘보수성’을 감안하면, 이들의 집단적 움직임은 이해할 만하다. 이들은 정상적인 학문의 업적보다는 나치의 ‘정치적’ 수혜를 받아 교수가 된 사람들을 탈나치화의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배제시켰는데, 여기에는 탈나치화라는 정치적 명분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폐쇄적인 집단성도 크게 작용한 듯이 보인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들을 당시 독일사회의 ‘파국적인 위기’상황에서 처한 시대의 희생자로 간주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동안 학문적 적대자로 간주되었던 사람에게조차 ‘시대의 희생자’라는 공통된 인식에서 서로 관대하게 대하는 풍토에 젖어 있었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역사학계는 ‘나치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역사상(歷史像)을 변화시키는 데 합의했다.33) 물론 독일의 역사적 전통이 잘못되었다는 테제에 대해서는 몇몇 망명 역사가들을 제외한 모두가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나치를 낳게 한 독일의 민족전통을 비판하고, 그 전통 위에 서 있던 기존의 ‘독일 역사상을 수정(Revision des deutschen Geschichtsbildes)’하자는 데에는 거의 동의했다. 나치 치하에서 독일에 남아 ‘고초’를 겪었던 전력으로 인해 나치청산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던 두 대표적인 독일 역사가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와 리터(Gerhard Ritter)34)가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본 취지에 동감했고, 또 새로운 독일 역사상의 수립에 이바지했다. 물론 이러한 독일 역사상의 수정은 나치청산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변호하려는 성격이 짙었다. 이로 인해 1945년 이후 역사학계의 인적 연속성은 확실하게 보장되었다. 콘체 자신도 1976년 퇴임강연회에서 동서독의 역사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언급하면서 1945년 이후 나치와 연루된 역사학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학은 다시 열렸습니다.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나치전력으로 해직된 사람들을 제외하면 개인적인 연속성은 유지되었습니다.”35)
비록 탈나치화의 성과가 미비했더라도, 문제는 이러한 인적 연속성이 소위 벨러가 말하는 정치적으로 ‘반성적 학습과정’을 겪었는가 하는 점이다. 예컨대, 테오도르 쉬더의 아들이자 역사가인 볼프강 쉬더(Wolfgang Schieder)에 따르면, 콘체가 비록 그 스승이자 인구사회학자인 군터 입센(Gunther Ipsen)의 이론과 방법은 이어받았지만, 그의 ‘이데올로기적인 사고’는 이어받지 않았다고 주장한다.36) 이처럼 이들 두 역사가가 나치의 ‘그릇된’ 정치적 목표를 1945년에는 버렸다는 것에 대해서는 후학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학문적인 것은 어떠했는가?
마이네케와 리터뿐만 아니라 1945년 이후 다시 대학에 자리를 잡은 로트펠스, 브룬너, 쉬더 등 소위 동유럽연구의 선구자들이 다시 학문세계에 등장한다. 이들은 민족국가 중심의 역사상을 탈피하고 범(汎)유럽사, 더 나아가 보편사(普遍史) 범주에서 바라보는 민족사를 구축했다. 그럼으로써 나치의 파국은 독일민족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전(全)세계적 차원에서 생겨난 공통적인 문제, 예컨대 근대적인 위기로 파악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37) 이와 같은 시각에서 보면 비록 제한적이고 소극적이지만 1945년 이후 독일 역사학계의 변화, 특히 과거청산과 관련된 노력은 나름의 결실을 맺은 듯하다.
그렇지만 최근에 확인된 것처럼, ‘민족사’는 1945년 이후 여전히 학문적으로 많은 수요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문화적이고 민족적인 문제가 여전히 계속해서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전후에도 소련과 폴란드가 점령한 동부지역에 대한 정치적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보수주의 진영에서 보기에는, 다방면으로 문제가 증폭되었을 뿐, 1918년의 상황이 1945년에도 반복되고 있었다. 1918년에는 러시아가 동쪽을 위협했고, 이제는 ‘볼셰비키’가 독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서독 내에서 내부의 적이 여전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여전히 <동유럽연구>가 다시 필요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질 수 있었다.
둘째는 추방민과 피난민을 서부지역에 ‘무리 없이’ 정착시키는 데에는 이들의 연구가 계속 필요했다. 여기에는 그 동안 전래되었던 동화, 풍습 및 방언 등에 대한 연구도 빠질 수 없었다. 이러한 측면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예는 바로 1951년부터 1961년까지 무려 10여년이나 지속된 거대한 연구프로젝트인 <동부-중유럽의 독일인 추방에 관한 자료집(Dokumentation der Verteibung der Deutschen aus Ost-Mitteleuropa)>이었다.38) 추방된 독일 피난민들의 문제를 담당하고 있던 정부부처의 지원을 받은 이 연구프로젝트의 책임자는 바로 쉬더였으며, 여기에는 로트펠스, 콘체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를 통해 이들은 전후 독일 역사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또한 전후 세대인 젊은 사학자들, 예컨대, 후에 뮌헨 <현대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던 브로샤트와 ‘빌레펠트 학파’(Bielefelder Schule)를 만든 벨러 등이 참여했다. 바이마르 시대 세대에서 전후 세대까지 독일 역사학계의 삼대(三代)가 공동으로 참여한 이 연구는 그 내용과 정치적 영향력에 상관없이 그 형태상으로 이미 독일 역사학계의 연속성을 웅변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셋째, 1945년 ‘서방으로의 통합’이 진행되면서, 각 지방에서는 전통적인 고유한 문화가 상실될 위험에 직면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보존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지방주의가 점차 강조되었으며, 이러한 배경 하에서 나치 때 ‘발굴’되거나 강조되었던 민속학 등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39) 따라서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 연구는 1945년에도 계속되어 학문의 연속성을 가능케 한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인적 ‧ 학문적 연속성으로 인해, 1960년대까지 진행된 나치시기 역사학계에 대한 연구가 역사학의 ‘나치청산’에 관련되어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어쩌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몇몇 연구자들이 역사학계 내부에 있던 나치의 잔재에 대해 주목하긴 했지만, 사회적 문제로까지는 부각되지 못했다. 이와 관련되어 이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연구는 바인라이히(Max Weinreich) 및 하이버(Helmut Heiber)40)의 저서가 있으며, 또 이를 뒤이어 곧바로 나온 베르너(Karl Ferdinand Werner) 연구가 존재하긴 했다. 특히 후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곧 “독일 역사가들은 나치의 역사상 인식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심지어 그것을 따랐다. 곧 민족적 혹은 인종적인 방향성 때문에 그런 사람도 있고, 또 출세를 바라는 순수한 권력의지 및 ‘독일제국’이 다른 민족을 지배해야 한다는 꿈을 꿈꾸고 그렇게 했다. 이 수많은 의견개진은 . . . 강제(로서)가 아니라 확신에서 그렇게 했다”41)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전후 역사학계의 연속성은 사회적으로나 학문상으로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63년 한 학술회의에서 나치시기 <동유럽연구>에 대한 비판이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제기되었지만, 발표문이 비밀리에 부쳤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42)
특히 1960년대 말에 독일에서 68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나치문제가 사회적으로 불거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무런 문제제기를 받지 않았다. 따라서 이와 관련해서 1945년 시점이나 혹은 독일 과거청산의 분수령이 되었던 1960년대에도 이 나치시기 역사가의 ‘부역’에 대해 후대 역사가들이 그들의 혐의를 인식하고도 ‘침묵’을 지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나치문제를 과감히 거론했던 새로운 젊은 역사학자들은 왜 유독 자기 학계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덮고 넘어갔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의혹의 핵심은 이들 ‘나치 역사가’들의 태도가 아니라 그들 다음 세대의 ‘비호’로 넘어갔다. 그래서 “죄 지은 아버지 세대, 이를 외면한 아들 세대, 이를 엄격하게 추궁하는 손자세대”라는 도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현재 젊은 소장학자들은, 자신들의 스승들이자 일찍 역사학계의 주역이 되었던―그래서 파울 놀테(Paul Nolte)의 말을 빌리자면 ‘장기의 세대(世代)(lange Generation)’43)―벨러, 몸젠, 로타 갈, 혹은 브로샤트 등이 모두 문제 당사자들의 ‘제자’였기 때문에 스승의 전사(前史)에 대해 침묵했으며, 그것을 제대로 문제 삼지 않고 ‘묵인’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이제 손자세대는 아들세대가 개인적인 존경심에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입신양명 때문에 구(舊)세대의 ‘오점’을 눈감아주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4. 전후세대의 침묵과 도전
그래서 이후 한 세대가 더 흘러가고 독일이 통일을 이룩하고 난 이후인 1990년대에야 비로소 이들 역사가들의 ‘나치부역’ 혐의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물론 1980년대에 독일 역사학계 내부에서 나치 시대 역사학에 의문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던 것은 전혀 아니다. 1980년 이미 파울렌바하(Faulenbach)는 1945년까지 독일역사학은 민족사의 내용과 연속성을 갖고 있었다는 논지를 내놓았고,44) 슐체(Winfried Schulze)는 전후 독일 역사학을 주제로 한 연구 성과를 내놓으면서 이 문제를 아주 조심스럽게―당시에 ‘부역’의 주된 당사자는 에르트만(Erdmann)이었는데, 슐체는 그의 이름을 좀처럼 밝히지 않았다―제기했다. 이어 영국 역사가가 나치시대 <동유럽연구>를 학문적으로 세밀하게 연구함으로써, 나치 때 역사학과 정치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었는지를 밝혀내었다.45) 비록 이들의 주된 출발점은 정치적인 혹은 도덕적인 내용이 아니라 독일 역사서술의 연속성이었지만, 이러한 연구로 볼 때, 아들세대가 침묵으로만 일관했다고 손자세대가 공격하는 것에는 약간의 오류가 담겨 있다.
물론 1990년대에 이 문제를 학문연구를 통해 사회적 공론의 장(場)으로 이끌어낸 것은 이 손자세대의 공적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과연 세대 간의 교체로서 이루어졌는지는 좀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왜냐하면 1990년대에 이 논쟁에서 ‘공격’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모를 보면, 소위 제도권의 역사학계가 아니라 제도권 밖의 사람이 거의 대부분 때문이다.46) 이에 반해 사회사가(社會史家), 곧 이제 제도권의 아성을 구축하고 있는 이들은, 대다수 수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대간의 차이로서 이 논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너무 단순해 보인다. 독일 역사학계는 스스로를 여전히 ‘동업조합’(Zunft)이라고 부를 정도로 결집성과 폐쇄성을 갖추고 있다. 이로 인해 역사학계 제도권 밖과 안의 차이가 쉽게 극복되기 어려운 문제이다. 따라서 이 논쟁은 이러한 갈등을 내포함에 따라서 학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좀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분위기를 띨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손자세대들이 이 과정에서 더욱 공격적으로 나온 것은 나치부역 혐의를 받고 있는 당사자들이 사망한 마당에서 이들은 더 이상 스승세대를 의식하지 않아도 될 뿐더러, 종종 그들을 엄격하게 추궁하고 비판하는 것이 오히려 ‘출세’의 지름길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이들이 손자세대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들 대부분이 바로 제도권 ‘주류’학계의 외부에 있기 때문에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 논쟁에서 세대교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인위적인 교체라기보다는 상황의 변화로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말하자면 ‘아들세대’와 ‘손자세대’, 그 자체가 무슨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이 달라졌는가? 전후 제2세대 역사가들은 문서공개 등의 실질적인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항변할 수 있다. 요컨대, 이번에 문제가 된 역사가들의 개인행적은 이들이 사망하고 난 뒤 접할 수 있게 된 서한이나 자료에 의해 추적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독일통일과 더불어 동독이 지니고 있었던 사료들이 역사가들에게 공개된 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나치역사학의 전모를 밝히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던 <동유럽연구>는 소위 사회주의권의 붕괴 자체가 이를 자극하기도 했고, 또한 문서고의 개방 등으로 실질적인 연구여건이 좋아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쉬더가 ‘작성한’ 문제의 문건이 국립 문서보관소에 수십 년 동안 보관되어 왔는데, 그것이 왜 이제 논란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과연 전후 소위 ‘아들세대’ 역사가들이 의식적으로 이 문제를 회피했거나 알고도 이를 일부러 묵살했는가, 아니면 이들은 아예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1960년대 나치청산이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조차 ‘아들세대’가 이들 역사가들이 나치 때 한 행적에 대해 묻지 않았다는 것은 실로 의문투성이이다.47) 혹은 이들은 이 문서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그 중요성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홀로코스트에 대한 포괄적이고 깊은 연구가 수행되면서 그 중요성을 깨달았던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홀로코스트의 문제가 1990년 이후 사회적으로 더 민감한 문제가 되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도 통일 이후 동독의 붕괴로 역사문제에서 동서독 간의 경쟁관계가 종말을 고하게 됨으로써, 자국 역사가들을 보호하던 방어막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 등장한 여러 논쟁들로 인해서 홀로코스트는 더욱 대중의 관심을 모으는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특히 골드하겐 논쟁으로 가해자의 범주가 확대되면서 이 문제가 자연히 연구자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고, 그만큼 사회적 파장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중반에 터져 나온 독문학자 슈베르트/슈나이더의 사건으로 독문학계, 더 나아가 대학 내의 학문이 나치 때와 연속성이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특히 이 사건은 당시 독문학계의 주변학자들이 그의 과거 행적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학계 전체의 ‘공모’가 없었으면 전후에 그가 한 변신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독일학계의 구조적인 모순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게다가 나치부역의 기준도 시간이 흐를수록 완화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엄격해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들이 나치에 학문적으로 최소한 기여했던 사실이 전쟁 종결 직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또한 위에서 언급한 바이마르 시대부터 전후 세대까지 역사가들의 ‘사고방식’이 지속되었다는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48) 물론 과거의 ‘민족사’ 연구자들은 바이마르 시대 혹은 나치 시대에 사용했던 개념을 그대로 전후에도 적용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민족사 방법론에서 몇 가지 개념들을 새롭게 전환함으로써, 이들의 민족사는 새로운 시기에 맞는 역사학으로 다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동유럽의 연구 대상이었던 농촌주민 대신에 산업사회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1945년 이후 지정학적 이유에서 더 이상 농촌촌락의 연구를 동구지역으로 확대하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 안정된 농업구조를 통해 동유럽의 팽창을 주장했던 이들은 내부의 인구과잉에 눈을 돌리고, 이로 야기될 사회의 불안정 요소, 혹은 비(非)통합적 요소인 하층민들, 즉 ‘대중’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49) 이에 따라 민족사는 사회구조사로 전환될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많다. 예컨대 ‘인종적’이라는 단어가 은연중에 당시대에 맞는 ‘인류학적’이라는 용어로 대체되거나,50) 브룬너 경우, 1941년의 저서에 나오는 민족(Volk)이라는 용어를 전후에는 구조(Struktur)로 바꾸어 놓기도 했다.51)
특히 이들 두 역사가가 새로 부각된 사회사 연구에 선구적인 작업을 했기 때문에, 나치 때 행해진 동유럽 지역의 ‘민족사’ 연구와 전후 사회사 사이에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가 관심을 모은다. 물론 모두 다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몇몇 ‘민족사’ 서술자들은 당시로서는 혁신적 방법론을 선보였다. 이들은 사회학자 및 인구학자들과 함께 ‘학제간’ 공동작업(1)을 통해서 국가와 정치라는 협소한 주제를 뛰어 넘어 농촌의 삶, 이주, ‘민족문화’ 등으로 주제의 확대(2)를 시도했으며, 통계나 지도 등을 사용하는 방법론(3)을 도입했던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특징은 1960년대 이후 등장할 사회사를 그대로 떠올리게 할 만큼 그것과 유사한 것이다. 따라서 전후 사회사의 맹아가 이미 나치시대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이렇게 볼 때, 나치의 동유럽 전쟁에 ‘참여’한 이들 ‘민족사’는 결국 역사학의 이중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요컨대, 내용상으로 민족적이며 반(反)유대주의적이었지만 방법론상으로는 ‘혁신적’이었던 셈이다.52)
물론 현재 독일사의 중추를 담당하는 사회사가가 이 주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리는 없다. 특히 사회사는 나치의 성립에 일조한 것으로 알려진 전통적인 독일 역사주의를 극복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되었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전후 독일사학계에 정치적 새바람을 불러왔다. 그런데 이 사회사가 이제 와서 보니 나치의 민족사서술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사회사가의 입장에서는, 이후 사회사의 정착이 이 두 사람들에게서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 베버, 오토 힌체, 또는 한스 로젠베르크 등과 같이 망명했다가 귀국한 역사가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학파로부터 더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논의하거나, 아니면 이들 문제의 나치 역사가들이 1945년 이후 ‘반성적인 학습과정’을 통해 스스로 ‘새로운’ 역사학을 제시했다는 점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최근 코카―그는 리터(Gerhard A. Ritter)의 제자였다는 점에서, 벨러보다는 이 논쟁에서 비교적 더 자유롭다―는 “빌레펠트 이전에 항상 베를린이 사회사의 중추였다”면서, 근대 독일 사회사의 뿌리를 “1930년대 및 1940년대의 나치즘 색채를 다분히 띤 ‘민족사’”보다는 다른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53)
이에 반해 벨러는 자신의 스승세대가 ‘반성적인 학습과정’―그것도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54)―을 거쳐 ‘연방공화국의 역사가’(Historiker der Bundesrepublik)로 변신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최근 출간한 독일사회사(Gesellschaftsgeschichte) 제4권에서 나치의 학문적 수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곧 나치시기의 학문은 비록 부분적으로는 전문직업화(Professionalisierung)의 경향을 드러내거나 학문에 따라서는 양면성, 곧 대중의 민족이데올로기를 추수(追隨)하는 것과 진지한 경험연구를 지향하는 양면적인 특성을 보였지만, 전반적으로는 인종주의적인 유사과학을 면치 못했던 것으로 평가했다.55) 말하자면, 이로써 그는 민족사 연구자들의 학문적 ‘혁신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셈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혁신성’은 나치에 앞서 이미 빌헬름 제국시기에 형성되었던 것이고, 나치 민족사 연구자들이 그것을 약간만 바꾸어 놓았던 것이라고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회사 ‘뿌리’에 관한 논의는 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민족사’의 보수주의적 세계관이 갖는 정치적-세계관적인 잘못은 교정하면서도 혁신적인 방법론은 계승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절충적인 단절/연속이라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1945년 이후 역사가들이 ‘서구화’라는 새로운 정치적인 요구에 따라 ‘근대성에 대해 한결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치 때 보수적이었던 역사가들이 1945년 이후 지속된 정치적인 보수적 성향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은 채 학문적으로 민주적인 특성을 유지했던 것도 바로 이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56)
최근의 이 논의는 1980년대 이후 신문화사 및 일상사 등의 등장으로 학문적 패러다임에서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1930년대 민족사와 1960년대 이후 사회사 사이의 유사성이 오히려 부각된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이마르 시기에서부터 나치시기를 거쳐 전후 역사학으로 이어지는 사회사적 관심과 그 개념에 연속성이 있다는 주장은 최근 ‘나치시대 역사가’들을 바라보는 데 중요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5. 맺음말
1998년에 신문지상으로 통해 여러 차례 격렬한 논쟁이 오고 간 후, 2001년 아헨 역사학 대회에서 다시 한번 이에 대한 논의의 장이 마련되었다.57) 이제는 정치적인―때로는 감정적인―논쟁에서 다소 벗어나 나치 시대의 역사학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다른 학계 및 서유럽연구,58) 남동구연구,59) 역사학잡지, 주변국인 폴란드, 프랑스, 네덜란드와 공동연구 등으로 이에 관한 연구주제가 점차 넓혀지고 있다. 최근에 나온 몇 가지 연구 성과는 바로 나치시대 역사학이 생각보다 훨씬 더 나치 절멸정책에 이바지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치시대의 학문정책은 예상한 것보다는 훨씬 더 치밀하게 조직되었고 역사학자들도 더 광범위하고 민감하게 정치에 조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논쟁은 1945년 이후 독일 역사학계가 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상당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제기했다. 나치에 공감했던 당시 세대의 ‘사고방식’이 이후에까지 계속 전수되었던 데에는 여기서 논의한 대로, 정치 성향, 학문의 필요성, 불철저한 과거청산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했다. 그렇지만 이와 관련해서 역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독일 역사학계의 기본특성이다. 이곳에서는 소위 ‘도제식’의 학문풍토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긴밀한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1945년 이후 탈나치화에서 끈끈한 유대감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은 1960년대 이후에도, 아니 현재에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학계에서 학문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실질적인 ‘단절’을 이루기란 쉽지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후의 논의는 지금 연구되고 있는 것처럼 지식사회학적인 연속성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독일 ‘학문공동체’ 자체의 특성에 대한 분석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출처: 역사와기억 홈페이지, http://past.snu.ac.kr >
1) 이 논문은 2003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KRF-2003-072-AL2001).
2) Clause Leggewie, "Mitleid mit Doktorvätern oder Wissenschaftgeschichte in Biographien," Merkur, Vol. 53. No. 5, p. 433에서 인용.
3) 이 논쟁의 개괄은 Winfred Schulze/Otto G. Oexle (ed.), Deutsche Historiker im Nationalsozialismus (Frankfurt, 1999)을 참조 (이하 Historiker im NS로 약함). 여론은 대회 이전부터 크게 주목하고 있었고, 발표자 및 참가자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독일 역사가들이 모두 빠짐없이 참석해서 한마씩 거들었으며, 또 그 거대한 강당에 청중들이 다 입장하지 못하고 결국 옆 강당에서 화면으로 중계방송을 보아야 했다.
4) 나치와 관련성에 대해서는 Dirk van Laak, Gespräche in der Sicherheit des Schweigens(Berlin 2002). 박찬국,『하이데거와 나치즘』(서울, 2001).
5) Gali Algazi, Otto Brunner―“Konkrete Ordnung” und Sprache der Zeit, in: Peter Schöttler, Geschichtsschreibung als Legitimationswissenschaft 1918-1945 (Stuttgart 1997)(이하 Geschichtsschreibung으로 약함), pp. 166-203. 에르트만(1910-1990)은 독일역사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저명한 역사가로서 나치 때 나치교사협회에 가입했으며 학교교과서인 <조상의 유산>이라는 시리즈물도 작성했고 (미간행), 여기에서 그는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지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1945년 4월에도 그는 여전히 ‘총통’의 숭배자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최근 논의에 대해서는 Martin Kröger/Roland Thimme, Die Geschichtsbilder des Historikers Karl Dietrich Erdmann (München 1996)를 참조하라.
6) 소위 쉬나이더/쉬베르테(Schneider/ Schwerte) 사건은 1945년 이후 탈나치화의 문제점을 확연히 드러내주었다. 그는 1945년을 전후로 해서 신상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이름을 바꾸고 혼인신고를 다시 했을 뿐만 아니라, 박사학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에 학위를 새로 따는 등 새로운 사람으로 변신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의혹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Helmut König, Die Zukunft der Vergangenheit. Der Nationalsozialismus im politischen Bewußtsein der Bundesrepublik (Frankfurt, 2003), 특히 pp. 87-119 참조. Klaus Weimar, "Schneider/Schwerte und die Germanistik und Ludwig Jäger," in Merkur, Vol. 53. No. 5, pp. 445-453. Helmut König/Wolfgang Kuhlmann/Klaus Schwabe (eds.), Vertuschte Vergangenheit. Der Fall Schwerte und die NS-Vergangenheit der deutschen Hochschulen, München 1997.
7)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Heinrich August Winkler, "Hans Rothfels - ein Lobredner Hitlers? Quellenkritische Bemerkung zu Ingo Haars Buch "Historiker im Nationalsozialismus", in Vierteljahrshefte für Zeitgeschichte(이하 VfZ) 4(2001), p. 643-652. Ingo Harr, "Quellenkritik oder Kritik der Quellen? Replik auf Heinrich August Winkler," in: VfZ 3(2002), p. 497-505. Heinrich August Winkler, "Geschichtswissenschaft oder Geschichtsklitterung? Ingo Haar und Hans Rothfels. Eine Erwiderung, in VfZ 4(2002), p. 635-651. 또한 H-Soz-Kult, Forum: Hans Rothfels und die Zeitgeschichte in
8) 그의 학문관에 대해서는 Walter Frank, Deutsche Wissenschaft und Judenfrage: Rede zur Eröffnung der Forschungsabteilung Judenfrage des Reichsinstituts für Geschichte des neuen Deutschlands gehalten am 19. November 1936 in der grossen Aula der Universität Müunchen, 1937.
9) 이들의 간단한 이력은 이렇다, 쉬더(1908-1984)는 1933년 뮌헨에서 나치의 대표적인 역사가인 뮐러(v. Müller)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주제: 1863년부터 1871년까지의 바이에른 소독일운동)를 받고,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에 찬성하여 대독일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34년 로트펠스가 있던 쾨니히스베르크로 가서 1939년 교수자격논문(제목: 바이히젤란드Weichselland의 게르만 정신과 신분적 자유: 서부 프로이센의 정치적 이해관계 및 정치저작)제출했고, 전후에 1967년부터 1972년 독일역사학회장을 역임했다. 한편 콘체(1910-1986)는 쾨니히스베르크로 가서 로트펠스에게서 1934년 박사학위(논문제목 <히르센호프: 리프란트 지역에 있는 독일어권의 역사 Hirschenhof. Die Geschichte einer deutschen Sprachinsel in Livland>)를 받았으며, 로트펠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자리에서 쫓겨나자 1939년 여름 비인에서 군터 입센(Gunther Ipsen)에게서 <리투아니아와 벨루시아의 농업체제와 주민Agraverfassung und Bevölkerung in Litauen und Weißrußland>이라는 주제로 교수자격논문을 제출했다. 전후에 역시 쉬더의 뒤를 이어 1972년부터 1976년까지 독일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10) Götz Aly, Macht-Geist-Wahn, Kontinuität deutschen Denkens, Berlin 1997, p. 180-81에서 재인용.
11) Ibid., p.166.
12) Mechtild Rössler/Sabine Schleichermacher(ed.), Der "Generalplan Ost". Hauptlinien der nationalsozialistischen Planungs- und Vernichtungspolitik, Berlin 1993. Angelika Ebbingshaus/Karl Heiny Roth, Vorläufer des ’Generalplans Ost’. Eine Dokumentation über Theodor Schieders Polendenkschrift vom 7. Oktober 1939, in 1999, 1992, p. 62-94. Ingo Haar, Historiker im Nationalsozialismus, (Göttingen 2000), p. 371. “학문은 자기를 찾아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사를 밝혀야 한다”(Albert Aubin)는 말에는 당시 동유럽연구자들의 공감대가 반영되어 있었다.
13) Götz Aly & Susanne Heim, Vordenker der Vernichtung. Auschwitz und die deutschen Pläne für eine neue europäische Ordnung (Frankfurt 2004, 초판은 1993).
14) <독일 북동부지역 연구단체(Nord- undd Ostdeutsche Forschungsgemeinschaft, NOFG)>와 <독일 남동부 지역의 연구단체Südostdeutsche Forschungsgemeinschaft>(연구소장 Otto Brunner)에 소속된 연구원이 1천 여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나치는 이러한 동유럽 연구만이 아니라 독일 서부지역을 연구하는 소위 ‘서유럽연구(Westforschung)’의 연구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5) 여기에서 대해서는 Winfred Schulze/Otto G. Oexle (ed.), Deutsche Historiker im Nationalsozialismus 에 나온 이들의 논평을 참조하라.
16) Joachim Lerchenmueller, Die Geschichtswissenchaft in den Planungen des Sicherheitsdienstes der SS. Der SD-Historiker Hermann Löffler und seine Gedankenschrift "Entwicklung und Aufgaben der Geschichtswissenschaft in Deutschland," Bonn 2001, p. 18-19.
17) K. Jarausch & R. Hohls (ed.), Versäumte Fragen. Deutsche Historiker im Schatten des Nationalsozialismus (München, 2000), p. 182. 예컨대, 1942년 몇몇 반(反)유대주의적이면서 SS에 가까웠던 역사가들이 새로운 연구프로젝트를 기획하여 이를 소개했을 때, 리터(Gerhard Ritter), 쉬타델만(Rudolf Stadelmann)과 같은 역사가들은 이에 반대하여 문제가 생기자, 쉬더를 비롯한 ‘쾨니히스베르크’ 집단이 중재에 나서 일을 수습했다. 쉬더가 소위 SS-역사가들과 거리를 둔 것도 확인된다. Ingo Haar, p. 357.
18) Aly, p. 167.
19) Ingo Haar, "’Revisionistische’ Historiker und Jugendbewegung: Das Königsberger Beispiel’", in: Peter Schöttler, Geschichtsschreibung, pp. 52-69.
20) Ingo Haar, p. 297. 같이 입당한 동료 역사가들 가운데는 에리히 마쉬케(Erich Maschke), 쿠어트 폰 라우머(Kurt von Raumer), 그리고 루돌프 크래머(Rudolf Craemer) 등도 있었다. 최근 역사가 브로샤트(Broszat)가 나치당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놀라움을 자아냈지만, 이것 역시 입당한 시기(1944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Nicolas Berg, Der Holocaust und die westdeutschen Historiker. Erforschung und Erinnerung Göttingen 2003), p. 420. Die Zeit에 나온 Norbert Frei의 글(Nr. 38, 2003)과 Götz Aly의 글(“Was Wusste Walter Jens”, Nr. 4, 2004)을 참조하라. 이 책에 대한 논쟁은 H-Soz-Kult, Forum: St. Berger: Erfahrung und Erinnerung als analytische Kategorien der Historiographiegeschichte, in
21) Ingo Haar, p. 356.
22) Ian Kershaw, Hitler 1889-1936 (Stuttgart, 1998), p. 607.
23) Otto Gerhard Oexle, Die Fragen der Emigranten, in: Historiker im NS, p. 57.
24) Erst Schulin, "Weltkriegserfahrung und Historikerreaktion," in ders./Wolfgang Küttler/Jörg Rüsen (ed.), Geschichtsdiskurs, vol. 4: Krisenbewußtsein, Katastropheerfahrung und Innovationen 1880-1945 (Frankfurt, 1997), pp. 165-188. Ingo Haar, ""Revisionistische" Historiker und Jugendbewegung: Das Königsberger Beispiel," in: Peter Schöttler, Geschichtsschreibung, pp. 52-103.
25) 이들보다 약간 윗세대인 군터 입센, 헤르베르트 그룬트만(Herbert Grundmann), 쿠르트 폰 라우머(Kurt von Raumer)도 이 ‘사고공동체’에 속한다.
26) 여기서 말하는 사고방식과 사고공동체라는 개념은 플렉(Ludwik Fleck)이 과학사 서술에서 추출한 것을 빌려온 것이다. Ludwik Fleck, Genesis and Development of a Scientific Fact (The Univ. of Chicago Press, 1979). 사고방식(Denkstil)이라는 말은 원래 만하임(Mannheim)이 1925년에 처음 사용한 말이다. 필자가 굳이 이 낯선 용어를 사용하려는 것은 여기서 발하는 ‘사고방식’은 한 개인의 구체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하나의 인식체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27) Thomas Etzenmüller, "Kontinuität und Adaption eines Denkstils. Werner Conzes intellektueller Übertritt in die Nachkriegszeit," in B. Weisbrod (ed.), Akademische Vergangenheitspolitik. Beiträge zur Wissenschaftkultur der Nachkriegszeit (Göttingen, 2002) (이하 kademische Vergangenheitspolitik 로 약함). pp. 123-146. 여기는 p. 130.
28) Ingo Haar, Volksgeschichte und Königsberger Milieu. Forschungsprogramme zwischen Weimarer Revisionspolitik und nationalsozialistischer Vernichtungsplanung,” in Harmut Lehmann und Otto Gerhard Oexle (ed.), Nationalsozialismus in den Kulturwissenschaften, Bd. 1 Fächer-Milieus-Karrieren, Göttingen 2004, pp. 169-209. Phillip-Christian Wachs, Der Fall Theodor Oberländer (1905 bis 1998), Frankfurt, 2000. p. 162ff.
29) W. Schulze, Deutsche Geschichtswissenschaft nach 1945, pp. 207-227.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역사학 정교수 110명 가운데 20명이 ‘정치적 이유’로 1945년 ‘영원히’ 해직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이 수에는 나치 때 내적인 갈등 때문에 해직된 이도 포함되어 있어서 실제 수는 그보다 적을 것이다. 앞의 책, p. 124.
30) 결국 독일역사학이 콘체와 쉬더에게 옮겨진 것은 그들이 이러한 사회사의 초점을 갖고 있었긴 하지만, 예컨대, 튀빙겐 대학의 역사가 슈타델만(Stadelmann)의 요절이 결국 이들에게 현대사의 바통을 넘겨주게 되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Gerhard. A. Ritter의 회고담, Versäumte Fragen, p. 124.
31) Ibid., p. 121. J. F. Tent, Mission on the Rhine, p. 62-67.
32) Carola Sachse, ""Persilscheinkultur". Zum Umgang mit der NS-Vergangenheit in der Kaiser-Wilhelm/Max-Planck-Gesellschaft," in B. Weisbrod (ed.), Akademische Vergangenheitspolitik, pp. 217-246.
33) "‘역사상의 수정’에 대해서는 전진정,「서독 초기 역사학과 과거청산 문제」,『부산사학』 39호 (2000.12), pp. 217-242.
34) Gerhard Ritter, Gegenwärtige Lage und Zukunftsaufgaben deutscher Geschichtswissenschaft. Eröffnungsvortrage des 20. Deutschen Historikertages in München am 12. September 1949, in Historische Zeitschrift 170 (1950), p. 1-22. 다음의 것도 참조하라. Gerhard Ritter, "German Professor in the Third Reich," in Review of Politics 8 (1946), pp. 242-254.
35) Werner Conze, “Die deutsche Geschichtswissenschaft seit 1945. Bedingungen und Ergebnisse,” in Historische Zeitschrift 225 (1977). pp. 1-28.
36) Wolfgang Schieder, Sozialgeschichte zwischen Soziologie und Geschichte. Das wissenschaftliche Lebenswerk Werner Conzes, in Geschichte und Gesellschaft 13 (1987), pp. 244-266.
37) Jin-Sung Chun, Das Bild der Moderne in der Nachkriegszeit. Die westdeutsche "Strukturgeschichte" im Spannungsfeld von Modernitätskritik und wissenschaftlicher Innovation 1948-1962, München 2000. 전진성, 앞의 논문, p. 239.
38) Mathias Beer, "Im Spannungsfeld von Politik und Zeitgeschichte. Das Großforschungsprojekt "Dokumentation der Vertreibung der Deutschen aus Ost-Mitteleuropa,"", in VfG 46 (1998), pp. 345-389.
39) Will Oberkrome, Zur Kontinuität ethnozentrischer Geschihtswissenschaft nach 1945. Weltanschauung und politisches Engagement der westdeutschen Kulturraumforschung in den fünfziger Jahren, in Zeitschrift für Geschichtswissenschaft 49 (2001), pp. 50-61.,
40) Max Weinreich, Hitler’s professors : the part of scholarship in Germany’s crimes against the Jewish people (New York : Yiddish Scientific Institute, 1946). 이 책이 독일어로 번역되었더라면 탈나치화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Helmut Heiber, Walter Frank und sein <Reichsinstitut für die Geschichte des neuen Deutschlands>(Stuttgart, 1966). 이 방대한 저서는 나치 때 역사가들의 행적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41) Karl Ferdinand Werner, Das NS-Geschichtsbild und die dutsche Geschichtswissenschaft (Stuttgart 1967). p. 96.
42) Hans-Erich Volkman, "Historiker im Banne der Vergangenheit. Volksgeschichte und Kulturbodenforschung zwischen Versailles und Kaltem Krieg," in Zeitschrift für Geschichtswissenschaft 49 (2001), pp. 5-12, 이 논문에 따르면 동독에서도 전후에 이와 같은 인적 연속성이 있었다. p.12.
43) Nolte Paul, "Die Historiker der Bundesrepublik. Rückblick auf eine "lange Generation"", in Merkur, Vol. 53. No. 5, pp. 413-432.
44) Bernd Faulenbach, Ideologie des deutschen Weges. Die deutsche Geschichte in der Historiographie zwischen Kaiserreich und Nationalsozialismus (München 1980). 그는 이후에도 이에 대해 많은 논문을 남겼다.
45) Michael Burleigh, Germany turns Eastwards, A Study of <Ostforschung> in the Third Reich 그리고C, Clessman, Osteuropafoschung und Lebensraumpolitik, in P. Lundgreen, Wissenschaft im Dritten Reich(Frankfurt 1985), pp. 350-383 역시 중요한 작업이었다.
46) 이 논쟁을 주도하고 있는 알뤼(Aly)는 언론인 출신이고, 로트(Roth)는 의사 출신으로 형식상으로 역사학계의 ‘제도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또 현재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하고 있는 소장학자들은 대부분 제도권의 교육을 받았지만 역사학계 ‘주류’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47) 이에 관한 전후 제2세대 역사가들의 인터뷰는 Versäumte Fragen 을 참조하라. 최근 이 인터뷰가 방법론상으로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제2세대의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48) 이에 대한 국내 문헌으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전진성, 「나찌시기 독일 민족사(Volksgeschichte) 서술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 <역사와 문화>, 제1권 (2000), pp. 74-89. 독일에서 논쟁은 1993년에 나온 책인 Oberkrome, Volksgeschichte. Methodische Innovatiojn und völkische Ideologisierung in der Deutschen Geschichtswissenschaft 1918-1945 (Göttingen, 1993)과 그 이듬해에 나온 Hartmut Lehmann & James van Horn Helton (ed.), Path of Continuity, Central European Historiography from the 1930s and the 1950s, Cambridge 1994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Ingo Haar, Michael Burleigh의 연구서들이 나왔다. 최근의 논의로는 Jin-Sung Chun, Das Bild der Moderne in der Nachkriegszeit. Die westdeutsche "Strukturgeschichte" im Spannungsfeld von Modernitätskritik und wissenschaftlicher Innovation 1948-1962, München 2000. Thomas Etzemüler, Geschichte als Tat: Objektive Forschung als "kämpfende Wissenschaft," Deutsche Neuzeithistoriker vor und nach 1945, in Tobias Kaiser et al, (ed.), Historisches Denken und gesellschaftlicher Wandel. Studien Gesischtswissenschaft zwischen Kaiserreich und deutscher Zweistaatlichkeit, Berlin 2004, pp. 171-198.
49) Thomas Etzenmüller, "Kontinuität und Adaption," p.131 ff.
50) Peter Schöttler, Geschichtsschreibung, p. 17.
51) Gali Algazi, Otto Brunner―“Konkrete Ordnung” und Sprache der Zeit, in: Peter Schöttler, Geschichtsschreibung, pp. 166-203.
52) 물론 동유럽 연구의 ‘혁신적인’ 방법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예컨대 오버크롬(Oberkrome)은 나치는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반(反)문명적인 ‘반(反)근대’를 세우고자 했다고 하는 반면, 하르는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라면, . . . 민족사에서는 그 어떤 발전적인 동력을 찾지 못했다. 민족사 연구자들은 비(非)인간적인 목표를 추구했다”고 주장한다. Ingo Haar, p. 372.
53) Jürgen Kocka,, "Sozialgeschichte und Vergleichende Gesellschaftsgeschichte an der Freien Universität und in Berlin" (미발표 원고, 2005년 8월 예정).
54) 나치였다고 고백했던 역사가가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중세사가였던 프리츠 뢰리히(Fritz Rörig)는 1947/48년 강의 첫 시간에 자신이 나치였음을 고백하고 이에 대해 사죄했다. 헬가 그레빙(Helga Grebing)의 인터뷰 내용, Versäumte Fragen, p. 148-149. 이 ‘반성적 학습과정’을 입증해주는 사람들이 바로 당사자들의 제자인 벨러 등이라는 점에서 그만큼 ‘형식상’의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55) Hans Ulrich Wehler, Deutsche Gesellschaftsgeschichte, Bd. 4: 1914-1949 (München, 2003) p. 787. Axel Flügel, "Ambivalente Innovationen. Anmerkungen zur Volksgeschichte," Geschichte und Gesellschaft 26(2000), pp. 653-671.
56) 폴프람 피셔(Wolfram Fischer)의 인터뷰 내용, Versäumte Fragen, p. 116. Christoph Cornelißen, "Historikergeneration in Westdeutschland seit 1945. Zum Verhältnis von persönlicher und wissenschaftlicher objektivierter Erinnerung an den Nationalsozialismus,", in Christoph Cornelißen, Lutz Klinkhammer und Wolfgang Schwentker (ed.), Erinnerungskulturen. Deutschland, Italien und Japan seit 1945 (Frankfurt, 2003), pp. 139-152.
57) 이에 대해서는 Max Kerner ed., Eine Welt ― Eine Geschichte? 43. Deutscher Historikertag in Aachen, 26. bis 29. September 2000(München 2001). 이 당시 발표된 논문은 잡지 Zeitschrift für Geschichtswissenschaft 49집 (2001) 제1호에 실려 있다,
58) Hans Derks, Deutsche Westforschung, Ideologie und Praxis im 20. Jahrhunderts(Leipzig, 2001).
59) Mathias Beer & Gerhard Seewann, Südostforschung im Schatten des Dritten Reiches, Institution-Inhalte-Personen(München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