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 개혁에 뜻없이 무임승차, 권력남용 심해 禍- -경대승/ 개혁 실천에 적극, 젊고 지지기반 없어 실패-
우리 현대사는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난 정치군인들의 집권으로 얼룩 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잘한 점도 있지만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사회 구성원 누구에게나 각자 맡은 바 임무와 역할이 있다. 그 책무 를 충실히 수행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타 분야에 함부로 뛰어들면 자칫 혼란만 초래하기 십상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현대말고도 중세에 무인들이 집권한 때가 있었다. 고려시대 무인정권이 바로 그것이다. 무인정권은 의종 24년(1170)에 정변을 통해 세워진 뒤 원종 11년(1270)까지 꼭 100년 간 유지됐다. 당시는 사리사욕에 의한 이전투구가 심했다. 특히 무인정권 초기에 이런 양상은 극에 달했다. 군부 실력자 정중부와 경대승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문신의 극심한 전횡과 무인에 대한 차별대우에서 비롯된 무신정변 주도세력은 형식적인 대표집단과 실질적인 주도층, 행동대원층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정중부는 ‘얼굴마담’ 격이었다. 그는 비록 무인 이었으나 대장군(종3품)이란 고위층 인사였다. 대장군은 지금의 참모 차장에 해당되는 직책으로 군에서 제2인자라 할 수 있다. 나름대로 특권을 누리던 그로선 급격한 사회 변동을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정 변 참여에 소극적이었다.
무신정변의 실질적인 주모자이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이고· 이의방 등이다. 그들은 산원(散員:정8품)이란 하급장교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중대장급 정도다. 나중에 경대승의 뒤를 이어 무인정권을 잡 는 이의민은 그들보다 높은 별장(別將:정7품)의 직위에 있었으나 천 민 출신이기에 주모자로 가담하지 못했다. 정변 주모자들은 문신들이 술 마시고 놀면서 자신들을 무시하는 모습에 분개했다. 자신들은 술 한 잔도 못하면서 문신들을 호위해야 하는 처지가 한스러웠다. 결국 정변을 모의한 뒤 정중부를 대표로 끌어들였다. 난세를 등에 업고 입 신양명해보려는 무인들이 행동대원으로 나섰다. 조원정·이영진·석 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대개 천민 출신이거나 병졸이다.
정변은 치밀한 계획과 행동대장들의 적극적인 활약, 하급 군인들의 대거 참여로 성공을 거뒀다. 물론 정중부나 이소응 같은 고위급 무인 의 동의도 정변 성공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정중부는 5·16 쿠데 타가 일어났을 때 장도영 장군 같은 인물이다.
이고·이의방 등이 정중부를 정변의 대표자로 끌어들인 건 무엇 때 문일까. 단순히 고위급 무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용모부터가 세인의 두려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키가 7척이었고 이마가 넓었으며 무성하고 긴 수염이 무인다운 풍모를 자아냈다. 더구나 눈이 각져서 무인들조차 눈빛을 마주치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무인들이 그를 따 르고 존경했다.
하지만 정변이 성공한 뒤 권력을 좌지우지한 건 행동대장들. 자신들 이 아니면 결코 거사가 성공하지 못했으리라고 확신한 그들은 정변 직후 4등급을 뛰어넘어 장군(정4품) 직위에 올랐고 문신들의 직책까 지 겸했다. 정권의 핵심으로 진입하자마자 ‘비망지지(非望之志:바라 보아선 안 될 뜻)’까지 품었다. 이고가 특히 그랬다. 그는 왕이 되 려 했다.
이고는 법운사·개국사 승려들과 결탁하고 시중의 ‘깡패’들을 끌 어모았다. 왕을 제거하려는 첫 단계 작업이었다. 하지만 사악한 비밀 은 탄로나게 마련. 거사를 눈치 챈 이의방이 이고를 급습하는 바람에 이고는 정변을 일으킨 지 몇 달 만에 목숨을 잃었다.
이제 권력은 이의방에게 넘어가는 듯했다. 더욱이 그는 권모술수에 능한 모사꾼이었다. 군사행동에 촉각을 세우며 주시하고 있던 정중부 에게 다가섰다. 두문불출하며 정세를 관망하던 정중부에게 술을 들고 찾아가 부자관계를 맺었다. 문신들만 취임할 수 있던 지방관에 무인 들을 임명하기로 약속도 했다.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하던 이의방은 명종 3년과 4년에 일어난 김보당의 난과 조위총의 난으로 종말을 맞 았다. 기회를 엿보던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혼란을 틈타 이의방을 제 거한 것이다. 정중부는 자연스레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떠올랐다. 스스로 관료들의 최고위직인 문하시중(종1품)에 오르며 권력을 음미 했다.
권력은 꿀과 같고 마약과도 같은 것. 한 번 맛을 보면 절대 끊을 수 없다. 점점 거기에 빨려들어가 종국엔 파멸에 이르고 만다.
정중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권을 잡은 뒤 의종의 별장 하나를 차지 했고, 자신의 고향 해주로 인근의 군현을 포함시켰다. 정부에 바쳐야 하는 조세를 포탈하기 위해서다. 권력을 이용해 농장까지 경영했다. 마음대로 절을 중수해 자신의 만수무강을 빌도록 강제했다. 당시 그 의 나이는 70세. 노욕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때도 정년퇴직제가 있었다. 나이 70이면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치사제(致仕制)’다. 정중부는 제도를 무시해가면서까지 관직에 머 물렀다. 인사 전횡은 말하나마나다.
그러자 권력의 떡고물을 받아먹기 위해 많은 참새가 몰려들었다. 송 유인은 정중부에게 붙기 위해 조강지처를 내쫓고 정중부의 딸을 새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정균의 횡포도 아버지 정중부 못지 않았다. 임 금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승선직에 오른 그는 왕의 귀와 입을 막았 다. 인사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태후의 별궁에 큰 집을 지어 거 처하기도 했다. 만행에 불만이 고조됐으나 종균의 위세에 물려 명종 은 물론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정씨 부자의 전횡에 염증을 느끼는 세력이 급 속히 늘어갔다. 정변에 참여했던 하급 군인들도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 기대했던 군졸들에게 돌아온 건 절 망이었다. 일부 아첨꾼들만이 연줄을 타고 출세할 뿐이었다. 백성도 대상만 바뀌었을 뿐 수탈에 시달리기는 매한가지였다. 결국 공주의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의 봉기가 일어났다. 정중부 일가의 독재가 원인이라는 게 여론이었다. 일부 군인은 대자보를 붙였다.
“시중 정중부와 그 아들 승선 정균, 그리고 사위인 송유인이 권력을 농단하면서 방자하게 횡포한 짓을 하고 있다. 남적(南賊:명학소의 망 이·망소이를 말함)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 지금 만약 군사를 동원해 적을 토벌하려면 반드시 먼저 이들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정균은 이 소식을 듣고 분노에 가득 찼지만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사직하고 두문불출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청년장군 경대 승에 의해 정씨 부자의 독재는 막을 내렸다.
의종 22년 15세의 나이로 교위직에 오른 경대승은 17세 때 무신정변 을 맞았다. 경대승은 물론 그의 아버지 경진도 거사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 아니다. 정중부와 같이 온건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 바람에 정중부 정권 초기에 경진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종2품)까지 올랐 다. 경진은 그 지위를 이용해 남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물의를 빚기 도 했다.
경대승은 집안의 후광에 힘입어 장군에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고속 승진은 본인의 성격과 관계가 깊다. 경대승은 아버지와 달리 청렴 결 백했다. 아버지가 빼앗았던 토지를 돌려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무신 들의 전횡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의협심이 남달라 무인들의 불법적인 행동에 곧잘 분개했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불만도 들어 있다. 명종 8 년 서울에 올라와 있던 청주인들과 청주 본토 사람들 간에 벌어진 싸움을 원만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청주의 사심관(事審官)이던 그는 관직에서 파면됐다.
조용히 때를 기다리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들었다. 정균이 공주에게 장가들려 하자 왕이 이를 매우 꺼렸다. 누군가 이들 세력을 꺾어주기 를 바라는 눈치였다. 특히 정중부의 사위인 송유인이 눈엣가시였으 나, 그가 문극겸과 한문준을 내쫓아 조정 관리들에게 신망을 잃고 있 었다.
경대승은 명종 9년 행동을 개시했다. 정균과 친하게 지내던 견룡군 (牽龍軍:왕의 경호원) 허승을 불러 내심을 털어놓았다.
“내가 보다 못해 흉적들을 처치하려 한다. 네가 조금만 협조를 해주 면 성사가 될 것 같다.”
평소 경대승의 성격과 의협심을 잘 알고 있던 허승은 흔쾌히 수락했 다. 거사는 장경회가 열리는 날 벌이기로 했다. 그날은 불경을 꺼내 읽고 다시 장경각에 보관하는 날이다. 온종일 행사를 치르고 난 뒤엔 으레 뒤풀이가 따랐다. 피로와 술이 겹치면 잠이 깊이 들게 마련이 다.
거사의 날이 왔다. 밤이 깊어지자 경대승은 결사대원 30명을 이끌고 화의문 밖에 숨어들었다. 허승의 신호를 기다렸다. 얼마 뒤 휘파람소 리가 들렸다. 허승이 숙직 중이던 정균을 처치했다는 신호였다. 경대 승은 즉시 결사대원을 이끌고 왕궁 담을 넘어 들어가 정중부의 측근 들을 도륙했다. 즉시 금군(禁軍:왕의 호위부대)을 출동시켜 정중부와 송유인을 잡아들여, 이들의 머리를 베어 저잣거리에 매달았다. 당시 정중부의 나이는 74세였고, 경대승은 26세였다.
경대승은 정중부 일당을 모두 처치할 수는 없었다. 26세밖에 안 된 그가 실권을 잡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세력도 적잖았다. 게다가 어 떤 세력이 자신을 해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고·이의방이 한 순간에 목숨을 잃었던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정중부·정균 일 당이 자신에게 살해된 듯이 언제 누가 자신을 살해할지 모를 일이었 다. 그래서 도방(都房)을 설치했다.
도방은 말 그대로 여러 개의 방을 터서 하나의 큰 방으로 만든 것이 다. 여기에 100여 명의 결사대원이 머물도록 했다. 모든 행동과 죽음 을 같이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이다. 그러한 의미로 긴 베개와 큰 이불 을 만들어 같이 썼다. 경대승 자신도 때때로 결사대원들과 숙식을 같 이 했다. 그들은 경대승 경호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세상사가 어디 뜻대로만 되는가. 도방 소속 대원들이 방자해 졌다. 약탈을 일삼았다. 거사를 같이 일으켰던 허승도 권력을 남용했 다. 교만을 부리면서 은근히 자신의 패거리를 키웠다. 한때의 동지였 던 그가 이제는 위협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도리 없이 허승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을 살해한 경대승도 한 인간이었다. 그는 극도의 불안과 위 협에 휩싸이다가 급기야 악몽에까지 시달린다. 명종 13년(1183)년 어 느날 밤에는 정중부가 칼을 들고 자신에게 호통을 치는 바람에 소스 라치게 놀란다. 꿈이었다. 이때부터 병을 얻은 그는 얼마 안 가 죽었 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정중부와 경대승은 다같이 무인이었지만 서로 생각이 달랐다. 정중부 는 무신정변에 동의했으나 새로운 세상을 열어볼 뜻이 별로 없었다. 이미 고위직에 올랐을 뿐 아니라 나이도 많이 먹어서다. 경대승은 달 랐다. 정변이 일어났으나 달라진 건 없고 오히려 더 어지럽고 지저분 한 세상이 됐다. 젊은 혈기에 불탔던 그는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고 달라진 세상을 만들려 애썼다. 하지만 실패했다. 너무 젊었고 지지기 반도 넓지 않았다. 목적만큼 수단과 방법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대 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