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강원도 와야리 꽃피는 산골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다니고 고향을 떠나 춘천에서 비오면 연탄아궁이에 빗물이 차서 퍼내야만했던 60만원짜리 전세집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나운서가 꿈이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하고 어떤노력을 해야하는지 몰랐습니다.
주위에 조언해 줄만한 사람도 없었구요. 넉넉치 못한 시골 살림살이 금전적으로 집에 보탬이 되고 싶어 진학을 포기했습니다. 부모님 걱정 않끼치고, 속 않썩이는 착하기만한 딸이었죠. 그랬던 딸이 결혼할때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오빠가 먼저 결혼하길 바랬던 고지식한 부모님을 졸라 먼저 시집간다고... 이렇게 해서 결혼한 사람이 박집사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딸, 대학진학 못한것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녀가 된 지금은 하나도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갈릴리 '리' 출신 이더라구요. 그리고 하나님은 공평하시잖아요.
중학교가 미션스쿨이라 그때 하나님을 처음 알았지만 의무적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결혼해서 춘천에 근무할때 만났던 상관을 영천에서 또 다시 만나면서 그분의 권유로 거부감없이 아이들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군인교회에 나갔습니다. 상관의 눈도장을 찍을려고 열심히 다녔지만 힘만들고 믿음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다니면서 세례를 받고 단체로 흰돌산기도원에서 2박3일 숙식하며 방언받고 체험하면서 믿음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군생활을 마치고 지금 살고있는 느리울에 정착을 했습니다.
처음 이사왔을때는 '가까운 교회에 나가야지'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죄인줄도 모르고 점점 무뎌져만 갔어요. 저의 시련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대전에서 논산으로 출.퇴근하면서 남편은 짜장면 배달부에서 호프집 요리사로 저는 남편을 도와 부지런하고 생활력 강하신 친정부모님 생각하며 바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들 다니는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논산까지 찾아와 짜장면을 드셨지만 단지 손님으로만 대했습니다. 주일도 쉬지않고 4∼5시간을 자며 물질적인 욕심에만 열심을 더 했습니다. 아이들로 제대로 돌보지 못하구요. 이렇게 몇년을 지내다 보니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있었어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일 마치고 대전으로 올때는 차안에서 늘 울며 왔고 스트레스를 알콜에도 의존을 해 봤습니다. 이렇게 생활하다보니 몸은 점점 않좋아지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렸지만 하나님은 날 데려가지 않으셨습니다.
얼마후 피곤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가 큰 트럭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의식이 들어 깨어보니 웅성웅성하는 소리와 함께 앞 유리가 거미줄 같이 희미하게 보였고 옆에 타고 있던 남편은 목을 다쳐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요. 움직일 수 없어서 남편에게 억지로 힘을 다해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었더니 움직이지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무슨일이 일어났구나!' 포기한 채로 누워있다 깨어보니 건양대학교 응급실이었습니다. 저는 무릎, 갈비7개, 발목, 팔, 다리가 부러지고 앞머리에는 유리가 박혀 머리카락이 잘려있었고, 눈위는 찢어지고, 췌장은 터지고 옆에 타고 있던 남편도 머리, 골반, 목, 눈등 여기저기 다쳤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저를 데려가지 않으시더군요. 아이들에게는 여행갔다 온다 하고 일주일지나 알려주었습니다. 아이들이 병원왔다간 후로 중단했던 교회를 이 계기로 다시 나갔었나봐요.
어느날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병실에들어오셔서 기도해 주셨고 또 다시 오셨을땐 부담스럽고 옆 환자들에게 피해주는것 같아 싫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자는 척을 했지요. 오히려 아이들을 교회 가지 못하게 하고 전화오면 '우리 아이들 스트레스 받으니까 아는 척 하지 말아 주세요', '큰 교회 갈거니까 전화하지 마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병실에 꼼짝없이 누워있을때 마음이 편안했고 몸이 빨리 회복되어가고 걸어다니는 자체가 감사했습니다. 이제야 깨닫고 교회에 다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교회에 등록을 했지만 자꾸 사랑의 교회가 생각났습니다. 기도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그 전에 마음 아프게 했던 것들은 아무것도 생각이 않나고 그냥 마음에 이끌리어 그 다음주에 혼자가는 것이 쑥스러워 큰아들에게 사랑의 교회에 사랑의 교회에 같이가자고하니까 흔쾌히 그러자고 했습니다.
하나님 떠난지 7년만에 돌아와 무릎 굻었습니다. 그날 눈물이 나고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기로 작정했고 남편에게도 쑥스러워 못하는 말 '하나님! 사랑합니다.' 라는 기도가 나도 모르게 나왔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며 설교 들을때마다 믿음은 성장해 갔고, 성경 말씀이 더 알고 싶어지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뒤돌아보면 내 맘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고 하나님 계획속에 내가 있었고 내가 그 계획속에서 벗어 나려고 하니까 날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려서라도 의의 길로 인도하려고했던 주님! 원망은 하나도 없고 감사함만 있을뿐입니다.
군 생활을 마치고 제일 힘들었던 5년간의 세월이 저에게는 고생이 아닌 큰 연단이었고 잘 싸우시던 시부모님 , 복잡한 시댁일들 마음속으로 원망도 많이하고 미워도했지만 하나님 앞에 내려 놓으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제대로 한번 돌봐주지 못했던 아이들도 주안에서 잘 성장해 가고 있고 남편도 주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려합니다. 이렇게 가정이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앞 날이 주안에서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고 기대도 해 봅니다.
모든 사람들이 대박을 꿈 꾸시죠? 가까운 곳에 있더라구요. 내 마음속에... 결단하십시요.
내 인생의 대박은 남편도 아니고 로또 당첨도 아니고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들 지금은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저에게 지혜와 능력을 허락하여 주신다면 다음세대들이 인성과 능력이 갖추어진 지도자로 잘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그 외에 맡겨진 사명 잘 감당하며 주님나라 갔을때 하나님 앞에 떳떳한 딸이 되고싶은게 저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갔으면 좋겠어요
부족한 저를 이 자리에 세워주신 하나님 감사드리며 여러분 사랑합니다.
첫댓글 다시 봐도 눈물이 나게 하는 간증입니다. 지희숙집사님을 너무 사랑하셔서 내버려둘수없어 하나님께서 다시 집사님을 불러주시고 사랑의 교회로 불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잔잔한 미소로 맞이해주시는 집사님의 마음에 늘 감동이 됩니다..^^
집사님의 감명있는 간증의 말씀 저도 되새이며 감동의 글 잘 보았습니다.주님의 품안에서 이제는 평안을 누리시며 행복하세요..
저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합시다.♥♥♥(^▽^//)